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주치의·언더우드 부인 홀튼 의료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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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어스 스티어링 홀튼(Lillias Stirling Horton, 好敦)은 1851년 6월 21일 미국 뉴욕주 앨버니(Albany)에서 출생했다. 시카고 여자의과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했다. 이 학교는 후에 노스웨스턴대학교 의학교가 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1888년 3월 27일 37세로 내한하였다. |
명성황후 주치의·언더우드 부인 홀튼 의료선교사
◇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홀튼(Horton, 1851-1921)은 애니 엘러스의 후임으로 제중원의 제2대 부인과장과 명성황후의 시의(侍醫)로 1888년 3월 27일부터 사랑의 인술을 펼쳤다. 그의 의술은 왕비에게 확신을 주었기 때문에, 곧 명성황후의 마음을 샀으므로 시의가 되었다. 명성황후는 외국인 부인들을 대접할 때는 늘 홀튼을 함께 초대하였다.
◇ 언더우드와 결혼
1888년 가을 서울에서 H. G. 언더우드와 약혼하여, 1889년 3월 14일 38세에 당시 30세인 언더우드와 결혼하였다. 언더우드는 미국에서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했었지만, 그 여성은 선교에 대한 관심과 이상이 없었으며, 약혼자와 함께 한국에 오기도 거절하였다.
언더우드 부부 결혼 배경에는 이른바 “아기소동”과도 관계가 있다. 아기소동 이란 ‘외국인들은 한국 어린이들을 몰래 데려다 잡아먹으며, 그 눈알을 빼서 사진을 현상하는데 쓴다.’는 허무맹랑한 헛소문을 퍼트려 사회를 혼란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격분한 군중들은 선교사들의 앞잡이가 남의 집 자식들을 꾀어간다 생각하고 그들을 마구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선교사들이 성찬식을 거행할 때 집례자가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이는 내 살이요 내 피라”고 하신 예수님 수난에 대한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밖에서 몰래 엿듣고 실제로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오해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때 병원은 아이들을 잡아 죽이는 장소로 잘못 인식되었으며, 외국인들이 아이 고기를 먹는 것으로 오해된 시기가 있었다. 이렇게 군중들이 격분할 때에, 외국인 의사가 거리에 모습을 보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홀튼은 가마를 타고 병원을 왕래하며 일을 계속했다. 성난 군중들은 홀튼의 가마꾼을 위협하였으므로, 나중에는 가마꾼도 나오지 못했다. 이같은 상황 아래에서도 그녀는 병원을 향하여 걸어 다녔다. 이럴 때 언더우드는 홀튼의 안위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위험 속에서도 홀튼을 호위해 주었다.
O. R. 에비슨은 홀튼에 대하여, “복음을 설교할 때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안전과 평안이 위태로울 때 대담해지고 강해졌으며, 자기 자신의 안전에 대하여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국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어떤 형태로든지 국가적으로 발전시켰고, 그녀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 영향력을 주었다”고 했다.
이들 부부는 결혼 후에도 신혼여행 겸 전도 순행으로 개성, 평양 등지를 거쳐 강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경유하면서, 한국의 인정 풍속과 언어 습관을 배우면서 강도를 만나고 화재와 자연의 위협도 경험하였다.
1894년 이후 이들 부부는 양화진에 여름 별장을 지어놓고, 여러 해 동안 지낸 일도 있었다. 이 부분을 홀튼은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1894년 여름 청. 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강변에 있는 언덕 위에 여름 별장을 지을 만한 아주 아름다운 장소를 살 기회를 얻게 되었다. 75달러밖에 하지 않아, 미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싼 값이었다. O. R. 에비슨, F. S. 밀러 선교사와 함께 각각 조그마한 방갈로를 지었다. 덕분에 가족들은 수년간의 여름 동안 피서를 갈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
언더우드는 이곳에서 많은 일꾼들을 접견하였으며, 성경 번역을 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한강에서 수영도하고, 절벽 부근의 아름다운 곳에서 차와 생강 빵이나 과자를 먹었다.
저녁에는 배를 빌려 타고 강 위에 비치는 달빛을 보며 노래를 부르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의 저서 한국의 언더우드(Underwood of Korea)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그녀는 1921년 10월 28일 언더우드 사후 5년만인 70세에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제2묘역(다-10)에 안장되고, 묘비는 1923년 5월 31일 그의 아들 원한경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비문에는 “大美國人 元杜尤牧師夫人 好敦之墓”라 쓰여 있다.
<양화진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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