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파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신약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두개인들과는 상당한 견해차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경 연구에도 열심이 있었고 율법 학자들도 있었다. 성경에는 바리새인들의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하고 있다 (마23:1-39). 우리가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알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몇 군데 있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성경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요세프스의 글에서도 바리새인들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상세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세프스 자신이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증언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선과 악을 심판하실 분은 어디까지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가 부분적으로 옳은 것도 많고 행위에 있어서 매우 정결한 것은 사실이나, 문제는 그것이 다 외식이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부활을 믿고 있었으며 또 예언서와 역사서, 지헤문서를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을 믿고 있었고, 영적인 세계를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의 기원은 바벨론 포로 시대로 볼 수 있다. 성전이 파괴되고 고향을 떠나 바벨론 땅에서 그들이 신앙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결국 모여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에 의하여 전해지는 탈무드 중에 바벨론 탈무드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성경을 읽고 깨달은 사실은, 다른 것보다 특별히 자기들의 나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가, 바로 율법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데 있다는 것이었다. 다니엘서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포로로 끌려가서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징계와 교육을 받았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바벨론에 보내신 것은, 저주가 아니라 징계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징계는 목적이 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가서 배운 것을 다 열거할 수 없지만, 확실히 배운 것이 있다.
1.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2. 자기들의 하나님이 바벨론 왕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3. 바벨론의 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4.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인간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5.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신다는 것을 배웠다.
6.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배웠다.
7. 상당한 기간 동안 열강들의 틈에서 유대인들이 환난을 겪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8. 모든 역사는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9. 조상들의 죄와 자신들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뼈에 사무치게 깨닫게
되었다.
바벨론에서의 70년 동안은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유대교의 신학은 대개 이 시대에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성경이 이 시기에 기록된 것이다. 다니엘, 에스겔, 에스라등의 선지자 들이 함께 활약하였고, 느헤미야 같은 인물이 있어서 유대교는 일대 개혁의 시기가 된 것이다.
고레스 칙령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성전을 건축하는 일과 율법을 다시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면서 얼마 동안은 개혁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포로에서 돌아온 세대가 세상을 떠나자, 그들은 다시 헤이해졌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말라기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처음에 이 율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사람이 바로 에스라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처음에는 귀환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분열되지 않고 함께 협력하여 개혁을 주도해 나가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 자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이라고 하는 말을 읽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서기관들은 제사장 계열 혹은 레위인들이 주로 하는 일이었다 (대상2-55) 이들 서기관 (쇼폐림)들은 율법을 해석하는 것도 하지만, 대개 기록하여 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고 성전 봉사자들의 조직, 제사 의식의 적용 등은 이들이 맡아서 지도하는 일들이었다 (대하34-13;느8;7-13)
귀한 공동체 내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에스라가 시작했으나, 후에는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닌 사람들이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게 된 것이 분명하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이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제사장 중에서 율법학자를 서기관이라 하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제사장이 아니고 레위인도 아닌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게된 사람을 ‘현자’(賢者=智慧者:하카밈)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생겨나게 된 것은, 아마도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팔레스틴 지방이 급속하게 헬라화 되는 것을 보면서, 경건한 율법주의자들이 궐기하고 일어서게 되는 시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헬레니즘적인 생활양식이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에게 급속히 유행되는 것을 지켜보는 경건한 사람들은, 이를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이러한 운동은 일반 백성들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한편은 제사장 맛다디아스와 그의 후손 하스모니아 왕가에서도 헬라화에 대하여 반대하고 투쟁하였다. 그러나 하스모니아 왕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헬라화 되어가는 것을 볼수있다.
역사가 이렇게 진행될 때도,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헬라 문화를 거절하면서 경건성을 지키려고 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결속되었고, 마침내 한 종파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정치적인 영향력은 언제나 사두개인들이 행사하고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민중들에게 종교적인 영향력을 크게 미치고 있었다. 바리새인들 가운데는 가말리엘과 같은 학자들이 있었고, 요세프스와 같은 장군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스데반 등 상당히 많은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믿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 가운데서는 주를 믿은 사람들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신약 성경에서 할례당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은, 거의 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신자가 된 사람들인데, 그 수가 수 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 가운데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던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를 인하여 기록된 서신이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서이다.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후에도 존속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후에는 다시 회당을 중심으로 더욱 결속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열심당원들도 다 죽고 체포되어, 결국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후에도 남아서 얌니아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며 보존하여 온 것이다. 오늘날도 예루살렘에 가면 하시딤이라는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그 사상적인 뿌리로 보면 확실히 바리새인들의 정신적인 후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으며, 그 중에는 지금도 복음을 거역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이 언제까지나 성경을 연구하면서 메시야를 대망하고 믿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온 것이, 그들로 하여금 거의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루살렘이 멸망된 후 바리새인들의 행방에 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23:1-7). 성전이 파괴 된후 남은 자들에게 삶의 의미와 희망을 심어 주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대표격이었던 사람이 자카리의 아들 요하난이었다.
