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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3)-4. 마카비 혁명 5. 하스몬 시대 6. 로마시대<남병식 목사

영국신사77 2007. 5. 24. 22:56
                                       4. 마카비 혁명시대

 

 

 

 안티오커스 4세는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 제우스 신을 위한 제단을 세우고 제물을 바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모디인(Modiin)의 제사장이었던 마타티아스(Mattathias)는 이 명령을 거절하고 그의 다섯 아들들과 함께 무력투쟁을 시작했다.  이 혁명에는 당시 하시딤(유대경건주의자들)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티티아스는 혁명을 일으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고, 그의 다섯 아들 중에 유다 마카비(Judah Machabee)가 그 뒤를 이어서 놀라운 게릴라 전술을 통해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의 이러한 게릴라 전술에서 따온 별명이 있는데, 바로 '마카비'(Machabee, 망치)라는 말이다.

 

  유다 마카비는 BC 164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여 회복시켰다. 그래서 생긴 절기가 바로 수전절(하누카)이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요 10:22)

 

  유다 마카비가 BC 160년 엘리아사 전투에서 사망하자, 그의 형제인 요나단(Jonathan)이 뒤를 이어서 혁명을 이끌었다. 그는 계속해서 승리했으며 많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BC 153년에 그는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새로운 왕조(하스몬 왕조) 를 세울 기초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도 체포되어 죽고 만다. 그의 형제 시몬(Simon)이 뒤를 이어 오랜 전쟁 끝에, BC 141년 셀루커스 왕조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5. 하스몬(Hashmon) 시대[BC 164~63]

 

   셀루커스 왕조는 결국 유다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BC 63년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할 때까지 마카비의 후손들이 독립적으로 나라를 다스려왔다. 이 왕조를 하스몬[(히l)Hashmon, (영)하스모니안] 왕조라고 부르는데, 이는 마카비 왕조의 시조인 '아스모네우스'(Asmoaeus)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하스몬 왕조의 전성기는 시몬의 아들인 요한 히루카누스 1세(John Hylucanus1: BC 135~104, 31년간) 때였다. 그는 남쪽 에돔과 네게브 북부, 욥바와 아스돗 사이의 평야, 사마리아 인근지역, 벧산 계곡 및 남부 샤를 지역 등까지 국경을 넓혔다. 이 지역 안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하게 했다.

 

  그런데 이때 신약 4복음서에도 나오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대표되는 종판간의 갈등이 심각했다. 서로가 주도권을 잡으려고 끝없는 투쟁을 했던 것이다. 특히 이들은 율법관에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바리새파는 후대에 탈무드로 대변되는 구전 율법(Oral Torah)과 글로된 모세 오경, 즉 성문 율법(Written Torah)을 모두 성경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예언자의 가르침도 성경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오직 모세오경 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다.

 

  알렉산더 아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27년간)는 영토를 더 확장시켰으며, 특히 예수님이 탄생할 때 있었던 헤롯대왕의 아버지인 안티파터(Antipator)를 유다 남쪽 이두메 지방의 지방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BC 63년에 폼페이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로마의 통치시대가 시작됐다.

 

 

 

 

 

                                             6. 로마시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64년전 BC 64년, 로마의 폼페이가 수리아의 셀루커스 왕조를 정복하고, BC 63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복잡한 왕위 다툼에 개입하여 그 왕가를 약화시킨 후 식민지로 삼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예수님이 탄생했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12제자를 길렀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다.

 

  그렇다면 동방 박사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지를 물어보고, 베들레헴 근처에 살던 두 살 이하의 모든 남자 아이들을 죽인 헤롯 대왕은 누구일까?

 

  당시 히루카누스 2세는 대제사장인 동시에 유다의 분봉왕이었으나, 이두메를 통치하던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가 실권을 잡고 있던 실세였다. 

 

  로마가 폼페이와 시저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소란한 틈을 타서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는 시저 편에 섰다가, 로마 시민권을 상으로 받게 되고 유대의 행정장관으로 임명받았다. 그뒤 안티파터는 자기의 권력을 이용하여, 장자 파시엘을 예루살렘 통치자로, 작은 아들인 헤롯을 갈릴리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BC 43년 안티파터가 암살되자, 로마는 파사엘과 헤롯을 유대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게 된다.

 

  결국 헤롯 대왕은 유다 왕이 갖추어야 할 정통성 즉 유다 지파와 유다 지방 출신이 아니라, 이방에 가까운 이두메 출신이기에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초라한 제2성전(스룹바벨 성전)을 대대적으로리모델링을 하고, 전국 곳곳에 대규모의 건축을 하게 된다. 그가 죽자, 여러 아들들이 나라를 분할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출처: 남병식 목사의 '바이블 문화코드'

 

 

 

* 남병식 목사는 부산대, 장로회신학대학원,연대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1994~1998까지 4년간 히브리대학 대학원에서 성서학과 박사과정을 수학하고, 공군군목과 명성교회 교육목사를 거쳐, 현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조교수로 재직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