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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23-솔로몬의 국제 무역항을 찾아서

영국신사77 2008. 8. 20. 14:43

   성지를 찾아서 23-솔로몬의 국제 무역항을 찾아서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578588

 

  솔로몬 시대 예루살렘은 외국제 수입상품들로 넘쳐났으며, 수많은 외국상인들이 북적대는 국제적인 메트로폴리스였다. 부왕 다윗이 영토를 확장하기위해 무력으로 국제적 감각을 익힌 반면, 아들 솔로몬은 무역과 외교라는 평화적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부각시켰다. 솔로몬의 국제성은 300명이나 되는 그의 부인들 중에서, 각각 이집트 모압 암몬 에돔 페니키아 힛타이트의 왕족과 귀족 출신들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잘 찾아볼 수 있다. 성서 경제학자들은 국제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이용하여, 솔로몬이 비로소 성전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과연 솔로몬이 건설한 홍해의 무역항이라는 에시온 게벨은 어디이며, 그 항구를 운영했던 다시스 해운회사는 어떤 기업이었는가.

  예루살렘 성전의 신축공사를 기획하던 솔로몬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당대 최고급 목재인 레바논의 백향목을 수입하는 문제였다. 기본적인 건축자재인 석회암은 예루살렘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노동력이야 부역을 통해 모집할 수 있지만, 성전의 내부를 황금빛으로 치장하기 위해서는 독특한 향과 함께 웬만해서는 잘 썩지 않는 백향목을 반드시 사용해야만 했다.
 
  백향목의 명성은 이집트에서는 이미 왕조가 시작된 서기전 3000년경부터 입증이 됐다. 대규모 선박을 만들기 위해, 이집트는 레바논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뗏목으로 백향목을 가져왔던 것이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축성과 궁전 및 성전 등의 건축사업을 위하여 필요한 목재와 기술은 페니키아의 두로왕 히람과 구상 무역을 통해서 충당했다. 당시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 등의 목재는 바다에서 뗏목으로 이동되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욥바 북부의 야르콘 강으로 운반됐다. 목재와 기술 지원의 댓가로 솔로몬은 해마다 엄청난 양의 밀(2만코르)과 기름(20코르)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갈릴리 지방의 20개 도시를 히람에게 건네준 것으로 미루어, 솔로몬이 약속한 댓가를 제때에 충분히 지불하지 못했거나, 해가 거듭할수록 히람의 요구조건이 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사용된 것은 이집트 신왕국 시대가 시작할 무렵인 서기전 1550년경부터였다. 신앗시리아 시대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말들의 원산지는, 대부분 터키 남부의 타우루스(Taurus) 산지와 메소포타미아의 지붕으로 불리는 자그로스(Zagros) 산지에 위치한 지역들이다. 이집트는 비교적 일찍부터 말과 병거를 이용한 전술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엄청난 숫자의 군마가 필요했고, 솔로몬은 바로 이점에 착안하여 터키 남부의 무쭈르(Mutzur)와 쿠에(Que)로부터 말을 수입하여 이집트에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는 국제 무역로변에 위치한 므깃도를 병거성으로 개발했고 넓은 이즈르엘 평야에서 군마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 솔로몬이 운용한 병거대(chariotry)와 기병대(chivalry)는 4만마리의 말과 12,000명의 기병들로 구성된 대규모였다. 당시 병거는 한대에 은 600세겔(6㎏)이었고 말은 한마리에 은 150세겔(1.5㎏) 정도였기 때문에, 솔로몬은 말 장사를 통해 커다란 이익을 올렸을 것이다.

