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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경의 숲- 정진국 목사 "인류 고대사(2)" 성경의 숲

영국신사77 2007. 4. 26. 20:32
성경의 숲- 정진국 목사 "인류 고대사(2)" 성경의 숲

2006/12/14 10:17

http://blog.naver.com/nova7979/90011929369

 

인류고대사(2)

 

정진국 목사

 

 

인간의 타락 - 타락의 결과.

 

인간은 타락했고 그로 인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타락한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타락의 결과가 창세기 4장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로 본다면 4장부터 6장까지를 타락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고, 넓은 의미로는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사건까지를 타락의 결과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4장과 5장에서 나타난 가인과 아벨, 그리고 가인의 자손과 셋의 자손을 통해서 타락의 결과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2개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구속의 중요성”이며,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선악과의 결과로 생겨난 비극”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에게 “구속”이라는 대안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타락의 결과를 살펴보기에 앞서 창세기 3장 15절과 3장 21절에 비춰진 구속이라는 개념을 배워야하는데, 그러나 이 책은 성경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자세히 강해하고자 쓴 책이 아니므로, 일단은 흐름을 이해하는 차원으로만 이해하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만약 자세히 강해하고자 한다면 너무 방대한 내용이 다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구속은 하나님의 경륜을 통해서 볼 때, 성경의 주제가 아닙니다. 구속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개입된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흔희 구속의 결과를 이야기할 때, “회복”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은 생명이었으며, 인간이 그 생명을 통해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며 사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앞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 중에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고, 타락한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바로 이 구속 사건이 개입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흐름 속에서도 구속이 중요한 하나의 흐름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4장에서는 그러한 구속사적 흐름 속에서, 또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어떤 중요한 의미의 구속이 있을까요?

 

창세기 4장에 나타난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너희가 비록 타락을 했지만, 제사를 통해서 구속함을 받고, 내가 너희에게 제시한 방식으로 살아가라”는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시된 방법이 인간들에게 실천된 것이 바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아벨은 양을 잡아서 드린 피의 제사였으나, 가인의 제사는 농사를 통해 거두어들인 땅의 소산물이었습니다. 즉 피의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성경의 흐름 속에서 보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배 잘 드리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예배 못 드리는 사람은 망하게 하신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와 관련된 스토리를 성경 속에서 전개해나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의 서두부분에서 하나님의 경륜은 점진적 계시의 방식으로 나타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겠습니다만, 성경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쓰여 졌습니다. 그 주제에 관한 이야기가 점진적으로, 하나의 흐름에 따라 풀어져 있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신구약 성경 66권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그 흐름 속에서 봐야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바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야기는 타락의 사건이 일어난 후에 벌어진 그 결과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지, 창세기 4장만 독립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이것에 대해 더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잠시 3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간은 타락하고 난 다음에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창 3:7) 이것은 곧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닌, 사람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해낸 일입니다. 또한 나뭇잎 옷이기 때문에 머지않아 잎이 말라서 시들해질 것이며, 그때가 되면 또 다시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할 것입니다. 즉, 잠깐 동안만 효과를 볼 수 있는 옷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창 3:21) 이것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옷이며, 말라버릴 염려가 없으므로 다시 만들어 입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가죽옷은 어떤 동물의 죽음. 즉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 옷이기도 합니다. 이 옷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의 노력과 율법을 통한 자기의 의로움으로는 구속이 없으며, 진정한 구속은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희생을 통한 방법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죽 옷이 아담과 하와 이후,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신앙생활로 투영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에 대한 간단한 소개 후에 바로 이어져서 나오는 것이 “제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그 방법을 수용하고, 믿음으로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또 가인의 제사를 안 받으신 이유는 그가 불경스러운 태도로 제사를 드렸거나, 그가 나쁜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선악과에 대한 결과로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농사를 지어서 거둔 땅의 소산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 피의 제사였습니다. 단지 소산물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가인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 아마도 가인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한테는 양이 없잖아? 피의 제사를 드릴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냥 내가 거둔 농작물로 제사를 드려야지. 나도 열심히 일해서 거둔 농작물이란 말이야. 피의 제사면 어떻고, 그냥 제사면 어때? 제사만 드리면 되는 거지.”  가인이 실제로 이런 생각을 했나, 안 했나하는 문제를 떠나서 결과적으로 가인은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이 아닌, 자신의 소견에 옳은 방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더 나은 제사(히 11: 4)”라는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피의 제사를 드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니, 가인은 이제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식으로 제사를 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여전히 자기 소견과 자기의 자의적 선악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이 모든 일들이 아벨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벨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갖게 되었으며, 결국 아벨을 살해하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이 말하려는 바는 결국 타락을 통해서 인간들 사이에 분쟁과 미움과 시기, 질투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형성된 선악의 시비에 의한 삶이 인간을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창세기 4장은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가지 유형의 삶 - 가인과 셋의 족보.

