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믿음간증歷史

[역경의 열매]이평해목사 (1~6) 불교계 지도자에서 주님의 종으로

영국신사77 2007. 8. 16. 00:33

[역경의 열매]이평해목사 (1~6) 불교계 지도자에서 주님의 종으로

 

 

 

         (1) 불교계 지도자에서 주님의 종으로

 

 



“하나님,당신이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저를 살려주세요. 저는 지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 곁으로 다가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저는 지금 너무 두렵고 떨립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이 고비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제게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제발 하나님….”

  1998년 7월의 어느날, 그는 지붕의 용마루를 끌어안고 기도에 매달렸다. 미친 듯이 외치는 그의 기도는 차라리 울부짖음이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인들 이렇게 절박할까 싶을 정도였다.

  그때의 그 남자가 바로 나, 이평해이다. 당시 강원도 불교신도회 회장인 내가 집옆에 기도원을 지어,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을 모시고 집회를 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몰려 왔다. 그들은 나를 그냥 놔두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린 나는 급한 김에 지붕으로 피신했다.

 밑에서는 “배신자 나와라!”고 소리를 질러댔고, 지붕 위에서는 “하나님, 살려주세요!”를 외쳐댔다. 30여분 동안 이런 상태가 지속됐으며, 나는 눈물을 족히 한 바가지는 쏟아낸 듯했다. 얼마나 하나님을 외쳐댔는지 목도 꽉 잠겼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내 내면이 달라졌다. 얼마 전까지 불안하고 두려웠던 생각들이 사그라졌다.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하나님께서 담대함을 주신 것이었다. 여전히 문앞에서는 많은 사람이 “배신자 이평해 나와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집과 지붕을 연결하는 통로를 타고 집으로 내려와, 문을 열고 그들과 마주했다.

  “당신들이 나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그 전에 나도 한 마디 해야겠소. 지금까지 나는 불교계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해왔소.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 변화가 생겨서 기독교를 믿게 됐는데, 그것 때문에 나를 공격한다는 게 말이나 되오? 일단 들어와서 차나 한잔씩 마십시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놀랐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듯한 사람들을 상대로 또박또박 내 입장을 설명하기가 쉬운 일인가. 그러자 더욱 놀란 건 그들이었다. 벌벌 떨며 싹싹 빌 줄 알았던 내가 당당하게 나오자 오히려 그들이 당황하는 듯했다. 잠시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네가 배신을 하고도 잘살 수 있을 것 같아?” “차를 마시든지 꿀을 먹든지 혼자서 잘 먹고 잘살아라!” 입에 담기 어려운 험한 욕설들을 퍼붓고 그들은 떠나갔다.

  참으로 고마운 하나님의 배려였다. 혼자서 뜨거운 차를 한잔 마시는데,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격이 출렁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 드렸다.

  그랬다. 나는 한때 승려였고, 신도회를 이끌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위대한 하나님을 체험하고, 기독교인으로 탈바꿈해 주님의 종이 됐다. 나는 지금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갈보리기도원을 세워, 보다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전하면서 나름대로 목회 활동도 하고 있다. 지금도 주위에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부터 나는 내가 체험한 하나님을 알리고자 한다.

◇이평해 목사 약력=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합동선목), 경기대 경영대학원 졸업, 조계종 강원도 신도회 회장, 조계종 교화위원장 등 역임, 현 강촌 갈보리기도원 원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교수(비교 종교학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국민 05.8.22.]

 

 

 

          [역경의열매] 이평해 (2) 1997년 가을 ‘운명의 날’을 맞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인도…. 곱씹을수록 실감이 가는 말들이다. 짧지 않은 내 인생의 발자국을 더듬어보면 이 말들은 진실의 차원을 넘어 진리임이 깨달아진다. 그리고 미천한 한 인간의 삶을 통해 펼치신 하나님의 섬세하고도 깊은 섭리에 절로 찬양이 터쳐나온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라고 한 시편기자의 고백이, 이렇게도 가슴을 울릴 줄은 예전에 정말 몰랐다. 불교 지도자였던 내가 뒤늦게 하나님의 뜻을 깨우치고, 이렇게 뜨거운 가슴을 갖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으로 나를 그렇게 이끄셨다.

  나를 전도한 분은, 현재 로고스 법무법인 이끌고 있는 양인평 전용태 장로님들이다. 1995년 각각 춘천지방법원장과 춘천지검장으로 부임해온 두 장로님은, 오자마자 지역의 많은 이들을 전도했다. 특히 믿음이 없는 지도급 인사들은 두 장로의 타깃이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핵심이었다. 아마 내 이력이 그들의 구미를 더욱 당기게 했을 것이다.

