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민족 형성과 언약의 하나님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때부터 창세기 50장까지를 일컬어 이스라엘 민족 형성사라 부릅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형성되는가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첫째는 아브라함이요, 둘째는 이삭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셋째가 야곱이며, 그가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후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은 야곱의 아들들을 통해 구성된 12지파로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출 3:16)”
이 말은 하나님 자신을 철저하게 언약의 하나님으로써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그리고 그 언약이 이삭으로 계승되어서 이삭과 언약이 맺어지고, 마찬가지로 야곱과 맺어진 그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너희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것을 내가 너희들에게 성취시켜줄 것이다. 너희들을 그런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라는 하나님 스스로의 약속입니다.
또한 이것은 잠시 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이스라엘 민족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민족임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시작에서부터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형성되어나가는 “언약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 - 업적이냐? 언약이냐?
우리가 이스라엘의 민족 형성사를 살펴보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에 대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흔희 성경을 살펴보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업적에 관심을 갖기 쉽습니다. “그가 무슨 위대한 일을 했으며, 또 어떤 잘못을 했고,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그가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하는 문제에 집중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업적에 관심을 갖는 것은 성경의 포인트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을 계시하고 있는 책으로써,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인물의 업적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대표적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창세기 37장부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등장하는 요셉은 굉장히 뛰어난 업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써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삭,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야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큰 업적을 가진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12명의 형제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야곱을 비롯한 그의 모든 가족들은 요셉 덕분에 애굽에서도 귀빈대접을 받게 됩니다.(창 47:5~12)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언약 백성의 조상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계보를 잇는 사람은 요셉의 형 유다입니다.(마 1:3)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를 때, 왜 그들을 “유태인”이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유다지파를 통해서 메시아가 온 민족”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을 유태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유다의 자손. 즉 유다지파를 통해서 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것은 요셉이 아니라 유다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경륜의 측면에서 볼 때는 어떤 인물의 위대한 업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개인적으로는 위대한 업적이 있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으로서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반면에 유다는 성경에서 이렇다 할 업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그는 며느리 다말과 잠자리를 같이 한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족보 가운데 포함된 사람이 아니었으며, 그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은 바로 유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경륜적 차원에서 요셉은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경륜적 차원에서는 오히려 요셉보다는 유다입니다.
이런 비슷한 경우가 성경에는 또 등장합니다. 창세기 29장부터 등장하는 라헬과 레아가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고 7년을 일해서 라헬을 얻기를 원했는데, 원치 않는 레아를 얻게 됩니다. 야곱은 다시 7년을 일해서 라헬을 얻게 되고, 결과적으로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그 유다는 누구의 자식입니까? 라헬이 아닌, 레아의 자식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누차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경륜적 측면에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께서 성경을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보기 시작하면,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위대한 게 아니라는 이 사실을 밝히 깨달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해서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업적이 아닌 그 분 자신의 언약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성격
이번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길 원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전까지 인류 전체를 함께 다루셨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택하셔서, 이스라엘을 중점적으로 다루시며 그 언약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민족 형성사를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는 특징적인 성격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의 서론부분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나라 역사도 있는데, 왜 남의 나라 역사를 공부하냐?” 라는 질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를 통한 교훈을 얻으려는 게 아닙니다. 역사적 교훈을 배우고자한다면 우리나라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이 훨씬 많습니다. 훨씬 재미있으면서도 교훈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오히려 이스라엘 역사는 교훈적이지 못한 얘기가 아주 많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교훈적이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이런 간단한 상식을 통해 생각해봐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교훈만을 얻으려 하는 태도는 잘못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떤 민족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유독 이스라엘 민족만을 선택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는 첫 번째 특징은 “이스라엘이 제사장적 국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만 구원하시려고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으로 그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교만해졌으며, 이방인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이방인에 대한 정죄의식이 발달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다는 의미는 사명과 책임이 주어졌다는 의미 또한 함께 내포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택함 받았다는 선민의식은 있었어도 사명감과 책임의식은 가지지 못하는 나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는 데는 쓰임을 받았지만, 구속사역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들 민족을 통해 메시아가 오시기는 했으나, 그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도태되어 버린 것입니다. 복음이 확산되는 선교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방인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제사장적 사명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것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명도 함께 맡기셨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사명 없이 누군가를 선택하신 예는 없습니다. 즉, 특권을 주시기 위해서 택하신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택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택함 받았다는 자부심과 함께 사명감과 책임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는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통해 구속을 완성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언약하신 그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민족에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참 복 받은 민족입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의 세 번째 특징은 “그들의 역사는 신앙인들의 영적 노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예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생활이란 무엇이냐?” “믿음 생활이란 무엇이냐?” “은혜라는 게 대체 무엇이냐?” 