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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의 숲-정진국 목사 "하나니의 경륜을 계시한 책" 성경의 숲

영국신사77 2007. 4. 26. 20:21
성경의 숲-정진국 목사 "하나니의 경륜을 계시한 책" 성경의 숲

2006/12/1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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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경륜을 계시한 책

 

정진국 목사

 

 

하나님의 경륜을 계시한 책

 

일반적으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이 뭐냐고 물어보면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분명 틀린 말이 아니며,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신앙인들 역시 성경이 뭐냐는 질문에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라는 답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성경에 대한 뚜렷한 정의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함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명제 안에는 다양한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명확하고 뚜렷한 답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성경이 무엇인가에 대해 뚜렷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 그 점을 하나씩 살펴보자.

  성경은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0~21)”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며,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 졌다. 하나님께로부터 “경의 모든 예언”을 받아 말한 것이 곧 성경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어떤 대단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셔야만 한다. 오직 그것만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사람에게 알려주는 행위를 계시라 말하는데,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일컬어 “계시의 종교”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계시란 무엇인가? 계시라는 말의 한자는 “열어서(啓) 보여준다(示)”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무엇인가 감추어 둔 것을 Open하여 보여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열어서 나타내어 보여주시는 행위를 말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한 것을 사람의 말로 기록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더 성경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으로도 “완벽하게 성경을 정의 내렸다”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다시 말해 그저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책이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혹은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수많은 성경의 말씀들 중에서 중점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놓칠 우려가 있다.

 

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분명히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여러 가지의 말을 하게 될 것이며, 또한 여러 가지의 말에는 여러 가지의 뜻이 뒤따를 것이다. “밥 먹어라” “말 잘 들어라” “공부해라” 이 밖에도 수많은 말을, 수많은 뜻을 담고 아들에게 할 것이다.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많은 말씀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 많은 말씀들 중에서 우리가 봐야할 핵심이 뚜렷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다양한 말씀을 하셨지만, 그런 다양한 말씀들 속에는 사람들에게 핵심적으로 계시하려고하는 내용이 있다.

 

에베소서에서는 그러한 계시의 핵심을 일컬어 “경륜(엡 1:9, 3:2, 3:9)”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자신의 뜻을 계시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경륜이라고 한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을 계시한 책”이라고 해야 성경에 대한 정말 올바른 정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뭘 배워야 하겠는가? 당연히 하나님의 경륜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성경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풀리지 않는 매듭과 같던 성경이 하나씩 풀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마침내 성경에서 말하고자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비밀과 세대적 경륜

 

그렇다면 경륜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보편적으로 경륜이라는 말은 듣기가 힘들다.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다하더라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경륜”이라고만 이야기하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고, 또 널리 사용되는 “경륜”이라는 말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로 사이클 경주를 경륜(競輪)이라 부르며, 두 번째로 연륜이나 연륜에서 묻어나는 지혜를 일컬어 경륜이라 부르곤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뜻을 경륜이라 부르고 있다.

 

즉 성경에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으로써의 경륜이라는 말을 쓰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경륜이라는 말에 담긴 정확한 뜻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륜”이라고 하면 앞서 이야기한 두 번째 뜻과 연관 지어서, 하나님의 연륜과 그 지혜라고만 생각한다. 때문에 에베소서에 나타난 경륜에 대한 말씀을 읽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경륜(지혜)과 사람의 지혜는 다르지.”라는 개념으로만 이해하게 되는데, 이는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하게 깨달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정확히 경륜이라는 말을 어떻게 쓰고 있을까? 앞서 이야기했듯이 경륜에 대한 말씀은 에베소서에서 뚜렷하게 나와 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1:9)”

 

앞의 내용에서 계시란 감추어 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음을 미리 설명한 바 있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다고 표현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준비하신 것이 그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에베소서 3장에서는 경륜을 이해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엡 3:1~4)”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교회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에게 은혜의 경륜을 주셨다고 말했다. 그리고 4절에서 “이것(에베소서-성경)을 읽으면 내가 깨달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너희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경을 읽음으로 알 수 있는 그리스도의 비밀. 그것이 바로 경륜이라는 것이다. 또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엡 3:8~9)”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비밀의 경륜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온전히 드러난 바가 없이 부분적으로 알려졌으나,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온전히 드러나게 된 하나님의 비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이다.

 

에베소서의 원어를 살펴보면 경륜이란, 헬라어로 오이코노미아(οίκονόμία)다. 이것은 오이코스(οίκος : 집, 가족, 가정)와 노모스(νόμος : 법)의 합성어이다. 결국 오이코노미아라는 말은 직역하면 “가정 법” 혹은 “가정을 다스리는 법”이 되는 것이다. 또 이 오미코노미아라는 단어는 오이코노모스(οίκονόμος)와 같은 말인데,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청지기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가정 법(오이코노미아:οίκονόμία)”이라는 것은 청지기가 집안의 일을 경영하고 관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가정을 다스리듯이 우리 인간을 경영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륜이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경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왜 굳이 “경륜(오이코노미아: 가정 법)”이라는 말로써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일까? 유명한 세대주의 학자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는 경륜이라는 말을 “세대”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가정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때,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사람에게는 유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와 같이 성장하는 단계가 있는데, 이런 단계들을 일컬어 세대라고 한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유아기 때와 장년기 때가 같은가? 유아기 때 아이를 다루듯, 장년기에도 같은 방법으로 다룰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이처럼 각각의 세대에 따라서 부모가 아이를 다루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가정을 다스리는 방식이 세대에 따라 서로 틀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목표는 어떤가? 유아기 때 다루는 법과 청년기 때 다루는 법이 다르지만, 아이를 다루는 궁극적인 목적은 항상 동일하다. 아이가 올바르게 자라게 하려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동일한 목표를 위해, 유아기 때는 그 나이에 맞는 방식으로, 청소년기 때는 청소년 시기에 맞는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게 된다. 성경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계획을 일컬어서 단순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 않고, 경륜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런 세대적인 방법의 차이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다스리시듯 세대적인 상황에 따라, 성장의 과정을 염두에 두고 다루신다. 어떠한 목표는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목표를 이루어 가실 때, 과정을 두고 세대에 따라 각각 다른 형태로 다뤄 가시는 것이다. 그것을 계시한 책이 성경이다. 그래서 이 점을 모르고 성경을 보면, 성경을 올바르게 정리해서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경륜을 계시한 책”이라고 봐야한다.