  두 장로님은 평소 시간만 나면 내게 전화를 걸어 만나기를 원했다. 겉으로는 “그냥 식사하면서 살아가는 얘기나 나누자”고 말했지만, 내가 그들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춘천지역 홀리클럽 활성화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두 분은 모임 때마다 나를 끈질기게 불러냈다.

  그러다가 1997년 9월 운명의 날을 맞이했다. 제법 가을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어느 날, 나는 생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을 맞았다. 나를 소재로 해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과 양인평 전용태 장로님 등이 꾸민 그 날의 일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들은 당시 강원도불교신도회 회장이자 춘천지역 유지인 나를 하나님께 끌어내기 위해 ‘협동작전’을 펼쳤다.

  “이 회장님, 오늘 점심 약속 없죠?”

  평소와 달리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양인평 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그날은 토요일이라, 오후에 결혼식 주례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일로 바쁜 날이었다.

  “법원장님, 오늘은 안되겠는데요. 결혼식 주례도 있고 가봐야 할 곳도 있는데요.”

  나는 솔직히 내 사정을 밝혔다. 그리고 다음날 내가 근사하게 한 끼 사겠다는 말까지 보태며 죄송함을 표했다.

  “아,그래요. 그런데 이 회장님, 오늘 약속 모두 취소해주세요. 너무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오늘 한번만 제 말을 들어주세요. 그러면 앞으로 이 회장님 말은 뭐든지 다 들어드릴 게요.”

  평소 같았으면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을 양 장로님이었지만, 이 날은 달랐다. 통화를 하면서 한참 머뭇거리던 분이 내 일정을 모두 취소하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럴 수 없다며 몇 차례 정중히 양해를 구했고, 양 장로님도 알았다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오전 11시쯤 양 장로님이 불쑥 집으로 찾아왔다. 마음속으로 ‘참 지독한 양반이네. 그런다고 달라지지도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용태 장로님까지 나타난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다짜고짜였다. 내 차를 두 장로님 차가 앞뒤로 에워싸고 나를 강제적으로 끌고 갔다. 도착한 곳은 나도 잘아는 춘천시내의 한식당이었다. 두 장로님에게 양팔을 잡혀 식당으로 들어선 나는 깜짝 놀랐다. 

 

 

 

      [역경의열매] 이평해 (3) 뜻밖 만남 조용기 목사 “안수 받으세요”


  양인평 장로님과의 약속 시간을 조금 지나 들어선 식당의 대형 홀에는 100여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지역의 기관장들도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홀 안을 살피니, 메인 테이블인 듯한 곳에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분이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상당히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맞다! 조용기 목사다.' TV 화면에서 여러 차례 뵌 적이 있는 그분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랍게도, 조 목사님의 맞은편 자리에 나를 앉으라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무엇에 홀린 듯했다.

  "잘 오셨습니다. 조용기 목사입니다." "반갑습니다. 이평해라고 합니다."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머릿속에는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다는 생각과, 빨리 자리를 떠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조 목사님은 사전에 내 이력을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 양반, 신수가 훤하구먼. TV에서 볼 때보다 실물이 훨씬 낫네.' 등 엉뚱한 생각을 하다, 언뜻 내 차 트렁크에 실려 있는 장뇌삼이 떠올랐다. 곧장 나가서 장뇌삼 세 뿌리를 꺼내왔다.

  "목사님, 스님들이 키운 건데 드실 수 있겠습니까?" 장뇌삼을 내보이며 조 목사님께 물었다. 내 딴에는 일종의 도발이었다.

  "저는 스님들이 키우거나 만든 걸 잘 먹고 좋아합니다." 조 목사는 아무 거리낌없이 즉답을 했다.

  속으로 '나보다 몇 수는 위구나'하고 있는데, 조 목사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자신도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한 때 불교에 심취한 적도 있었으며, 폐병을 앓다가 한 소녀에 의해 하나님을 알게 돼 병을 고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됐다"는 '미니 간증'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회장님도 하나님을 알게 되면 훨씬 편하고 보람되며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다.

  갑자기 창 밖에서 들어오는 반짝이는 빛으로 눈이 부셨다. 그리고는 홀 안이 더욱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조 목사님과 나, 두 사람의 민머리에서 반사되는 빛인지, 앞으로 내 인생을 새롭게 밝힐 빛인지 몰랐다.

  식사는 2시간여 동안 이어졌다. 이날 오후 춘천 공지천 야외음악당에서 조용기 목사 초청 춘천지역 성회가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조 목사님이 2시간이나 할애한 것은 그분의 큰 배려였다.

  그런데 진짜 사고는 그 다음에 터졌다. 식사가 끝날 무렵 양 장로님이 여기까지 온 김에 목사님 안수나 한번 받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농담으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농담조로 답했다. "저는 목사님 안수를 하도 많이 받아 이렇게 대머리가 됐습니다. 이제 그만할랍니다. 산삼을 세 뿌리나 드렸으니 밥값도 치른 셈이고 이쯤에서 그만합시다."

