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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디아스포라 [Diaspora] 및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영국신사77 2007. 2. 3. 23:30

                    디아스포라 [Diaspora]

 

요약
팔레스타인 외역()에 살면서 유대적 종교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던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

디아스포라는 ‘이산() 유대인’ ‘이산의 땅’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분산() ·이산’을 뜻한다. 역사적인 서술에서 이 단어는 헬레니즘 문화 시대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통해, 그리스 근역()과 로마 세계에서 유대인의 이산을 가리키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역사적 배경
본문

BC 8세기 후반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 바깥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팔레스타인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왕국이 BC 734∼BC 721년의 아시리아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그리하여 아시리아 영토에 편입되었는데, 이때 많은 유대인이 고향을 떠났다. 또 BC 598∼BC 587년 바빌로니아인()의 침략으로 남쪽의 유다왕국이 멸망하자, 비슷한 이주현상이 일어났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개척자 같은 정신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많은 무리가 다른 지역, 특히 이집트로 이주하였다. 그 후, BC 4세기 초 알렉산드로스대왕페르시아제국을 정복하자, 근동에서는 그리스인()의 통치에 의해서 파급된 그리스문화에 실려 문화적인 혁신을 겪게 되었다. 또 교역과 상업이 급속하게 발달한 데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이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했던 탓으로, 유대인의 이산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매우 능동적으로 반응하여, BC 1세기 말엽에는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이탈리아에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나타났다.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2장 9∼11절에도 바르티아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키레네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언급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중심지는 로마제국의 3대도시인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였다. 안티오키아에 유대인들이 정착한 것은 BC 150년 이후였으며, 로마인은 그보다 더 늦었는데, 규모가 크고 부유하였으며 영향력이 강하기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신약시대의 디아스포라 학자 필로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만도 100만 가량 있었던 것 같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보다 그리스 문화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어서, 헤브라이어아람어를 사용하던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리스어를 상용()했다. 헬레니즘 문화권의 도시들에서 주로 수공업과 무역에 종사하던 그들은 본토 유대인들보다 높은 수입을 올렸으며, 그들이 행하는 무역의 증요성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같은 곳에서는 원주민보다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로마의 시민권이 제국()의 여러 곳으로 넓혀질 때, 바울로 사도처럼 그 시민권을 얻은 사람도 많았다.

                       디아스포라의 문화적 영향
본문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문화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학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적 헬레니즘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그곳의 유대인들은 ‘70인역()’이라고 불리는 구약성서그리스어 역본을 출간하여, 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들 중에서 많은 학자 ·저술가가 나왔는데, 필로가 가장 유명하였다.

 

  그리스문화에 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며 지도력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고, 성전과 성직자들을 후원했다. 팔레스타인 안에서는 야훼(하느님)에 대한 제사는 오로지 예루살렘(성전)에서만 거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종교적 회당(), 즉 시나고그가 디아스포라에서 생겨났으며, 그것은 팔레스타인으로 역수입되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도 유대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시나고그를 통해서였으며, 이 회당 조직이 사도 바울로의 전도여행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주목할 것은, 디아스포라를 통하여 최초로 반()유대인적 풍조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배타성, 경제적 번영, 특권들 때문에, 많은 도시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외국인 혐오가 퍼졌다.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체사레아 등지에서 반유대인 폭동이 일어났고, 법정에서는 유대인에게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끊임없는 반목이 계속되어 결국 칼리굴라의 박해로 이어져, 학자 필로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로마 법정에 박해의 중지를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 박해는 칼리굴라의 암살로 끝났다. 반유대적인 편견()은 키케로, 페르시우스, 세네카, 퀸틸리아누스, 타키투스로마의 문학가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2000년을 두고 전유럽과 중근동()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 집요하고도 비이성적인 반유대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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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아스포라 [Diaspora]
 
  ('분산'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히브리어로는 Galut

  ('유배'라는 뜻).

  유대 왕국이 패망하여 바빌로니아로 유배당한 뒤, 이방인 사이에 흩어져 살게 된 유대인들(→ 바빌론 유수). 또는 '유배되어' 팔레스타인 곧 오늘날 이스라엘 지역 바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나 유대인 공동체를 총칭한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진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키지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과 자신들과의 특수한 관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철학적·정치적·종말론적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이 관계에 대한 해석은 마지막에 '유배당한 자들을 한데 불러모은다'는 전통적 유대교의 메시아 희망에서부터, 하나님이 세계 전역에 순수한 유일신앙을 촉진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흩어놓았다는 개혁 유대교의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최초의 중요한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BC 586년의 바빌로니아 포로 때문에 생겼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유대 왕국을 정복한 뒤 유대인 가운데 일부를 노예로 삼아 끌고 갔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고레스) 대왕이 BC 538년 유대인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했을 때,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일부는 자발적으로 유배지에 머물러 살았다.

 

  초기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크고 중요하며 문화적으로도 가장 창조적이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성했는데, BC 1세기 그곳의 인구 가운데 40%가 유대인들이었다. AD 1세기경에 팔레스타인 바깥에 살던 유대인들의 수는 대략 5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가운데 4/5는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았지만, 팔레스타인을 자신들의 종교생활과 문화생활의 중심지로 보았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도 이미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 그뒤 유대교의 주요중심지는 바뀌었으며(예를 들면 바빌로니아·페르시아·스페인·프랑스·독일·폴란드·러시아·미국), 유대인 공동체들은 점차 뚜렷이 구별되는 언어·의식·문화 들을 받아들였는데, 그중 어떤 공동체들은 다른 공동체들에 비해서 비유대교적 환경 속으로 보다 철저히 빠져들어갔다. 어떤 공동체들은 평화롭게 살았지만, 다른 공동체들은 격렬한 반유대주의(anti- Semitism)의 희생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역할과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할 필요성 및 그 중요성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다. 대부분의 정통파 유대인들은 시온주의 운동(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 운동)을 지지하는 반면, 일부 정통파 유대인들은 현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때에 자기의 메시아를 보내려는 뜻을 방해하는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국가로 여기고 그것에 반대한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지하는 '셀릴라트 하갈루트'(shelilat ha-galut:유배를 부정함) 이론에 따르면, 디아스포라 안에서의 유대인의 삶과 문화는 동화(同化)와 문화적 특성의 상실로 말미암아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스라엘로 이민하는 유대인들만 유대인으로서 존속할 희망을 갖는다고 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입장을 비롯해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다른 어떤 입장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성립이 메시아 시대의 도래에 관한 성서 예언의 성취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혁파 유대인들은 미국을 포함해서 다른 여러 곳에 사는 디아스포라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전히 주장하지만, 1937년 미국 랍비 중앙협의회는 유대인들이 더이상 이스라엘로 귀환할 소망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선언한 1885년의 피츠버그 강령을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이 새로운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조국 수립을 지원하도록 적극 장려했다.

 

  그러나 1943년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미국 유대교 협의회는, 유대인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유대인이며,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의 고국에 주는 일체의 지원은,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불충스런 행위라고 선언했다.

