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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영국신사77 2007. 4. 9. 22:54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관광

 

알렉산드리아는 카이로에서 180킬로미터 북서쪽 지중해 남안에 위치해 있는 인구 400만의 이집트 제 2의 도시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제국(帝國) 내에 세운 도시 중 자기 이름을 붙인 것은 이곳 외에도 많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도시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다. BC 331, 대왕은 이곳을 정복하고 아프리카정복의 전진기지로 이 도시를 건설했으나  알렉산더 대왕은 이 곳을 다시 방문하지 못했다. 이 후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이집트의 수도가 되어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우고 지중해 연안지역에서 로마 다음으로 큰 경제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계획은 이 도시를 세계제국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으나, BC 31년의 악티움 해전과 BC 30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멸망으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로마 정기에는 다시 번영하였으나, 이 무렵부터 유대인의 식민지가 된 느낌을 가졌으며, 그리스도교도 전파되어 종교적 분쟁의 거리로 화하였다. 그러나 이슬람들이 수도를 카이로에 세운 이래, 쇠퇴일로를 걸어 제2의 도시로 전락하였다. 14세기 대 지진으로 말미암아 도시는 황폐화 되었고 나폴레옹이 이 곳을 점령했을 때는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이집트의 제일의 항구도시 일뿐만 아니라 기계, 시멘트, 조선, 구리정제, 석유정제 등의 공업과 곡물, 종이, 면화거래 등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상공업의 중심지이다. 지중해 기후로서 이집트의 휴양관광지로서 명성를 높이고 있다 

 

카타콤(Kom El-Shuqafa)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알렉산드리아 서편에 위치한 카타콤 이다. 콤 엘 슈카파는 아랍어로 질그릇 파편 무더기란 뜻이라 한다. 아마도 발굴되기 전에는 질그릇 쪼가리들만이 쌓여 있었던 듯하다. 무덤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제사에 쓸 음식을 담아온 질그릇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이곳에 버리고 갔기 때문에 주위가 온통 질그릇 파편들로 덮여 있었을 것이다. 1892년 질그릇 파편을 보고 유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 지역을 발굴했으나 아무것도 발견 못했다. 1900년 어느 날 수레를 끌던 당나귀 한 마리가 발이 빠지면서 구덩이에 쳐 박혔다. 당나귀가 카타콤으로 가는 문을 연 셈이다.

 

1995년이나 되어서야 일반인에게 공개하기 시작한 이 곳은, 1~2 세기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최대의 지하분묘로서, 로마 양식으로 지어진 지하 3층의 공동묘지 이다. 기독교 공인 전에 그리스도 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지하 교회나 무덤을 카타콤 이라고 부른다. 본래는 신분이 높은 가족용 지하묘지로 만들어 졌다가,  3세기 이후는 일반 시민의 공동묘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 지하묘지가 바위를 뚫어 만들어 졌다. 가운데가 뻥 뚫린 지름이 6미터나 되는 우물 같은 구조의 수갱(竪坑) 가장자리에 만들어진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면, 둥근 천정이 있는 원형의 방이 나오고 왼편으로 25평 남짓의 큰 방이 있는데, 유족들의 대기실 겸 식당으로 사용된 시설이라고 한다. 방 한 가운데 자 모양으로 사람들이 앉을 자리가 툇마루처럼 만들어 져 있는데, 폭이 2미터 정도나 되어 누워서 대기하기도 했던 듯하다. 전체 길이는 10미터 정도. 지금은 그냥 석상(石床)이지만 당시에는 부드러운 쿠션이 깔려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가운데 있어야 할 식탁은 보이지 않았다. 가운데 계단을 몇 발자국 올라가면 양 옆으로 각기 남 녀 모습의 석상이 있고 그 앞에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석관이 있다.  그 앞쪽 벽에는 코브라 두 마리가 태양을 이고 있는 모습이 부조 되어 있다. 여기에 묻힌 사람은 그레꼬로만 시대의 파라오인가? 왜 이름을 알리는 표지가 없을까? 그 주위로는 관 하나가 들어감직한 구멍들이 질서정연하게 파여 있다. 이런 작은 무덤들은 계단을 통해 곳곳에 있어 수백 개는 되는 듯 했다. 모든 촬영은 일체 금지. 카타콤 내부는 말 할 것도 없고, 입구에서 아예 카메라를 맡겨야 했다.

