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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경의 숲- 정진국 목사 "인류고대사(3)" 성경의 숲

영국신사77 2007. 4. 26. 20:36
성경의 숲- 정진국 목사 "인류고대사(3)" 성경의 숲

2006/12/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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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고대사(3)

 

정진국 목사

 

당세에 완전한 자 - 노아.

 

셋의 자손들이 세상에 섞이게 되고, 믿음과 세상의 경계가 무너져 모든 사람들이 육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소위 “노아의 대홍수”라 부르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방주를 통해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홍수 심판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한 인류가 완전히 멸망되고, 오직 노아와 그의 식구들 8명만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저 하나의 심판에 대한 사건이라고만 이해하고 넘어가선 안 됩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선택하신 것은 아담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선택하신 사람이 아담이라면, 두 번째 선택한 사람은 노아였습니다. 아담과 노아는 달랐습니다. 아담은 사실 아직 선도 행하지 않았고, 악도 행하지 않은 무죄인이었습니다. 즉, 아담은 순수 그 자체의 자연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인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을 해서 인류는 실패의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실패란 무엇입니까? 바로 창세기 6장 2절~3절의 내용이 인간의 첫 번째 실패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서 아담으로부터 나온 모든 인류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1차 실패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두 번째 사람이 바로 노아입니다. 그런데 자연인이었던 아담과 달리, 노아는 당세의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였습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9)”

 

그래서 노아가 선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다시 말해 노아는 의인이었고, 당세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기 때문에 선택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당시에 사람들은 전부다 타락했고, 노아와 그 식구들이 경건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경건한 노아를 선택해서 그들만 구원하셨다.”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정말로 경건했기 때문에 구원받았을까요?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참 묘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노아가 구원받았다는 이 사실이 “율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은혜”를 드러내기 위한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노아를 선택해서 그들만 구원하셨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서 우리는 흔히 “우리도 경건하게 살자”라는 교훈만을 얻고 끝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의 논리 진행이라면 구원이 “행위구원”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아시겠지만, 성경은 행위구원을 강조하는 책이 아닙니다. 루터를 비롯한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롬 3:28, 5:1)”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구원에 대한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교훈을 얻으면 이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이기 때문에 그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노아를 선택하셨겠습니까? 율법적으로 사는 삶을 부각시키려고 노아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더 드러내기 위해 노아를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가지시고 노아를 선택하신 것일까요?

 

노아는 당세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 시대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탁월한 의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노아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의인인 노아라 할지라도 아담의 후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의인인 노아라 할지라도 원죄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노아 역시 여전히 죄의 영향력 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이 타락을 하고, 그 결과 인간은 첫 번째 실패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를 남겨두심으로 아무리 경건하고 훌륭하다 할지라도, 인간은 실패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선택하시면서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너희가 선악과를 먹고 타락해서, 결국 너희 인류는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의인이며, 당세에 완전한 자인 노아를 한번 보자. 그 노아의 자손들로 신인류가 시작되면, 뭔가 달라질 수 있겠느냐? 이것을 한번 봐라. 너희가 직접 확인해 봐라”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불순종해서 결국 타락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자손들은 결국 홍수의 심판을 받고 실패한 인생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인류가 실패했고, 아담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 사실이 하나님 보시기에서는 창세기 6장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좀 더 의로운 사람들끼리 모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인류는 가인의 계열과 아벨의 계열이 뒤죽박죽이 되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실패자로 끝났지만, 의인의 가족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면 다른 결과가 일어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할 여지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세의 의인이었던 노아를 선택하셔서, “아무리 개인적인 경건을 유지한다 할지라도,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에게는 여전히 죄가 영향을 준다”라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라는 두 가지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노아는 신인류의 대표입니다. 아담은 불순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실패했다면, 노아는 순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순종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러한 반문은 충분히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며, 당세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 그 노아로부터 시작된 신인류도 결국 무엇을 합니까? 그들은 결국 바벨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2차 실패 - 바벨탑.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0:32~11:4)”

 