 

  유대인 국가 설립을 위한 지원은 종종 박애적인 이유만 가지고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뒤로는,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오늘날 전세계에 사는 약 1,450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310만 명 가량이 이스라엘에, 590만 명 이상이 미국에, 그리고 210만 명 이상이 소련에 살고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 > 인문학 > 종교 > 유대교

 

 

                         

 

 

                   7.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2006/10/26 오전 12:12 

6.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1) 디아스포라의 유대 사회와 문화

  성전 멸망 이  후 유대인들의 삶은 총체적으로  '떠돌이 생활' 그 자체였다. 제1차 성전 멸망으로부터 시작된  유랑의 세월은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한 근동 지방을 비롯하여, 이집트, 아프리카  북부로 이어졌으며, 제2차 성전 멸망과 이어 계속된 제2차 유대 반란은 로마  세계 전체로 유대인을 분산시켰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유대인 박해와 모슬렘의  추방은 유대인들을 스페인을 비롯한 동부 유럽과 서부 유럽에 이르는 지역에 이르기까지 확산시켜 놓았다.
  이들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어느 정도의 교류를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팔레스틴의 지위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그것보다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 갔다.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는 예루살렘에로의  귀향이 하나의 이상이요 꿈이었다. 열강들의 영토에서 자신들의 법적, 종교적 지위가 약화되면 될수록 그들은 시온에로의 갈망이 더욱 불타 올랐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이 한쪽에서는 서서히 식어 가면서 디아스포라의 신학을 정리해 나갔다. 자신들이 속해 있는 문화와 전통속에서 고유한 유대교의 전통을 어떻게 재해석해 나가며, 정착해 나가느냐?하는 것은 현실적인 삶 속에서 하나의 필연적인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문화에 점차 동화되어 가면서 살아가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타문화를 거부하며 박해와 죽음까지도 감래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디아스포라의 삶은 각 지역의 정치적 변화와 문화적 변동과 더불어 그 방향을 결정해 나가야 했으며,  적어도 현대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수 천년동안 계속되었다.

 

① 중세 유럽의 유대인-아쉬케나지
  아쉬케나지(Ashkennazi)는 성경에서  야벳의 자손  중 고멜의 후예이다(창10:3;대상1:6).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모여 살던 이들은 커다란 왕국을 이루며,  바빌로니아를 치기도 하였다(렘51:27).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 고멜(Gomer)은, 비록 그  이름이 북서부 시리아의 게르마니카를 가리킨다하더라도, 게르마니아(Germania)로 묘사하고 있다(cf.BT Yoma 10a).
  이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에 관하여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에서 이  용어는 북서부 유럽에 정착하여 살던 유대인 공동체를 총괄적으로 묶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서 살던 유대인들은 아쉬케나지의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동부 및 남부  유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모든 유대인들을 지칭하고 있다.
  아쉬케나지의 문화적인  뿌리는 남부 이탈리야와  북부 프랑스였다. 12세기 야콥 메이르 탐(Jacob b.Meir Tam)은 아쉬케나지의 문화를 일으며 나갔다. 특히 이 지역의 유대인들은 전통적이고, 근본적이며, 엄격한 유대 사상과 관습등을 유지시켜 나갔다.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 후 다양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서 살아가면서 이들은 외적인 영향보다는 내적인 전통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성경과 탈무드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이러한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이들의 연구의 주된 관심사는 할 라카적인 원리를 찾으려는 것이었다기 보다는 성경의 주석적인 활동이었다. 아쉬케 나지의 이와같은 노력과 전통은 유대교의 학문적 전통의 뿌리가 되었다.
  15-6세기 서유럽의 유대인들이 동부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그 중심이 보헤미아, 모라비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지로 옮겨갔다. 이들은 히브리어와 독일어를 합성하여 자신들이 고안해  낸 이디쉬어(Yiddish)를 사용하였으며, 이 언어를 사용하여 많은 제의시(제의시)등을 창작해 나갔다.
  17세기 스페인의 유대인  학살로 인하여 많은 유대인들(스파라딤)이 동부 유럽으로 이주해 들어오면서 급속도로  아쉬케나지의 인구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1648년의 폴란드 대학살 및 18세기 러시아의 박해등으로 말미암아 아쉬커니지 유대인들은 오스트랄리아, 남아프리카, 미국등지로 흩어져 분산(분산)되어 갔다.

 

② 중세 아시아의 유대인-스파라디
  역사적으로 스파라디(Sepharadi)는 스페인과 포루투갈에 살던 유대인의 후예들을 일컫는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 오바댜 1장 20절에 나오는 말로써 스페인을 일컫는 라틴어 'Hispania'와 동의어로  보고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스파라디는 아쉬케나지가 아닌 모든 유대인들을 통칭하기도 한다.
  전승에 의하면 유대인의 스페인  진출이 솔로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의 역사적 근거는  찾을 수 없으며, 다만 711년 C.E. 모슬렘의 팔레스틴 정복 때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 곳까지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정치적, 언어적으로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과 교류가 있었던 증거가 있으며, 바빌로니아에 버금가는 문학과 철학등의 창작활동이 활발하였다.
  1148년 알모하드(Almohad)의 박해 이 후 스페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집중(집중)되면서 유대 공동체에는 적지  않은 압력과 박해가 가해졌다. 1391년 박해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추방되거나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또 1492년 유대인 추방령이 포고되면서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터어키 등지로 떠나야 했으며, 이 칙령은 공식적으로 1968년까지 유효했었다.
  적어도 중세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역사에서 스파라드의 인구가 아쉬케나지와 비교할 때 약 1/10정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할은 활발하고 중요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문화와 잘 조화를 이루면서 유대인의 새로운 전통을 많이 창출해 냈다. 스페인어 혹은 히브리어와 스페인어를 조화시켜 만든 라디노(Ladino)어로 된 성경 주석, 시, 드라마, 법전 및 신비주의 카발라 작품등 많은 문학 작품들을 생산해  냈다. 1553년에 라디노어로 쓰여진 페라라 성경(Ferrara Bible)은 가장 유명한 책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2) 중세 유럽의 유대인
① 중세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
  유대 역사에서 중세라  함은 640년 아랍-모슬렘의 통치 시대로부터 십자군시대를 거처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을 거쳐 17세기 유럽의 변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지위와 자치권을 위한 투쟁의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유일신 신앙을 가진 모슬렘과 기독교와의 관계  속에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살아  나가야 했으며, 이 두 정복자들 안에서 받은 여러  가지의 고난과 박해의 시기로 규정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삶 속에서  자신들의 지위와 자치권을 보장받고 인정받으려는 노력과 함께 정치적-사회적 삶을 영위해 나가던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세 유대인들의 경제 생활은  가장 특징적인 역할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가내  수공업과 무역을 중심으로 점차 커 나갔으며, 디아스포라의 곳곳에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점차 확대되어 갔다.
  특히 기독교 세계 내에서의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유대인들의 재력을 바탕으로한 지위를 확보해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봉건 영토내의 먼 지역에 여행하여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거나  들여옴으로써 지역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는데도 기여하였다.
  11세기에 접어  들면서 유대인들은 각 지역마다  지점을 두어 무역과 상업활동을 체계적으로 해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온 가족이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봉건 군주들 조차 이들의 이러한 상업 활동을 인정하면서 많은 이익을 나누어 가졌다. 상업을 통하여 점차 많은 돈을 번 유대인들은 이 돈을 일반인들에게 대여해 줌으로써 이자를 받고, 금융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번 돈으로 금과 은을 사들였으며, 이러한 상업 활동은 순환적으로 계속되면서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종종 지방 원주민들로부터 오해와 미움을 사기도 하였으나, 여러 지역에서  금융과 상업에 관한 한  유대인들의 숙련된 활동이 크게 인정 받게 되었다.
  중세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제국 내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남녀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던 상류층이 많았으며, 모슬렘의 스페인에서도 유대인들은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② 중세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증오심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의 기본적인 태도는 중세 이전, 후기 로마 제국 내에서 사실상 구체화되었다. 즉,  하나님의 유대인 선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그 선택이 이미 기독교로 옮겨왔다는 신학적 이해는 4세기 이후 확대되었다. 교황 스레고리 1세(Pope Gregory I,590-604)는 유대인을 아직도 교회와 대적하며 싸우는 자들로 보았으며, 유대인의 회당을 새로 건축하는 일등을 금지시켰다. 같은 시기의 교부들 역시 반유대적 설교를 하였다.
  나아가 7세기 또 하나의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슬람교가 등장함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태도는 원칙적으로  부정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모슬렘의 스페인 안에서 유대인들은 개종을 강요당했으며,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자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였다. 기독교와 모슬렘 간의  갈등과 투쟁 역시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이가 나빠지면서 서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모슬렘의 정복은 모슬렘 제국 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지위를 바꾸어 놓았다. 모슬렘 교도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은 단순히 이단일 뿐 아니라 비신앙인이었다. 소위 모슬렘 신앙을 신봉하는  공동체인 움마(Umma)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모두 적이었다. 모슬렘 안에서 탁월한  법과 실천 강령을 가지고 있던 수니파(Sunnite) 교도들은 알리의 추종자들인 혁명적인 시아트(Shiites) 교도들보다 비교적 관용적인 사람들이었다. 1008년 이집트가 시아트파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집트 내의 유대인들은 심각한 박해를 받게 된다. 참수형에 처해지거나 광야로 추방당하게 된 것이다.
  한편, 1096년 라인 계곡에서  집결한 십자군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마인츠(Mainz)에서는 기독교 개종을 거부한 약1,000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으며,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을 때에는 유대인들을 회당에 모아놓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슬렘과 십자군에 의한  종교적 박해는 유대인들에게 [순교자에 대한 기도](Kiddush Hashem)를 낳게  하였다. 즉, 개종하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간  이들로 부르며, 이들을 위한 기도를 통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신앙적 구심력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가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이 계속되자 왕  헨리 4세(Henry IV)는 강제로 개종한 모든 유대인들에게 본래 위치로 되돌아 갈 것을 허락하여 많은 유대인 도시와 공동체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이러한 조처는  지속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힘이나 스스로 자신들을 방어할 희망을 찾지 못하게 되자, 학살에 반대하는  군사적인 행동을 감행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다다랐다. 유대인들은 폭동을 일으켜 도시 밖에 성채를 구축하고, 그 안에 사는 비유대계 사람들을 밖으로 보낸 후 맞서 싸워 나갔다. 영국의 요크(York)에서는 이렇게 하여 고립된 유대인들이 포위를 당하여 견디지 못하고 모두 자결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중세의  유대인들은 점차 그 사회와 고립되어 가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해 가면서 내면화 되어갔다. 경제적인 지위도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이 때에 생겨난 새로운 종교 사상은 대부분 내재화, 신비화되어갔다. 대표적인 집단 가운데 카라이트(Karaites)가 있는데, 이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종교 전통이나 제의, 탈무드등을 거부하면서 오직 토라와 유대인 사이의 개별적이면서  직접적인  접촉을  강조하였다.  카라이트의  지도자는  베냐민  모세(Benjamin ben Moses al-Nahawendi)였다.

