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4. 제1차 성전시대(1024 B.C.E -586 B.C.E.)

영국신사77 2007. 2. 3. 23:19
           4. 제1차 성전시대(1024 B.C.~586 B.C.)
2006/10/25 오후 11:46 

제2장  제1차 성전시대(1024 B.C.E -586 B.C.E.)
1. 왕정의 확립
  고대 이스라엘의 군주제는 4세기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부족간의 동맹 체제보다 두 배나 긴  기간이었다.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 왕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이스라엘은 왕권을 보다 체계적으로  확립해 왔으나, 솔로몬의 사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졌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721년 B.C.E.에 앗시리아로부터, 남 왕국 유다는  586년 B.C.E.에 바빌로니아로부터 멸망할 때까지 왕을 중심으로한 군주제를 실시하였다.


  지금까지 이 시대의 역사를  위한 기본적인 질문들은 사울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는가?  그의 왕권은 어떻게 다윗에게로  넘어 갔는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은 성전을 어떻게 건축하였으며, 왜 그의 사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는가?에 촛점이  마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은, 새로운 형태의 성경 문학 비평을  통하여, 성경 안에 자리잡은 각 전승 간의 차이(다양성)와, 그 차이의 원인을 보다 깊게 파악하게 됨으로써 위의 질문들에 관하여 대답하게 되었다.

 

 


                                         (1) 자료


①연대기
  이스라엘의 연대  추정 문제는, 계속 논쟁  중인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로마제국 이전의 시대에는 절대  년표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매 해를 왕의 통치년도를 기준으로 표시하였다. 더구나  그리스도교적인 연대 측정 방식은 기원 6세기에 비로서 실시된 것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국가들의 연대를 상호 관련 시켜서 배열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연구 과정을 통하여 비로서 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북이스라엘의 연대표는  당시 남왕국의 연대로 표시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까다롭고 힘들게 기록되어있다. 또한  히브리어 성경(MT)과 헬라어 성경(LXX) 사이의 서로 다른 연대기록 중 우리는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신년의 시작은 가을인가 봄인가?  한 왕이 즉위한 그 해를 통치 원년으로 계산하였는가? 차기왕과의 공동 섭정  기간(co-regency)은 누구의 통치 기간으로 잡았는가?하는 질문들에 관하여, 우리는 확실한 통일성 있는 답을 하기에 매우 곤혹 스러움을 느낀다.


② 신명기 역사
  왕정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는, 앞서 언급한 여호수아서나 사사기서와 마찬가지로, 신명기적 사가의 입장이 반영된 역사 자료들이다. 특히 왕정 시대의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서 신명기 사가의 특징은, 역대 왕들의 치적을 율법의 순종  여부에 따라 평가하면서  1)분단 왕국 통치자들의 연대별 대조 배열과, 2)예언과 성취의 도식으로 나타난다.


  이 기술은 유다의 개혁을 주도한 요시아왕의 통치 말기(622-609년 B.C.E.)에 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차례  "오늘까지"라는 공식구가  사용되고 있는데(왕상8:8; 9:21;10:2;왕하8:22등), 이것이  바로 기록자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아가 이러한 자료는,  바빌로니아 멸망 이후 제2차 편집 과정을 거쳐 오늘의 책으로 확정짓는 과정을  겪게 된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의 쇠퇴와 이를 다시 세우려는 개혁을 위한 요시아의 선전책자 내지 희망에 찬 개혁을 돕고 고취시키기 위하여, 전왕조의 역사를 약속과 성취라는 도식에서 고찰하였던 것이다.


③ 고고학
  군주시대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는 현저하게 많아서 성경의 기술과 함께 상당부분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므깃도, 하솔, 그리고 게셀(왕상9:15-17)의 발굴로 인하여, 솔로몬  시대의 도시의 모습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마리아의 발굴로 북이스라엘의 종교적 제의  형태와 정치적 힘의 정도, 그리고 라기스와 예루살렘의 히스기야 성벽 발굴 등을 통하여, 제1차 성전의 멸망과 그 과정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④ 예언서
  몇몇 예언서들은, 왕정 시대의 사회 경제적 생활 전반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예컨대, 북왕국에 대해서는 아모스와 호세아서가, 남왕국에 관하여서는  이사야와 미가서 그리고 예레미아서가 바로 그러하다.

