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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이평해목사 (7~13) 주일이면 스스로 즐겁게 교회로…

영국신사77 2007. 8. 16. 00:36
 [역경의 열매]이평해목사 (7~13) 주일이면 스스로 즐겁게 교회로…
 
 
             [역경의 열매] 이평해 (7) 주일이면 스스로 즐겁게 교회로…


  ‘나는 원래 기독교 체질인가? 아니면 내가 하나님께 꽉 찍힌 건가?’

  참으로 희한한 현상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갔다온 그날, 그러니까 1997년 9월11일부터 내 맘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미풍이긴 했지만, 나 자신이 충분히 감지할 정도는 되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오산리기도원을 갔다온 그날 일이 다음 날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따르릉∼” 아침 일찍 전화가 걸려왔다. 직감적으로 양인평 장로님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이번엔 김용운 장로님이었다.

  “저 김용운 장로입니다. 오늘 별일 없으면 점심식사나 같이 하시죠.”

  “아,예. 좋습니다. 교회에서 만납시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김 장로님의 제안에 응했다. 그리고 만날 장소를 식당이 아닌 교회로 정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교회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아닌가.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변화가 내게 일어나고 있는 증거였다.

  그랬다. 나는 변화됐다. 그때부터는 누가 데리러 오지 않아도, 누가 전화를 하지 않아도 매주 주일이면 스스로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달려갔다.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즐겁게 교회로 발길을 향했다. 찬양이나 예배도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해오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자 조용기 목사님과 여러 장로님이 무척 좋아했다. 그런 차에 조 목사님께서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하겠다고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집과 그 일대는, 내가 불교 성지를 만들려고 조성한 곳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탑을 세우고,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을 만들어, 불교인들의 자존심을 드높일 수 있는 성지로 꾸미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춘천 길목의 경치 좋은 곳에 3만여평의 땅을 구입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을 조 목사님이 찾겠다는 것이었다. 목사님께서는 “근처에 일이 있어 가는 길에 방문하겠다”고 하셨지만, 내 느낌으로는 일부러 오겠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워낙 영적인 혜안을 가진 데다 명민한 분이라서 뭔가 짚이는 게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11월24일 조 목사님은 몇몇 목사, 장로님들과 함께 오셨다. 오자마자 기도를 한 다음 조 목사님은 준비해온 성경책을 주셨다. 그리곤 “이 회장님, 이곳을 하나님께서 요긴하게 쓰실 것입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분은 필시 내가 주님의 종이 되고, 그 땅도 하나님의 성지로 바뀔 것이라는 걸 예감하신 것이었다.

  나는 조 목사님께 받은 그 성경책을 지금도 애지중지하고 있다. 워낙 오래 사용해 너덜너덜해졌지만, 책상머리에 꽂아놓고 소중히 다루고 있다.

  여기서 잠깐 성경책 이야기를 하면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찌감치 예정돼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조 목사님께 받은 그 성경책은 내가 24번째로 선물받은 성경책이다. 다른 종교 지도자까지 지낸 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성경책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춘천교도소 교화위원장으로 지내면서 목사님들과 가끔 의견을 나눌 때가 있었는데, 그분들은 꼭 나에게 성경책을 선물했다. 그렇게 받은 성경이 20권을 넘겼고, 양인평 장로님에게서 22번째,김용운 장로님에게서 23번째 선물을 받은 데 이어 조 목사님께 받은 것이다.

 

           [역경의열매] 이평해 (8) 결단끝 불교 물품 불길에 던져버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장로님께서 제게 용기를 주십시오!”

  1997년이 저물어가던 때, 나는 아무 연락도 없이 양인평 춘천지방법원장 방을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내 심정을 밝혔다.

  “아니,그게 무슨 말입니까?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십시오.”

  양 장로님은 갑작스러운 내 말에 의아해 하며 물었다.

  “제가 갖고 있는 불교 물건들을 모두 폐기해야겠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모든 걸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양 장로님은 놀라면서도 반가운 눈치였다. 그렇게 전도하려고 애썼던 내가, 자기 발로 찾아와 자기 입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행동으로까지 해보이겠다는데, 얼마나 좋았겠는가. 나는 그때 이미 여의도순복음교회 실업인선교회 산하 성도개발자문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성도들을 상담하면서 몇 차례 간증을 하기도 했다.