    

 

로마식 원형극장(The Roman Amphitheatre)                      

                                

 카타콤을 나와서 우리는 로마식 원형극장으로 향했다. 카타콤의 북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폼페이의 기둥이 있지만 일정관계로 생략. 폼페이의 기둥은 폼페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무슨 연유인지 그렇게 불리고 있으며 밑둥의 지름이 3미터 높이가 30미터의 로마 식 기둥이다. 콤 엘디카(Kom El-Dikkah; 돌무더기 언덕이란 뜻)는 알렉산드리아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그레코로만박물관에 가까운 콤 엘디카 유적 속에서 1967년에 발견된 원형극장은 1963년 신축건물을 짓고자 무슬림 공동묘지 터에서 작업을 하던 중 로마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대대적인 발굴작업 끝에 원형극장은 가장 늦게 1967년에 발굴되었다.

 

이 지역은 2세기경부터 조성된 거리로 판단되며 원형극장은 관객석이 13계단으로 되어 800여명이 앉을 수 있고 무대는 관객석의 한 가운데 이며 관객석의 뒤편으로 공연 준비 시설도 보인다.

 

연극 공연이나 레슬링 등 격투기 대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좌석은 유럽 산 흰 대리석이고, 원주는 아스완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무대 중앙에 박아 놓은 둥그런 돌 위에 서서 말을 하면 마치 스피커를 통해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울린다. 매우 신기하다. 이 곳을 방문하거든 꼭 한번 시험해 보시라.

 

 그 옆에는 좀더 먼저 발굴된 로마시대의 거리, 강의실, 공동목욕탕 등이 있다. 최근 극장 옆의 강의실 형태로 보아, 이 원형 극장은 대학의 강당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인류 최고(最古)의 대학이 이곳에 있었다는 말인가? 알디카의 유적 주위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펠루카의 등대 유물 등이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기록으로 봐서는 더 북쪽에 대형 극장이 있다고는 하나, 위치가 확실치 않아 발굴되지 못하고 있다.

 

마가교회(St. Mark Coptic Orthodox Church)

 

 

  로마식 원형극장을 나와 들른 곳은 지중해변에 가까운 마가교회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St. Mark)는 원래 북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으로 이주를 했고, 숙모와 결혼한 베드로(St. Peter)에게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여행했고 서기 61년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여러 곳을 떠돌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마가는 신발이 헤어져서 먼저 신기료 장수에게로 갔다. 신기료장수 아니아누스가 신을 깁고 있는 동안 송곳에 찔려 피가 나자, 마가는 진흙을 집어 침으로 섞은 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하면서 상처에 발라 주었더니 거짓말처럼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었다.

 

  이 때부터 아니아누스와 그의 가족은 세례를 받고 신도가 되었다. 신도가 급증하자 이교도들이 마가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에 신도들이 마가를 당분간 피신하도록 권유했고, 마가는 아니아누스에게 추기경을 서품하고 다른 도시로 옮겨서 복음을 전파했다. 2년 후 돌아와서 교회를 세우니 이곳이 마가교회이며 최초의 콥틱교회다. 이교도들은 교회를 부수고 마가를 잡아다가 끈으로 묶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죽였다.

 

  신도들이 시신을 수습해 교회안의 비밀스러운 곳에 묻었다. 서기 828년에 베니스의 상인이 이곳에 와 시신의 일부를 훔쳐서 베니스로 가져갔다. 그러나 1968년에 교황 바울 6세는 마가의 시신을 이 곳으로 반환했다.

  지금의 교회는 새 건물로서, 중앙에 최후의 만찬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오른 쪽으로 가면 역대 교황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 이곳의 초대 교황은 성 마가 이다. 로마교황청의 교황명단과는 완전히 다른 콥틱교단의 교황명단이다.

 

 

 케이트베이 성채(Qaitbay's citadel)

마가교회를 나와서 우리는 지중해에서 잡은 생선으로 요리한 점심을 먹고 콰이트베이 성채로 향했다.