  스바 왕국은 향품을 많이 생산하며, 근처의 동부 아프리카 지역과 해상 무역을 통하여 금을 확보할 수 있고, 또한 그들이 낙타에 주로 짐을 싣고 온 것으로 미루어, 이 왕국의 지리적 위치를 아라비아 남부 지역으로 보고 있다. 스바의 여왕은 황금만 120키카르, 즉 5t에 달하는 엄청난 양을 가져왔다. 그러나 역시 스바산의 최고의 상품은 신전 분향에 필요한 향품과 방부제, 그리고 각종 향신료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아라비아 반도의 남부와 인도양 연안에서 자라기 때문에, 이미 솔로몬 시대부터 이스라엘과 인도양 사이에 거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이 주변국들과 육상무역을 했지만, 이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최고의 부와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에시온 게벨 항구에 설립한 다시스 해운회사 덕택이었다. 다시스는 지명으로서, 이 회사 소속의 배와 선원들이 대부분 그곳 출신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스는 지중해변에 자리잡은 해양 무역의 도시로만 추정될 뿐, 아직 정확한 지리적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페니키아 학자들은 스페인의 타르테소스로 보고 있다. 에스겔서(27:12)에 기록된 대로, 다시스의 특산품은 철 은 주석 납 등의 진귀한 금속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다시스의 배들은 홍해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와 인도양 너머의 인도, 그리고 동부 아프리카 등 매우 먼 거리를 항해하기 때문에, 3년에 한차례씩 이스라엘 항구인 에시온 게벨로 돌아왔다. 어떤 학자들은 항해기간이 3년 걸린 것은 아프리카 대륙을 한바퀴 돌아 대서양을 통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 불리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지중해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하지만 당시 아프리카 해안에는 아라비아 남부의 스바 왕국 등과 교역을 하였고, 서기전 1500년경 이집트의 하쳅숫트 여왕의 벽화 부조에 기록된 동부 아프리카의 푼트와 성서의 기록에 나타난 오피르 외에는 알려진 지명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일부러 오랜 기간동안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돌아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남쪽 홍해의 항구 도시였던 에시온 게벨은 1930년대 미국의 유대인 고고학자 넬슨 글릭의 발굴 결과, 오늘날 에일랏 근처에 위치한 텔 엘-클레이페(Tell el-Kheliefeh)로 알려졌다. 하지만 출토된 토기들에 대한 정밀 분석 결과, 대부분 서기전 8세기 이후의 것들로 밝혀졌다. 특히 무엇보다도 이 유적지는 바다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동안의 퇴적작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고대 항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후, 해양 고고학자들은 신비에 싸인 홍해의 조그만 섬 게지랏트 엘-파라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시나이 반도의 해안으로부터 18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섬은, 길이가 400미터 정도되는 작은 섬으로서 서쪽에는 깊숙한 만으로 이루어진 항구가 있었다. 해저 발굴 결과, 방파제의 흔적과 함께 구약시대의 토기류들이 발견됐다. 실제로 지중해의 페니키아 도시들도, 두로와 같이 해변에서 가까이 위치한 섬을 육지와 방파제로 이어서 항구를 만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만일 타르쉬쉬 해운회사가 페니키아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었다면, 내륙에 위치한 텔 엘-클레에페 보다는 해변에 가까이 위치한 게지랏트 엘-파라윤 섬이 많은 배들을 정박시킬 수 있는 적절한 항구가 될 것이다.

  한편 서기전 850년경 유다의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의 아하시야는 공동으로 투자하여 합작 해운회사 프로젝트(역대하 20:36-37)를 시작했다. 100년전 솔로몬 시대에 명성을 떨친 다시스 해운회사를 다시 고용했으나, 배들이 파선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아마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세력이 약화된 국제정세의 모멘툼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던 솔로몬 시대와는 달리, 이집트와 앗시리아가 건재해서 국제 무역의 중심이 홍해에서부터 지중해로 넘어간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짐작된다.
 
  신약시대에 헤롯이 지중해변에 대규모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건설하고, 아라비아 반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것이, 어느 정도 솔로몬의 업적과 비교된다. 더구나 국제무역에 일가견이 있었던 두 왕에 의해, 각각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성전이 건설됐다는 사실도 결코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김 성 교수(협성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