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해하기 - 교훈이냐? 경륜이냐?
“우리나라 역사도 모르면서 왜 남의 나라 역사까지 공부하려 하냐?”
“이스라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더 많다.”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를 그저 교훈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역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성경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계시한 책”이라는 사실과 성경에는 뚜렷한 세대구분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세대의 구분이 있다는 말은, 세대의 흐름 또한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럼 그 세대의 흐름은 성경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을까? 세대의 흐름은 성경에서 “역사”의 형태로 나타난다. 성경은 필연적으로 역사책일 수밖에 없다. 경륜이 있다는 건 각 세대가 있다는 것이며 각 세대가 있다는 것은 역사가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경륜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역사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 나와 있는 역사는 단순히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성경이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은 주는 부분도 없진 않지만, 성경의 역사를 교훈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가져온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성경에 나타난 역사를 그저 교훈의 개념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나라의 “삼국유사”나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들도 성경만큼이나 중요한 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 있는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분 자신의 경륜을 계시하기 때문이지, 교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속에 담겨있는 경륜을 읽어내기 위해 우리는 그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주목해서 보기 시작해야 하는가? 역사와 그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경륜을 주목해서 보기 시작해야 한다. 성경을 볼 때 교훈을 주목해서 보면 성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역사 속에서 나타난 경륜이 정말 중요한 것이며, 교훈 그 자체만으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즉, 교훈 자체에 중점을 두기 시작하면 일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책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살인(殺人)하지 말라(출 20:13)”는 하나님 말씀과 “살생(殺生)하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놓고 본다면, 둘 중 어느 쪽이 더 고차원적인 선(善)을 가르치고 있는가? 또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말씀과 도교에서 가르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중, 어느 쪽이 더 고차원적인 경건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사실들은 결국 기독교보다 불교나 도교가 훨씬 더 수준 높은 거룩함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으로 갈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교훈적인 측면으로 성경을 봐선 안 된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일컬어 “모순적인 책”이라 부르는 것이며, 실제로 성경을 읽은 가운데 있어서도 수많은 모순점들이 발견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찌니라 (출 20:13)”다. 그러나 여호수아서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 (수 10:40)”
여호수아서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모두 죽인 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 말하고 있다. 또한 열왕기상에서 사울 왕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인가?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삼상 15:3)”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에게 또 다시 살인을 명하신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삼상 15:9~11)”
사울 왕은 살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다. 이 모순은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실제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오래 다닌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질문 중 하나다. 성경을 교훈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줄 수 있겠는가? 성경이 경륜의 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이러한 질문에 전혀 답변해줄 수가 없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받고 “어? 정말 그러네?”하며 시험에 들기도 하고, 설령 대답해준다 해도 질문자를 이해시킬 수 있는 대답이라기보다는 “그냥 믿어라”하는 식의 변명에 가까운 얼버무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륜을 이해하지 못할 때 생기는 의문은 단지 이것뿐만이 아니다. 왜 하필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일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 선택하셨으며, 다른 민족은 “이스라엘의 밥(민 14:9)”으로 방치하셨을까? 심지어 예수님은 이방여인과 그녀의 딸을 “개(마 15:26)”라고 비유하셨다. 이것을 두고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을까? 누군가가 그렇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겠는가? 그저 “의심하지 마라” 혹은 “그냥 믿어라”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겠는가? 경륜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사소한 질문에도 대답할 길이 없어진다.
성경이 “경륜을 계시한 책”이라는 성경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을 풀이하는데 있어서도 정말 문제투성이가 된다. 앞뒤가 안 맞는 모순이 너무 많고, 이런 질문 앞에서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어진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륜을 이해하면 조금 전의 질문들이 다 해결이 된다. 어려울 것 없이 아주 쉽게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륜을 알아야 하며, 또한 경륜의 책에 나타난 역사를 알아야 한다. 성경의 역사를 교훈적으로만 이해해버리면 성경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타 종교의 경전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는데,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읽어내자.
