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기원후 역사
이스라엘의 기원후 역사
바빌론 유배 : BC587-538 페르시아 지배 : BC538-333년 희랍지배 : BC333-142 <하스모네오-마카베오 家에 의한 독립시대(BC142-63)> 로마제국 지배 : BC63-AD313 비잔틴지배 : AD313-636 아랍지배 : 636-1099 십자군 통치 : 1099-1291 맘루크 지배 : 1291-1516 오스만제국 지배: 1517-1917 영국 통치 : 1918-1948 이스라엘 독립 : 1948
<北이스라엘 : BC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
바빌론 유수 ( 기원전 586 ~ 538년) 바빌로니아의 정복으로 남부 유태왕국은 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정복이 유태인들의 땅에 대한 애착은 끊지 못했다. 그들은 바빌론 강가에 앉아 밤낮으로 고향을 기억하자고 언약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시편> 137장 5~6절) 1차 성전 파괴(기원전586년)후에 바빌론의 유수가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독특한 이상의 체계와 이스라엘 땅 밖에서 유대교의 체계가 발전하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민족의 생존과 정신적인 동질성이 확고해 지고 한 국가로서 민족의 장래에 대한를 보장하였다.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기원전 538 ~ 142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왕 키루스의 칙령에 따라 일부 유태인들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왔다. 제1차 귀환 때(기원전 538년) 배를 탄 약 5000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다윗의 직계후손인 스룹바벨에게 인도되었으며, 1세기가 채 못되어 행해진 제2차 귀환은 율사 에즈라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 후 4세기가 넘도록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제국 (기원전 538 ~ 333년)과 후의 그리스 시대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시대)의 대군주 (기원전 332 ~ 142년) 밑에 여러 가지 계급으로 나뉘어 자치하는 법을 배웠다. 유태인들의 귀환, 에즈라의 지도력, 두 번째 성전의 건축, 예루살렘 성벽의 중건과 유태인의 종교적, 사법적 최고 기구인 크네세트 하게돌라 (의회) 의 설립은 두 번째 공동체의 시작을 의미한다.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는 유다는 예루살렘이 중심인 국가가 되고 대제사장과 장로 회의에 지도력을 위임하였다. 그리스 시대를 거치는 동안 시리아에 본거지를 둔 셀레우코스 왕은 그의 백성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관습을 강요하기 위해 유태교 행사를 금지하고 성전을 모독하였다. 그 반발로 거대한 항거 운동이 일어나고(기원전 166년) 강한 전투력이 생겼다. 이 항거 운동은 처음에 하스모니아 왕조의 성직자인 마타티아스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데, 그는 셀레우스코군에 대항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성전을 정화하였다(기원전 164년). 이 성전 탈환을 매년 하누카 축제(수전절) 동안 경축하고 있다.
※하스모니아 왕조 ( 기원전 142 ~ 63년 ) 하스모니아의 승리가 잇따르자 셀레우코스는 유다 왕국(이때 이스라엘 땅으로 불리었다) 에게 정치적, 종교적인 자치권을 부여하였고(기원전 147년), 셀레우코스 왕국의 붕괴로(기원전 129년)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다. 하스모니아 왕들은 세습하여 왕이 되었는데, 솔로몬 시대의 영토에 버금가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약 80년간 지속된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동안 유태인의 생활은 풍요로웠다.