  해를 넘긴 1998년 1월23일 삼악산 내 별장에 다섯 사람이 모였다. 나 외에 춘천순복음교회 김주환 목사님, 양 장로님, 강원일보 사장인 조남진 장로님, 그리고 강원대 교수님 등이었다. 우리는 전쟁터로 나서는 전사와 같은 마음으로, 거실에 앉아 비장하게 기도를 드렸다. 김 목사님은 내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별도로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뒤로 수십 그루의 천년송을 병풍 삼고, 앞으로는 소양강을 내려다보는 그야말로 절경에 위치한 별장 마당에, 그동안 내가 보물처럼 여겼던 물건들을 하나씩 내놓았다. 불상 목탁 불화 등 있는 모두 끄집어냈다. 하나씩 뜨거운 불길 속으로 집어넣기 위해서였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엄청 어려운 일이었다.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내 몸을 얼어붙게 했다. 온몸에 왕방울 같은 소름이 돋아나, 마치 갑옷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주여! 주여!”를 외쳤다.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주여, 제게 용기를 주소서. 주님의 능력으로 이것들을 태우고 부수게 하소서. 주여! 주여!” 옆에 있는 네 분도 크게 외치며 기도했다.

  얼마나 그랬을까. 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하더니, 얼음 같던 몸이 불덩어리로 변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무얼 하느냐. 속히 처리하지 않고 무얼 하느냐. 조금 지나면 네가 죽는다. 빨리 처리해라!” 나는 “감사합니다”를 연방 외쳐댔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한 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물건들을 망치로 부수고 불속으로 던져나갔다.

  불과 1시간여 동안 진행된 일이었지만, 내겐 영원처럼 느껴졌다. 모든 일을 끝내자 우리는 그 자리에 엎어져 기도했다. 나는 목청껏 외쳤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일을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저의 모습을 보셨죠? 앞으로 저를 구원해주신 주님만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소서!” 섭씨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도 우리의 몸은 후끈 달아올랐다.

  어둠 속에 내려온 우리는 말없이 춘천시내로 들어와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비로소 긴장이 풀리며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서로 밥값을 내겠다며 유쾌한 실랑이를 벌이며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교회에 달려가, 조용기 목사님께 알리고 다시 안수기도를 받았다.

                                                                                                                  정리=정수익기자

 

 

          [역경의 열매] 이평해 (9) 믿음 생기자 ‘성령의 목소리’ 들려


“주님이 부르실 때에 순종하며 주 앞에 엎드렸네/세상에 귀한 나의 모든 것 하나 둘 거두셨네/주님 사랑 이제 알았네. 어리석고 미련한 나의 모습/더러운 세상 옷 던져 버리고 텅 빈 손 내밀었네/주님 은혜 감사하면서 순종하며 주님께 찬양하리/귀하신 주 보혈 증거하면서 영원히 찬양하리/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의 빈 손을 내게 다오/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축복 네게 주리니/너의 빈 손을 내게 다오 너의 손 붙들리니(후렴)”

  위의 글은 내가 예전에 썼던 글을 약간 바꿔 찬양사역자인 남정순 전도사가 곡을 붙인 성가이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노래라고 느낀다. 하지만 그보다도 항상 노래 가운데서 예전의 상황들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가슴에 사무치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한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 1998년이 새해가 밝으면서 나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몸과 마음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한참 뒤에야 깨달았지만, 그 소용돌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베푸시는 크나큰 은혜의 잔치였다.

  나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일단 거둬가셨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물질적으로도 상상을 초월한 액수를 포기했다. 나는 아깝지 않았다. 단지 아내와 아이들이 남편과 아버지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피하는 게 무척 힘들었지만, 그 또한 견딜 만했다.

  내가 불교 관련 소장품들을 모두 폐기한 뒤 두번째로 맞은 주일, 그러니까 2월1일[1998년] 나는 또 한번 희한한 경험을 했다. 완전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고 주일예배에 참석해서인지, 마음 상태가 여느 때와 달랐다. 교회에 나가자, 몇몇 장로님들이 오늘은 외국인석에 앉자고 해 따라갔다.