역사속의 경륜 - 점진적 계시
그렇다면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흔희 기독교의 역사관을 “선(線)적 역사관”이라 부른다. 윤회를 말하는 불교가 끝없이 돌고 도는 “원(圓)적 역사관”을 가진데 반해, 기독교는 시작과 끝이 있는 선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역사의 끝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그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에 나타난 경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적지 않은 단서를 준다.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관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선적 역사관이다.
다시 말해 “끝”을 향해 달려가는, 즉 지향점이 있는 역사관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계시를 일컬어 “점진적 계시”라 부르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경륜을 계시하실 때,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경륜을 계시하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경륜은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계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도 경륜을 계시하셨으며,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의 경륜이 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계시는 다를 수밖에 없다. 또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계시 역시 다른 수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향한 경륜의 계시를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만 봐도 이것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이 말씀은 성경에서 최초로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계시다. 이 말씀에서 여자의 후손이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메시아를 말하며, 뱀은 곧 사탄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말만 가지고는 메시아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계시가 희미하게 나타난 것이다. 이 말씀은 “원시 복음”이라 불리는데, 말 그대로 이것은 원시적으로 희미하게 드러난 복음이라는 말이다. 물론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있었을까? 이 말씀만 가지고는 메시아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마치 수수께끼 같은 이 말씀은 빛이 아주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메시아에 대한 개념이 약간 비춰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나중에 계시된 말씀된 말씀과 실제의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 1:18)”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알게 되었다. 또한 원시복음에서 발뒤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과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이 뜻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는 신약 시대의 계시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확연히 드러난 계시를 통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는 바를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원시적인 형태의 계시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일컬어 “점진적 계시”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점진적 계시 속에서 우리는 초보적인 계시와 완성된 계시 중 무엇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해야 할까? 다시 말해서 창세기 3장 15절의 원시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를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를 통해서 원시복음을 해석해야 할까? 두말할 필요 없이 후자의 방식으로 계시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초보적인 계시와 완성된 계시의 관계를 일컬어서 “그림자(골 2:16~17, 히 8:5, 9:24, 히 10:1)”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즉, 실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그림자처럼 뚜렷하지 않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복음처럼 수수께끼처럼 희미하게 계시 된 것은, 조금씩 점진적으로 뚜렷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조금씩 실제의 모양을 갖추어가던 계시는 마침내 예수님이 오시고 신약성경이 완성될 때를 완성된 것이다.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계시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뉜다. 일반계시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롬 1:20)”
라는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자연만물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되는 것을 말하고, 특별계시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이점에서 비춰볼 때 계시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고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해석해서 명확하게 그 내용 설명을 해준 것이 신약성경인데, 그 신약성경의 완성이 곧 계시의 완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신약에 의해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분명히 구약은 신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굉장히 효과적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림책”과 “해설집”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설집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자세한 부분도 그림책을 통해 분명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실제적 해설집인 신약으로 이해하기 힘든 자세한 부분까지 그림책인 구약에서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책은 실제적 해설집을 보고나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실제 없는 그림책으로는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해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혀지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약과 무관한 독립적 구약 속에서는 절대로 계시의 완성을 볼 수 없으며, 뚜렷한 계시의 실제를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을 읽을 때는 반드시 신약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난 다음에 이해를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 신약의 개념이 구약에 의해서 더 밝아진다.