우리가 바리새인들에 관하여 알려고 하면 대체로 세 가지의 기록들을 이용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고,
둘째, 외경들이며,
셋째, 요세프스의 「유대고대사」 「 유대전쟁사」 「자서전」 「아피온 반박문」 등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성경이 제 일차적인 자료가 되는 것이요, 언제나 궁극적인 자료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최종적인 권위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율법의 전통을 따라서는 제사장이 될 수 없었지만, 그들이 새롭게 깨달은 제사 인애( 仁愛 - lovirng kindness)가 변제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만인 제사장설을 신봉하게 되었다.
사실 바리새인들이 비록 늦게라고는 해도, 인애가 제사보다 낫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굉장한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 오시기 전에 깨달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까지 대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지지도가 자기들의 종파의 존립에 문제가 되는 듯할 때는, 독한 시기심 때문에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평소에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두 종파가 적대하고 있는 동안에 민심이 전부 예수님께로 쏠리게 되자, 이 두 종파가 함께 연합하여 우선 “예수임부터 제거해 놓고 보자”하는 쪽으로 급선화하고 있는 것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한 관계는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역시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제일 먼저 존재의 근거를 잃은 사람들이 사두개인들이었다. 결국은 엣세네파도 없어졌고, 열심당원도 없어졌고, 헤롯당워도 없어졌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 남았는데, 그들이 바로 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2-1 바리새파의 기원(起源)과 시대적 배경
B. C 330년경 알렉산더 대왕(The Great Alexander)은 온 세계를 제패할 야심을 가졌다. 그는 단지 온 세계를 지배할 권력만을 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까지 정복하려고 하였다. 그리이스 문화를 사랑했던 그는, 그 문화적 혜택을 속국이 된 모든 지방에 전파하기를 바랐다. 이스라엘도 이런 그리이스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리이스의 완숙한 문화와 종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매우 매력적이었으며, 그리이스어를 모르면 야만인으로 생각될 정도로 그리이스 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되었다.
알렉산더 사후(死後)에는 그의 장군들이 오랫동안 그의 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서로 투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B. C 198년경에 셀류쿠스(Seleucus)가의 안티오쿠스 3세가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안티오쿠스 3세는 처음에 유대인들을 관대하게 대했으나, 점차 유대인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겪은 최악의 시련기는 아티오쿠스 4세의 통치기였다. 그는 스스로에게 에피파네스(Epiphanes)라는 칭호를 부여했는데, 이는 '신의 체현(體現)'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신의 위치에 놓은 것이었다. 외경 마카비서의 기록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형제 야손(Jason)은 그 형 대신에 자기가 대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안티오쿠스 4세에게 뇌물을 바쳤다. 그리고 자기가 대제사장이 되는 조건으로, 야손은 '성전'에서 돈을 갹출(醵出)할 것을 약속했으며, 유다에서 그리이스 문화를 지지할 것도 약속했다. 운동 경기장이 예루살렘에 세워졌으며, 많은 제사장들이 성전의 의무를 뒤에 버려두고 그리이스의 운동경기들에 참여했는데, 이 운동들은 그리이스의 헤리쿨레스 신에게 드리는 예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안티오쿠스 4세는 이집트를 정복하려는 시도를 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로마인들로부터 이집트에서 떠나라고 종용받았다.
이 일로 굴욕을 느낀 안티오쿠스는 그의 분노를 예루살렘 공격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 관습을 행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반포했으며, 유대교 절기들과 희생제사들을 금지하였다. 그는 유대땅 전역에 이교 제단들을 세웠으며, 유대인들은 강제로 돼지고기를 먹어야 했다. 최악의 사태는 그리이스 신 제우스에 대한 제단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워진 것이었다.
이처럼 안티오쿠스는 고유한 유대적인 것을 모두 파괴하려 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그리이스문화를 받아 들이게 하면, 그들이 그리이스 통치를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떤 유대인들은 이 박해에 직면하여 굴복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다고 믿는 생활 방식들의 포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항의 중심은 하시딤(Hasidim) 즉 '경건한 자들' 혹은 '충성스러운 자들'이라고 불린 단체였다. 이들은 B. C. 2세기경 에스라로부터 시작된 경건 집단이었다.
