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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두개파

영국신사77 2007. 5. 24. 23:55


                                사두개파


사두개인들은 일반적으로 다윗의 시대에 제사장으로 충성했던 사독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사독은 이론의 아들엘르아살의 후손이며 아히둡의 아들이요 아히마아스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사독”은“의”(義 - Σαδωκ)라는 말에서 유래된 이름이었고 실제로 아히둡의 아들 사독은 의로운 일에만 헌신하였던 사람이다. 


“아므람의 자녀는 아롬과 모세와 미리암이요 아론의 아들들은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며 엘르아살은 비느하스를 낳았고 비느하스는 아비수아를 낳았고 아비수아는 북기를 낳았고 북기는 웃시를 낳았고 웃시는 스라히야를 낳았고 스라히야는 므라욧을 낳았고 므라욧은 아마랴를 낳았고 아마랴는 아히둡을 낳았고 아히둡은 사독을 낳았고 사독은 아히마아스를 낳았고 아히마아스는 아사랴를 낳았고 아사랴는 요하난을 낳았고 요하난은 아사랴를 낳았으니 이 아사랴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한 자며 아사랴는 아마랴를 낳았고 아마랴는 아히둡을 낳았고 아히둡은 사독을 낳았고 사독은 살룸을 낳았고 살룸은 힐기야를 낳았고 힐기야는 아사랴를 낳았고 아시랴는 스라야를 낳았고 스라야는 여호사닥을 낳았으며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옮기실 때에 여호사닥도 갔었더라”(대상63-15)

 

아론 자손의 반차가 이러하니라 아론의 아들들은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라 나답과 아비후가 그 아비보다 먼저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다윗이 엘르아살의 자손 사독과 이다말의 자손 아히맬렉으로 더불어 저희를 나누어 각각 그 섬기는 직무를 맡겼는데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 족장이 이다말의 자손보다 많으므로 나눈 것이 어러하니 엘르아살 자손의 족장이 십륙이요 이다말 자손은 그 열조의 집을 따라 여덟이라“(대상24:1-4) 

 

사독은 다윗의 통치기간 중에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과 사독을 세워 제사장의 의무를 행하게 하였다.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장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이 되고 아도니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롯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되고 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 야일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니라”(삼하 20:23-26) 사독과 아비아달이 다윗의 시대에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압살롬의 반역에는 둘다 가담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아도니아의 반역에 아비아달이 가담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솔로몬의 시대에는 아비아달의 가문이 제사장의 반열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왕하1:7).아비아달은 거슬러 올라가면 제사장 엘리의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솔로몬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한 제사장은 결국 선지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이 수행하게 되었다.그러한 일이 있은 후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계속하여 사독의 계열로서 자기가 굳혀지고 있다 . 히스기야 시대에도 제사장은 사독의 계열로 이어지고 있고 (대하31:10)

 

바벨론 포로 시기에도 제사장의 직분은 사독의 계열로 이어지고 있다 (겔40:46  43:19  44:15  48:11)

 

일반적으로 이들의 유래를 논하는 학자들은 B.C.2세기경에서 비롯되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확실한 기원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팔레스틴에서 없어진 것은 A.D.70년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됨과 동시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들은 제사장의 권위를 중시하였고 율법도 그런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성전봉사와 종교적이고 의식적인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대개 예루살렘의 부유층을 이루고 있었으며 종교와 정치가 일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항상 실권자들이었으며 산헤드린의 의원들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대개 헤롯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로마의 집정관들과도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백성들은 오히려 회당에서 백성들을 지도하는 바리새인 학자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중에는 귀족은 거의 없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오직 기록으로 보존죈 토라만을 인정하였고 

 

예언서나 기타 성문서 같은 경우는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예언서에는 언제나 왕이나 제사장들이 잘못하는 일들을 지적하는 지사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제사장들이 이를 거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나,천사, 예정론(       )등은 일절 믿지 않으려 했고, 

 

그들에게 있어서 복이란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며 가시적인 것들이었다. 

