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일 클락 (1955-2000) 언더우드 4세 부인
게일 클락(Gale Clarke)은 1955년 3월 25일 출생하여 언더우드 4세 피터(Peter A. Underwood, 원일한의 셋째 아들)와 결혼했다. 교사로 헌신하였으며, 2000년 6월 15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2묘역 라-12 자리에 안장되었다.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04-22 (102 호)
[시론]이런 세습을 본다 -언더우드 가문 2004년 02월 02일 12:00:00 기독신문(http://www.kidok.com) 서정민 교수 지난 2004년 1월 15일 하나님 품으로 떠나신 언더우드 3세(원일한 장로)가 얼마 전 필자에게 마지막 한 말이다. 명랑한 얼굴의 언더우드 4세(원한광 박사)는, 함께 빈소를 지키다 위로하는 필자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버지는 승리하셨어요, 괜찮아요.” 역시 참 씩씩한 4세였다. 그 후 5일 동안의 장례기간, 연세대학교와 한국 교회 공동장으로 진행된 순서 내내, 언더우드 가 사람들의 꿋꿋한 태도와 소박한 마음씨는 모든 조문객들에게 인상적으로 회자되었다. 기간 내내 그들을 가까이서 지켜 본 필자는, 사료에서 읽어지는 언더우드 1세의 용기와 집념, 그리고 2세의 열정과 한국사랑이 맥맥이 흘러내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 원일한 장로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고, 특히 손때가 묻은 귀한 소장품들, 수백 장에 이르는 가족들의 생활사진을 제공 받아, 당시의 생활상 재현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진 한 장, 책 한점을 앞에 놓고도 가문 대대로 전해 받은 사명과 숨은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음이 참 귀한 시간이었다. 이제 원일한 장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 분이 “내 생애에서 가장 기쁜 일”이라고 고백한 바 있는, ‘언더우드 가 기념관’의 지속적 육성과 계획되어 있던 ‘언더우드 사료관’의 설립은 필자는 물론 연세대학교의 확고한 의지이다. 언더우드 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선교의 최고, 최대의 선교사 가문이다. 제1대 선교사인 언더우드 1세(원두우)로부터 시작된 이 가문은 2세(원한경)를 거쳐 이번에 소천한 3세(원일한) 형제들, 그리고 4세(원한광) 형제들로 이어졌다. 일찍이 2세인 원한경은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2세대 선교사들이 지니고 있는 이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거두절미하고 나는 단언한다. 2세 선교사는 엄청난 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비해 단점은 티끌과도 같다.” 언더우드 2세의 ‘선교사 대물림’의 이점 주장, 그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 물론 기능적이거나 효율적인 측면에서는 ‘선교지 적응’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이 2세, 3세, 4세로 이어지는 현시점에서 살피면, 더 중요한 핵심이 있다. 결코 그들은 이권, 권세, 기득권을 대물림하지 않았고, 한국사랑, 열정, 용기, 헌신을 대물림하였다. 거기에 원일한 장로의 생애와 죽음 안에서 찾아낸 것은, 청빈과 겸손이 덧붙여진 것이다. 특히 그는 설립자 가문에 대한 연세대학의 특별한 예우나 보답을 원하지 않았고, 그 귀중한 신앙의 계승과 아름다운 전통의 보존뿐이었다. 이런 세습이라면, 누구라서 안 된다고 나설 수 있으랴. 맑고 푸른 웃음을 얼굴 가득 머금고, 소매 깃이 헤어진 양복을 입은 채, 등 두드려 주던, 그 설립자 3세와, 이 겨울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참 슬프지만 아름다운 일이다. 양화진에는 그런 세습자의 무덤이 또 한 기 늘었다. 한국 교회가 혼탁한 즈음이면, 겸손한 마음으로 ‘양화진’ 거울에 자신들의 얼굴을 한번 비추어 보았으면...
“나는 다른 거 바라는 것이 없어요. 연세대학이 언더우드 정신, 언더우드 설립정신을 잘 기억하는 것 밖에 없어요.”
평소에도 존경하던 언더우드 3세를 좀더 가까이 만나 뵐 수 있었던 계기는, 2002년 언더우드기념 학술강좌에서 논문을 발표한 뒤, 곧 바로 계획된 연세대학교 내의 ‘언더우드 가 기념관’ 조성의 일부 책임을 맡아 몰두하면서이다. 학교 내 옛 언더우드가 사택을 정비하여, 설립정신의 기념공간으로 조성하는 데에는 여러 전공의 교수님들이 참여한 의미 있는 일이었고, 필자는 전공상 이 기념관의 의의와 내용, 곧 ‘소프트웨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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