 

③ 중세 유대인의 법적 지위
  중세 유대인의 지위는 항상 세속 정부의 인가(인가)에 의해서만 그 역할을 보장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항상 그들의 자치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중세 사회에서 유대인들이 받은 정치적, 종교적 대우라는 것은 보잘것 없는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는 만만치 않았다. 서부 유럽의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돈을 빌려주는 일에 종사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교회와 제국, 교황과 황제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고조되면서 유대인의 종교적 지위를 위협하는 교황의 입장과 유대인의 경제적,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려는 황제의 노력이 상호 교차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가지게 된 것이 유대인의 경제력과 그들의 대부(대부) 행위였다. 돈이 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돈을  빌려주게 함으로써 그들의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거나, 심지어 죄를 지은 유대인들에게 면제부가 되도록 해 준 경우도 있었다. 이는 중세 봉건 제도 하에서 농노들은  봉건 군주에게 충성하고, 봉건  군주는 농노들을 보호해 주는 한 형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의 행위는  적어도 교황의 눈에는 부정적인 것이었으며, 더구나 교부들에게 있어서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들은 가인처럼 인식되었다. 황제의 지위 마저도 결정 지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 교황은 유대인들을 억압하였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실질적인 법적 차별은 없었으나 관습과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서 유대인은 증오와 미움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폭력적인 저항뿐 이었다.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기독교 어린이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살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더 큰 곤경에 처하도록 하였을 뿐이었다. 1286년 뮌헨에서는 "유대인들이 기독교 어린이들을 잡아다가 그 피를 뽑아 마신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으며,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이 사실을 문자적으로 믿었다.
  급기야 황제 프레드릭 2세(Frederick II)는 사제들을 불러 이 사실을 조사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여러 지역에 걸친  지역에서의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님이 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믿지 않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으로부터 유대인이  추방된지  거의  한 세기나  지난  1387년에  쓴 쵸서(Geoffrey Chaucer)의 칸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에서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④ 중세 유대인의 종교사상
  중세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징조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말경이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지도 체제는 귀족적인 계급구조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토라 연구에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층이 이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권위와 역할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러한 지도  체제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적 박해 속에서 이러한  체제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형태의 체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형식의 지도 체제와 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지도력의 권위를  주장하고  나선 사람은  모세  벤 마이몬(Moses  ben Maimon, 1135-1204)이었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해 이집트로 건너가  유럽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제도를 발견한  그는 과거의 제도를 거부하고 보다 강력한 정신적지도자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는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만을 강조하고, 탈무드학교에서 많은 돈을 받고 가르치는 행위등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합리주의자로서 전통과 신앙을 이성과 철학을 바탕으로 설명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유대 사상을 수정해 나갔다. 그는 유대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려 하였으며, 유대 상류 사회의 많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그는 명확하게 체계화된 철학으로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을  설명하였다. 그는 메시아의 인성(인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다 사회적인 성격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주의 철학으로 설명된 유대 신앙은 아직까지 이성적(리성적)인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과 논쟁을 거쳐야만 했다.
  메이르  벤 하레비(Meir  ben  Todros  ha-Levi Abulafia)와  메나헴  벤 솔로몬(Menahem ben Solomon Hameiri)는 마이몬의 합리주의적 태도와 해석에 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그의 이론을  반박하였다. 특히 마이몬의 육체의 부활을 거부하는 해석과 합리적 알레고리적 해석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헬라의 지혜"와 모세의 토라는 결코  종합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마이몬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유대교의 밀의적(밀의적)이며 신비적인 교리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두 학파간의 갈등과 논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았다. 15세기까지 계속된 이 논쟁은 결국  두 학파의 주장은 상호  보완적이며, "이성과 신앙은 길을 밝히는 두개의 등불"이라는 결론으로 어느 정도 매듭을 짓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해와 차이는 여전히 유대인의 문화와 종교적 전통속에 깊게 흐르는 두 줄기의 물줄기가 되었다.

 

⑤ 유대인의 재 이주
  많은 박해 속에서 유대인들은 힘들고 위험한 곳으로부터 새롭고 안전한 삶의 거처를 찾아서 떠나야  했다. 이들의 이주는 이슬람 세계로부터 기독교 세계로,기독교 세계에서 다시 다른 기독교 세계로, 서쪽으로부터 동부나 북부로 이주해 갔으며, 주로 도시로부터 소도시나 시골로, 유럽의 중요 국가로부터 변방의 국가로의 이동이었다. 서부 유럽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은 동부나 북부 유럽으로 대량으로 이주해 나갔으며, 주로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시아 등지로 옮겨갔다.
  특히 스페인의 카톨릭 지도자들은 1391년부터 1492년이 이르는 기간 동안에 스페인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으며 , 이는 또 다시  고향을 잃은 자들처럼 처참하게 쫓겨가야 했다.
  이들은 주로 한 곳에 보다 큰 집단적인 정착을 실시하면서 스스로 자신들의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 기회를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형태의 정착운동을 벌여나갔다. 나아가 이 시기에 쫓겨난  많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에로의 복귀를 서둘렀다. 순례단과 함께 팔레스틴으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들 가운데는 은행가나 상인들이 많이 있어,  팔레스틴의 경제적 이익과 부합되어 이주가 용이하기도 하였다.

