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기 선교사들 이야기(2) (Part I)
언더우드, 가장 열정적인 순수 복음전파의 언더도그 (underdog):
공의 만큼 정의롭게 사람들을 헤아리는 것이다.
글쓴이: 토마스 박 전도사
조선말기의 갈등과 언더우드선교사
교회에서 대부분의 신앙간증을 들어보면, 자신 인생의 벼랑끝에 치닫고 또 더 이상의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주셨기 때문에 새롭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공통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미조리주의 수도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의 기독교교육과 현대문화의 교수이신 Dr. Jerram Barrs, 또한 자신이 어느 바닷가의 벼랑끝에 서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을 바로 그때,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만나서 삶이 바뀌었다고 간증하셨는데, 이 분의 이런 신앙적인 경험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너무나도 정확히 상징적으로 은유해 주는듯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하나님은 더 이상 삶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된 바로 그 곳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삶이 새 출발할 수 있도록 큰 축복과 은혜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원더우)선교사가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1300만명이라는 백성들과 관료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공생하였던지 간에, 조선에 첫 발을 내딘 1885년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기도문과 같이 조선은 “메마르고 가난하고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나지 않는 땅”이었는데, 이는 마치 그 당시 조선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조선인들의 마음 또한 메말랐고, 삶의 그 어떤 기대감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암흑기였으며, 그 어떤 존재도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의 역할을 해주길 기대못하는 망망(望亡)한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했을 당시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 조금 필요합니다. 공교롭게도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한 1885년 4월5일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난 1884년12월4일로 부터 거의 반년후의 일입니다.
이 갑신정변은, 근대화의 물결에 발맞춰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고 주변국 일본처럼 국민들을 위한 새로운 근대사회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개화파 엘리트들(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이를 저지하려는 고종의 황후 민씨를 중심으로 한 척후 세력들을 제거하여 정변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 정변은, 민비가 청군의 도움으로 개화파를 진압함으로 삼일천하로 끝나고, 조선은 제 모습으로 되돌아왔습니다. (특히, 그동안 개화파 지원을 약속해 왔던 일본이 갑자기 발뺌을 함으로, 이 개화파 엘리트들은 그냥 힘없이 쓰러집니다.) 하지만, 이 정변으로 인해 되돌이킬 수 없는 몇가지 진실이 민초들의 마음 깊숙히 새겨지고 말았습니다.
첫번째, 이 갑신정변으로 인해, 조선의 오랜 사대주의 나라 청나라는 더 이상 왜구로부터의 침략을 막아주는 큰 형이 아닌, “조선의 나아가야할 미래를 가로막고 발목을 붙잡는 올무로서의 의미 밖에는 주지못한다”는 것이였습니다. 물론, 이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이 아직 대중의 전반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이 개화세력을 청나라의 힘을 입어 무너뜨린 민씨의 발상은 시대착오적이며 백성을 위함이 아닌 권력수구적 태도로만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국외세력에 대한 강한 불신이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말기”라는 역사의 한 시점에 입(入)애굽하기 이전에, 이미 (1)일본에서도 (2)서구열강에서도 또 (3)청나라에서도 각각 그 나라들이 조선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제시한 그들만의 “복음”이 있었습니다.
(1)서구열강들이 제시했던 “복음”은, 그들의 앞선 과학기술과 또 상업적인 교류를 통한 조선의 근대화였고,
(2)일본이 제시했던 “복음”은, 서양문물에 가장 처음으로 개방하여 변화에 성공한 나라로서의 본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이 따라야 할 모델을 제시해 주는 것이였고,
(3) 청나라가 제시했던 “복음”은, “서방오랑캐”와 “왜국”으로 부터 조선을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이였습니다.