이들 경건주의자들은 시리아에 대항한 마카비 독립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순수한 동기로서 유대인의 종교가 외부 세력의 침해를 받지 않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의식을 지킬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마카비 독립전쟁에 함께한 또 다른 부류는, 정치 독립을 통해서만 그리이스주의적 영향에 대해 효과적 방어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이 시리아를 상대로 전투를 계속해 결국은 하스모니안(Hasmonaer)왕국을 세웠다. 그런데 이 하스모니안 왕가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확대해 가는 데만 주력하였다. 마카비 전쟁에 함께 가담했던 경건한 사람들은, 군인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의 지위를 수행하려는 지배자의 정책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결국 경건한 사람들은 하스모니안 왕가와는 결별하게 되었다.
'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은 이 경건한 사람들이 하스모니안 왕가의 정치적 야욕에 반대하여 분리해 나왔다는 의미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경건한 사람들, 곧 바리새인들은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정치적 야욕보다는 전통을 고수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모든 불결을 제거하려는 성격에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폭력을 사용하여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켜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경건한 생활, 기도, 금식을 통해 하나님이 인도하실 미래의 상황을 준비하려고 노력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나중 혁명당원들이 이방인과의 전쟁을 통해 메시야의 시대를 강제로 이루려고 로마 점령군에 대한 공격을 준비할 때도, 그들과 일을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2-2바리새파의 구성과 조직
사두개파가 귀족들이나 제사장 가문등 사회 상류층으로 한정된 반면, 바리새파는 보통 중산층으로 구성되었다. 바리새파에는 개개의 사제들, 특히 평신도들, 수공업자들, 농부들, 상인들이 속해 있었고, 그들은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살았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공동체는 요세푸스의 사료에 의하면, 6,000명 이상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
바리새파 공동사회에 가입하려 할 때는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다. 가입 신청자는 우선 바리새파 전통의 모든 부분에서와 십일조, 그리고 정결의식 및 음식에 관한 모든 규례들을 그대로 지킬 것을 서약하였다. 그런 후에는 수습기간에 들어가는데, 이 기간동안 바리새파 존속여부에 대한 면밀한 심사를 받았다. 이 과정을 거치면 정식으로 바리새파의 일원으로 인정되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보통 안식일 전날 밤에 모여 예배와 집회를 가졌다. 그들은 자주 공동식사로 함께 모였는데, 그것은 그렇게 하면 정결에 대한 계명을 더 잘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2-3.바리새인들에 대한 성경의 언급
ⓐ 유대인들 중의 한 계파(행 15:5)
ⓑ 모세의 예배의식을 엄격하게 지켰던 자들(행 26:5)
ⓒ 율법에 대해 열성을 지님(빌 3:5)
ⓓ 유대인들의 유전을 지킴(막 7:3, 5-8, 갈 1:14)
ⓔ 외식하는 자들(눅 18:11, 빌 3:5,6)
ⓕ 열심으로 전도함(마 23:15)
ⓖ 스스로 의롭다함(눅 16:15, 18:9)
ⓗ 사람들에게 높임 받기를 좋아함(마 23:7)
ⓘ 시장에서 문안 받고, 랍비라 칭함 받음을 좋아함(마 23:7)
ⓙ 경문(經文)을 넓게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임(마 23:5)
ⓚ 요한의 세례를 거절함(눅 7:30)
ⓛ 부활을 믿음(행 23:8)
ⓜ 그리스도를 비난함(마 9:11, 눅 7:39, 15:1, 2)
ⓝ 그리스도의 이적을 사탄의 능력이라고 깎아 내림(마 9:34)
ⓞ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의논함(마 12:14, 요 11:47,53)
ⓟ 그리스도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냄(요 7:32,45)
2-4.바리새파의 기본 사상
(1) 구전 율법(장로들의 遺傳)
구전 율법은 포로기 시대부터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무관심과 불순종이 비참한 포로 생활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생각한 유대 지도자들은, 포로생활 가운데서도 율법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통해, 성문 율법인 토라를 부지중에 혹은 우발적으로라도 범하지 않도록, 고도로 세분화된 잡다한 금지조항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런 금지 조항은 성문 율법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친 것이라고 하여 '울타리 축조'라고 불리었다.
그후 포로시대가 끝나자 새로운 환경에서 또 다른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발생하였는데, 유대지도자들은 이미 있던 율법을 분석하여 더 구체적인 규례들을 제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구전 율법의 내용이 A. D. 200년경 미쉬나(Mishnah)라는 성문문서로 편집되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렇게 율법에 울타리를 친 것은, 우선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이해를 현실의 삶과 조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2) 율법의 해석 방법에 대한 두 대표적 입장
B. C. 1세기경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바리새파간에 두개의 경쟁적인 학파가 생겨나서 율법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보였다. 샤마이(Shammai)가 주도하는 학파는 지극히 전통적이며 타협을 불허하는 보수주의적 학파인데 비해, 힐렐(Hillel)이 주도하는 학파는 율법을 실제 생활과 조화시켜 해석하려 하였다. 성경 복음서 기록에 나타난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자신은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율법사(눅 11:46)들은 샤마이 추종자로 보인다. 극단적인 샤마이파의 입장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모두 성취할 것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A. D. 66-73년의 전쟁을 치른후, 국민 생활의 재건을 위해 요하난 벤 자카이와 그의 동지들의 주도 아래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은 힐렐학파였다.