 

(3) 유럽의 변화와 유대인 공동체
① 17-8세기의 유럽 사회의 태도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14-15세기에 걸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문예부흥(Renaissance)은 근대화의  시발점으로 인정된다. 나아가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사회가  지니고  있던   가치관이  파괴되면서  세속주의(Secularism)와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새로운  사회의 가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종교'와 '정치'의 분리 원칙이 세워지게 되는 동시에 한쪽에서는 극단적인 종교주의가 증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신앙은 통치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종교와 국가 사이의 강력한 경쟁 관계를 만들었다.

 

㈏ 종교적 관용(Religious Tolerance)과 유대인에 대한 존경심의 증가
  설교가 로저 윌리암(Roger  Williams)은 1644에 쓴 한 에세이에서 "기독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두는 것을 금지 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다. 종교의 자유, 즉 이방인과 유대인, 터어키인이나 기독교인들의 예배나 사상은 모든 국가나 지역 안에서 인정되어야만 한다"고 썼다.
  존 로크(John Locke)는 [관용에 관한 편지](Letter Concerning Toleration,1689)에서 "이방인도 모슬렘이나 유대인들도 그들의 종교때문에 시민권이 제한 되어서는 결코  않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소위  17세기  말의 종교관용  이론(Theory of Religious Tolerance)의 기초인 것이다.
  보다 중요한 영향은 17세기의 히브리, 유대 문학에 대한 유럽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 유대주의자들(Christian  Hebraists)은 유럽대학 안에서 히브리 유대학 강좌를 두었다. 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사상, 사회 및 국가에 대한 권위있는 책으로써,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구약사상은 계몽된 국가의 정치, 사회 발전의 좋은 례서로 인정되기 시작 하였다.

 

㈐ 상업이론과 유대 변증학
  유럽 사회의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사상은 유대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태도에 큰 변화를 주었다. '국가의 복지'(Walfare of the State)는 유럽 사회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주장은 "모든 인간은 종교에 의하여 판단되지 아니하며, 국가에 대한 유용성(Usefulness)에 의해 판단된다"는 것이다. 유럽의 인구 증가와 그에따른 인간의 경제적,  상업적 행위를 중시하게 된 것이다. 17-18세기의 사람들은 상업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론(Mercantilist Theory)을 받아 들이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유럽 사회의 유대인의 통합을 지지하게 된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변화에  따른 유대인들의 지지는 1638년 변증가인 시몬루짜토(Rabbi Simone Luzzato)가 쓴  [베니스의 유대인에 관한 소고](Essays on the Jews of Venice)에 잘 나타나 있다:"유대인들이 사는 곳은 어디에서나 무역과 상업이 넘쳐 흐른다". 특히 영국에서는  철학자 존 토란드(John Toland)의 [대영제국과 에이레의  유대인 귀화를  위한 근거](Reasons  for Naturalizing  the Jews  in Great Britain and Ireland,1714)에서 "유대인들을 영국으로 데려오는 일이 왜 이익이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또 몽테스크(Montesquieu)는 "기독교는 무역이나 상업적 이익을 위하여 고리대금을 엄격히  금지했는가 하면, 왕은 또한 유대인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추방시켰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돈을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기기 위해 어음(letter of  exchange)를 고안해 냈다"면서 유대인들이 유럽의 경제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 계몽주의와 유대인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은 서유럽과 중앙  유럽에서 교육받은 유럽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이들은 종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동등한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국가 안에서 구별된 신원을 보존하는 것을 역사적   집단의  실존으로   받아  들였으며,   나아가  '구별주의자'   유대인  집단('seperatist' Jewish group)을 비록 그들이 위선적일 망정 인정할 정도 였다.
  독일 작가인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은 [유대인](The Jews,1749)에서 유대인을 정직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증명할 목적으로 이 책을 쓴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이며, [현자 나단](Nathan the Wise,1779)에서는 유대인을 이론이나 실제에 있어서 자연  종교의 제안자로 보았다.  이 책 속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선민"(chosen people)으로 간주하자 현자인 나단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 자신의 백성을, 너는 너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인간이요 다음이 유대인이며, 너도 먼저 인간이요 나중이 기독교인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기생적(parasitic)인 모습으로 발전되는 것은 배격되었다. 토너(Clermont Tonnerre)는 1789년 12월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우리는 한 국가  안에서 유대인들에게 독립된 정치기구나 계층을 두는  것을 허락해서는 않된다. 각자  개인적인 자격으로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러한 우리의 입장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추방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국가 안에서 비시민 단체(a groupof non-citizen)나 국가안의 국가(a nation within a nation)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이것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 리신론자들(Deists)과 철학적 합리주의자들(Philosophical Rationalists)
  유대인들을 하나의  단체로 인정하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그것은 곧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18세기 영국의  리신론자들은 자연종교(natural  Religion)를  지지하며, 계시종교(revealed religion)를 반대하는 자들로써,  모든 종교 사상을 합리주의적으로 보려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유대 성경은 지어낸 거짓말이요, 그들의 조상과 영웅들은 부도덕한 악당이요,  예언자들은 좁은 마음의 광신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들은 종교적 기적이나 환상등을 거부하는  자들로써 이러한 사상을 가진 종교는 모두 미개한 것이므로,  유대인들은 야만족이요 잔인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초대교부들의 반유대논쟁의 부활이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그의 철학사전(1756)의 "유대인" 항목에서 "큰 국가가 작고  알려지지 않은 노예국가로부터 법이나  신앙을 가져올 수는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전적으로 무식한 민족이며,  오랫동안 폭력과 증오, 반역과 인색함으로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화형에 처해지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또 홀바하(Holbach)는 반유대주의에 입각하여 유대인을 "간단히 말해서 약탈 민족이다"라고 정의해 버리기도 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Fichte) 역시  유대인들을 "도덕적 타락"과 "국가 안의 국가"라는 두 원리에  입각하여 비판하면서, 1793년에는 유대인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일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그들이 이 권리를 계속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목을  자를 수 밖에 없다. 만일  이들에게 시민권을 준다면 그들은 다른 시민들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8세기 이러한 논거의 주장자들은  전세계에 이 일을 알리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철학자 칸트(I.Kant)는 [의사단의  전쟁](The War of Faculties,1798)에서 "유대인을 안락사(euthanasia)하는 방법은 그들의 종교적 도덕성과 순수함, 오래된 법규들을 그들로 하여금 포기하도록 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설파하였다.

 

㈓ 통합의 방법으로써의 유대인들의 개량(improvement)
  리신론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의 교육받은 계층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나 신앙을 버리거나 변경하지  않고도 그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통합의 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돔(C.W.Dohm)은 [유대인의  시민 변형](Civil Transform  of the Jews,1781)에서 유대인들의 동등한 시민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면서 그들이 가지고있는 기술을 격려했다. 나아가 그들의 예배의 자유, 회당을 열 수 있는 권리 및 학교에서 과학이나 예술에 종사하는  일도 허락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훈련의 부족은 그들이  온전한 시민권을 부여 받은 후에 실시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기독교나 국가에 대한 증오심이 표출될 가능성을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임을 경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제안하기를 영향력 있는 정부 밑에서 새로운  교육을 통한 개량 방법이 창안,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돔의 주장은 다른  여러 나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목사인 아베 그레고리(Abb  Henri Gregoire)는 [유대인의 육체적,도적적,정치적 문예부흥 소고](Essays on the Physical,Moral  and Political Renaissance of the Jews,1789)에서 "모든 유대인들의 모임은  정부가 임명하는 대표가 의장이 되어야 하며, 모든 토의는 그  국가의 언어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85년 폴란드에서 온 유대인들을 개량하기 위하여 모든 서류에 그들의 언어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군 복무를 의무화 하였다.