특히, 러시아가 제시한 “복음”은 위의 3가지 “복음”들보다 더욱 흥미롭습니다. 러시아는 자신을 “거룩한 성모국(Holy Mother Russia)”라고 말하면서, 비서방주의 국가들을 “서구열강의 침략근성”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조선에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이 갑신정변을 통해, 일본도, 러시아도, 서구열강도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움직일 뿐, 방향성을 완전히 상실한 조선인들을 구원할 “복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민초들의 마음에 명백하게 인식된 것입니다. (특히,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이제 조선이 청산하고 역사의 한 시점에서 출(出)애굽해야 할 나라로 새롭게 인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개화파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일부 목적을 달성한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19세기말 전 세계가 근대화로 탈바꿈하기 위해 신음하는 때에, 국제정치적 갈등의 교차로로 스스로를 허락해 버린 조선은,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그런 전반적인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유교적 가치관이 그 유효기간이 지난 것같이 느껴지기만 하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시대변화적 바람이 불고 있다라는 것을 모든 백성들이 인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로 이때! 더 이상 돌파구를 찾을 수 없고 절망적인 바로 그 싯점에, 하나님께서는 이 “메마른 조선 땅”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를 보내십니다…!
언더우드가 조선을 만났을때…
언더우드선교사의 선교행적은 하나의 영화를 보듯 흥미로운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때(When Harry Met Sally)”라는 영화보다, “언더우드가 조선을 만났을때”라는 영화를 만든다면 더욱 드라마틱할 것입니다.
로맨틱한 신혼 여행
첫번째, 그의 선교인생은 “겨울연가”만큼이나 로맨틱했습니다. 홀튼여사를 로맨틱하게 만나서 결혼하는 에피소드중 하나입니다. 홀튼여사는 의료선교사로 독신으로 조선에 들어와 민비의 개인 의사가 되었는데, 갑신정변이후로 조선인의 서양에 대한 불신이 커가면서, 가마를 타고가는 도중 하인들이 그녀를 서양귀신이라고 하여 다 도망갑니다. 그러자, 그때 또 다른 “서양귀신” 언더우드가 짜잔!하고 나타나, 영웅처럼 용감하게 홀튼여사를 구해 가마에 다시 태워갔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로맨틱 센스라고 말할 수 밖에요…
이들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여행 또한 한국북부지방 선교여행으로 갔는데, 말 한마리에 사랑하는 아내를 앞에 태워, 조선의 경치를 함께 음미하며 즐겁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선교여행을 떠나는 이 선교사부부를 마치 한국의 순정만화를 보듯 상상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그의 선교인생에는 여러가지 갈등이 마치 “모래시계”를 시청하듯 복잡다양하게 일어난 것같습니다. 조선과 미국을 오고가는 장장한 로케! 동료 선교사들(엘런과 헤론)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 본국 선교부와의 견해차로 인한 갈등, 미국공사의 정치적인 언동으로 인한 갈등, 등등 여러가지 갈등이 비디오가게에서 빌린 연속극보다 더욱 우리로 하여금 눈을 못떼게 만듭니다.
세번째, MBC 드라마 “어사 박문수”만큼이나 그의 선교여행은 통쾌하고 민심에 희망을 불어주는 것이였습니다. 아내 홀튼여사와 함게 왕궁을 들락거리는 신분이었지만, 다른 선교사와는 달리 그는 각 지방 마을들을 다니면서, 골목길에 또는 샛길에서 마을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도 했고, 또 그들과 함께 길거리서 가두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또, 조선정부의 부정적 시선을 의식한 선교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네번째, 그의 인생은 미국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 “애신각라 부이”만큼이나 여러 시대를 넘나드는 “대서사시”였습니다. 조선이 서서히 몰락하는 과정을 한눈에 목격한 사람이고, 동시에 조선의 근대화 물결을 주도한 인물이였으며, 또 그후에는 한일합방이라는 시대의 변천을 하는 수 없이 삶의 달인처럼 음미해야 했던 인물이였습니다.
이처럼, 그의 선교행적과 삶의 모습은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것같습니다. 특히, 그의 가족이 그후 4대에 걸처 한국을 섬기며 봉사했던 것을 보면, 그가 뿌린 씨앗은 다른 선교사들과는 어딘가 남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추측하게 만듭니다.
특히, 그는 한국문화와 한국인들(물론 그 당시는 조선인들이라고 불렀겠죠.)을 마음 중심으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휴가를 얻어 미국에 건너가서도, “내 마음 한 가운데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라는 감동적인 설교를 하기도 했고, “The Call of Korea: Political, Social, and Religious”라는 책을 쓴 것을 보면, 조선 내의 영적 사회적 갈등에 어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기위해 삶을 헌신해 왔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굳이 몇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의 부인 홀튼여사의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English bulldog(영국산 불독)”, “불똥아리”, “넓은날개”, 등등이 홀튼여사가 그에게 붙여준 별명인데, 정말 그의 생애와 선교 행적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말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본인(토마스 박)도 그에게 한번 별명을 붙여보았숩니다. 제가 본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 가장 열정적인 순수 복음전파의 언더도그(underdog)!
