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성경을 이해하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할 서론적인 이야기를 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창세기부터 시작되는 성경본문을 가지고 하나님 경륜의 점진적 흐름을 살펴보자. 그 첫 번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인류고대사다.
인류고대사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를 말하는데, 이 부분은 굉장히 적은 장수이며, 실제로 성경을 펴 봐도 그리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이 안에는 결코 무시되어선 안 되고, 또 무시할 수도 없는 중요한 내용과 함께 매우 많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 지금부터 인류고대사에 숨겨진 은혜의 경륜을 하나씩 찾아보도록 하자.
천지 창조의 핵심.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이상한 점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타난다. 창세기 2장 1절부터 3절을 살펴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고 했는데, 4절부터 “창조의 대략은 이러하다”하면서 또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애매하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이 우주 창조의 전체적인 개요를 보여주는 전체도라면, 그 전체도 중에서 인간 창조에 대한 부분을 우리에게 자세히 보여주시고자 인간 창조의 영역을 강조한 부분 확대도가 2장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장은 전 우주와 우주 만물 창조의 개요가 나와 있는 전체도, 2장은 6일간의 창조 중에서 인간 창조의 영역을 강조한 부분 확대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1장과 2장의 구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6일간 많은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중에 인간을 창조하신 내용만을 확대하고 강조해서 보여주셨다는 그 사실에서 무엇이 느껴지는가? 우리는 “창조의 핵심은 인간이다”라는 사실을 쉽게 유추해 낼수 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에서도 이미 언급이 되어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있으라 하시니 있었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있으라 하시니 있었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있으라 하시니 있었고” 5일간 창조를 하는 동안 계속 같은 패턴으로 가던 하나님의 창조사역이었으나, 6일째날 인간 창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말씀 하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신다.
그래서 인간 창조에 대해서 특별히 중요한 부분이 창세기 1장의 후반부인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26~30)”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데 구체적, 세부적으로 어떻게 창조하셨는가하는 내용이 나온다. “흙으로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라는 구체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그 후에 하와가 창조되었다” “아담은 흙으로 지음 받았고,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지음 받았다” 또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어준다” 이런 중요한 내용들이 창세기 2장에 담겨져 있다. 이런 것들은 결국 창조의 핵심이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이 창조의 핵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창세기 1장의 내용은 신약에 비추어 살펴볼 때, 생명 성장의 과정을 나타낸 그림책이다. 창1장은 생명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예표다. 그러니까 창1장은 우주 창조에 대한 내용만을 계시하신 부분이 아니라, 우주창조와 함께 생명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고, 일단은 창조의 핵심이 사람이라는 그 사실을 이해하는 정도로 넘어가도록 하자.
에덴동산과 인간.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핵심으로써 사람을 지으셨다. 그러나 이 사람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타락을 하게 되는데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창세기 3장에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창세기 3장만 봐서는 안 되고, 2장에서부터 하나의 흐름으로 함께 봐야한다. 창세기 2장은 창조의 개념에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타락의 개념 속에서도 아주 중요한 정보를 주기 때문이다.
먼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 관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천지창조의 핵심으로 인간을 지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셨다. 이것은 우리가 조금 더 깊게 연구해야할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내용으로써, 단순히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이라는 장소에 두셨다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 이 에덴동산은 곧 천국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셨을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 즐거움, 행복이라는 뜻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을 그곳에 두심으로 말미암아서 “너는 나와 더불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 존재다”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누릴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할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써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경에서 말하고자하는 경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질 것이다. 에덴동산으로 예표되는 천국에서 인간이 편안하게 누릴 자로 지음 받았다는 이 사실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누릴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된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인간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그림이 잘 나타나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3~5)”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나온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창세전부터 예정하시고 섭리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창조의 목적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는 그 말 자체를 꼼꼼히 살펴보자.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2개의 중요한 단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하늘에 속한”이며, 두 번째는 “신령한”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창조하셨는데, 그 복의 정체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는 것이다. 즉, 천국에 속한 영적인 복을 주려고 우리를 지으셨다는 말인데,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이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영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 존재로 우리를 지으셨다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이 담고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을 예표하고 있는 에덴동산에 사람을 두셨다. 바로 인간의 창조 목적을 우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살 자로 지음 받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을 통해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될까?