 

㈔ 프랑스 혁명기의 유대인들에 관한 토의들
  프랑스 국민의회 및  독일 국민의회는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비중있는 토의를 계속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의 인권, 즉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을 박탈하자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주창하는 것은 꺼려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정치적 문제 및 시민권 부여에 관해서는 그 논쟁이 계속되었다.
  1789년 12월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목사 및 보수주의자들은 '유대인'(juif)이라는 말은 종교적 분파(sect)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들의 법을 가지고 있는 한 민족으로 규정하면서, 이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것은 영국사람이나 화란사람들이 프랑스 시민이 될 수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로베스삐에르(Robespierre)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의 나쁜  성격을 강조하면서 '시민이 될만한 적절한 자격을 갖춘 시민에게만 공민권을 주어야 한다'고 차등 권리제를 주장하였다.
  1796년의 독일 국민의회에서도 프랑스에서와 비슷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으로부터 추방당했으며,  그들의 희망은 오직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땅에서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나그네로써 살고 있으며, 또 전능자로 오실 메시아를 늘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다른 땅에서의 거주 자체를 하찮은 것(unworthy)으로 여기고 있다."
이에 반해 유대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은 우리가 그렇듯이 한 인간이며, 그들의 행동 역시  다른 민족이 가지고 있는 것같이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지금 유대인들은 한 백성(a people)으로서 생각 되는가? 아니면 한 국가(a nation)로 생각 되는가? 이들에게 주어진 이름은 신앙의 이름인가? 국가의 이름인가? 그들은 그들의 국가를  잃은 이래 그들 스스로를 한번도 국가로 부른 적이 없으며, 한 신앙의 백성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라고 옹호하였다.
  결론적으로 17-18세기의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종교적 관용이론  혹은 상업주의적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대인을 한 인간으로, 또한 경제적 가치로  봄으로써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자는 입장이며,  2) 다른 하나는 유대인을 정치적으로 '국가안의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두 주장이 계속  됨에도 불구하고 17-18세기의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는 시온주의 운동을  위한 매우 커다란 변화로 인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종교개혁으로 인한 정교분리 운동, 합리주의자들의 계시종교의 거부, 교회 전통과 조직에 대한 비판 및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자유 및 인권에 대한 존중이라는 커다란 유럽의 변화에 따라서  유대인들의 정치적, 법적, 철학적 전통에 대한 관심의 폭이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② 전체주의 국가에서의 유대인의 법적 지위
㈎ 중앙집권화와 지방주의의 대결
  중세 유럽 사회는 기본적으로 각 사회 단체간의 협력 및 정치-사회적 지위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절대  왕조 국가(Absolutist Monarchy)를 강화시킨 중앙집권주의자(centralist)와 전체주의자(absolutist)는 이러한 중세의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각 단체와의 협력과 유대 공동체의 자치력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절대 권력의 집중은 유럽에서의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를 상실케 했다.

 

㈏ 동부 유럽의 유대인들
  이 시대에 폴란드는 왕정이  기울고 대신 귀족 계층의 세력이 증가 하였다. 따라서 유대인의 지위는  왕보다 귀족 계층의 태도에 의해 결정되었다. 유대인들은 주로 대지주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고용효과를 누리고 있는 자들로써  다른 계층(사제,도시 중간층  및 소작농)의 비판으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이  대신에 이들로 부터 당하는 시달림 또한 고달픈 것이었다. 사유 재산이 없었던  유대인들은 대지주의 땅에서 살았으며, 그 때문에 공민과 지주 사이의 갈등을 직접 경험하게 된 것이다.
  특히 폴란드의  사제들은 유대인 박해의 배후 세력이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교회 예배 참석을 강요했으며,  반유대 시위에 학생이나 도시 불량배들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까지 고문과 잔악한  박해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1740년대와 50년대에는  거의 매년  종교적 광신주의자들의  피의 모독(blood libel)이 있었다. 최악의 사건은 1768년 폴란드 귀족사회의 반대 단체와의 충돌이 있었다. 쩨렌쯔니악(Zhelezniak)이 이끄는 깡패들이 동부 폴란드를 장악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우만(Uman)의  중요한 한 성채를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들과 귀족들을 살해 했으며, 이  때에 처형된 사람은 20,000여명으로  그 중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약하면,이 시대의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의 지위는 매우 보잘것 없었으며 전체주의자들의 태도는 거의  중앙집권적인 통치의 힘을 위하여 소수민족이나 단체들의 자치적 힘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계몽된"  전체주의자들은 소수 민족을 "변형" 시켜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면서 유대인들의 통합을 꾀하였다.

 

㈐ 계몽주의의 결과와 프랑스 혁명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변혁 만큼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의 변화는 전체주의의  몰락과 개인주의의 탄생으로  나타났다.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평등이 존중되었으며,  이는 곧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를 위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중세 종교, 사회  조직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인식된 유대인들의 '자리매김'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이룩된다.
  프랑스 혁명은 평민들의 귀족들에 대한 불만과 혁명 사상으로서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이루어 졌다.  계몽사상은 17세기에 시작된 과학자들-갈릴레오, 뉴턴, 테카르트, 호이헨스, 파스칼등-에  의해 이룩된 과학 혁명과, 사회 과학자들-로크(사회계약론), 콩도르(낙관주의), 아담  스미스(자유 방임론), 루소(자연법, 교육, 인간불평등 기원론), 볼테르(리신론)등-에 의한  인간의 리성 발견을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1789년 8월  말 루이 16세의 삼부회가  사라지고 프랑스 국민의회가 발족하였다. 국민의회는 [인권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에서 다음과 같이 공포하였다:"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어떤 인간도 자신의 신앙으로 인하여 침해 받지 아니한다".
  이보다 조금 앞선 1786년  미국의 버지니아에서 선포된 [종교 자유를 위한 헌장](Acts for establishing Religious Freedom)에서도 역시 "모든 인간은 어떤 종교의 예배, 장소, 사역에 강요  받지 아니하며,...어떤 종교적 입장이나 신앙에 의한 고통에서 배제된다. 모든 인간은  종교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논쟁하거나 고백하는 것은 자유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물론 이와같은 선언이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논리적 근거가 된 것은 사실이나 즉각 이 개념이 실천-시행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목적을 반영하는  추상적인 원칙 - 다양한  부분의 관심, 전통 개념과의 상호 균형 -의 선언일 뿐이었다. 앉아서 이러한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 나폴레옹(Napoleon)과 유대인
  1793년 국왕인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도덕 공화국을 세운 자코방파는 대중들의 지지를 얻기에는 그들의 이상은 너무 추상적이고, 그 실천은 너무나 폭력적이었다. 1795년 가을, 불만에 찬  파리 시민들이 봉기 했을 때 국민 의회를 위기로부터 구출해 준 나폴레옹은 해방의 원칙(Emancipatory Principle)을 지키려는 자들과 이를 반대하는 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충돌을 계기로 권력을 얻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급기야 1799년 국가  지상주의(Statism)를 내세우며 중앙집권적인 군주제를 부활기키면서 황제에 등극하였다.
  그는 외국과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함으로써 유럽 전역에 걸쳐 그 세력을 뻗어 나갔다. 그러나 프랑스의 팽창주의는 여러 나라들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이탈리아등지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마침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그를 엘바섬에로의 유폐(유폐)로 막을 내렸다.
  한편, 유대인에 관한  문제는 알사스-로렌(Alsace-Lorraine) 지방의 주민들이 유대인들에게 빚 문제를 제기하면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 문제는 프랑스 국민의회에 상정되어 유대인을 위한  특별법(special laws for the Jews)을 제정하려고 하자, 이 법이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 면서 거부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1년동안 유대인에 관한 모든 안건을 토의할 기구를 두도록 하였으며, 동시에 [유대인 저명인사 의회](The Assembly of Jewish Notables)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1806년 7월 이  기구가 설치되어 유대인들에게 제기된 12개의 질의서 -일부다처 및 이혼에 대한 유대인들의 의견,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 유대 자치 기구의 권위 문제,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과 직업문제 등 -를 토의하여  응답하도록 하였다.  이 의회는  1807년 2월에  [대산헤드린](The Great Sanhedrin)으로 개편되어 이 문제를  토의한 후, 9개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나폴레옹에 따르면 이 결의안은 프랑스안에서 "모세종교의 조직"을 발표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1808년 3월에는  유대인들의 지위를 규제하는 두 칙령이 공표되었다:1)프랑스 안에서  공동체의 계급적  조직(hierarchical organization  of community in France)을 규제하며, 모든 개인 또는 단체의 일은 파리에 있는 중앙 감독원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2)불명예스러운 선언(D cret  Infame)으로 불리워지기도 하는 이칙령은 유대인에 대한 모든 대부(loans)를 통제하며, 무역 거래를 위해서는 특별허가를 받아야하며, 아울러 다른 지역에서 프랑스의 북동지역으로 이주하기를 원하는 자는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이와 같은  변화된 조처는 다른 전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안에서 유대인을 통합하려는 의도를 실천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동시에 국가를 종교보다 우위에 두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영향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다시 게토(Ghetto)로 돌아 갔으며,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동등권은 국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폴레옹에 의해 수여된 것이다"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요약하면 17-18세기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는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에 서서히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유대인들에게도 전적인 동등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권력의 개입과 함께 인정됨과 동시에 그들의 목적에 이용되어 왔다. 절대군주들 처럼 이들은 그들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이 일을 진행 시켰으며, 유대인들을 "통합"(integrate)하고 "개혁"(reform)하려는  의도가 컸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조항들은 자주 바뀌기도 하였으며, 그  시행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17-18세기 말까지는 적어도 유대인들의 완전한 법적 동등성을 확보하기 위한 과도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③ 동유럽 유대인들의 내적 투쟁
㈎ 정통 유대교의 쇠퇴