언더도그...
집안에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은 잘 알겠지만, 비디오 게임기에는 시중에 Playstation, Xbox, 그리고 Nintendo 이렇게 세가지가 있습니다. 이중에 가장 미약하고 힘을 못쓸 것같은 게임기가 Nintendo의 게임기인데, 게임을 잘 아시는 분들은 Nintendo만이 순수한 게임으로써 아이들에게 유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다른 게임 회사와는 달리, Nintendo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게임을 통해 어떻게 하면 유익한 시간과 삶의 배움을 줄 수 있을까를 상당히 고민하는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미약한 게임회사임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명가”라고 할수 있을 만큼 Nintendo회사는 순수한 게임경험을 아이들에게 제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세계에서 Nintendo는 “언더도그”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회사보다 미약하지만, 가장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게임을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갑자기 게임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와 당황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것도 전도사의 입에서!!!) 이래봬도 저 또한 게임하면서 자라난 세대랍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를 설명할 때, 이 Nintendo회사와 비교하는 것보다 더욱 좋은 설명 방법이 없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절대로, Nintendo회사에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행적은 Nintendo회사와 굉장히 비슷했습니다. 물론, 아펜젤러 선교사화 함께 성경번역에 헌신했고, 교육과 문서사업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또 과거 의과를 공부하기까지한 그로서 엘렌선교사를 도와 의료선교도 한 그였지만, 그의 마음 중심에 있었던 가장 큰 사역은 바로 순수한 복음전도였습니다.
동료 선교사와 본국정부 선교부가 달가와 하지 않았던 그의 순수 복음전도
그 당시 순수하게 복음전파를 위해 방방곡곡을 다녔지만, 그의 동료선교사들도 또 본국의 선교부도, 또는 미국공사도 그의 하는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조선정부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본국의 선교부에서는, 언더우드가 계속적으로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줄 경우 그에 대한 지원을 전면적으로 중단하겠다고까지 경고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더 큰 복음전파의 장애물은 조선정부가 아니고, 자신들의 동료선교사와 또 본국의 선교부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선교여�에 조선관료들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그는 본국에 연락하기도 했습니다.
언더우드의 동료인 의료선교사들(엘런과 헤론)은 조선의 권력자들과 먼저 친화정책을 써서, 조선정부가 개신교에 대해 우호적으로 변하면 그때 복음을 전파하고자 권력에게 먼저 다가갔지만, 언더우드는 입국하자 마자 조선의 평민들에게 먼저 다가간 것입니다.
각종 서양 의료기술을 가지고 내한하여 권력층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은 엘런선교사와 헤론선교사와의 계산된 선교계략과는 달리, 언더우드는 순수하게 조선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한 순수한 “언더도그”였던 것입니다.
가치관의 부재(不在), 사회윤리의 부재, 또 삶의 방향성을 상실한 시대에서 그 무엇보다도 평민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은 서구열강의 서양문물도 아니고, 큰형님(청나라)의 보호도 아니고, 일본의 근대화 모델도 아니고, 성모 러시아도 아니였습니다. 그들에게 진실로 필요했던 것은, 불확실한 시대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였고,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 세상(조선정부, 서구, 일본, 러시아)이 줄 수 없는 “그리스도안에 참 소망”이라는 즐거움을 조선인들에게 선사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시말해, 조선에 그 무엇보다도 먼저 퍼진 것은 근대화의 물결도 아니고, 일본 또는 러시아의 진출도 아니며, 서구의 선진문물도 아닌, 바로 복음화였던 것입니다…!
물론, 복음 외에 그 다른 물결들 또한 나중에 한반도에 결국 다 들어오기는 했지만, 언더우드의 “언더도그”같은 순수 복음전파는, 조선땅이 변화하기 위해 우선 순위로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고집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의지를 너무나도 정확히 반영해 주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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