 

가인은 아벨을 죽인 후, 에덴 동편 놋 땅으로 가서 새로운 가정을 꾸립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셋이라는 아들을 낳고, 셋도 결혼하여 자손들을 남기게 됩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가 4장 후반부와 5장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곳에 족보가 나오는 것일까요? 셋은 그래도 노아의 조상이니까 그렇다 쳐도, 왜 가인의 족보까지 나온 것일까요?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다 (창 4:25)”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즉 셋의 족보는 아벨의 족보를 대신하는 역할로써,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가인이 자기의 소견대로 제사를 드린 선악과에 의한 사람이었으며, 아벨이 하나님이 제시한 구속과 은혜를 받아들여 제사를 드린 사람이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벨이 죽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아벨을 대신할 셋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셋의 족보는 단지 족보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선택하고 자기 소견에 의해서 독립적 살아가는 가인의 계열과 하나님의 구속을 받아드리고 그 방식대로 살아가는 아벨의 계열을 대비해서 보여주는데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인 가인의 족보, 그리고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셋의 족보, 이 둘을 분명하게 대조시켜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차이가 있나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타락한 가인의 계열이 어떤 일을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창 4:16~17)”

 

가인이 뭘 짓는다고 합니까? 성을 짓는다고 합니다. 즉, 도시 문명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도시를 지어서 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려라 (창 1:28)” 라고 명령하시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이 창세기 1장 28절을 일컬어 “문화명령”이라 부르는데,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문화는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문화요, 자연과 함께 사는 문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아담이 그 죄로 인해 숨었던 것(창 3:8, 3:10)처럼, 가인은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의 심판이 두려워서 성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인의 축성(築城)을 통해서, 도시문명의 시작이 결국 죄 때문에 생겨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인의 족보에서 나타나는 죄의 결과는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창 4:18~19)” 이 라멕의 결혼은 성경에서 나오는 최초의 일부다처제입니다. 이때 일부다처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결국 일부다처제라는 것도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가인의 계열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단 한명의 여자. 즉, 하와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일부다처제가 생겨났겠습니까? 라멕은 어떻게 인류최초로 한명 이상의 여인을 아내로 취했겠습니까?

 

결국 라멕이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제 멋대로 두 여인과 결혼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일부다처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Sex)적 문란입니다. 오늘날 대체 왜 이토록 성범죄와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성병들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까? 성적 문란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적 문란함은 어디로부터 나왔습니까? 바로 라멕으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즉, 가인의 계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독립적 계열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창 4:19~22)”

 

라멕의 세 아들들은 각각 유목민의 조상이 되었고, 음악 예술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기계문명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도시문명, 예술 문화, 기계문명이 결국 누구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까? 가인의 후예로부터 나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문명과 문화를 창조하는 주체가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바로 이 모든 문명의 끝에는 “자아”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육”이 있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습니다.

 

실제로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세상적인 것들을 보면, 모든 문화와 예술은 결국 휴머니즘(Humanism)과 성(Sex)의 타락을 향해 흐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음악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인간의 내적 능력을 개발시키면, 신처럼 초월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뉴에이지(New Age)운동”으로 흐르고 있으며, 춤은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외설적인 동작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기계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좋은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계문명이 발전되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휴머니즘(Humanism)과 성(Sex)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학으로 발전 된 기계문명은 마침내 생명을 복제함으로써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으며, 인터넷 문화는 누구나 손쉽게 음란물을 구할 수 있는 정보매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모든 문명, 문화, 예술이라는 것의 대부분이 사람들을 타락으로 끌고 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문명과 문화와 예술에 현혹되어선 안 됩니다. 그 배경에는 바로 가인의 정신. 즉 선악에 따른 인간 독립적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문화와 예술들이 내걸고 있는 주제가 뭐냐면, “인본주의(人本主義)”인 것입니다. 즉, 인간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이 가인의 계열은 노아 홍수 때, 모두 죽게 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가인의 계열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이 노아의 홍수가 끝난 다음에 결국 무슨 일을 합니까? 바벨탑을 쌓습니다. 왜 그들은 바벨탑을 쌓았습니까?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4)”

 

인간의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후에 등장하게 되는 “바벨론”이라는 말은 이 바벨탑에 그 어원이 있는데, 바벨론은 결국 사탄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계 18:2) 그렇다면 결국 사탄의 세계 속에서 주장하는 핵심주제가 뭐겠습니까? “인간의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고귀하며, 위대하고, 가장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 속에서도 이 점이 만연해 있는 것입니다. 종교마저도 이러한 휴머니즘의 잣대로 평가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종교는 잘못되었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철학도 신을 탐구하던 학문이 이제는 인간에 대한 탐구로 그 주제를 옮겨 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창세기 4장 23절과 24절은 또 다른 모습의 타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 4:23~24)”

 