  성전으로 들어서자, 실내는 이미 수많은 성도들의 기도로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많은 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기도를 했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라고 여기며, 나도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내 마음속이 심상치 않았다.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입이 저절로 실룩거려지는 것이었다. 그리곤 무당이 굿판에서 하는 소리 같은 것이 내 입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방언이었다.

  나는 외쳤다. “주여! 주여! 왜 저를 무당으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그건 마음속의 외침이었지, 입으로는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얼마나 그랬을까. “얘야, 너에게 막중한 임무가 있으니 잘 수행하거라!”는 성령님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나는 비로소 제대로 기도하게 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성령 충만케 하옵소서. 세상 끝날까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막중한 임무를 기꺼이 수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방언이 터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경의 열매] 이평해 (10) “불교 성지 만들 땅에 기도원 건립”


  비로소 나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편입됐다. 외형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하나님 한 분만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을 만큼 바뀌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첫번째 시험이 앞을 가로막았다.

  1998년 설날이었다. 우리나라의 관습대로 제사를 지내야 하고, 그러려면 지방을 써놓고 절을 해야 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불교계의 지도자였고, 누구보다 유교적인 전통에 충실했던 내가, 자식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하나님,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게 지혜를 주세요. 오늘 당장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하기는 정말로 어렵습니다. 일단 오늘의 난국을 넘길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가족이 제사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방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제사가 시작됐다. 아이들은 평소 해오던 대로 넙죽 절들을 했다. 나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이들이 절하는 걸 아무 말 없이 지켜보면서 앉아 있었다. 그렇게 절을 하지 않고 제사를 끝냈다. 아이들은 내가 절을 했는지, 그냥 무릎만 꿇고 앉아 있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알면서도 아버지의 처지를 이해해줬는지도 모른다. 조상 제사에서 절을 하지 않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주여,주님의 뜻에 따라 했습니다. 비록 유치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하지 않겠지만, 순종하고자 하는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제게 더 큰 믿음을 주시어, 어떤 난국과 시련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제사를 마친 뒤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내 신앙심은 하루하루 커지고 여물어갔다. 그야말로 일취월장이었다. 나 자신이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은 나만이 아니었다. 주위 장로님들도 나만 보면 “이 위원장님의 믿음이 놀랍도록 좋아지고 있다”고 한 마디씩 했다. 사실 신앙심에 대한 칭찬만큼 듣기 좋은 것도 없었다. 또 그런 칭찬만큼 쑥스러운 것도 없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앙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깊어지게 해야 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그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나에 대한 다음 계획을 펼치셨다.

  언제부턴지 모르게, 나와 친한 몇 명의 장로님들이 건네는 말이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 옆에 기도원을 세우면 아주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받아넘겼다. 그러나 여러 차례 듣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불교 성지로 만들고자 준비한 땅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면 상당히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일 것 같은데, 그러면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내 땅에서 일어나는 것인데,하나님께서 이후에 더 큰 역사를 만드실 것도 같은데….’

  며칠을 깊이 생각한 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곳에 하나님의 성지를 만들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이 사실을 주위에 알렸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다짐하고, 일단 사연 많은 그 땅에 기도원을 세우기로 했다”고 공표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오는 6월23일 기도원 개원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해주세요. 많은 분이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뜻밖의 전갈이 왔다. 앞으로 남은 기간은 불과 1주일이었다. 도대체 이 기간에 어떻게 건물을 세운단 말인가?

 

 

     [역경의 열매] 이평해 (11) 1주일만에 기도원 완성…감동의 출발


  “하나님,1주일 안에 기도원 건물을 짓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저로선 최선을 다하겠지만, 안되면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역시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었다. 몇 군데 건축업자에게 알아봤지만, 한결같이 어렵다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집 뒤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매달렸다.
 
  나는 그때 나만의 기도처소를 갖고 있었다. 빽빽한 산림 속에 꿇어앉아 기도할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놓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곳을 찾았다. 거기에는 내가 직접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걸어놓았다.