홍수가 끝난 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모두 노아의 후손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인 셈, 함, 아벳이 자손을 낳아 신인류가 구성되었으며, 창세기 10장 32절은 땅의 열국 백성이 모두 노아 자손의 족속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신인류는 성공을 합니까? 신인류는 노아를 닮아서 완전하고 의롭게, 경건하게 살게 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바벨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노아의 식구를 통해서 신인류가 형성이 되었지만, 그 신인류는 오히려 아담보다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은 선악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어진, 그래서 독립된 자아를 가지고, 독립된 선악의 기준으로 살아갔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인류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오히려 사람의 이름을 내자라고 합니다. 하늘 꼭대기까지 탑을 쌓아서 사람의 위대함을 입증하자는 것입니다. 이 바벨탑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가인도 성을 쌓았습니다. 그는 왜 성을 쌓았습니까? 죄의식과 그로 인한 피해의식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한 마디로 그것은 자기를 보호하는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인의 계열이 홍수로 말미암아 사라진 후에, 노아 후손들이 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아주 가관인데, 결국 사람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하늘 꼭대기까지 탑을 쌓아서,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길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 어떠한가를 드러내고, 이름을 남겨서 그 업적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탑의 주요 내용이며, 바벨탑에 담긴 정신입니다. 바벨탑을 쌓는 또 한 가지의 목적은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흩어지지 말고, 바벨탑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살기 위해 바벨탑을 쌓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흩어지지 말자라는 말은 서로 돕고, 서로 세워줘서 하나를 이루자는 사랑의 실천에 대한 개념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목적의 똘똘 뭉침입니다. 즉, 개인의 편의를 위한 뭉침이며, 사람을 위한 뭉침입니다.

 

앞서 가인의 계열을 이야기 할 때도 잠깐 설명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볼 때 바벨탑을 쌓는 근본적인 정신은 사람의 이름을 높이고, 사람을 위해 뭉치자는 “휴머니즘(Humanism)”입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휴머니즘도 이 바벨탑의 정신과 같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휴머니스트”들은 더 이상 신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신이 아니라 사람이 최고의 가치이며, 사람이 곧 신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21세기의 휴머니즘 속에서 인류는 점점 더 보이지 않는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과거의 바벨탑이 “흙”으로 만들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오늘날의 바벨탑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고유권한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창조와 생명복제까지 손을 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이러한 것들 안에는 결국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정신이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내고, 서로 서로 가치를 극대화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범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은 명백한 죄입니다. 하지만 이에 버금가는 또 다른 죄는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서서 그 명성을 사람이 얻자”는 것입니다. 즉 휴머니즘이 죄라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사람이 최고의 가치라는 정신”이 바로 죄입니다. 사실 얼핏 들어보면, 휴머니즘으로부터 나온 주장들은 상당이 좋은 말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사람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치 있다고 하는데 나쁜 말처럼 들릴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바벨탑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명백한 죄인 것입니다.

 

결국 의인이라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통해 형성된 신인류조차도 바벨탑을 쌓음으로 말미암아서 죄짓는 모습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두 번째 심판을 하십니다. 흩어짐을 면하고자 했던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모두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2차 실패입니다. 창세기 6장의 첫 번째 실패에 이어서, 창세기 11장에서 인간은 두 번째 실패를 하게 된 것입니다.


경륜적 시각으로 본 노아.

 

아시겠습니까? 모든 분들이 이 사실을 이해하셨길 바랍니다.

 

노아를 선택한 것은 그가 의인이라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려고 노아를 선택했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방주를 짓는다”는 개념 속에서 분명히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선택되었으며, 그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완전히 전멸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렇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하나님의 경륜적 과정 속에서는 노아를 선택하신 이유는 지금까지 설명 드린 대로입니다. “가장 의롭다고 하는 노아조차도 이미 타락한 아담의 죄 아래 있기 때문에, 노아를 통해 신인류가 시작되어도 여전히 그들도 똑같이 죄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세의 완전한 자의 노아의 후손들조차도 아담 안에서 죄가 그들의 삶을 주장하게 되고, 지배하게 된다는 그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아를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인류 전체가 아니라, 노아 한 사람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이며, 당세의 완전한 자였던 노아도 홍수가 끝나고 난 이후에 술주정뱅이의 모습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는 포도주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리기보다는, 그걸 마시고는 술에 취해 누워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노아의 개인적 삶을 들여다 볼 때 그는 분명히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의인이었고, 당세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점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 개인적인 경건함에 대해서는 우리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는 노아라는 사람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 속에서 성경의 맥을 짚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때문에 지금은 노아를 하나님의 경륜적 입장에서 어떻게 봐야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 “노아가 사실은 의인이 아니다”는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분들께서도 분별력을 가지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노아를 선택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를 예뻐하신다”는 모범적 사례로 노아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아무리 인간이 선하고 깨끗하다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시려고 노아를 선택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길이 없다. 사람에게는 해결책이 없으며, 사람이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나타내고 증명하기 위해서 노아를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책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서도 이 점에 대해 밝히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