로마의 지배 ( 기원전 63 ~ 서기 313년) 로마인들은 그 지역의 강한 지도자로서 셀레우코스로 대체하고 하스모니아 왕 히르카누스 2세에게 다마스쿠스의 로마 총통의 지배 아래 제한적인 왕권을 부여하였다. 유태인들은 새로운 정부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이전의 하스모니아 왕조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노력이 마타티아스 안티고누스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로마에게 패하고 사망(기원전 40년)함으로써 이 땅은 로마 제국에 예속된 한 주가 되었다. 기원전 37년에 로마는 히르카누스 2세 고문의 아들이자 히르카누스 2세의 딸과 혼인한 헤롯을 유다왕에 임명하였다. 헤롯은 외교에서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지만 국내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제한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았으며,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왕 중의 하나였다. 그레코로만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헤롯은 거대한 건축 계획을 세워 카에사레아와 세바스테스의 도시들, 헤로디움과 마사다의 요새를 세웠고, 당시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인 성전을 재건했다. 이러한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유태 백성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지 못했다. 헤롯이 사망한 수 (기원전4년), 주로 헤롯 왕조에 대한 대중들의 반대로 인해 그의 후계자들의 권위는 점차 소멸되었고 유다는 로마가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6년). 점점 가혹해지고 이성을 잃은 로마의 지배를 견디다 못한 유태인들은 로마 황제 네로의 후기에는 항거 운동을 시작했다. 그 항거 운동은 예루살렘의 완전한 함락(70년)과 유다의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로마군의 대장 티투스에 의해 함락된(70년) 예루살렘과 성전은 유태 민족에게 중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유태 역사가인 조세푸스 플라비우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함락만으로도 백만명의 유태인들이 몰락하고 그 밖의 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고 수만 명이 노예로 팔렸다. 마지막의 짧은 유태인 군주 시대는 시몬 바르 코크바의 반란(132년) 후에 이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유다와 예루살렘이 수복되었다. 그러나 로마군의 막강한 힘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3년 후 로마 관습에 따라서 예루살렘은 '황소의 멍에로 갈라 젖혀졌으며' 이 땅에 대한 모든 유태인의 끈은 점차 소멸되고, 유다는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다시 불리게 되었다.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모두 불타버렸지만, 유태인들과 유태정신은 로마와 만남으로써 살아 남았다. 작은 유태인 공동체는 점차 힘을 회복하고 망명에서 돌아오면서 때때로 힘을 길렀다. 제도적인 공동생활이 재건되어 국가와 신전의 통합체 없이 새로운 환경과 만나게 되었다. 최고 의결 기구이자 사법의 주체인 산헤드린(크네세트 하게돌라의 후신) 이 야브네(70년), 그 후에는 티베리아스에서 재소집 되었다. 제사장은 랍비들이 대신하였고, 중앙성소가 없는 상태에서 카페르나움, 코라진, 바람, 감라, 그밖의 장소에 웅장한 건축물로 전형화된 유태교 회당은, 분산된 각 집단 사회의 중추가 되었다. 할라카(종교법)는 유태인들을 맺어주는 공통의 끈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마사다(Massada) 예루살렘 함락에서 살아남은 1000명에 이르는 유태인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은 사해 근처 마사다에 있는 헤롯 왕의 산꼭대기 궁전을 점령하고 요새화 하였다. 그들을 격퇴하기 위해 로마군이 계속하여 공격하였으나 3년 동안 버티었다. 마침내 로마군이 그들을 격파했을 때 이들 유태인들과 그 가족들은 노예가 되는 것보다 자살을 택했다. 마사다는 자신의 땅에서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유태민족의 결심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비잔틴의 지배 ( 313년 ~ 636년 ) 4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과 비잔틴 제국 건설에 이어 이스라엘 땅은 범 기독교의 나라가 되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 등 기독교의 성지에는 교회가 세워졌으며 도처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유태인들은 이전에 가졌던 자치권을 빼앗기고 공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으며, 단지 일 년 중 하루만 성전 파괴를 애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었다. 614년 페르시아가 침입해 오자 유태인들은 석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를 지지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페르시아는 예루살렘 정부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3년밖에 지탱되지 않았다. 곧이어 비잔틴군은 예루살렘에 재입성하여(629년) 다시 유태인들을 축출하였다.
아랍의 지배 ( 636년 ~ 1099년) 무하마드가 죽은(632년) 지 4년 후부터 아랍의 지배가 4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다마스쿠스에서, 다음에는 바그다드와 이집트로부터 칼리프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 지배 초기에는 유태인의 예루살렘 거주권이 회복되고 유태인 공동체는 '보호' 아래 사는 것이 승인되었는데, 이것은 특별 선거와 지세의 납부에 대한 보상으로 생명과 재산, 예배의 자유를 보장받는 보호막으로서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비 회교도들에 대한 관례적인 지위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비 회교도에 대한 제한법의 도입(717년)으로 유태인의 공적인 행동, 종교 의식, 법적 지위 등은 제한을 받았다. 그 와중에 내려진 경작지에 대한 세금의 중과로 그들 대부분은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으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적, 경제적인 차별 대우가 심해지자 많은 유태인들은 이 땅을 떠남으로써 11세기 말경 이스라엘 땅의 유태인 집단은 상당수가 사라지고, 유기적이고 종교적인 응집력이 점차 상실되어 갔다.