성경에 나타난 세대의 구분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세대를 구분해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성경에는 필연적으로 세대가 구분되어 있다. 또한 각각의 세대는 동일한 목적을 향해서 가고 있지만, 각각의 세대에서 다루고 있는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음식 같은 경우가 그렇다. 최초의 아담과 하와는 채식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창 1:29) 그러다 노아홍수 이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육식을 허용(창9:2~5)하셨으며, 출애굽 이후에는 또 다시 음식 제도가 바뀐다.(레 11:1~47) 그리고 신약시대에 들어서 음식 제도가 또 바뀌어져서, 율법에 대한 규제가 풀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행 10:9~16, 15:3~20) 이처럼 육식에 대한 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성경에서는 제도의 변천과 함께 세대의 구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성경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세대적 구분이 무엇인가? 구약과 신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문제 하나만을 보더라도 구약의 행동 양식과 신약의 행동 양식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율법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복”에 대한 개념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구약 시대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상으로 물질의 복을 주셨다. 다시 말해 구약에서는 순종의 결과가 물질적 축복이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상으로 무엇을 허락하셨는가? 물질의 복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통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당한 핍박과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 그리고 스데반 같은 집사들과 그 외에 수많은 신앙인들을 이야기하면서,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에 대한 말씀을 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1~1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들어서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돌변하셨는가? 구약에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신약에 들어서는 무관심의 하나님이 되셨는가? 그렇지 않다. 신약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따른 순종의 결과로 물질이 아닌 영적인 복을 받았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중심으로 사람을 다루신데 비해, 신약에서는 순종에 대한 축복으로 영적인 복을 받은 것이다.

 

구약의 “물질”은 결국 신약의 “영”을 강조하기 위한 그림자였으며, 신약의 “영”을 설명해주는 그림책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수많은 기복주의 신앙인들이 신약의 시대에 살면서 순종을 통한 구약의 복을 간구하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폐단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아이를 착하게 키우려는 부모의 교육과 같은 것이다. 어린 아이일 때 부모는 아이에게 사탕을 주고, 매를 때리며 아이를 가르쳐간다. 아이가 착한 일을 하면 사탕을 주고, 나쁜 일을 하면 꾸중하면서 교육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기나 청년기에 들어서면 아이에게 예절을 가르친다. 이때는 사탕을 주거나, 매를 때리는 것보다 교훈을 통한 예절을 가르치는 것으로 교육한다. 그렇게 하여 아이가 장년이 되면 마침내 사람됨이 형성된다. 결국 사탕을 주고, 매를 때리고, 예절을 가르친 것은 아이가 장년이 되었을 때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을 하나님의 경륜에 대입해보자.

 

어린아이는 곧 구약의 사람들이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사탕을 주셨으며, 불순종하면 매를 드셨다. 그런데 이제는 신약시대에 들어서 청년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청년이 된 자녀들에게 또 다시 사탕과 매로 가르치려 하시겠는가? 20살이 넘은 아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들었다고 해서, 사탕을 쥐어주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린아이에게는 착한 행동에 대한 뚜렷한 개념 없이 배워야 했기 때문에 사탕과 매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청년이 되면 개념을 이해하는 때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절과 교훈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장년이 되었을 때, 예절과 교훈은 그 사람의 됨됨이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됨이 나이를 먹은 자녀가 받게 될 새로운 형태의 사탕인 것이다. 만약 20~30대가 된 사람이 자신의 부모에게 “아빠, 오늘 제가 인사 잘했으니까 사탕주세요”라고 한다면, 이 아이가 과연 정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린 그 사람의 정신 상태를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앙인들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청년이 되어서도 아버지에게 사탕을 요구하고 있다. 나이를 먹어서도 아버지에게 사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에 버젓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려는 뜻에서 사탕과 매를 사용했던 것뿐인데, 아이는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그 속뜻은 보지 못하고 사탕과 매만을 보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세대적 경륜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약의 복을 여전히 기대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들이 소위 기복주의라 하는 잘못된 신앙풍토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이 계시된 책이며, 우리는 그 경륜을 볼 때 세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세대적인 경륜을 이해하느냐 이해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느냐 실수를 범하느냐로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을 분명하게 구분하셨다. 그와 함께 많은 부분으로 세대를 구분하셨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엡 3:9)을 깨닫기 위해 세대를 구분하여 볼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