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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양화진과 언더우드 선교사 4대 가문

영국신사77 2008. 6. 16. 06:51

양화진과 한국장로교 최초 언더우드 선교사 4대 가문 묘역

 

 


 양화진은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는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수륙 교통의 거점기지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풍치 절경(風致絶景)의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여 언더우드는 F.S.밀러, O.R.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미화 75달러에 땅을 사서 방갈로를 지어 놓고 많은 일꾼들을 접견하고, 여름 내내 새벽 일찍 일어나 오후 4~5시까지 성경번역 등의 일을 한곳이다.

그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언더우드는 이곳을 외국인 묘지로 쓰이도록 하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며, 이곳을 왕래하면서 서교동교회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한 곳이기도 하다.

언더우드 가문 4대가 안장된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일가의 정신과 공적은 우리 겨레의 사랑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라는 비문이 있다.

◇ 한국장로교 최초 선교사 언더우드(1859-1916)

호레스 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 元杜尤)는 1859년 7월 19일 런던에서 출생하여 1872년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뉴욕대학(1881)과 뉴 브른슨 신학교를 졸업(1884)하고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1985년 4월 5일 인천에 도착했다.

1886년 고아원을 설립하여 경신학교로 발전시키고, 1887년 장로교 최초의 새문안교회를 설립했다. 1897년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하고 1889년 한영사전을 편찬했다. 1890년 성서공회를 설립하고 성서번역위원으로 활약했다.

민비가 시해된 뒤 고종임금을 극진히 보살폈으며, 1915년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사람이 일을 아니하면 세상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1916년 10월 12일 미국에서 57세로 별세하여 Union hill에 묻혔다가 1999년 5월 20일 유해를 양화진 제2묘역 다-11 자리에 이장하였다.

◇ 민비의 시의 릴리어스 홀튼(1851-1921)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S. 홀튼(Lillias Stirling Horton, 한국명 : 好敦)은 1851년 6월 21일 미국에서 출생했다. 1888년 3월 독신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광혜원 제2대 부인과장과 민비의 시의로 사랑의 인술을 펼쳤다.

1889년 3월 언더우드와 결혼했다. 신혼 여행은 선교여행을 겸하여 평양 의주 등 북한을 다녀왔다. 저서로는 "한국의 언더우드" 등이 있다.

1921년 10월 28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제2묘역 다-10자리에 안장되고, 비문은 1923년 5월 31일 원한경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 언더우드 2세(1890-1951) 원한경

언더우드 2세(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元漢慶)는 1890년 9월 6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1906년 한국을 떠나 1912년 뉴욕대학을 졸업했다. 1912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경신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3·1운동 때에 제암리교회 사건을 세계에 폭로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1934년 연희전문 교장에 취임하고, 1942년 추방되었다. 1945년 목사안수를 받고 10월 다시 내한하여 미 군정청 하지장군의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1946년 연희대학교 명예총장에 추대되었다.

서울에서 부인과 사별한 뒤, 귀국하였다가 1950년 한국 전쟁이 돌발하여 10월에 전쟁터로 다시 나왔다. 1951년 2월 20일 부산에서 과로로 별세했다. 양화진 제2묘역 라-9 자리에 안장되었다.

◇ 와그너(1888-1949) 언더우드 2세 부인

언더우드 2세 원한경의 부인 에델 V. 와그너(Ethel Van Wagoner 한국명 : 태요한)는 1888년 4월 11일 미국 미시칸에서 출생하여 교육학을 전공했다. 1912년 서울외국인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16년 12월 6일 원한경과 뉴욕에서 결혼했다.

연희대학교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서울에서 1949년 3월 17일 공산당 청년들의 총에 피살되어, 양화진 제2묘역 다-9자리에 안장되었다. 1949년 11월에 세운 비문에 "활발하고 아기차고 다정하고 의로웠다"고 기록했다.

◇ 언더우드 3세(1917-2004) 원일한


언더우드 3세(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 元一漢)는 191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미국 해밀턴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1939년 8월,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연세대에서 교수, 도서관장, 총장서리와 재단 이사로서 한국교육의 발전과 한·미 우호증진에 이바지했다.

새문안교회 장로, 성서공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6·25 한국 전쟁 때 해군대위로 참전하고 정전 협정 시 UN측 수석 통역장교였다. 2004년 1월 15일 87세로 별세하여 19일 양화진 제2묘역 라-11 자리에 안장되었다.

◇ 데이비슨 (1915-1976) 언더우드 3세 부인

언더우드 3세의 첫 부인 죠안 비다 데이비슨(Joan Vida Davidson)은 1915년 9월 19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과 서울 외국인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76년 2월 2일 뉴용에서 별세하였으며, 유해는 양화진 제2묘역 라-10에 안장되었다. 비문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기록이 있다.