  유럽에 있던 유대교의 외적인 상태와 정신적 상황의 변화는 그들의 신앙과 사상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주었다. 즉 그들은 1,500년 이상 지켜온 율법-탈무드 전통이 점차 쇠퇴해 가면서  전통적인 랍비들의 경건성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즉 계몽주의와 더불어 정통 유대교의  율법주의는 쇠퇴해 갔으며, 주변 세계와의 접촉과 교류, 특히 유럽의  새로운 교육제도와의 만남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800년경 서유럽에서는 존경받을 만한  탈무드 학교가 없어졌으며, 동유럽에서 조차 이러한 학문적 전통은 낡은 형태에서 벗어 나지 못하였다.

㈏ 신비주의의 발효(Jacob Frank와 그의 종파)
  극단적인 사회주의를  배격하는 폴란드의 유대  사회는 그것과 대조되는 신앙과 종교를  일으키기 위해 신비주의를  발효시킨다. 1750년 야콥 프랑크(Jacob Frank)는 포돌리아(Podolia)  태생으로 [남은  안식주의자](Sabbatean Remnants)의한 분파를 만들었다. 이들은 "탈무드에 반대하는 유대인"으로 규정되어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성육(incarnation)하심과  삼위일체(trinity)를 믿으면서 예루살렘에서의 이스라엘의 구원을 거부하던 자들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는 탈무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으며, 그를 비판한 주교가 갑자기 죽자 더욱 기승을 부렸다.
  1759년   프랑크 신봉자들은 "유대인들이  제의의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사용하고 있다"고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그의 요청이 교회에 의해 거절되면서  그는 13년간이나 체스토코바(Czestochowa) 성채에 감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수백명의 유대인들은 계속적으로 불어만 갔다.
  프랑크는 카발라식 안식주의자(Kabbalistic Sabbatean) 전통을 정치 사상의 흔적으로 연결시켰다:"폴란드는 선택된 땅이요,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군대의 힘이 필요하다". 그는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정치적 제도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1772년 러시아가 폴란드에  들어오면서 프랑크는 다시 석방되어 독일의 오펜바하(Offenbach)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딸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19세기 초에 이 운동은 사라지고 만다.

㈐ 바알 쉠 토브(Ba'al Shem Tov)와 하시딤 운동(Hasidism)의 시작
  "선한 사람들의  주인"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랍비  바알  쉠 토브(R.Israel ben  Eliezer Ba'al Shem Tov,1700-1760) 은  포돌리아(Podolia) 태생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젊어서 그는 회당의 보조 교사였으며, 몇 년간의 명상과 독신생활 이후 그는 기적을  만드는 사람(Ba'al Shem or Miracle Worker)이 되었다. 그후 그는 종파의 지도자가 되어  몇 장의 편지외에는 남긴 것이 없지만 그의 가르침과 인격은 큰 힘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금욕적인  카발라주의자들(ascetic   kabbalists)과  안식주의자(sabbateans)들과  접촉하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밀의적(밀의적)  신비주의 원리(esoteric mystical theories)을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에는 극단적 밀의종교가 널리 퍼져 있었으며, 칸트 철학자였던 솔로몬 마이몬(Solomon Maimon)은 밀의적 실천을 통하여 죽음을 서둘렀던 자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하시딤의 신앙에  의하면 "의(Zaddik)은 세상의  기초이다". 온 세상은 그로부터 나왔으며, 모든 영적, 물질적  부요함은 그에게 통제된다. 의은 하나님의 결정조차 바꿀수 있는 유일의 힘이다.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devekuk,'붙다','풀')는 특별히 중요하다. 화해(memuza,'mediating')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필요하다. 하시딤의 기본 원리는 "하나님을 위해 비워 놓을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신은 모든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에 의의 지도자들의 중심 목적은  모든 물질세계의 세포(kelipot)에 감추어져 있는 신의 빛을 표출시키는 일이다.
  이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열정,  백열상태(life  of  fervor)와  초월적인 기쁨(exalted joy)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은 '초월', '영원', '위'등의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하시딤 운동은 메시아에 대한  대망 사상을 약화 시키지는 않으나 이를 현재적, 내재적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1747년  새해에 그가  경험한  신비적인  환상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수레(divine Chariot)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 두루  퍼지게 된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다. 1760년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때까지 이것은 '운동'(movement)으로 제도화 되지는 않았다.

㈑ 하시딤 운동의 구체화
  마기드(Maggid,'설교가',cf.삼하15:13)는 14세기  중세 때의 "떠돌아 다니며 설교하는 사람"(Wandering  Preacher) 혹은 "대중 설교가(Public Preacher)로서 16세기에는 "조직되어 있지 않은 지식계급"(non-establishment intelligentsia)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이었다.
  도브 바엘(Dov Baer of  Mezhirech)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바알 쉠 토브의 제자들은 하시딤  운동의 여러  사상들을 구체화  시켜 나갔다.  특히 랍비  야콥 조셉(R.Jacob Joseph of Polonnoye)은 첫 번째 하시딤 운동에 관한 책인 [야콥 조셉 전승](Toledot Jacob  Joseph,1780)을 출판하였다. 그는  기도를 하시딤 운동의 기본강령으로 강조하였다. 또, 동물의 제의적 도살,  공동식사, 안식일이나 절기 식사중에 행하는 의에 관한 설교등이 특별히 강조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대설교가들(Great Maggidim)으로써  레비 이삭(R.Levi Issac of Berditchev),  미카엘(R.Jehiel  Michael  of  Zloczow),  엘리멜렉(R.Elimeleh of Lyzhansk)등 많은 랍비들이 있다.

