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더 우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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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선교의 아버지 언더우드
언더우드의 본명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년 7월 19일 영국태생), 한국명은 원두우이다. 미국으로 이민 간 언더우드는 1877년 열아홉 살 때 뉴욕대학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1881년에 졸업 직 후 다시 미국 개정교파의 뉴부런스위크 신학교에 입학하여 1884년에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뒤 언더우는 인도 선교에 뜻을 두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게 한 음성이 들려왔다.
“왜 너는 조선으로 가지 않느냐?”
언더우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미국 북장로교선교부는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초대 조선 선교사로 정식 임명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 부두에 상륙하였고, 처음 서울에 입성한지 사흘만에 알렌이 개설한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1886년에는 고아원과 고아학교를 창설하고, 그때 4세 된 고아 하나가 언더우드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 후에 언더우드의 비서가 되고, 그 뒤 새문안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으니, 그는 김규식 박사이다.
입국한지 3년째 되던 1887년 9월 27일에 14명의 교인들이 언더우드의 집 사랑방에 모여 두 사람의 장로를 세워 당회를 조직하였다. 이보다 앞서 언더우드는 노도사 라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이 사람은 국내 최초의 세례교인으로, 헤론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다가 성경책을 훔쳐 갔던 사람이다.
언더우드는 학자이면서 한국어의 대가였다. 1889년에는 한국어 분법과 한영사전을 편찬, 간행했으며, 성서번역에 재능을 발휘하여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별세할 때까지 그 초대 위원장으로 시무했다. 특히 그는 신구약 성경을 번역하되 순 우리말로 번역했으며 우리 문화사의 금자탑을 쌓았다. 또한 그는 언론인이자 편집인이었다. 한국성교회서회를 조직할 때에도 언더우드가 거액의 원조를 받아 왔으며, 1897년에는 <그리스도신문> 이라는 주간신문을 창간하였는데, 이 신문이 우리 교계에 새로운 지식과 영적 양식을 제공할 뿐 아니라, 비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한국의 찬송가 역사에서도 선구자가 되었다. 1893년 이전까지는 찬송가가 있더라고 몇 장씩 낱개로 돌아다니던 것을 언더우드 혼자서 150장을 번역, 책으로 엮어 1893년에 간행했다.
2. 홀튼과의 만남
언더우드의 부인 이름은 릴리어스 홀튼(Lillias S. Horton)이고, 1888년 봄에 우리나라에 왔다. 홀튼은 북장로교 선교부가 광혜원에 제2대 부인과 과장으로 파송한 여의사이다.
초대 부인과 과장은 엘러즈였는데, 그녀는 1887년 벙커와 결혼하게 되어 그 후임 과장으로 홀튼이 파송된 것이다.
홀튼은 입국한지 한두 달 될 즈음, 허무맹랑한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이른바 ‘아기소동’이다. 즉, 외국 사람들이 조선의 아이들의 눈알을 빼어다가 안경알을 만들고, 염통을 빼어다가 양약을 만들어 판다는 낭설이었다. 이때에 외국인들은 바깥출입을 얼씬도 할 수 없었고, 가마꾼도 서양인을 도와준다는 이유로 심한 매를 맞았기 때문에 활동하기 어려웠다.
이때 총각 언더우드는 홀튼 양의 호위병이 되기로 결심하고, 신변보호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이에, 처녀 총각의 연애로 발전하게 되어, 1888년 가을 결혼을 하게 되었다(참고사항 홀튼은 8살 연상이었음).
그런 때에 그가 왕비의 시의인 홀튼과 결혼을 하게 되어, 일약 주목받는 인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3. 황실 복음의 좌절
1894년 한겨울 한번은 황후의 부름을 받고 궁으로 갔더니, 궁 안에 연못이 있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궁에 들어와 스케이팅을 하며 재미있게 보내라고 제안했다. 언더우드 부인은 이때야 말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온 가족과 함께 여러 아이들까지 궁으로 데려갔다. 그때 언더우드 부인은 연못가 소나무에 크리스마스트리를 하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전했다.
명성황후는 홀튼의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듣고 난 뒤, 귀족 집안 자제들을 가르칠 학교를 설립해 달라는 말을 전했다. 언더우드는 ‘이제는 귀족들에게 전도할 기회가 생겼구나’ 하면서 건축설계를 하는 그 해에,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를 당하는 을미사변이 터지고 말았다. 만약 명성황후가 시해 당히지 않았다면 귀족학교가 설립되었을 것이며, 왕실은 아마도 기독교화 되었을 것이다.
1916년은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의 창립 등 엄청난 고생 탓으로 건강을 잃어 휴양차 미국에 갔다가 1916년 10월 12일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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