인간이 흙을 빚어 창조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서 분명히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다 하셨는데, 그렇다면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일까? 눈이 2개이며, 입이 1개, 팔이 2개, 손가락 발가락이 각각 10개씩인 이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체의 모습을 가지고 계신다는 말은 어딘가 어폐가 있다.
만약 누군가가 인간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인간의 정체성을 논하려한다면 그 주장은 결과적으로 인간은 짐승과 같은 존재라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성경에서는 짐승들 또한 흙으로 지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창 2:19)”
그렇다면 짐승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면서도,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건 인간의 어떤 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 2장의 한 부분을 살펴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으신 후에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되게 하셨다. 결국 짐승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이겠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다. 히브리어로 “니슈맛 하임(nishmat chayyim)”이라는 이 단어는 호흡이라는 뜻의 “네솨마(neshamah)”와 살아있음을 뜻하는 “하이(chay)”가 합쳐진 합성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네솨마”라는 단어가 호흡이라는 의미와 함께 “영혼(잠20:27)”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생기라는 말은 “살아있는 호흡”이라는 뜻과 함께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뜻도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창조되어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영혼이다. 즉, “영”이라는 말이다.
에덴동산은 하늘에 속한 복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인간 창조의 사건을 말하면서, 흙을 빚어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코에 불어넣어진 생기. 즉, 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육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다. 이 사실이 창세기 2장 상반부에 에덴동산과 인간 창조를 통해 확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이 땅에서 살되, 그 참된 가치가 천국과 영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지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관심은 하늘과 우리의 영이다. 우리의 관심도 이 땅에서의 일이나 육의 편안함이 아니라, 천국과 영이어야 한다.
인간의 타락 - 생명나무와 선악과.
인간이 천지창조의 핵심이라는 사실과 인간의 참 가치는 천국과 영이라는 이 두 가지의 개념에 이어서 세 번째로 살펴볼 것은 바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셨는데, 그 동산의 중앙에는 중요한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또한 에덴동산의 특징 중에 하나가 동산에서부터 4개의 강이 발원되고 있다는 점이다.(창 2:10~14) 에덴동산은 이 4개의 강의 근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점을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에덴동산이라고 하면 선악과만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보다는 생명나무와 4개의 강이 훨씬 더 중요한 내용이다. 왜냐면 이 생명나무와 강은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그대로 등장하는 생명나무와 생명수의 강이기 때문이다.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1~2)”
이 에덴동산은 천국의 예표라는 사실을 이미 앞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에덴동산과 연관 지었을 때, 이 생명나무와 강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천국의 예표인 에덴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생명이다. 이 생명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인간창조의 목적이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면, 생명나무와 생명 강은 그 창조 목적을 이루는 수단과 방법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릴 수 있는 방법이 곧 생명이다. 이 생명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누림을 위한 필연적 요구조건이다. 천국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길 원하시는 것 또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즉 생명이 이 인간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요 10:10)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고로 이 생명은 복음의 핵심이며, 하나님 경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생명의 책이라 부른다. 또한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라 부른다.
생명나무와 선악과에 대해서 자세히 짚고 넘어가보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대체 선악과가 뭐 길래 그걸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을까?