 

 


                              (2) 군주제 발생의 요인


  이스라엘에 왕권이  발생하게 된 직접적인 요인으로  가장 널리 인정 받는 것은, 중앙 집권화된 블레셋을 비롯한 모압, 암몬의 군사적 위협의 증대 때문이라는 사실이다(삼상8:19-20). 특히 블레셋은 1150년 B.C.E. 이후에 이스라엘의 남부 해안 평야의 지배권을 확고히 장악하였고, 1050년 B.C.E.에 이르러서는 산악 지대의 이스라엘 중심부까지 심각한 위협을 가해왔다. 이스라엘 지파의 중앙 성소인 실로가 파괴되면서 법궤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삼상4:3). 블레셋은 당시 과두 지배 체제를 유지하면서,  강력한 철병거 등의 기동력있는 공격력을 갖추고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해 왔다(cf.삼상13:19-22;삼하8:4).  적어도 이러한 블레셋을 이스라엘의 느슨한 지파 동맹  체제로는 막아낼 수 없었으며, 이스라엘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통합된 군사력과 지도력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삼상8:20;1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론과  더불어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가 이어지면서, 각 지파 혹은 계층간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제사장 가문의  사제권 남용(삼상2:12-17)이나 뇌물 수수(삼상8:1-3)등은 이러한 사회의 특징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계층간의 갈등은 새로운 체제와 질서를 요구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요구가 바로 왕을 세우는 제도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내적 요인은  왕 제도의 발생을 완성 시키는 충분한 원인이 되지  못하였다.  예언자들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군주제를  반대하였다(삼상8:10-18). 예언자들의 사상에는 군주제란 곧 신정 정치의 타락된 형태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왕이 백성을 억압하고  세금을 거두어 가며, 자녀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기능을 하게  될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왕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의 왕 요청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의  평등주의 이데올로기(cf.삼상8:11-17)와  야훼에 대한 신뢰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보았다(삼상12:19).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왕을 임명함으로써 모순된 전승을 통일없이 합하여 놓았다(삼상8:4-22;9:15-16). 다시 말하면 성경의 자료는 왕의 임명이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볼 때 비신앙적인 행위임을 분명히 언급하면서도, 왜 그를 임명할 수  밖에 없는가?에  관한 설명이나 변명  없이 사울을  초대 왕(혹은 '지도자',cf.삼상9:16)으로 임명하고 만다.


  물론  기본적으로 성경 안에는, 고대 근동의 왕의 개념과는 달리 왕을 신격화 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은 다만 하나님의 대리자일 뿐이며, 야훼께서 친히 왕권을 주도하신다는 사상이  여전히 깊게 깔려 있다. 신명기 역사가는, 왕이 되기 위한 기본 요건으로  타국인을 왕으로 세우지 말  것, 말(마)을 많이 두지 말 것, 아내를 많이 두지 말  것, 자기를 위하여 은, 금을 많이 쌓아놓지 말 것 등을 규정하고 있으며(신17:14-17), 또 왕은  반드시 율법을 자기 곁에 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만하지 말도록 정하고 있다.


  왕권에 대한 초기 이스라엘의 전승은, 찬성자들(정치적 이유)과 반대자들(신학적 이유)의 갈등 구조가 깊은 골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의 이러한 전승은 후기 예언자들에게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호8:4a;13:9-11).



                   (2)사울(1030-1010 or 1012-1004 B.C.E.)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베냐민 지파의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는 왕으로 나아오기  전에는 준수한(bahur tov)  지파 영웅으로 부상했던 인물이었다(삼상9:1-2). 그는  왕이나 예언자(cf.삼상10:10-11;19:18-24)로서의 기능이나 역할 보다는, 군사적 기능이  보다 강조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왕(Melek)보다는 지도자(제후/사령관,nagid)로 불리웠다(삼상9:16;10:1).