  바로 응답이 왔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100평이 넘는 기도원 건물을 완성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제법 쓸 만한 건물을 세웠다. 덕분에 그곳에서 많은 목회자 성도들과 개원예배를 드렸다.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즈음 나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연재 서두에서 밝힌 대로, ‘배신자’ ‘배교자’로 찍힌 내겐 연일 공갈과 협박이 날아들었고, 심지어 집으로 많은 사람이 쳐들어오기도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몸 곳곳에서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나는 불미스러운 일을 당할 것에 대비해 언제나 가스총을 소지하고 다녔다.

  그러나 내게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하나님이라는 ‘빽’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용기와 지혜를 주셔서 모든 어려움을 능히 극복하도록 해주셨다. 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죽음까지도 맞설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이에 관한 내용은 연재를 시작하면서 밝혔다.

  그럼에도 6월22일, 개원예배 당일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끊임없이 날아드는 협박이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싶어 경찰에 보호를 요청했는데, 뜻밖에도 200여명의 병력이 주위를 감쌌다. 그리고 내 처지를 아는 주위 목사님들이 대거 참석해주셨다.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참석한 목사님들은 앞다퉈 나의 손을 잡으면서 격려했다. 모두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드려진 예배는 참석자 모두에게 큰 감동과 은혜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후 어느 정도 혼란이 정리되자, 희소식이 날아왔다. 조용기 목사님이 직접 오셔서 부흥성회를 인도해주시겠다는 것이었다. 날짜는 8월11일로 정해졌다. 나는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기도원을 쓰실 것이라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 부흥성회를 성대하게 열 계획으로, 나는 춘천 가평 등 일대에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고 전단도 돌렸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뜻밖에도 춘천지검에서 통지서 한 장이 배달됐다. 내가 산림법 건축법 등 위반으로 고발됐으니, 출두해 조사를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곳에 지었고, 산에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무슨 범법을 했다는 말인가.

  결국 조사를 받았다. 수십년 전부터 길은 닦여 있었고 내가 살던 집도 이미 앞선 주인이 주택을 지어 살던 곳이라고 항변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들어보지도 못한 법 내용을 들이대며 내가 법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그래, 이놈들아 마음대로 해봐라. 나에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니 별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어코 나를 감옥에 가두었다. 형사 두 명이 찾아와 따라갔더니, 창살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평해 (12) ‘억울한 수감’알고보니 옥중전도 명령


  나는 미결수로 춘천교도소에 수감됐다.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또한 뒤늦게 하나님을 받아들인 데에 대한 대가 중의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견디기가 한결 수월했다. 또 춘천교도소의 교화위원장을 오랫동안 했던 덕분에 심적인 부담도 덜했다. 그러나 삼복더위의 교도소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다 8월11일로 잡아놓은 기도원 부흥성회에 대한 걱정도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또한 주님의 뜻일 줄이야….

  내가 수감된 방의 재소자들은 모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섬광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이들을 전도하자. 하나님께서 내게 전도자의 사명을 부여하면서, 가장 먼저 이곳으로 보내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은근하게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여기서 내가 개발한 독자적인 전도법이 나왔다. ‘딸랑이 전도법’으로 이름 붙인 이것은 모 메리야스 회사의 상표에서 따온 것으로, 감옥 안에서 가장 가치를 인정 받는 메리야스라는 물질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당시 많은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연일 면회를 와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넣어주었다. 나는 그 물건들을 아끼지 않고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역시 물질에 약한 것이 인간이었다. 그들은 조금씩 마음문을 열어갔다. 나는 내가 겪은 하나님을 조금씩, 아주 신중하게 그들의 마음속으로 투입했다.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첫번째 수감돼 있던 방에서 닷새만에 모든 수감자가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들은 출소한 뒤 꼭 나를 찾기로 하고 교회에 나갈 것도 약속했다.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교도관에게 말해, 불교인들이 수감된 방으로 자원해 들어갔다. 불교인 방에서는 내가 승려 생활을 한 것을 활용했다. 그곳에서도 며칠만에 매일 아침 펼치던 불경책을 성경책으로 대신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면 무척 길다.

  교도소 안에서는 거의 모든 시간을 기도에 매달렸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이끄시는 내 주변의 사연들이 너무나 절묘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폭력범들이 수감된 방까지 자원해 들어갔다. 겉모습만 봐도 무시무시한 젊은이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딸랑이 전도법에다 연일 사식을 먹이며 그들과 교제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달리 잘되지 않았다. 같이 기도하자고 하면 ‘너 혼자 하라’는 식이었다. 나는 비상대책을 강구했다.