(3) 영혼 불멸 사상
바리새인들은 영혼에 불멸의 힘이 있어서, 몸이 흙 속에 파묻혀도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상벌을 받게 되는데, 선하게 살았을 경우에는 소생하여 다시 살게 되고, 악하게 살았을 경우는 영원한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믿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부정한 반면,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인정했다.
(4) 역사관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고 인간 활동을 지배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추진해 간다고 하는 성경적 교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하고 그의 뜻에 반항할지 모르지만, 그분의 뜻은 인간들의 순종 여부와 관계없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다. 사도행전 5장 38절에 있는 가말리엘의 충고는, 이런 의미에서 바리새파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2-5.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결의론(legalistic casuistry)
'율법주의적 결의론'은 어떤 도덕적 의무가 종래의 관행이나 성경의 율법 등과 서로 충돌되어 '어떻게 해석하고 결정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났을 때, 그 '의문을 해결하는 일종의 법'을 의미한다. 이것은 앞에서 서술한 구전 율법과 매우 유사하지만, 여기서 말하려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구전 율법을 어떻게 일상생활에서 적용해 갔는가 하는 점과, 그 문제점을 밝히려는 측면에 관심을 둔 것이다.
(1) 율법주의적 결의론(決擬論)이형성된 배경
당시의 서기관들, 특별히 바리새주의적 서기관들은 종교나 도덕적 의무 등 모든 것을 율법의 범주 안에 다 집어넣고 그 법을 지키기만 하면 그것이 곧 의(義)라고 판단했다.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의 사상을 가장 광범위하고도 논리적으로 전개시켜 바리새파 사상의 중심으로 끌어왔다. 바리새주의는 모든 생활 환경과 관련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는지 밝히려고 노력함으로써 생활 전체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율법에 울타리를 친다는 의도로 만들어졌던 규정들은 점차 그것 자체가 하나의 원칙이 되었다. 장로들의 유전은 그 당시 새로운 문제들이 일어날 때마다 비유적 방법과 기발한 사고를 통해 적용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새로운 해석은 전승 조항으로 자리를 잡았고, 후에는 그 해석 자체가 또 하나의 새로운 해석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와 같이 날마다 축적되어간 전승(傳承)은 얼마가지 않아서 그 내용을 한 번에 훑어 볼 수 없는 분량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모든 구체적인 문제의 해답을 성서의 구절에서 일일이 찾으려고 애썼고 그렇게 무엇을 해야 옳은지 찾아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더 자의적인 해석으로 흘러 결국은 자신의 판단이 성서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 있게 되었다.
(2) 율법주의적 결의론과 실현 가능성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또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율법의 성취를 위한 그들의 결의론이 오히려 실천할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렸다는 문제로 고민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해석학적 기교'를 발휘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율법의 실천 가능성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오히려 율법의 껍데기만 잘 포장하여 형식적으로 지켜갈 뿐 실제 하나님의 본 뜻과는 너무나 멀어져 갔다.
(3) 율법주의적 결의론에 담긴 의도
바리새인들의 결의론의 배후에는 인간의 부가적인 경건과 선행이 종말에 하나님의 의로 받아들여져 잘못을 상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실이 있다. 사람들의 종교적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보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4) 율법주의적 결의론의 영향과 예수님의 책망
의식상 정결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율법의 울타리밖에 있었던 이방인들과의 엄격한 분리를 가져왔고,정결법에 대한 해석때문에 사마리아인들과 분리를 초래하였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처럼 정결의 법이나 십일조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하는 동료 유대인들을 멸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의 내용과 행위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서 결정적인 거부의 대상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 자기들의 입장과 근접해 있던 예수가, 어떻게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교제할 수 있었으며 (막2:15, 눅15:1-2), 어떻게 안식일 규정을 초월할 수 있었으며(막2:23-3:6), 정결의 계명에 마음쓰지 않을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율법의 외적인 준수만을 생각하고 마음의 정결을 모르는 위선자라고 그들을 책망하셨다(눅11:39-43). 세심하게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되어 전적인 순종을 드리는 데는 등한히 했다. 예수님의 바리새인의 이러한 외식에 대한 책망과, 또한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공격해서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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