오늘날 사람들이 복음을 퇴색시키고, 생명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선악과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곧 타락의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의 원인을 우리가 알아야 그에 대한 처방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선악과를 먹는 것이 왜 타락인지를 이해해야, 그 타락에 대한 대안과 처방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확한 처방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선악과는 두 가지의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첫째는 자유의지의 상징이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그 사실을 선악과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둘째는 순종에 대한 시금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순종해야할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물이라는 견해로써, 쉽게 말해서 인간이 피조물로써의 자기 위치를 깨닫고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선악과를 그 상징물로 두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선악과를 이해할 때, 피조물로서 하나님에게 순종해야함을 가르쳐주기 위한 상징적 개념으로 이해를 한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이다. 아마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선악과를 이 두가지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또 신학교에서도 대부분 이렇게 가르치고 있으며, 많은 목사님들께서도 신학생 시절에 이렇게 배우셨을 것이다. 사실 이 두 가지의 견해에 문제는 없다. 틀린 이야기가 없으며, 분명히 맞은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견해는 선악과의 정체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내고 있진 못하다.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타락은 “인간의 불순종 때문에 타락되었다”라고 결론이 날 수밖에 없다. 타락의 원인을 불순종으로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타락의 원인은 불순종이다. 로마서에서도 이 부분은 명확하게 불순종이 원인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롬 2:19)”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는데, 타락의 원인은 “불순종”이지만, 타락의 내용은 “선악을 알게 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정말로 걱정하셨던 것은 인간이 불순종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구별할 줄 알게 되는 것이었다. 인간이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이 정말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그 위험한 상황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사과를 먹지 말라고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인간은 결국 불순종해서 사과를 따먹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경우에도 오늘날 이 인류 역사 가운데 있는 타락의 내용을 설명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사과를 따먹고 타락했을 경우의 인간과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을 경우의 인간이 겪게된 타락의 결과가 똑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전통적인 이해를 통해 선악과를 바라본다면, 즉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서 타락했다는 이해를 통해 선악과를 바라본다면, 타락의 개념자체가 율법주의적 관점으로 흘러가버린다. 쉽게 말해 인간이 왜 타락하게 되었느냐는 질문 앞에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다”라는 대답이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사과나 딸기 같은 다른 과일이 아닌 선악과라는 열매를 먹었다는 그 사실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비극적인 존재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인간이 그런 비극적인 존재가 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유독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창 2:16~17)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의 타락을 이해할 때는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불순종도 간과하고 지나가선 안 되겠지만, 인간이 따먹은 열매가 하필이면 선악과였다는 그 사실에 우리가 더욱 집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선악과는 어떤 열매인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는 것은 인간이 선과 악을 깨닫는 것이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 눈이 밝아졌으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스스로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사탄도 마찬가지로 하와를 유혹할 때 이 사실을 이야기했으며, 하나님께서도 타락한 인간을 보고 같은 말씀을 하셨다. (창 3:5, 3:7, 3:22) 그렇다면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이 어째서 타락의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성경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같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5)”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2)”
하나님께서는 바로 “하나님같이 선악을 알게 된다”는 이 결과를 걱정하신 것이다. 또 그렇게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복이 아닌 화가 될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금지하셨을까? 여기서 “하나님과 같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같은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존재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과 같이”라는 말은 로마서 5장에서 그 의미가 분명하게 나온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것을 “왕 노릇”이라 표현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롬 5:21)”
우리 인간의 왕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 인간의 왕은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왕이시길 원하시며, 인간들이 자신들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은 싫어하신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삼상 8:6~8)”
결론적으로 선악과의 문제는 인간이 독립적인 존재로써 자의적, 주관적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인간은 모든 판단을 자기중심적인 자의적 선악의 기준에 의해서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삶인 것이다. 쉽게 말해 자기 생각에 옳고, 자기 생각에 그른 것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 삶. 그것이 바로 타락한 삶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삶을 가리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삿 17:6)” 라고 표현한다. 또 이사야서에서는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 (사 53:6)” 라고 하는데, 이런 것들이 바로 죄다. 그러므로 죄는 불의, 거짓말, 짜증, 화냄이 죄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이다. 또한 죄된 행동은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죄를 짓는 행동이다.