◇ 게일 클락 (1955-2000) 언더우드 4세 부인

게일 클락(Gale Clarke)은 1955년 3월 25일 출생하여 언더우드 4세 피터(Peter A. Underwood, 원일한의 셋째 아들)와 결혼했다. 교사로 헌신하였으며, 2000년 6월 15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2묘역 라-12 자리에 안장되었다.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04-22 (102 호)

 

 

                                                                                    

      [시론]이런 세습을 본다 -언더우드 가문

 

                                 2004년 02월 02일 12:00:00 기독신문(http://www.kidok.com)

                                                                                                       서정민 교수


  “나는 다른 거 바라는 것이 없어요. 연세대학이 언더우드 정신, 언더우드 설립정신을 잘 기억하는 것 밖에 없어요.”


 

 지난 2004년 1월 15일 하나님 품으로 떠나신 언더우드 3세(원일한 장로)가 얼마 전 필자에게 마지막 한 말이다. 명랑한 얼굴의 언더우드 4세(원한광 박사)는, 함께 빈소를 지키다 위로하는 필자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버지는 승리하셨어요, 괜찮아요.”

 

 역시 참 씩씩한 4세였다. 그 후 5일 동안의 장례기간, 연세대학교와 한국 교회 공동장으로 진행된 순서 내내, 언더우드 가 사람들의 꿋꿋한 태도와 소박한 마음씨는 모든 조문객들에게 인상적으로 회자되었다.

 

 기간 내내 그들을 가까이서 지켜 본 필자는, 사료에서 읽어지는 언더우드 1세의 용기와 집념, 그리고 2세의 열정과 한국사랑이 맥맥이 흘러내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소에도 존경하던 언더우드 3세를 좀더 가까이 만나 뵐 수 있었던 계기는, 2002년 언더우드기념 학술강좌에서 논문을 발표한 뒤, 곧 바로 계획된 연세대학교 내의 ‘언더우드 가 기념관’ 조성의 일부 책임을 맡아 몰두하면서이다. 학교 내 옛 언더우드가 사택을 정비하여, 설립정신의 기념공간으로 조성하는 데에는 여러 전공의 교수님들이 참여한 의미 있는 일이었고, 필자는 전공상 이 기념관의 의의와 내용, 곧 ‘소프트웨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고 원일한 장로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고, 특히 손때가 묻은 귀한 소장품들, 수백 장에 이르는 가족들의 생활사진을 제공 받아, 당시의 생활상 재현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진 한 장, 책 한점을 앞에 놓고도 가문 대대로 전해 받은 사명과 숨은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음이 참 귀한 시간이었다.

 

 이제 원일한 장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 분이 “내 생애에서 가장 기쁜 일”이라고 고백한 바 있는, ‘언더우드 가 기념관’의 지속적 육성과 계획되어 있던 ‘언더우드 사료관’의 설립은 필자는 물론 연세대학교의 확고한 의지이다.

 언더우드 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선교의 최고, 최대의 선교사 가문이다. 제1대 선교사인 언더우드 1세(원두우)로부터 시작된 이 가문은 2세(원한경)를 거쳐 이번에 소천한 3세(원일한) 형제들, 그리고 4세(원한광) 형제들로 이어졌다.

 

 일찍이 2세인 원한경은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2세대 선교사들이 지니고 있는 이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거두절미하고 나는 단언한다. 2세 선교사는 엄청난 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비해 단점은 티끌과도 같다.”

 언더우드 2세의 ‘선교사 대물림’의 이점 주장, 그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 물론 기능적이거나 효율적인 측면에서는 ‘선교지 적응’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이 2세, 3세, 4세로 이어지는 현시점에서 살피면, 더 중요한 핵심이 있다.

 

 결코 그들은 이권, 권세, 기득권을 대물림하지 않았고, 한국사랑, 열정, 용기, 헌신을 대물림하였다. 거기에 원일한 장로의 생애와 죽음 안에서 찾아낸 것은, 청빈과 겸손이 덧붙여진 것이다.

 특히 그는 설립자 가문에 대한 연세대학의 특별한 예우나 보답을 원하지 않았고, 그 귀중한 신앙의 계승과 아름다운 전통의 보존뿐이었다. 이런 세습이라면, 누구라서 안 된다고 나설 수 있으랴.

 

 맑고 푸른 웃음을 얼굴 가득 머금고, 소매 깃이 헤어진 양복을 입은 채, 등 두드려 주던, 그 설립자 3세와, 이 겨울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참 슬프지만 아름다운 일이다.

 

 양화진에는 그런 세습자의 무덤이 또 한 기 늘었다. 한국 교회가 혼탁한 즈음이면, 겸손한 마음으로 ‘양화진’ 거울에 자신들의 얼굴을 한번 비추어 보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