십자군 시대 ( 1099년 ~ 1291년) 다음 200년 동안 교황 우르만 2세의 호소에 따라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유럽 각국의 십자군의 지배를 받았다. 5주간의 포위 후 1099년 7월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기사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라틴 왕국을 세웠다. 도시의 비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회당 안에 장벽을 쌓고 유태인들은 그들의 거점을 방어했으나 모두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 후 수 십년 동안 십자군은 조약과 협정으로, 그러나 대부분 유혈 군사 정복으로 이 나라의 다른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갔다. 십자군 왕국은 대부분 요새화 된 도시나 성에 한정된 소수 정복자들의 왕국이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땅은 기독교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기독교 국가가 되지는 않았다. 십자군이 유럽에서 성지까지의 교통로를 열어 순례의 길이 대중화되고 인기를 얻자, 동시에 늘어나는 유태인들은 그들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갈구하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무리를 지어온 300명의 랍비들 중 몇몇은 악고에, 나머지는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십자군이 쿠르드 살라딘에게 격파 당하자(1187년), 유태인들은 예루살렘에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들의 거주는 요새화 된 몇몇 성에 한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은 이슬람 군의 엘리트 계급인 맘루크에게 패하자 이 땅의 십자군 지배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맘루크의 지배 ( 1291년 ~ 1516년 ) 맘루크의 지배아래 이 땅은 다마스쿠스의 지배를 받는 벽지가 되었다. 악고 , 욥바, 그 밖의 항구들은 새로운 십자군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무역은 단절되었다. 중세 말에는 이 나라 도시의 중심은 파괴되고 예루살렘의 대부분은 황폐해졌으며, 유태인들은 궁핍해졌다. 맘루크의 쇠퇴기는 정치적, 경제적인 격동과 질병, 탐욕스러운 자들의 침입과 지진 등으로 암울한 시기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 1517 ~ 1917년) 다음의 4세기 동안 이스라엘 땅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지배를 받았다. 이스라엘 땅은 네 부분으로 분할되고 행정적으로는 다마스쿠스의 한 지방으로 예속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초기에는 약 1000호 정도의 유태인들이 이 땅에 살았는데, 주로 예루살렘 , 나블루스 , 헤브론 , 가자 , 츠파트 , 갈릴리 마을에 거주했다. 이 유대인 공동체는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 이 땅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유태인의 후손으로 이루어졌다. 오스만 술탄 술래이만 1세가 죽을 때까지(1556년) 자리 잡힌 정부에 의해 유태인의 생활은 개선되고 유태인의 이주를 자극하였다. 새로운 이주민들 중 몇몇은 예루살렘에 정착했지만 대부분은 츠파트로 갔다. 그리하여 츠파트는 16세기 중반에 유태인 수가 1만명에 달하는 직물의 중심지로 번창했을 뿐 아니라 유태학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카발라(유태의 신비주의)가 번성했으며 동시에 슐란 아루크에 성문화된 것과 같이 유태 법률은 츠파트 학파에서 디아스포라(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 전역에 퍼져 나갔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소홀해지면서 18세기말에는 많은 토지가 부재 지주의 소유가 되어 가난한 소작 농민들에게 일괄성 없는 세제로 임차되었다. 갈릴리의 대삼림과 카르멜 산맥은 벌목되고, 늪지와 사막이 경작지를 침식하였다. 19세기에 서양 세계의 진출이 시작되자 유럽 열강들은 선교활동을 통해 그들의 지위를 획득했다. 영국 , 미국 프랑스의 학자들은 성서의 지리와 고고학 연구에 착수하고 영국 , 프랑스 , 구 소련 , 오스트리아 , 미국이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정기 기선이 이 땅과 유럽 사이를 왕래하고 우편과 전신이 개설되었다. 예루살렘과 욥바를 연결하는 도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세 개의 대륙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교두보로서 이 땅의 재탄생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유태인들의 생활 조건은 서서히 개선되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세기의 중반에는 예루살렘 성안의 인구가 과밀하기 때문에 유태인 거주 지역을 세웠으며(1860년), 다음 25년 동안 그 새 도시를 핵으로 하는 교외 지역을 추가로 7개 더 건설하였다. 1880년에 예루살렘에는 많은 유태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농지가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매입되고 시골 정착민들이 새로 생겼다. 