인간들이 살아온 역사를 돌아보면 언제나 전쟁과 싸움, 분쟁들이 가득했다. 왜 전쟁을 하고, 왜 싸우며, 왜 분쟁이 일어나는가? 결국 자기입장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서 전쟁을 하며, 자기입장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불의를 꺾기위해 싸움을 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곧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사에 왜 이렇게도 평화가 없는가하는 문제도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자기의 입장에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서, 서로 싸우는 것이다. 이렇게 선악과에 대한 문제가 밝아지면, 결국 인생의 문제가 생기는 근본원인까지도 밝아진다. 인생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곧 시비(是非)를 가리는데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시비를 그치면, 그것을 통해 전쟁과 싸움과 다툼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아담 안에서 자신만의 선악기준이 있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미 인간의 본성이 되어버린 그것을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시비를 따지는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때문에 인간의 삶은 결코 평화로워 질수가 없다.
그렇다면 정말로 인간의 삶은 불행의 연속인가? 인간의 이러한 시비를 그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 이러한 자기 판단의 시비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럼 과연 그 생명이란 무엇일까?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의 모습으로 예표된 이 생명은, 쉽게 말해서 “선악과의 반대”이다. 바로 판단의 주체가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판단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만약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면, 인간은 선악의 구분이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는 방종(放縱)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생명나무의 실과 역시 선악을 가려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다면 인간은 선악을 가려내는 기준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에게 있는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선악의 판단이 자의적이 아닌 “하나님 의존적”으로 되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것은 선하다” “저것은 악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기준이 곧 사람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생명나무의 실과는 중국 신화 속에 나오는 천도복숭아처럼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을 얻는 것 말고도 더 크고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건 바로 이 생명 속에는 하나님의 선악의 원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선악과가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독립적 존재방식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처럼”이라면, 생명과는 하나님 수준으로서의 “하나님처럼”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선악의 기준이 곧 사람의 기준이 되며, 그 선한 것을 행하고 그 악한 것을 행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까지도 이 생명 안에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나무의 정체다.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경륜의 계획을 완성하려 하신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경륜은 이루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꿈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 1장에서도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을 이야기하면서,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안에서” 라는 말이 수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엡 1:1, 1:3~4, 1:6~7, 1:9~10, 1:12~13, 1:15, 1:20) 그리스도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바로 생명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생명나무는 곧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생명과를 먹는 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생명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가보자. 생명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 의존적인 삶이라는 사실을 앞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이 하나님 의존적인 삶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을까? 바로 “은혜”다. 다시 말해 하나님 의존적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은혜로 산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내가 노력하거나, 내가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놓으신 사실을 근거로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이다. 은혜라는 것은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 수 있도록 값없이 은혜를 주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을 말할 때, “은혜의 경륜”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엡 3:2)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과 그 생명을 은혜로 받는 원리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하고, 이 책에서는 일단 이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인간의 타락 -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인간은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게 되었다. 그런데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조치가 뭐냐면, 곧바로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하시는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22~24)”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을까? 선악과를 따먹었다 해도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게 해주실 수는 없었을까?
그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생명과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명나무의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봐서 쫓아내셨다. 다시 말해 생명과를 먹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 쫓아낸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인간은 이미 타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타락한 상태로 인간이 영생을 하게 될 때, 그것이 과연 축복이라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타락한 상태로 영생을 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불행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고, 다시 돌아와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없게 하려고 천사들과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 때, 그 홍수를 통해서 에덴동산을 완전히 감추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신 데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 또 다른 이유는 바울의 말대로 감추어졌던 비밀(엡 3:9)이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쉽게 알 수는 없지만, 4장부터 이어지는 타락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그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다. 그 이유는 인간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도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타락의 결과를 인간들 스스로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다음에 벌어지는 창세기 4장부터 6장까지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어 타락하게 된 결과가 무엇인지 너희가 봐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바로 타락의 결과를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내버려두셨다는 것이다. 로마서 1장을 살펴보면 이것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롬 1:21~24)”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장 24절의 말씀대로 인간을 더러움에 내버려두신 것이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먹게 된 결과와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들이 직접 깨닫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고, 인간은 에덴동산을 나와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상하셨던 대로 인간들은 죄에 대한 결과로 말미암아 죄악의 늪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 4장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