예컨대 “유월절”이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된다. 유월절을 통해 우리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서 죄 사함을 받은 것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유월절이란 무엇인가? “넘어 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유월(逾越)절은 곧 신약의 실제적 사건의 그림자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 12:12~13)”
출애굽당시에 열 번째 재앙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의 좌우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를 모두 죽이시는 중에 피를 볼 때에 그 집을 넘어간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문에 바른 피가 집안에 있는 사람을 살려준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의 피가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계시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유월절 사건을 보면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구원의 계시인 출애굽기의 유월절에는 신약에서 보기 힘든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출 12:11)”
이 유월절을 통해 우리는 구원의 성격을 조금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곧 “구원은 탈출”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거쳐 애굽을 탈출했듯이, 오늘날 구원을 받은 사람들도 죄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죄된 세상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애굽에서 눌러 살고 있는 것처럼 잘못되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또한 출애굽은 가나안을 위한 출애굽이다. 즉, 홍해를 건너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에 도착하는 것이 출애굽의 참된 목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 속에서 신약에서는 뚜렷하지 않은 구원의 성격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구원이란,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떠나는 것”과 함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목적지를 향해가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이란 예수의 피로 말미암는 죄사함을 일컫는 말이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완벽하게 구원의 성격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구약의 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 드러난 초보적인 계시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약이 쓸모없는 책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신약을 통해서 구약이 해석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신약에 대해 어마어마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구약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약과 구약은 상호보완적이다. 구약이 없으면 복음이 풍성해지지 않는다. 구약이 있기 때문에 복음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신약의 관점이 없이 구약을 보게 되면 “사탕과 매” 밖에 보이지 않지만, 신약의 복음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구약을 깊이 있게 묵상해보면 구약의 무궁무진한 복음의 보고로써 다가오게 된다. 성경을 점진적 계시로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경륜을 계시한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역사가 있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각 세대별로 다른 방법을 통해 인간을 다루신다. 우리는 이제 그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바라보고, 이해해야한다. 계시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 성경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완성된 계시를 가지고, 점진적으로 그림자처럼 보여 졌던 계시들을 이해해야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구약의 그림자들과 그림으로 인해서, 계시의 완성인 신약을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세대와 역사의 흐름
우리는 앞서 성경이 하나님의 경륜을 계시한 책이며, 그 경륜은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역사 속에 드러난 경륜을 배우기 위해, 성경에 드러난 역사의 흐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경륜을 세부적으로 공부하기에 앞서 일단은 성경의 역사적 흐름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자.
성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의 역사적 흐름에서 중요한 분기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앞서 하나님의 경륜에 세대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한바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러한 세대의 정확한 구분을 위해 각각의 분기점들을 중심으로 성경의 역사를 나누어보자.
성경은 첫머리에서 역사의 시작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천지창조이며,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시작으로 우주의 모든 역사의 시작되었다. 그 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타락하게 되었으며, 이 타락이 바로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 후 노아의 홍수까지를 한 세대로 볼 수 있으며, 이 홍수가 또한 역사상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 또한 중요한 분기점이며, 이것으로부터 모세의 율법까지가 또 하나의 세대를 형성한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율법을 받게 되는 그 시점이 마찬가지로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이 사건 이후를 율법시대라 부르는데, 이 율법시대 안에서도 사사시대, 왕정시대, 포로시대와 같이 세대의 구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세대들 또한 모두 율법시대 안에 포함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시대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끝이 나게 된다. 예수님의 탄생이 중요한 분기점으로써 이로 인해 율법시대가 끝이 나고, 새로운 성자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때까지를 우리는 구약이라 부르고, 이 이후를 신약이라 부른다. 물론 이 이후의 신약시대도 분기점을 나눌 수 있다. 예수의 탄생부터 십자가와 승천까지가 하나의 세대로 존재하며, 오순절을 분기점으로 새로운 성령 시대가 열린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면서 비로소 성경의 모든 역사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역사의 흐름이 아닌 성경의 순서에 따라, 조금 더 거시적으로 시대를 구분해보자.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역사는 시작된다. 그리고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를 “인류 고대사”라 부른다. 그리고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를 “이스라엘 민족 형성사”로 볼 수 있다. 그 후 출애굽기 1장부터 말라기까지를 “이스라엘 민족사” 혹은 “이스라엘 역사”라 부르며,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총체적으로 구약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부터 요한복음 21장까지를 사복음서라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다. 그 다음 사도행전 1장부터 사도행전 28장까지를 “초대 교회사”라 부르고,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를 서신서라 부르는데 이것이 “기독교 교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전체를 “종말론” 혹은 “종말예언”이라 하며, 우리는 여기까지를 신약이라 부른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이다. 성경이 복잡하고 어려워보여도, 단순하게 정리해서 보면 이런 흐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