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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답사기](하)알렉산드리아와 클레오파트라

영국신사77 2007. 4. 10. 13:14

[이집트 답사기](하)알렉산드리아와 클레오파트라

( 문화면  2004-6-28 기사 )


 -찬란했던 황금빛 문화터 무심한 관광객들만 북적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의 펠루시움에 입성한 것은 지금부터 2,336년 전인 BC 332년 가을이었다. 알렉산더대왕의 마케도니아군은 당시 이집트를 통치하던 페르시아 마자케스의 지시로 저항을 받지 않고 수도 멤피스를 점령했다. 그는 멤피스의 수호신인 신성한 황소를 아피스신에게 바치고 경의를 표하고 시의 오아시스에 있는 아몬신전에서 신탁을 받는다. 룩소르신전 벽면에는 파라오의 모습을 한 자신이 미노스신 앞에 서있는 부조를 새기게 했다. 그는 지중해로 흐르는 나일강의 하류로 진군, 카노푸스까지 갔다. 마레오티스 호수를 우회하여 호수와 바다 사이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에 좋은 곳을 발견한다. 라코티스라는 조그마한 어촌에 그는 병사들로 하여금 밀가루를 뿌리게 하는 방식으로 도시건설의 윤곽을 잡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의 방향과 도시의 건물을 조화시켜 여름에는 시원한 공기, 온화한 기후에 알맞게 도시구도를 잡는다. 3면이 호수, 북쪽은 지중해를 바라보도록 알렉산드리아 건설의 기초를 다졌다.

 알렉산더대왕은 BC 323년 6월3일 고열로 쓰러졌으며 13일 숨을 거둔다. 이집트에서 인더스강까지 동서로 4,000㎞, 남부러시아에서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해협까지 남북 1,800㎞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정복했으나 그 땅은 분할된다. 대왕의 최측근 장군이었던 마케도니아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건국한다. 그는 막강한 군단과 그리스인 시종과 가신들을 대동하고 새로운 왕조를 일으켜 40년간 이집트를 통치한다. 이집트 고왕국의 수도 멤피스, 신왕국의 수도 테베(룩소르)에 이어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로마 아테네와 함께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부터 클레오파트라여왕까지 330년간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지중해의 정치 중심지, 물류 중심지, 학술과 예술의 중심지, 보물이 가득찬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225㎞ 거리에 있는 알렉산드리아는 오늘날 이집트 제 2의 도시, 나일강 하구 지중해의 관문도시, 온난한 기후의 관광휴양 도시로 알려져 있다. 역사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버스에서 우리들은 알렉산더대왕과 클레오파트라여왕의 족적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사막 한가운데 일직선으로 뻗은 고속도로는 군데군데 4차선 확장공사를 끝낸 흔적이 역력하다. 사막의 지평선 위로 태양이 뜨겁다. 사막의 이곳저곳에 오아시스처럼 푸른 숲을 조성하고 농토로 개간한 곳도 눈에 들어온다. 이집트인들이 사막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집트의 저력은 사막에서 나올는지도 모른다. “사막이라도 부럽다! 부럽다! 저 넓은 땅” 하고 소리없이 외쳐보는 것이다.

 BC 15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그리스계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이 도시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5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했다. 베타는 북쪽 지역으로 왕궁, 박물관, 델타는 동쪽지역으로 유대인 지구이며, 나머지 알파 감마 엡실론 지역은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오늘날 알렉산드리아에서 2,000여년 전의 도시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왕궁도 없고, 저 유명한 파로스 등대도 없다. 폐허 한가운데 폼페이우스 기둥만 우뚝 서 있다. 그러나 거리는 사람들로 혼잡하고 시장은 활기가 넘친다. 지중해를 향해 반달 모양으로 동서 길이 25㎞, 남북 폭은 2㎞로 펼쳐져 있다. 알렉산드리아항의 코르니시(해변도로)는 이탈리아의 나폴리항, 프랑스의 니스항, 쿠바의 아바나항의 원형이 아닐까.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소스트라토스에게 파로스섬에 등대를 건설하라고 명한다. BC 279년에 완공된 이 등대의 높이는 180m, 부속실은 300개이며 밤에는 50㎞밖에서도 배들이 등댓불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등대 이름은 섬 이름을 따서 파로스 등대라 했다. 8각형 모양의 등대는 1303년, 1326년 두 차례의 큰 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된다. 1480년 이집트의 술탄 카이트 베이가 옛 파로스 등대 부지에 `카이트 베이 성채'를 건설한다. `카이트 베이 성채'는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코발트색의 지중해 파도가 해안을 하얗게 할퀴고 있다. 몰려드는 4전세계의 관광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낚시를 드리우는 낚시꾼들은 한가하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파로스 등대의 잔해는 바닷속에 잠겼다. 그나마 오스만 터키제국 군대를 막기 위해 건설된 `카이트 베이 성채'에서 1798년 나폴레옹함대와 넬슨함대가 벌였던 해전의 역사를 더듬어 본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알렉산드리아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식량을 보내준 로마황제 디오클레시안을 위해 건립했다는 `폼페이우스의 기둥'이 폐허 한 가운데 서 있다. 높이 25m, 지름 2m의 거대한 붉은 색 기둥의 돌은 아스완 채석장에서 가져왔다. 옛날에는 400개의 기둥이 있었으나 지금은 1개 밖에 남아있지 않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수호신인 아피스의 신전도 물론 흔적도 없고 3개의 화강암 스핑크스가 을씨년스럽게 앉아있다. 관광객들은 이 스핑크스와 폼페이우스 기둥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3세기경 로마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 3개의 원형극장을 건설한다. 콤 알디카지역에 남아있는 원형극장에서 이 도시의 번영을 엿본다. 몇개 남지 않은 붉은 색 푸른 색 돌기둥과 13층 계단의 대리석, 그리고 무대뒤편 좁은 터널길에서 여러가지 소리가 지금도 재생된다. 우리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소리의 재생을 실험하고, 햇빛속에 나란히 앉아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알렉산드리아와 안녕을 고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알렉산더대왕의 시신을 옮겨와 묻었다는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무덤 또한 어디에 있을까. 알렉산드리아 도시 땅 밑에, 또는 지중해 바다 밑에 잠들어 있을까, 아니면 분해되어 버렸을까. 로마의 시저와 결합하고, 시저가 살해된 후 안토니우스와 결합한 클레오파트라와 영혼은 알렉산드리아 하늘을 여기저기 떠도는 것은 아닐까. 코브라가 자신을 물게 하여 죽음으로 자신은 물론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마감한 역사의 뒤안길에는 여왕의 당당함과 나라의 비운을 결단한 어떤 힘을 느끼게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말이 없다. 알렉산드리아를 뒤로 버스에 오른 우리들 또한 말 없이 정적의 일순을 맞는다. 이집트 제 32왕조의 수도 알렉산드리아 탐방은 그렇게 끝났다.

 김영기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