  그러나 양 장로님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조 목사님과 다른 사람들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용태 장로님까지 합세해 "그러지 말고 한번 받자"며 또 두 장로님이 내 양팔을 붙잡고 무릎을 꿇도록 종용했다. 나는 도저히 무릎까지는 못 꿇겠다고 버텼다. 결국 주저앉은 상태로 안수를 받게 됐다.

  "사랑의 하나님, 저에게 능력을 베풀어 여기 있는 이 사람을 구해 하나님의 큰 일을 담당할 수 있는 일꾼으로 만들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 성령의 능력을 내리시어, 여기 있는 이 사람이 구원의 은총을 받아, 새롭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소서. 그리고 하나님…."

조 목사님의 절절한 기도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역경의열매] 이평해 (4) 안수기도중 온몸이 요동치는 체험


  나는 일찍부터 강단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쉽게 현혹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내 심지는 웬만한 충격에도 요지부동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처음 받는 안수기도지만, 뭣이 달라지랴 싶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님의 안수기도 중,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먼저 내 몸이 위로 붕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적어도 30㎝는 떠오른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내 몸이 구석으로 힘차게 쳐박혔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달려들어 내 몸을 요동치지 못하게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내 몸은 발광을 해댔다.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러나왔고, 신체의 모든 구멍에서 물기가 새어나왔다. 혼자 수십명의 장골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상태가 얼마 동안이나 지속됐는지 모른다. 진정된 뒤, 내 얼굴과 머리, 옷은 만신창이가 됐다. 주위 사람들에겐 아무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오직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크게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하는 종이 될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나를 위로하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자리에 누웠다. 신기하게도 머릿속이 맑았다. 아니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가운데 불현듯 바로 그 날 오후 6시에 공지천에서 열린다는 성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애써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새록새록 궁금증이 생기는 걸 어쩌지 못했다. ‘성회는 어떻게 열릴까?’ ‘성회에는 몇 명 정도가 참석할까?’ ‘조용기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정장이 아닌 점퍼 차림이었다. 혹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걱정에, 챙이 넓은 모자까지 눌러 썼다.

  공지천 야외음악당에 간 나는 깜짝 놀랐다. ‘워낙 유명한 목사이니까 500명 정도는 모였겠지’라고 생각한 내 예측이 완전히 빗나갔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적어도 3,000명은 넘는 것 같았다. 나는 슬금슬금 “주여!” “아멘!”을 외쳐대는 군중에게 다가갔다.

  “아니,이 회장님 아닙니까?” 등뒤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나는 그를 몰랐지만, 그는 나를 알아봤다. 낮에 식당에서 한바탕 ‘난리’를 친 터라, 그때 그 식당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나를 알아볼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남진 장로였다.

  “회장님, 앞으로 가십시다. 안 그래도 회장님이 오실 것 같아 자리를 만들어 놨습니다. 조 목사님께서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그는 내 팔을 잡고 끌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기분도, 그럴 계제도 아니었다. 완력으로 그를 뿌리쳤다.

  “지금은 갈 수 없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가기로 하고, 오늘은 잠깐 구경만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양해하십시오.”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후회스럽기도 하면서, 뭔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날 밤은 참으로 길었다. 밤새 깊이 잠들지 못하고 온갖 상념들이 떠올라 뒤척거렸다. 부처님이 떠오르는가 하면 예수님이 떠오르고, 평소 꿈도 꾸지 않았던 갖가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렇게 날이 새자, 더 큰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평해 (5) 순복음교회 기도 열기에 깜짝 놀라


  날이 밝자마자 양인평 장로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잘 잤느냐”며 대뜸 “급한 일 때문에 찾아오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사실 나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전날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수많은 불교 신도를 이끌고 있는 내가, 조 목사의 안수기도에 구석으로 처박혀 눈물 콧물을 쏟아낸 일이 무슨 불륜이라도 저지른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내 마음 한 구석에선 이상한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뭔가가 있다. 그렇지 않고는 천하의 이평해가 안수기도 한번에 나자빠질 수는 없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양 장로님이 왔다. 나는 딱 부러지게 동행을 거절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그게 아니었다. 못 이기는 체 옷을 갈아 입고 양 장로님을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느 새 내 차는 양 장로님의 뒤를 따라 경춘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도착한 나는 또 다시 놀랐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본 건 난생 처음이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꼬부랑 노인네까지, 건장한 청년에서부터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환자까지, 잘 차려입은 신사 숙녀에서부터 남루한 행색의 노숙인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뒤섞여 교회 문을 들어서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뭣이 있긴 있구나’하는 생각이 또 다시 들었다.