(4) 반유대주의(Anti-Semitism)
① 반유대주의의 실상과 허상
  우리는 앞서 중세 유럽인들이 토의하였던 유대인에 관한 입장을 정리해 보았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만나지게 되는  유럽인들의 경향 가운데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 의식이  매우 깊게 깔려있다는 점이다.  어디서부터 이러한 문제의 발단(발단)이 있는가?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의 차별은 단지 중세의 정치적 경향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보인다.
나아가 근세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시작된 유대인의 독립 운동인 시온주의의 기원이 "반유대주의는 시온주의를 낳았다"는 말로 요약되고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현대 이스라엘의 독립을 향해가는 유대인들의 시온주의  운동의 배경을 이해 하기 위해서 반드시 반유대주의를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반유대주의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 이념이  형성되고 발전되게 되는 여러 동기들과 그 과정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반유대주의는 또 다른 이념적 허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②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존재 하는가?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한 시대의 유대인에 대한 나쁜 감정일 뿐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발전된 하나의 체계적 이념인가?  이러한 질문은 반유대주의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질문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반유대주의가 하나의  실체로 이해되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며, 조작된 허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구체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데 있다.
이스라엘의 전수상  이쯔학 샤미르(Izhak Shamir)는  "나는 지구상의 어디에서도 반유대주의라는 이름의 망령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유대인을 미워하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프랑스의 지성인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반유대인 사상은 그것이 무엇인지  환영을  가지고   있지  않다(no  illusion).  반유대주의는  형상이  없다(no imagination). 그것은 처음부터 비합리주의(irrationalism)에  바탕을 두고 생겨났다. 다만 그것은 유대인에  대한 단순한 '의견'(opinion)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반유대주의는 하나의 죄악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준비한다. 유럽인들은  그것이 바로 유대인을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반유대주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이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논의할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구석구석에서는 유대인 공동묘지가  파헤쳐진다든가 유대인에게 불이익이 불법적으로 자행된다든가 하는 구체적이며 조직적인 반유대적 행동들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보이지 않는 유대인에 대한 미움의 뿌리가 존재할 뿐 아니라, 그것이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자라나  하나의 실체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실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을 통하여 확인 되었을 뿐이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의 문제를 하나의 '집단적 사건' 또는 '실체적 현상'으로 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반유대주의의 정체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의 기원을 역사적 맥락에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 아이디어가 형성되고 발전되게 되는 여러 동기들과 그 과정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파악하려는 반유대주의는 또 다른 허상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③ 반유대주의의 기원(Origin)과 정체(Identity)
  반유대주의는 하루 아침에  탄생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의 역사는 유대인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된  일로써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되어온 문제이다.  에집트의 바로왕이 단지 노예들의 인구가  불어 난다는 막연한 이유로 인하여 히브리 노예들에게 행한 박해, 수산궁의 하만이 모르도개와 그의 백성에게 행한 대학살의 음모 ,헬라 시대의 마카비 전쟁을  통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갈등, 로마시대의 제1차,2차 유대 반란을 통한 대학살과 도미티안(Domitian), 하드리안(Hadrian) 황제등의 개인적 감정을 넘어서는  유대인을 향한 로마 정책, "아말렉이 너희에게 어떻게 하였는지를 기억하라"는 말씀- 여기서 강조하는 점은 적(아말렉)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적이 너에게 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등 수없이 많은 원인이 불명료한 미움과 박해 사건들이 성경안에도 기록되어 있어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타국인들의 이해의 정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에 대한 미움과 박해의 원인을 유형별(typological)로 분류해 봄으로써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온 반유대주의의 뿌리와 정체를 함께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종교적 반유대주의(Religious Anti-Semitism)
  고대 이스라엘 사람 혹은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소수의 유일신 신앙 공동체(the Monotheistic Minority)와  다수의 이방 제국(the Mighty Pagan Empires)과의 갈등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종교 사상은 유일신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유일신  사상은 원칙적으로 다신교를 숭상하는 열국들과의 종교적,정치적 타협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러한 태도는 늘 힘센 열국들로 하여금 소수의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박해를 가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정치적 박해로  이해되지 않고 종교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또한 가지게 한다. 수산궁의 하만에 의한 유대인 박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박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서는 종교적 해석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승리를 칭송한다.
  근대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들이  박해 받은 근거로 제시되었던 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독특한 종교  관습이었다. 안식일을 지키며, 까다로운 음식법(Kashurut)에 따라 살면서 결코 동화되지  않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성격은 지배 계층인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늘 눈에 거슬리는 혐오감이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성격은  종종 '선민'(chosen people)이라는  용어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적어도 이러한 종교적 반유대주의는 유럽의  근대 사회가 태동 되면서 개인의 권리가 그의 종교에 의해  차별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상이  펼져지던 17-8세기 이전까지는 매우 설득력있는 박해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 사회적 반유대주의(Social  anti-Semitism)
  1세기 로마 제국  내에서의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박해의 근거로써 "유대인들의 반사회적 경향"을 들고 있다(Pliny the Elder). 다시 말하면 로마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진 유대인들은 로마  사회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비추어졌으며, 바로 그 원인이  로마로부터 유대인들이 박해 받게 되는 까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적어도 로마인들의 눈에 비추어진 유대인의 그러한 배타적 생활 방식은 물론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앞서 설명한 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신앙이 그들에게는 반사회적 경향으로  비추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적어도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은 현상적으로 반사회적 경향을 지닌 반로마주의자들로 분류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피온(Apion)과 마테토(Manetho), 로마의 타키투스(Tacitus)나 세네카(Seneca)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지적은  중세 유럽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속한 사회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기보다는 유대인끼리만 모여 살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살아왔다는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다. 물론 유대인들  입장에서 볼 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변명이 없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타인의 눈에 비추어진 유대인의 모습은 그러하였다.

㈐ 신학적 반유대주의(Theological anti-Semitism)
  기독교 세계에서 반유대주의는 예수를 박해한 유대인들 스스로 짊어지게 된 '피 값'이라는 의식이  팽배하게 지배하면서 얻어지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의 관계 변화의  싯점을 유대인들에 의한 예수의  처형 이 후로 잡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초기 기독교는  점차 유대교를 비판하고 거부하여, 그들로 부터 분리되어 나옴으로써 '자율적이며 독자적인' 종교로 발전해 나갈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역사적 근거로써 예수의 유대인에 의한 박해 받음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자기 동일성(Self-identity) 확보를  위한 유대인 혹은 유대교에 대한 신학적 거부로 설명된다. 특히 기독교의 구속사적 신앙(Heilsgeschichte)에서 볼 때, 유대인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백성이 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낡은 이스라엘(Old Israel)은 새  이스라엘(New Israel)로  대치되었으며, 옛 계약(Old  Covenant)은 새 계약(New Covenant)으로  교체 되었다. 구약(Old  Testament)은 신약(New Testament)의 빛 아래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들이 당한 모든 역사에서의 고통은 하나님의 섭리(계획)하심이라는 신학에 의해 뒷받침 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박해하는 일에  대한 도덕적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자기들의 폭력'을 구별하지 않았다는데 그 오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입장에 서 있는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신학적 태도와 윤리적 논점을 혼돈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의식은  2,000년간의 기독교 교회사에서 일관되게 주장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기독교 교회는 시대마다 일어난 유대인 박해사건을 '유대인의 예수 배척의 귀결'로  보았고, 유대인들은 이를 '무고한 피흘림'으로 이해했다. 적어도 중세의 교회는 이러한 시각에서 유대인들을 판단하고 박해하였다.