오랫동안 예배의식과 문학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오던 히브리어가 다시 부활되었다. 아울러 시온주의의 토대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시온주의에 고무된 두 개의 이주 집단이 19세기 말기와 20 세기초에 동유럽으로부터 이땅에 도착했다. 땅을 일구어 그들의 고향을 다시 찾으려는 희망으로 이들 개척자들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세우고, 나중에 꽃피우게 된 농업경제의 기반을 다졌다. 새로운 이주민들은 극히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행정부의 태도는 적대적이고 압제적이었다. 통신과 교통 수단은 여전히 원시적이고 불안정했다. 늪지에서는 치명적인 말라리아균이 번식했고 토양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상태였다. 토지 매입은 제한되었고 건축은 콘스탄티노플의 특별 승인 없이는 금지되었다. 이러한 어려움과 그 밖의 어려움들은 나라의 발전을 방해하였지만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이전 1500년대에 5000 명에 불과했던 유태인의 수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1914년) 때 85,000명에 이르렀다. 1917년 12월에 알렌비 장군의 지휘아래 영국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4세기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끝나고 말았다. 영국군에는 수천명의 유태인 의용군이 포함된 3개 대대의 유태인 여단이 있었다.
※시온주의(Zionism) 시온주의는 시온(Zion)이란 말에서 유래된 말로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을 뜻한다. 시온주의의 이상- 조상의 땅에 유태 국가를 재건한다- 은 수세기에 걸친 디아스포라(유태인의 유랑)에서 그들을 존속 가능케 한 이스라엘 땅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끊임없는 갈망과 깊은 애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치적인 시온주의는 동유럽 사회에서 유태인에 대한 압박과 박해와 차별 대우가 계속되고 서유럽 사회에서 역시 차별 대우 없이 그 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형식적인 해방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다. 스위스의 바젤에서 테오도어 헤르츨에 의해 소집된 시온주의자 회의에서 시온주의자 협회를 설립함으로써 (1897년)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시온주의 프로그램은 유태인을 약속된 땅에 복귀시키는 것을 촉진 및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적이고 실제적인 두 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유태인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새로운 생활을 해나가고, 박해로부터 자유롭고 그들의 생활과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역사적인 땅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법적으로 안정이 보장된 생활과 동질성을 갖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영국의 지배 ( 1918 ~ 1949년) : 1922년 7월에 국제 연맹은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를 수락하고 '유태 민족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연결' 을 인정하고 유태국가 건설을 촉진했다. 9월 국제 연맹 이사회와 영국은 유태 국가 건설 촉진 계획에 위임통치 지역의 4분의 3인 지금의 하세미테 요르단 왕국을 포함시키지는 않는다는 제안에 동의하였다.
※이주 : 시온주의와 벨푸어 선언(1917년)에 고무되어 1919년과 1939년 사이에 많은 유태인들이 이주하여 유태인 공동체를 다른 양상으로 발전시켰다.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주로 러시아에서 온 3만 5천 명의 이주민들은 몇 년 동안 공동체의 성격과 조직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개척자들은 포괄적인 사회적, 경제적 구조의 토대를 세웠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키부츠와 모샤브를 설립했으며, 집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였다. 1924년에서 1932년 사이에 주로 폴란드에서 온 약 6만 명의 이주민들은 도시 생활을 발달시키고 풍요롭게 하였다. 이들은 주로 텔아비브, 하이파, 예루살렘에 정착했는데, 그곳에서 소규모의 사업체와 건축회사 경공업체를 설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의 1930년대에 마지막으로 중요한 이주의 물결이 일어났는데, 히틀러가 등장했기 때문에 독일에서 온 약 16만 5천명이다. 이들 중에는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중서부 유럽으로부터 온 가장 큰 규모의 이주였다. 그들의 학력과 기술, 경험은 비즈니스의 수준을 높이고 도시와 농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였으며,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생활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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