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우드 홀(Sherwood Hall,1893-1991)
“나는 아직도 한국을 사랑합니다. 내가 죽거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땅에 묻어주시기 바랍니다.” (셔우드 홀)
반 세기(1890∼1940년) 동안 2대에 걸쳐 한국 의료선교사로 헌신했던 가정이 있다.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홀은 평양에서 의료선교를 펼친 부부.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셔우드 홀은 조선에서 처음 태어난 서양아기였다. 당시 윌리엄은 선교를 위해 기상천외한 발상을 했다. 서양 여자와 아기를 처음 본 평양 주민 10명씩 한 조로 5분씩 보여주며 전도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청일전쟁의 현장이었던 평양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느라 혹사당했고, 발진티푸스에 걸려 1894년 11월24일 소천했다. 당시 부인 로제타는 임신 7개월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딸 에디스마저 이질로 세상을 떠났지만 로제타는 불굴의 의지로 의료선교 활동을 지속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교육을 처음으로 시작했고, 서울에 동대문부인 병원을 세웠으며, 경성여자의학 전문학교를 열었다.
셔우드는 1900년 문을 연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귀국해 사업을 하려 했던 13살 셔우드 홀의 인생에 일대 전기가 있었다. 1906년 8월, R A 하디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인생의 목표를 바꿨다. 부친과 같은 조선의 의료선교사였던 닥터 하디의 설교가 비수처럼 소년의 가슴에 꽂혔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수행하기 어렵다. 기억하라. 이러한 영적인 힘은 계속적인 기도로만 얻어질 수 있다. 이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의 영광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초점이 바뀌어진다.”
이후 셔우드는 마운트 유니언 대학에 입학해 그곳에서 메리안 버텀미를 만나 결혼한다. 두 사람은 각각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25년 다시 조선 땅을 밟게 된다. 셔우드는 부인 메리안과 함께 해주에서 폐결핵 전문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며 1928년엔 ‘결핵환자의 위생학교’를 세웠다. 이후 미국에서 안식년 기간동안 접한 크리스마스 실 운동을 조선에 접목했다. 결핵요양소의 운영비 마련과 결핵에 대한 계몽을 위해 한국 최초로 남대문을 그린 크리스마스실을 1932년 12월3일 발행했다. 또 이웃소녀를 돕기 위해 우표수집광으로 소문난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 우표와 크리스마스 실을 보내자고 제안한 것은 셔우드 홀의 일곱살 난 아들 윌리엄이었다. 소녀의 쾌유를 비는 대통령의 짧은 답장이 백악관으로부터 도착했고 소녀는 놀랍게 건강을 되찾은 일이 있었다.
이 가정의 전도행전은 1991년 캐나다에서 각각 98세와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셔우드와 메리안이, 한 줌의 재로 돌아와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아들이 묻혀 있던 양화진에 안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