  “이것들 보세요.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우리 함께 오늘 재판 받으러 나가는 청년을 위해 기도합시다. 기도해서 그 청년이 석방되면 앞으로 같이 기도하고 만일 석방되지 않으면 잠자코 있겠소.”

  일종의 모험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시 나를 도우셨다. 그날 재판을 받으러 나간 청년이 바로 석방이 됐다. 그 이후에도 그 방에서 몇 명의 미결수들이 기도의 힘으로 석방의 기쁨을 맛봤다.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조용기 목사님이 두 차례나 면회를 오셨다. 한번은 수감되고 얼마 안 됐을 때이고, 한번은 보름여 지났을 때였다. 그런데 두번째 면회온 날은 바로 기도원의 부흥성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평해 (13) 감옥서 맞은 성회…기적같은 ‘가석방’


  창살 안의 나는 무력했다. 당장 내일 주인공이 없는 상태에서 치러질 첫번째 부흥성회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재소자의 몸으로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누구랑 대화도 하기 싫고 식사조차 하기 싫었다. 취침시간이 돼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찾았다. 비몽사몽간에 계속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했다. 그런데 갑자기 시퍼런 불빛이 비치더니, 그 불빛에 쇠창살이 모두 다 끊어졌다. 꿈인 듯했다.

  날이 밝았다. 1998년 8월11일, 기도원의 부흥성회가 열리는 날이다. 아침부터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히 꿈인 것 같았는데, 너무나 생생한 그 광경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앉아 있는데, 교도관이 면회라며 불렀다.

  ‘누굴까? 이런 이른 아침에 누가 찾아왔을까?’ 이 사람 저 사람을 떠올리며 면회실로 들어섰다. 뜻밖에도 조용기 목사님이었다. 조 목사님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이 위원장님, 걱정이 많으시죠? 밤새 못 주무셨나 얼굴이 좋지 않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성회는 제가 잘 치르겠습니다. 제게 맡긴다 생각하고 마음 편히 가지세요. 그리고 혹시 하나님께서 또 다른 기적을 만드실지도 모르니 계속 기도하세요.”

  고마웠다. 한없이 고마웠다. 내 마음을 헤아려 이렇게 아침 일찍 서울에서 춘천까지 달려와 위로해주시는 조 목사님이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그러나 정작 내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일종의 투정이었다.

  “목사님 같으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저는 지금 보름 가까이 감옥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한번 들어와서 지내보세요. 그리고 오늘 당장 성회날인데,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조 목사님은 재차 나를 위로하시곤 나를 위해 뜨겁게 기도해주고 떠나셨다. ‘그래, 잘될 거야.’ 억지로 마음을 달래며 방으로 돌아와 앉아 있는데, 금세 교도관이 또 불렀다.

  “일단 출소하세요.”

  이게 무슨 말인가. 미결수에게 출소라니 당치도 않는 말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면 교도관이 농담을 하는 것인가?

  “이봐요, 지금 늙은이 잡고 농담하는 거요? 안 그래도 심란한데...”

  내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교도관은 무표정하게 설명을 해줬다.

  “그게 아니고요. 가석방 지휘서가 내려왔어요. 3일 동안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겁니다.”

  아니, 그럼 어젯밤 그 꿈이…. 조금 전 조 목사님이 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기적이란 말씀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걸 따지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12일만에 교도소를 나섰다. 이미 연락이 된 듯, 밖에선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얼른 올라타고 기도원으로 달렸다. 얼마 되지 않은 그 거리가 수만리 먼 길처럼 느껴졌다. 얼마 걸리지 않은 그 시간이 몇 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기도원에 다다랐다. 수십년만에 고향을 찾은 사람처럼 마음이 설�다. 기도원 일대에는 경찰 2개 중대 병력이 쫙 깔려 있었다. 수천 명의 인파가 기도원 건물 주위에서 성회에 동참하고 있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감동이 솟구치고 입에서는 연방 “할렐루야!”가 터져나왔다.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