  나는 군중에 떠밀려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산 넘어 산이었다. 밖에서보다 더욱 놀라웠다. 아직 예배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저마다 기도를 하고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하는 사람, 소리 치며 기도하는 사람, 끼리끼리 손을 잡고 기도하는 사람,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사람들…. 당시의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 장로님이 일러준 대로 6층으로 올라갔다. 선교연합회 사무실에 들어서자, 연합회장인 김용운 장로님을 비롯해 많은 목사님과 장로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이산가족과 상봉하는 것처럼 반가워했다.

  “자,이제 기도합시다.” 김 장로님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모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목사님의 기도가 시작됐다. “하나님, 오랫동안 길 잃고 헤매던 한 마리의 어린 양이 이제 하나님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희는 이 양을 하나님의 품안에 영원히 거하도록 하고자 합니다….” 보통 때보다 오래 기도가 계속됐다. 나도 기도하는 시늉을 했지만 마음은 다른 데에 있었다. ‘참 희한한 사람들이야. 틈만 나면 기도를 해대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모두 “아멘!”을 외쳤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관세음보살’이라고 했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우르르 몰려나갔다. 나도 그들을 따랐다. 조용기 목사님의 대기실이었다. 목사님도 반갑게 맞아주셨다. 목사님도 나를 만나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객기가 발동해 “목사님, 조금 전에 기도하고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또 한번 나를 위로했다. “아,예. 기도는 여러 번 하면 더 좋습니다. 회장님은 앞으로 하나님 나라를 넓히는 데 큰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날 나는 그야말로 얼이 빠진 상태로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고 나자 또 하나의 이벤트가 준비돼 있었다.

 
 
       [역경의열매] 이평해 (6) 기도원 찬양소리에 저절로 마음 변화


  예배를 마치자마자 김용운 장로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솔직히 따라 갈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영 가기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였다. ‘에라, 여기까지 온 김에 어디든 못 가겠어? 가는 데까지 한번 가보자’하고 따라나섰다.

  김용운 장로님을 비롯한 많은 장로님들의 차가 내 차의 앞뒤로 섰다. 정신없이 그들을 따라간 곳은 오산리기도원이었다. 이미 연락이 돼 있었던 듯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환영을 해줬다. 성전에 들어가니 1,500여명의 성도들이 모여 찬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의 힘차고 격정적인 찬양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듯했다. 가슴속이 뜨거워지면서 무리에 섞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차분한 염불에 익숙해 있던 내가 이처럼 크게 소리 질러 노래하는, 생소한 분위기에 마음이 움직인다는 게 신기했다.

  “오늘 귀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한때는 승려였고 현재도 불교계의 지도자급 위치에 있는 분입니다. 이분이 오늘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게 됐습니다. 우리 모두 박수로 환영합시다.”

  김용운 장로님이 강단으로 나가 나를 소개했다. 교회에 나오게 됐다는 말은 사실과 달랐지만 크게 싫지는 않았다.

  “할렐루야!” 나는 할렐루야를 외치며 강단으로 올라갔다. “저기 저분, 할렐루야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 성도에게 물었다.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영광 돌리라는 뜻입니다.” 할머니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러면 정식으로 다시 한번 외치겠습니다. 할렐루야!”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내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언뜻 내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내 입에서는 내 의도와는 상관없는 말들이 계속 쏟아졌다.

  “안녕하십니까. 이평해 법사입니다. 일찍부터 조용기 목사님이 뛰어난 분인 줄 알았는데,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기도원을 와보니 역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조 목사님을 기관차로 삼고 김용운 장로님을 객차로 삼아 천국행 열차에 올라탑시다. 우리에게는 티켓도 필요 없습니다. 레일 없는 이 열차는 전 세계를 돌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성전을 진동시키는 듯한 큰 박수갈채가 한참 계속됐다. 내가 바뀌었다. 내가 바뀌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는 혼란스럽고 몸은 피곤했다. 저녁에는 박해숙 장로님이 운영하는 전원 식당에서 융숭한 식사까지 대접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당신 오늘 어디 갔다 왔어요?”

  아침에 결혼 축의금 봉투 5개를 떠맡기고 부랴부랴 나갔다가, 피곤한 기색으로 밤늦게 돌아오자 아내가 대뜸 물었다.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가서 조용기 목사님을 만나고 왔소.”

  “아니, 당신 미쳤어요? 불교신도회 회장이 교회에 가면 어떡해요!”

  “그래 내가 미쳤소. 아름다울 미(美)에 친할 친(親)자로 미친 사람이 됐소!”

  그날부터 아내는 나를 ‘천하의 못된 배신자’로 취급했다. 옆에 다가가는 것조차 싫어했다. 나는 아내의 그런 태도가 충분히 이해됐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