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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17-찌포리 문화설

영국신사77 2008. 8. 20. 00:14

                  성지를 찾아서 17-찌포리 문화설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471286
 김성(협성대교수)

 

1931년 여름 미국 미시간 대학의 워터맨 교수는 찌포리라 불리는 나사렛 근처의 한 고대 유적지에 대한 발굴을 시도했다.당시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사마리아,므깃도,벧산 등 유명한 대도시들을 발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성서에도 등장하지 않는 초라한 폐허를 택한데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신약시대의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찌포리가 갈릴리 왕국의 첫번째 수도로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워터맨은 2개월여에 걸친 발굴 결과 서기 예수시대에 건설된 4천5백명 수용규모의 로마식 극장과 별장의 흔적들을 발견했다.이를 계기로 신약시대의 나사렛은 문명과는 고립된 촌락이 아닌 대도시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는 가설과 함께 어린 시절 예수의 교육적 문화적 배경을 이 도시로부터 찾으려는 새로운 이해가 시도됐다.

그 결과 청중을 사로잡았던 비유의 말씀들,현실적이고도 실용적인 율법의 해석,그리고 심오한 철학적 윤리 등은 보잘 것 없는 나사렛 출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구심이 걷히기 시작했다.하지만 소위 `찌포리 문화설'로 불렸던 이 가설은 중단된 발굴과 함께 얼마 못가서 학자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다.

1976년 시행된 이스라엘 전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유적조사에서 찌포리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됐고,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과 미국 듀크대학이 공동 추진하는 대규모 발굴작업이 1985년 시작됐다.비록 1930년대에는 신약시대의 유적을 중심으로 복음서의 해설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된 서기 2~5세기의 회당과 귀족의 저택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찌포리는 유대교 중심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주변을 감시할 수 있고 방어에 유리하게 우뚝 솟은 언덕,수량이 풍부한 샘과 근처를 흐르는 하천,비옥한 농경지,그리고 사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찌포리는 갈릴리의 중심지였다.

서기전 40년 헤롯은 로마군의 도움으로 찌포리를 선점한 후 갈릴리를 점령했으며 서기전 4년 그가 죽고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왕국의 왕으로 임명됐을 때 그는 자연스럽게 이 도시를 새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유대민족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은 여러 지방으로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서기 200년경 찌포리에 정착했으며 이로인해 찌포리는 유대교의 중심지가 됐다.`기록된 토라'인 구약성서와 견줄만한 `구전 토라'인 탈무드의 기본 텍스트 `미쉬나'가 최고랍비 유다에 의해 최종 편집된 곳도 찌포리였다.

서기전 4년 헤롯 안티파스가 찌포리를 `자율 도시'라는 의미로 `오토크라토리스'로 명명하고 수도에 걸맞는 건축공사를 실시했을 때 나사렛을 비롯한 근처의 마을주민들이 이 공사에 대거 참여했다.요셉과 예수의 직업으로 알려진 복음서의 `텍토노스(tektonos)'의 좀더 정확한 뜻은 `목수'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건축노동자'라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했다.그렇다면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찌포리 건설현장을 오갔을 것이고,어쩌면 이곳의 왕궁 부설학교에서 교육 받을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어릴때 부터 예수는 하룻길 되는 찌포리의 극장에서 서커스와 연극 등을 구경했을 것이다.그리스 고전에서 `휘포크리테스(hypokrites)'는 `연극배우'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됐는데 복음서에서는 배우라기 보다는 `위선자'의 의미로 쓰였다.아마도 원래 예수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이 배우같은 자들아'라고 빚대어 꾸짖었을 것이다.실제 생활과는 전혀 다른 삶을 연기하는 찌포리 극장의 배우들을 염두에 둔 예수의 언어적 유희는 로마식 극장이 없었던 나사렛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나사렛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성벽에 둘러싸여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한 왕궁의 일상생활도 예수의 비유에서 구체적으로 잘 드러난다.왕궁에 거하는 고급 의상을 차려입은 자들(마11:8),혼인잔치를 베푸는 왕(마22:1~14),왕과 왕이 전투를 벌이는 비유(눅14:3),그리고 예수의 후원자들 중의 하나인 헤롯 왕의 재무장관의 아내 요안나(눅8:3) 등은 모두가 찌포리나 티베리아스 같은 왕도와 동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서기 20년 갈릴리 왕국의 수도가 호수변에 새로 건설된 로마식 도시인 티베리아스로 이전됐다.청년이 된 예수도 자신의 직업에 충실했다면 이 건설현장에서 일했을 것이다.티베리아스가 복음서에 언급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후대 랍비들의 해석은 `하맛트'라 불리는 유대인 마을의 묘지를 헐고 그 위에 새도시가 건설되어서 유대인들은 정결율법에 따라 일부러 이 도시를 피했다고 전해준다.찌포리의 시대가 가고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티베리아스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직감한 예수가 자신의 선교 중심지로 가버나움을 택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였다.



[찌포리의 역사]
원래 히브리어로 `찌포리'는 새와 관계가 있다.마치 언덕에 새가 한 마리 앉아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오늘날 멀리서 찌포리를 바라보면 새 대신 서기 12세기 초에 건설된 십자군시대의 망대가 한눈에 들어온다.당시 성전(聖戰)기사단은 예루살렘의 십자군 왕으로부터 찌포리를 넘겨받아 요새를 만들었다.서기 1187년 드 루시냥(de Lusignan)이 이끄는 십자군은 전투기지인 찌포리를 출발하여 갈릴리호수 근처의 히팀 언덕에서 살라딘이 이끄는 아랍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십자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예루살렘의 성묘교회에서 가져온 소위 `예수의 나무 십자가'를 앞세우고 행진했으나 이마저 적들에게 탈취당하고 만다.폐허가 된 찌포리 망대는 18세기 중엽 갈릴리 지방의 베두인 통치자인 다하르 엘-오마르에 의해 재건됐다.

십자군시대부터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고향이 찌포리라는 말이 생겼고 그들은 찌포리 언덕 서쪽지역에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를 기념하는 교회당을 건설했다.따라서 이 말을 인정하는 학자들은 예수가 어린 시절에 외가에 자주 들렀다면 찌포리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가능성도 있음을 주장했다.19세기에 들어와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은 무너진 십자군시대의 교회당을 이용해 수도원을 건설했고 오늘날 이곳은 고아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한편 찌포리의 옛 영화를 복원하고자하는 유대인 개척자들은 근처에 키부츠의 일종인 모샤브를 설립하고 그 이름을 '찌포리'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