㈑ 정치적-인종적 반유대주의(Political-Racial Anti-Semitism)
  근세-현대에 오면서 이러한  여러 유형들의 반유대주의 사상들은 유대인들의 시민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제한 함으로써 보다 정치화 되어 갔다.  특히 유럽 사회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비인간화는 유대민족에 대한 생물학적 인종차별(racism)로 나타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형태의 새로운  반유대주의(Der neue Antisemitismus)는 그 동안 계속되어 오던 여러 형태의 반유대주의의 종합적인 축적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현상은 단순히 한 쪽 측면-그것이 종교적이든,사회적이든,정치적이든 간에-에서만 해석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박해는 역사적으로 타  민족에게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정치적 반유대주의는 늘 지배 체제-그것이 로마의 네로 황제이든 독일의 히틀러이든지 간에-의 유지를 위한 정치적 수단 또는 목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④ 현대 반유대주의
㈎ 특성
  현대  반유대주의(Modern  anti-Semitism)는  초기  반유인  운동(Early anti- Jewishness)와는 구별된다. 초기는  주로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 및 전통에 대한 이방세계 혹은 기독교 세계의 증오로부터 시작 되었다면, 현대의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이러한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의식이 유대인에게 정치적, 조직적 박해의 형태로 나타난다.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유대적 감정은 그런 점에서 매우 이념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드러나는 현상은 잠재의식적 수준을 넘어서는 매우  정치적인 것이어서 그 현상이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유럽인들의 눈에 비추인 유대인의 배타적 신앙과 생활 방식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한 반유대주의는 급기야  유대정신(Jewish spirit)의 파괴를 선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독일에서는 유대인의 인종적 열등함이 강조 되면서 인종차별주의자(racist)와 연합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대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의 역할이나 영향에 대해 투쟁하려는 목적을 가진 유럽인들의 조직 및 정치적 정당의 확산이라 특성지울  수 있다.이는 유럽 사회가  지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으로써 "Jewish Question"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념적 뿌리(ideological roots)
  17-18세기의 유럽의 변화는  합리주의적 사상의 지지자들이 이끄는 반전통주의자 써클(anti-traditionalist circles)을  만들었다. 이들은 특히 그들의 전통 및 종교적 신앙과 분리될  수 없는 유대인들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한편, 유럽사회주의자(Socialist)들은 유대인의  사회적 역할과  유대교의 본질사이의 관계를 부정적인 태도로 보았다. 이들은  유럽 공산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반사회적 경향(anti-social tendency)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사회적 진화론(social Darwinism)은 인간의 역사나 사회의 발전을 자연과학적인 적자생존 이론에 적용시키면서,  인간은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으로부터 적응, 발전해 나가는  것이기며, 따라서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종족'(race)은 도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대인들은 아리안족(Aryans)과는 달리 정치적으로나 문화적 성취력,도덕적-사회적 가치로 볼 때 열등한 '종족'으로 규정하였다.

㈐ 사회적 뿌리(social roots)
  유럽 사회의 변화는 정치의  민주화를 가져왔고, 이는 보다 많은 국민들이 보다 넓은 정치 영역에  참여하여 책임을 나누는 역할이 보다 더 강조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가 보다 큰 반유대주의를 부축이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의 '자유사회'(free society)는  보다 자유로운 경제적 경쟁, 이 결과로 야기되는 독점상태의 몰락을 가져  왔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주의는 국제적 길드(gilded International)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오히려 이익이 되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경제적 힘은 '악한 유대인'(evil Jews)이라는 중세의 망령을 다시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유럽의 경쟁자   혹은  반대자들에게   있어서  유대인   경제가인  로스최일드(Rothchild)는 세계  경제와 증권 시장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상징이었다. 또 막스(K.Marx)와 라살(Lassale)은 유대인  혁명가의 상징으로, 보에르네(Boerne)와 하이네(Heine)는  극단주의적  문학가  혹은  저널이스트의  상징으로, 번하르트(Sarah Bernhardt)는 극장을 지배하는 상징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반유대주의자들로 하여금 보다 큰 정치적 힘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 독일에서의 반유대주의 운동의 조직
  독일에서의   반유대작가들의  활동은   카톨릭   잡지인  [게르마니아](Germania) 로부터 시작된다.  저널이스트인 오토 글라가우(Otto Glagau)와 윌리암 마르(Wilhelm Marr)는 유대교와 독일주의  사이의 생사를 건 투쟁으로써 국가의 문제들에 관한 여러편의  기사를 쓰면서,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1878년 기독교 사회운동가 당을 만든 아돌프 스토커(Adolf Stoecker)는 반유대적 연설을 통하여 유럽인들을  자극, 선동하였으며, 1879년말과 1880년에 이르러 독일은 반유대주의 운동은 중심이 되었다.
  역사가이며 교수였던 하인리히  트로츠키(Heinrich Treitschke)는 유대인들이 독일 문화와 사회에 동화되어 가는 것 자체를 독일-유대적 잡종('mongrel')문화의 탄생이라 하여 거부하였으며,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the Jews are our misfortune)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가장 극단적인 주장을  한 사람은 두링(Eugen Duehring)으로써, 그는 유대민족의 여러 성격을 공격할 뿐 아니라 유대인 피에 대한 중상 모략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고대 히브리 민족이 행하던 인간제사(human sacrifice)를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사건으로 보아 반유대주의의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독일 내에서의 반유대주의  운동은 동유럽 전체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 지도자였던 알사코브(Aksakov)는 1881년에 "최근 유럽문화를 리드해 나가는 독일에서 시작된 반유대주의 운동은  종교적 불관용, 미숙한 무지등에서 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너무  뒤늦게 일어난 대중의 각성의 증거이다.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는 이 일을 주시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반유대주의의 첫 국제' 회의는  1882년 말 드레스덴(Dresden)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유대인때문에 위험하게 된 기독교 국가의 정부와 국민들에게 드리는 선언문"이라는 제목으로 회의 결과를  출판을 하였다. 이 문서는 모든 도시에 유대인과 투쟁하기 위한 위원회를 두도록 요청하고 있으며, 이 위원회는 [국제 기독교 동맹]으로 단일화 하자고 제의하였다. 1883년에 열린 제2차 회의에서는 이 운동의 연합 이념으로 두링의 이론을 채택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 운동의 기초를 인종주의에 두려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헝가리에서는 국회부의장이었던  이소크치(Isoczy)가 반유대 발언을 시작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의  추방을 주장했다. 모든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내 그곳에서 유대국가를 세우도록 충고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돈(재정)과 말(언론)을 통제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추방을 선언했다.

㈒ 동유럽 국가의 정부의 공식적 정책(official government policy)으로서의 반유대주의
  러시아에서의 반유대주의 운동은 알렉산더 II세때 까지만 하여도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1881년 혁명으로 인하여 죽고 알렉산더 III세가 등장하면서 진보적  경향에 대한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다시말하면 러시아 안에서 유대인들의  수가 점차 불어나고 그들의 경제적 지위와 힘이 향상 되자 러시아인들은 이들에게서 위협을 느끼게 된다. 급기야 1881년 4월 29일  러시아의   남서지방에서  반유대인   폭력 시위를   시발로  엘리짜베가르트(Elizavetgrad)에서도, 키에브(Kiev)에서도, 5월에는 오데사(Odessa)에서 연속으로 일어났다. 살인과 약탈, 방화와 강간등이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특히 젊은 유대인들은 중학교나 고등교육 연구소등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 당했으며, 정부가 반유대주의 신문을 발행했고, 반유대 정책을 정권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1911년 키에브(Kiev)에서  발생한 사건 중 "유대인들은 그들의 제의의 목적으로 필요한 기독교인의 피를 얻기 위해 기독교 소년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멘델 베일리스(Mendel  Beilis)는 러시아 안에서 유대인들을 공식적으로 박해하는 보다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루마니아에서는 유대인들의 은행  소유를 법으로 금지하였고, 정부는 반유대주의 운동 단체들에게 재정 후원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럽 각지에서의 유대인 박해운동은 유대인들의 독립을 위한  이념 확립 및 국민 운동으로서의 시온주의 운동을 더욱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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