 

이트 베이 성채는 원래 세계7대 불가사의로 손꼽히던 파로스섬의 등대가 있었던 곳에, 등대가 지진으로 파괴된 후 세워진 유럽식 요새다. 이 요새는 1468년부터 1496년간 이집트를 통치한 맘룩 왕조의 술탄 콰이트베이가 세웠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콰이트베이 성채 또는 콰이트베이 요새라고 불리는 것이다. 콰이트베이는 당시의 술탄들이 평균 6년밖에 통치를 못한데 비하면, 26년간이나 통치하면서 재정을 튼튼히 하고 카이로, 알렉산드리아뿐만 아니라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에도 많은 모스크와 요새를 세워 종교, 예술, 국방을 강화하였다.

 

콰이트베이는 1477년 이곳을 방문하고 성채를 세울 것을 명령했으며, 성채가 완공된 1479년에 다시 와서 최신식 무기를 갖춘 용감한 군대를 배치하였다 한다. 이 후 이곳은 후대 술탄들에게도 중요한 요새로서 인정 받았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 성채를 접수했을 때, 이 성 안에서 십자군들이 사용했던 무기가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1805년 술탄 무하메드 알리가 중창했으나 1882년 영국함대의 공격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1984년 이집트 정부는 이곳을 유적지로 지정하고 대대적인 보수를 단행했다. 

 

  파로스의 등대는 고대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알렉산더 사후 이곳을 통치하게 된 프톨레미 소터(Ptolemy Sorter)의 지시로 29BC에 공사가 시작되어 아들인 프톨레미 필라델퍼스에 의해 완공되었다. 건축설계는 알렉산더 도서관에서 소스트라투스(Sostratus)가 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곳의 지형은 수심이 낮아 선박이 안전하게 운항하기에 매우 어렵기 때문에 등대가 필수적이었다. 등대는 밤에는 불을 피우고 낮에는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켰다고 하는데, 50킬로미터 밖에서도 식별되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적의 함선이 나타나면 거울의 빛을 이용해 적함을 불태웠다는 신화도 전해진다. 

 

  건물은  하단 사각건물의 높이가66미터, 중층 팔각건물이 28미터, 상층 원주건물이 7미터이고 그 위에 포세이돈의 석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건물의 가운데로 수직 갱이 있어 기름을 운반하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전체 높이는 115미터에서 130미터 정도로 추정되며, 현재 건물로 따지면 40층 건물의 높이와 필적한다. 이 건물은 도중에 부주의로 거울이 파손된 적이 있지만 수리를 하지 못했다 하며, 세 번의 지진 피해를 입는다. 첫 번째는 956년이었으나 큰 피해가 없었고, 두 번째 세 번째 피해는 1303년과 1323년에 입었으며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일정상 밖에서만 대충 둘러보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향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Library of Alexandria)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학술 연구 기관 으로서, 프톨레마이오스시대 세계최대의 도서관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이 도서관이 처음 세워진 것은 프톨레미 필라델퍼스에 의해서였다.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은 도서관이 세워진 후 부속기관으로 설립되었다. 박물관이 영어로 museum 이라고 한 것은 이곳에 뮤즈의 사원(Temple of Muses)이 세워지고, 그것이 박물관 역할을 하게 되면서 museum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프톨레미 3세는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는 사람은 그가 가진 모든 책과 두루말이를 헌납하도록 강요해서 이 자료들을 박물관에 모아 두었다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도서관의 성격인지 연구조사기관의 성격인지, 아직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도서관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이론이 많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가 이곳을 정벌했을 때 일부 파괴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고, 391년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이교도 관련 사원을 철폐했을 때 도서관자체가 파괴되지는 않았더라도 관련 서적은 모두 불태웠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때 별관으로 알려진 도서관도 파괴되었다. 그러나 더 많은 파괴가 642년의 무슬렘 정복 때 이루어 졌을 것으로 추정 된다. 당시 공중목욕탕의 불쏘시개로 6개월동안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고대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자리 옆에 세워진 최신형 알렉산드리아 도서관(The Bibliotheca Alexandrina)이였다. 이 도서관은 장서실, 독서실, 박물관, 천문관, 회의실 등이 최신의 시설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

 

2003년 완공된 건물로서 건물 전체의 모양은 풀 위에 비스듬히 세운 커다란 원형의 지붕을 한 모습이다. 지중해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의 기운을 받으려는 모습이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신념이 살아난 것이다. 풀의 가장자리는 화강암으로 벽을 쌓았고 건물의 벽면도 화강암으로 장식되었는데, 세계의 모든 문자를 장식으로 사용한 것이 이채롭다. 한글도 물론 있다. 사진에서 찾아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