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聖地성화歷史[종합]

성지를 찾아서 22-출애굽의 두 길

영국신사77 2008. 8. 20. 14:41

                  성지를 찾아서 22-출애굽의 두 길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522102

1. 출애굽의 두 길

인류의 영원한 생명양식,성서.하나님의 세상창조에서부터 인류의 종말까지를 기록한 성서는 계층과 인종이념을 초월해 전인류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성서를 참진리와 빛의 생명책으로 믿는 국민일보는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살아있는 성서의 역사현장으로 독자여러분을 안내하는 시리즈를 마련합니다.지난 98년 9월부터 99년 2월까지 ‘성서의 향기’란 제목으로 21회 본지에 연재한 성서고고학자 김성박사가 집필을 다시 맡습니다.‘新 성서의 향기’란 제목으로 시작하는 시리즈는 성서의 주요사건을 고고학적인 분석과 배경에서 해설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손길과 섭리를 생생하게 느끼는 감동을 줄것입니다.<편집자>

400년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는 두 갈래의 갈림길이 놓여 있었다.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였던 출애굽의 두 길은 비교적 다니기 쉬운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과 좀 더 어려운 ‘홍해의 광야길’이었다(출 13:17∼18).이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프로스트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비교적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선택했기에 이후의 모든 역사가 달라질 수 있었다.과연 그들이 선택한 홍해의 광야길이 어떤 길이길래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토록 달라졌는가.또한 그들은 왜 쉬운 지름길을 포기해야만 했는가.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하지 않았던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이집트와 가나안을 연결하는 중심 무역로이자 군사로였다.이집트 사람들은 이 길을 ‘호루스의 길’,즉 파라오의 길로 불렀다.이스라엘 지역으로 진격할 때마다 파라오들이 이 길을 이용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과 군수창고,마굿간 등을 갖춘 요새와 야영지가 건설됐고 요즘 기준으로 검문검색이 하도 심해서 통행증없이는 다니기 힘든 곳이었다.따라서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 길을 택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그들이 만일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진행한다면 도중에 군사적 제지를 받아 출애굽을 포기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까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홍해의 광야길로 인도했다는 것이다(출 13:17).신약시대 이후로 이 길은 라틴어로 ‘비아 마리스’,즉 ‘바다의 길’로 불렸다.이집트의 북쪽 삼각주 지역에서부터 출발한 이 길이 지중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1972년부터 10년동안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의 오렌 교수는 이 길중에서 이집트의 실레에서 이스라엘의 라피아까지 210Km 구간을 집중적으로 발굴한 결과 무려 150군데에 달하는 고대 야영지와 정착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이들은 대부분 서기전 1550년 이후에 개발된 것들로서 우물,저장능력이 40t에 달하는 곡식창고,육중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들이 모래 속에서 차례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특히 히브리 대학의 도탄 교수는 데이르 엘-발락흐에서 화려한 이집트식 궁전을 발굴함으로써 이 길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서기전 1550년경 이집트 고센 땅으로부터 쫓겨나온 힉소스,즉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바로 이 길을 따라 그들의 중심지였던 지중해변의 샤룩헨으로 피신했다.하지만 이집트의 군대는 끝까지 추격하여 샤룩헨을 점령했고,그 결과 가나안 지역은 이집트의 직접 통치하에 들어가게 된다.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 얼마나 빠른 교통로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서기전 1460년경 이 길을 따라 팔레스타인의 므깃도로 진격했던 이집트의 파라오 툿트모세 3세의 기록을 통해서였다.자히 땅(시리아-팔레스타인)의 ‘사악한 반역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원정군과 함께 출발한 툿트모세 3세는 8월25일 호루스의 길이 시작되는 실레 요새를 출발해서 9월4일 가자에 도착했다.즉 열흘만에 250Km를 주파한 셈이었다.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이 길을 택했다면 고센 땅을 출발한 지 적어도 40일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이 길은 170Km 지점의 엘-아리쉬 오아시스 외에는 전혀 물을 구할 수 없는 사막지대를 통과하기 때문에 오늘날 차량편으로 이동하기에도 상당히 힘든 여정이긴 하지만 이 길은 홍해의 광야길에 비하면 다니기 훨씬 쉬운 길이었다.

홍해의 광야길은 이집트의 광산 개척로인가.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한 홍해의 광야길은 지중해변의 바닷길에 비해서 그 여정을 지리적으로 오늘날의 지도상에서 결정하기는 매우 힘들다.그 대신 출애굽의 중간 기착지들 중에서 비교적 그 위치가 뚜렷한 시내산,가데스 바네아,에일랏 등을 기준으로 본다면 고센을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은 일단 홍해변을 따라 남쪽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쳐 가데스 바네아로 갔다가 다시 에일랏으로 내려 온 후 에돔 지역으로 건너간 것이다.오늘날 출애굽 지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관심은 과연 이스라엘 민족이 어느 곳을 지나갔는가 하는 것 보다는 왜 출애굽기의 저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과 에일랏을 거쳐서 요단 건너편으로 우회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출애굽 여정은 고대 이집트의 터키옥 광산과 구리 광산의 개척로와 일치한다.대부분의 이집트의 고대 장신구들은 황금과 3가지 보석으로 구성됐다.짙은 남색의 라피스 라줄리,연한 푸른색의 터키옥,그리고 붉은 계통의 카넬리안을 모양대로 잘라서 황금 틀에 정교하게 배치한 이집트 전통 장신구는 그 화려한 색상과 미적 조화로 인해 오늘날의 귀금속 장식과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없는 최고급품으로 전세계의 유명 박물관의 진열장을 장식하고 있다.이 중에서 황금과 라피스 라줄리,그리고 카넬리안은 이집트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터키옥은 시나이 반도의 와디 마아라와 세라빗 엘-카딤 근처에서만 채굴됐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이집트인들은 시나이 반도에 광산 개척로를 닦아 놓았던 것이다.구리는 이스라엘 남쪽의 아라바 광야의 팀나와 페이난에서 채굴됐다.따라서 출애굽의 경로는 이집트를 출발해서 터키옥 광산 지역인 시내산 근처를 통과하여 구리 광산 지역인 아라바로 이어지는 고대 이집트 광부들의 광산 개척로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나아가 터키옥과 구리의 수호신이 다름 아닌 암소여신 하토르였고 이를 숭배하는 신전이 이미 출애굽 시대 이전에 각각 세라빗트 엘-카딤과 팀나에 건설됐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왜냐면 비슷한 길을 걸어갔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형태로든 이집트식 소 숭배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그 결과 시내산 기슭에서 금송아지로 구체화됐기 때문이다.

40일 걸리는 지중해변의 지름길 대신 40년이나 걸렸던 머나먼 홍해의 광야길을 택한 이스라엘 민족은 시내산에서 율법의 기초인 십계명을 받을 수 있었다.유월절,칠칠절,초막절 등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3대절기는 모두가 머나먼 광야 여정 중에 경험된 사건들로부터 유래됐다.또한 이스라엘 종교의 구심점인 예루살렘 성전도 광야 여정을 진행하면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휴대용 성소인 법궤와 이를 안치하는 성막으로부터 형성될 수 있었다.나아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신앙고백은 모세가 광야길의 호렙산에서 만난 야훼가 다름 아닌 ‘이집트로부터 우리를 구해낸 신’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니던 평범한 길이 아니라 좁고 험난해서 누군가가 지나가야만 후대의 사람들이 좀 더 편하게 지날 수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이스라엘이 선택한 덕분이었다.

/김 성 교수(협성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