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요르단·레바론·시리아歷觀&聖地순례

요르단 : 움카이스(Umm Qeis) : 가다라(Gadara)

영국신사77 2008. 8. 8. 12:32
요르단 : 움카이스(Umm Qeis) : 가다라(Gadara)
 paxkorea    | HIT : 137
이 도시는 성경의 가다라 지방이다. 골란 고원과 헬몬산은 물론이고 갈릴리에서 사해 바다까지 바라다 보이는 산지 평원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고대의 유적지는 헬라-로마-비잔틴시대를 이어가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218년 셀루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가 이집트의 프톨레미에게서 빼앗았다. 기원전 2세기의 유명한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가다라를 가리켜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로 언급하고 있다. 기원전 98년경에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이곳을 정복하기 위하여 10개월 이상을 소요했다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은 가다라가 얼마나 힘있던 도시였는지를 보여준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황제에 의하여 정복되었고, 데카폴리스의 일원이 되었으며, 자체 동전을 사용할 정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이곳을 헤롯왕에게 제공하였으나 이를 원치 않았던 이곳의 많은 주민들은 헤롯에게 저항하였다. 헤롯이 죽은 기원전 4년 이후에는 시리아에 합병되었다.  3세기에는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디오클레시안 황제 때의 박해로 순교자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4세기에는 이곳 출신의 주교가 니케아 공의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635년 펠라에서 이슬람 군대에 비잔틴 제국에 패배함으로 이제 가다라는 이슬람 세계의 한 부분이 되었고, 메카 순례의 주요한 교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8세기에 있었던 대규모의 지진과 9, 10세기에 이곳에 창일 했던 전염병으로 가다라는 잊혀졌고, 12세기 이후로는 움 카이스로 불렸다. 아랍 마을이 다시 조성되었지만 그 규모는 작았다.

1806년 고고학자 울리치 시젠(Ulrich Seetzen)이 이곳을 답사하고 가다라 지방 유적지임을 확인하였으며, 1970년대에 이를 때까지 그냥 하나의 폐허로 남아 있었으나, 그후 지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는 작은 규모의 박물관이 마련되어 있어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그중 4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모자이크가 돋보인다.  

관련 성경 : 마 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