등등의 사실들을 보여주기 위한 예표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런 점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세 번째 특징은 책의 서두에서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을 이야기할 때, 설명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모든 것들을 하나의 그림책으로써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는 네 번째 특징은 그들이 갖는 특징적 성격 중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민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언약이 하나님 구속역사의 핵심이며, 또한 경륜적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핵심적 실마리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부를 때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왜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릅니까? 구약과 신약은 영어로하면, Old Testament와 New Testament입니다. 즉,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언약하신 내용들을 어떻게 이루어나가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언약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언약이 가지는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을 이해해야 성경을 보는 안목이 뚫려집니다. 언약이 가지는 특징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때문에 역사를 진행해 가시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어떠함을 가지고 언약을 진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에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 바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부도덕한 사람들, 부도덕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중요한 인물로써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모범이 안 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성경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잠시 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 족보에 등장하는 다말이나 밧세바는 부도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큰 복을 받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어리석고, 연약하고, 부도덕한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은혜 안에서 언약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 은혜 안에서 그런 부족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수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다말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입니다. 다말은 그 행실이 타의 모범이 되어서, 그 삶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에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언약을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다말의 지혜를 보고, 다말처럼 지혜로운 여인이 되라”하는 교훈을 주려고 성경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다말은 행실이 올바르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한 부도덕한 여인입니다. 결코 인정받을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다말을 인정해줘야 하는 것은 예수님까지 이어지게 될 계보를 이으려했던 신앙적 측면에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누구를 통해서 태어났습니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이 밧세바는 다윗이 남의 아내를 뺏어서 데려온 여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계획하셨으며,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을 잇는 것은 솔로몬이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밧세바를 인정하는 것이지, 밧세바가 대단한 존재라서 그녀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한 구속적 흐름이 그 주된 관점이기 때문에, 그런 내용들이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어떠함을 드러내면서, “너희도 이 사람처럼 올바르게 살아라”라는 교훈을 전해주는 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마태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유명한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이 부분은 참 재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족보가 없으면 하나님 언약의 신실성이 입증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족보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자손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측면에서도 참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측면에서도 아주 중요하는 말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가 끊어질 것 같은 위기가 몇 번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런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신기한 방법으로 또 이으시고, 끊어질 때쯤 되면 또 절묘한 방법으로 또 이으시는 것입니다. 그 끈을 잇는 내용들이 바로 성경의 족보를 통해 입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족보의 그 사람들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의 계보에 어떤 위기가 닥쳐도 결국 그 끈을 이으신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족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1)” 따지고 보면 족보의 시작은 아담부터 언급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아담이 아닌 아브라함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측면을 보이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 언약적 구속의 메시아를 설명하기 위해서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언약하신 사람이 아브라함인데, 메시아는 그 언약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 1:2)” 야곱에게는 12명이나 되는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형제들은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큰 업적을 가진 요셉도 여기에는 언급이 안 되고 있습니다.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설명했으니, 지금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마 1:3)” 아시겠습니까? 다말을 통해서 예수님의 계보가 연결되었습니다. 만약 다말의 지혜가 아니었다면 이 계보는 끊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말이 여기 언급된 것입니다. 다말이 우리에게 교훈적으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보를 끊어지지 않게 한 인물로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1:5)” 여기에 라합이 나옵니다. 이 라합은 여호수아서 2장에 등장하는 여리고의 기생입니다. 그럼 왜 라합이 여기 언급되었을까요? 예수의 계보를 잇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언급이 된 것입니다. 그가 정탐꾼을 숨겨줬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보를 잇는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룻이 나옵니다. 룻은 왜 성경에 기록되었겠습니까? 왜 하필이면 “룻기”라는 성경이 구약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룻은 이방인으로써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의 예표이기도 하지만, 룻이 보아스를 통해서 아들을 갖는다는 그 사실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인물이라서 거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잘 섬긴 것이 타의 모범이 되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6)” 우리야의 아내는 밧세바입니다. 그녀가 왜 여기에 등장합니까? 바로 그를 통해서 솔로몬이 나오고, 솔로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에 대해 밝아지지 못한 어떤 신학교에서는 “아마도 밧세바가 자녀교육을 잘해서 솔로몬이 훌륭한 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밧세바는 자녀교육을 잘한 어머니로써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는 억지스러운 추측을 신학생들에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성경을 교훈적으로만 이해하면서 생기는 폐단일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까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하는 그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언약의 구속사를 우리에게 계시한 책이기 때문에 그 내용들이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도덕하다고 느껴지는 이야기가 성경에서는 중요하게 나와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맥락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 그 사람들의 업적이나 위대함을 봐야할 것이 아니고, 그 속에 담겨있는 복음의 핵심과 언약의 가치.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경륜의 내용들을 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들께 강조하겠습니다만, 성경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책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역사책은 더욱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보가 언약을 통해서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계시한 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