 

일견 보기에는 이러한 사두개인들은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보였다. 

 

보수주의적이면서 현실주의적인 입장이 바로 사두개인들의 입장이었다. 

 

신약 성경에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함께 나란히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마3;7 16;1-12)

 

이글은 서로 팽팽하게 대립 관계에 있었지만 

예수님과 초대교회를 대항하는 데는 합세하였다(마22:14-46)

 

그러나 이들이 가진 교리적인 문제를 들고 나오면 

그들은 금방 또갈라서는 모습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행23:6-9)

성경에서 바리새인 가운데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있지만 (행15:5,빌3:5),

사두개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찾아 볼 수 없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의식에 치중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은 성경과 교리에 치중하였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나,

부활의 소망이 없고 종교 의식과 제물에만 관심을 가졌던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나자 영원히 지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1. 사두개파(참고)

 

Sadducees유대의 종교 및 정치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을 지지한 당파. 전 2세기에서예루살렘멸망(후70)에 이르는 기간에 세력을 가졌던 당파로, 귀족계급에 속하고, 대제사장 및 예루살렘의 유력자들로 이룩되어 있었다. 바리새인과 대립했는데, 바리새인이 종교적인데 반하여, 그들은 아주 정치적 색채가 강했다.

 

수는 비교적 소수였으나, 교양도 있었고, 특히 제사장 계급을 독점하여 세력을 폈다. [사두개인]은 다윗,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적 제사장 [사독](→)의 이름에 유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의로운] [形] qyDix'(tsaddiq)이라는 형용사에서 유래한다는 종래의 설은, 이 [차디크](tsaddiq)의 [아이](i)가 [차두크](tsadduq)의[유](u)로 왜 변했는가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 다윗, 솔로몬에 쓰인 사독이 사두개인의선조라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보수적, 현세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에 대하여 해방적이고 세속적이었다. 그 때문에 마카비 전쟁시대의 종교적, 민족적 혁신의시기에는 냉대되었는데, 하스몬왕조 (그 초기의 지도자들은 마카비로서 알려진다)가 세속화됨에 따라 세력을 펴고, 이에 비판적이었던 바리새인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 경향은 뒤의 헤롯왕조의 친로마정책과도 영합(迎合)하여,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적으로는 제사장 계급으로서강화되었다. 공회의 의원도 많았다. 따라서 민중으로부터는 떠나, 인기가 없었다. 그 신앙,사상은 일면 보수적임과 함께 한편 극히 합리적, 현세적이었다. 그들은 바리새인이 부가하고 존중한 유전(遺傳-)을 인정치 않고, 성문화된 모세의 율법만을 인정했다. 그 결과로, 부활도, 천사도, 영도, 일체의 존재를 인정치 않았다(막 12:18,눅 20:27,행 23:8). 또한 미래에있어서의 보응도 부정하고,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음을 말하고, 의지의 자유를 주장하여, 하나님의섭리를 믿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말해진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예수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이러한 그들을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다(마 3:7). 그들은예수에게 와서, 때로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기를 청하고(마 16:1-4), 부활에 대해 난문(難問)을 제출하여 시험하려고도 했다(마 22:23-33). 이들을 예수는 바리새인과 나란히 하여 비난했다(마 16:6,11). 그러나 복음서를 통하여 바리새인 만큼 비난의 대상으로 되어 있지는 않는데, 그것은 그들이 바리새인 보다 옳은데가 있어서가 아니라, 민중을 떠난 사두개인의 신앙은 예수의 시야에 들어오는 일이 적었던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및 바울도 박해했다(행 4:1-22,23:1-10). 후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그들의 세력을 뿌리채로 뒤엎어, 그후, 그들에 대해서 언급된데는 별로 없다. 다만 바리새인의 가르침과 계속 대립되고 있었던 것이, 탈무드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쳐 있다.


 

출처 블로그 > oxhill4952님의 블로그
원본 http://blog.naver.com/oxhill4952/110004943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