라멕은 자신이 입은 상처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잔인해졌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참 황당한 것은, 살인한 것을 감추지도 않고, 오히려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을 심판한 사람들이 77배나 벌을 받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죄책감이 없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문화와 문명이 발전하고, 인간의 가치가 최선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결국 죄에 대한 기준이 비뚤어지고, 그 결과로 죄책감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 25절 이하의 셋의 족보는 가인의 족보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5~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말인데, 이 부분은 표준새번역 성경과 공동번역성서를 확인해보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셋도 아들을 얻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어 불렀다. 그 때 에노스가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 (공동번역-창 4:26)”

 

“셋도 아들을 낳고,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표준새번역-창 4:26)”

 

가인은 에녹을 낳고 성을 지은데 비해, 셋은 에노스를 낳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부분만을 비교해 봐도 가인의 계열과 셋의 계열의 영적 흐름이 확연하게 대비가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 성을 쌓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적 계열과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 의존적 계열이 이렇게 대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셋의 족보에서 가인의 족보와 다른 점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1~24)”

 

이 에녹은 셋의 6대손이 되는데,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에녹이 어떤 사람인가하는 것은 히브리서를 보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 11:5)”

 

이 처럼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인은 업적 중심의 족보인데 비해, 셋의 족보는 하나님 중심의 족보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은 “어떤 일들을 했느냐?”가 중요한 족보였던데 비해서, 셋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느냐?”가 더 중요한 족보였습니다. 족보의 강조점과 그들의 삶의 가치관부터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셋의 계열과 가인의 계열 - 세상과 섞인 신앙인.

 

선악과를 통한 자기 판단의 가인 계열과 하나님의 구속과 은혜를 받아들인 아벨의 계열. 즉, 셋의 계열은 그토록 큰 차이를 보이며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창세기 6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창세기 6장은 타락의 완전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먼저 6장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 6:1~3)”

 

이처럼 6장의 도입부에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을 고대의 신화처럼 이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천사와 인간이 교합했다. 그래서 네피림이라는 특수한 종족이 생겨났다”라고 이해하곤 하는데, 그것은 정말 틀린 해석입니다. 성경의 앞뒤를 완전히 무시한 뜬금없는 해석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앞에서도 성경은 하나의 흐름 속에서 봐야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의 흐름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번 이 6장을 흐름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5장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습니까? 그 5장의 앞에 있는 4장에서는 또 무슨 이야기가 나왔습니까? 지금까지 성경은 가인의 계열과 셋의 계열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6장에서 갑자기 천사와 인간의 교합을 이야기한다면,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흐름 속에서 볼 때,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셋의 자손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자손입니다. 이 둘이 서로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두 계열의 사람들 사이에서 기준이 무너지고, 서로 뒤섞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참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2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창 6:2)”

 

이것은 두 계열 가운데 경계가 무너진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계열로써 이어져오던 셋의 자손마저도 결국에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삼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현대인을 보면 예수 믿는 여자보단, 예수 안 믿는 여자가 더 아름답습니다. 또 예수 믿는 남자보단, 예수 안 믿는 남자가 더 멋집니다. 물론 영적인 면에서는 믿는 자가 훨씬 멋지고 아름답지만, 실제로 나타나는 겉모습은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낫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곧 가치이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온갖 치장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자신에게 투자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지체들을 돌볼 필요도 없고, 헌금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좋은 옷, 좋은 화장품, 좋은 악세사리, 좋은 집, 좋은 차로 화려하게 치장하는 그들의 겉모습은 신앙인들보다 훨씬 더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며 살던 사람마저 세상이 부러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상이 더 좋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자기들의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삼습니다. 하나님 의존적인 계열에서, 자기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판단에 따르던 사람들마저 결국 “자기들의 좋아하는 대로”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가 다가온 창세기 6장의 이 상황은 신약의 그림자로써,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이 노아의 홍수 때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37~39)”

 

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며,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도 “사람의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인들도 처음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동행하며 살겠지만,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세상을 부러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믿음”과 “세상”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6:3)”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육체”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나옵니다.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육”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들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가인의 후손, 셋의 후손 할 것 없이 모든 인간들이 육을 가치로 여기고 사는 존재로 타락해 버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신”을 거두십니다. 즉, 성령을 거두어 버리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던 삶도, 이제는 성령의 인도 없이 “자기들의 좋아하는 대로” 세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며, 오늘 날 교회가 이렇게 변질되진 않았는가하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교회에 들어온 세상적인 것. 기복주의가 그런 대표적인 예 입니다. 교회에 세상이 들어온 것입니다. 교회에서 세상을 노래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얻으려하고, 세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기복주의적 신앙입니다. 오늘날의 기복주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해서 육이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재림이 나날로 다가오면서 한국교회는 “노아의 때와 같이 (마 24:37)” 변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적인 교회, 세속적인 교회는 완전히 타락의 극에 달한 창세기 6장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셋의 자손들은 그렇게 세상에 섞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먹게 된 결과를 인간들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인간이 육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그들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를 통해 인간들을 모두 벌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즉 “너희들 마음대로 산 것은 실패”라는 판정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제불능의 인간들을 보시고, 육체가 된 그들을 완전히 쓸어버리시기로 작성하셨으며, 그 결과 대홍수가 일어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