  사울의 주요 업적은 중앙  산악지대에서 블레셋을 몰아 내는 일이었다. 그는 수도라기 보다는  사령부를 길갈(삼상11:14-15)에 두었으며,  호화로운 왕궁도 없었다. 왕의 대표적인 기능으로  여겨진 세금을 거두거나, 군대를 징집하기 위한 국가기구를 두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가 한 일 가운데 국가 조직을 위한 기초로서 일부  법령들을 세우는 일(삼상14:32-34;28:3,9), 제사장의 직무를 부정하게 넘겨 받았던 일(삼상13:12;14:35),  또는 그의 사촌에게 군대 지휘를 일임하였던 일(삼상14:50ff.)등 매우 초보적인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의 가장 돋보이는 기능은 이웃의 국가들과의 전쟁 지휘자의 역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울의  통치 기간은 모두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암몬인들과의 전투(삼상11장), 블레셋과의 전투(삼상13장 이하)에 이어 아람인, 모압인, 에돔인들과의 전투에서 그는  "향하는 곳마다 이기는" 승리자로 등장한다(삼상14:47-48). 그의 전투에서의  신앙은 "야훼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14:6b)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싸워 주시는 전쟁"(a Holy War)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제사장직의 남용으로  사무엘과 갈등을 겪었으며(삼상13:8-15), 아멜렉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의 일부를 취함으로써, 하나님이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게(nahamati)"(삼상15:7-11,cf.15:17-22,27,35)되었다. 그의 최후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수였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맞이하게 된다(삼상31장). 길보아산에서의 전투에서, 그는 전통적인 지도력을 상실한채 그의 세 아들들과 함께 전사한다.


  비록 그의  아들들이 전사하였다 하더라도,  사울의 후계자가 세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지 않는 것은, 아직까지 이스라엘의 왕조가 왕위의 세습적인 전통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보기 보다는, 다윗에게로 이어지는 왕조의 세습을 정당화 하려는데 기인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다윗이 왕이 된 이 후에도, 여전히 사울의 가문과 측근들 사이에서 왕위  찬탈을 기도하였다는 기록(삼하2:8-10)과, 두 가문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쟁이 계속되었음(삼하3:1)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하겠다.



                               (3) 다윗과 솔로몬


① 다윗(1010-970 or 1004-965 B.C.E.)
  베들레헴 유다 지파 출신의 다윗은 수금을 잘 타는 음악의 천재였으며(삼상16:16), 사울왕의  부하(사병)로써   사울의 우울증(cf.삼상16:14-23,"여호와의 악신")을 음악으로 달래주는 촉망받는 자로 등장하였으나,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있던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Goliath)을 죽인 후, 백성들의 여론이 사울보다 다윗에게 기울어 졌다(삼상18:7). 이 일을 기화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서(삼상18:10-16),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군사를 이끌고  다니는 사울을 피하여, 여러 해 동안 망명하여 생활하고 있었다(삼상19-30장).  

 

  사울이 죽은 후에 그는 유다로 돌아와,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melek)을 삼아"(삼하2:4)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그러나 북부의 사울계 세력과 남부의 다윗계 세력 사이에는 누가 이스라엘의 전역을 지배할 것인가? 하는 세력다툼을 7년 이상 계속 하였다(삼상16:14-삼하5장).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지지하던 부하 아브넬은 그가  행한 사울 왕의 첩과의 통간을 이스보셋으로부터 지적  받자, 화가나서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더불어 다윗을 수장으로  추대하는 쌍무 협약(쌍무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결국 사울 가문과의 경쟁에서 다윗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삼하3:6-39;5:1-5).


  다윗은 블레셋을 결정적으로  쳐부수고(삼하5:17-25), 암몬과 모압 및 에돔, 그리고 시리아에 이르는 지역과 멀리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러 국경을 넘어 그의 세력을 뻗어 나갔다. 그는 그가 7년 6개월간 통치 하였던 수도 헤브론으로부터 여부스족이 머물고  있던 예루살렘으로  옮기고(삼하5:1-12;왕상2:10-11), "다윗성"(yirdavid)을 행정중심으로 하는 국가 기구를 설립하였다. 부족 동맹의 상징인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의 천막으로 옮겨 성소에 안치시키고(삼하6:1-23;시78:60), 아비아달과 사독을 국가 사제로 임명함으로써 확실한 국가적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삼하8:15-18).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치적 수도만이 아니라 그의 종교적 수도로 만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다윗은 명실공이 이스라엘의 통일 "왕"이되었다.


  다윗의 제국은 상당히 큰 규모였다. 팔레스틴의 전지역-동부와 서부, 사막과 바다에 이르기까지-은 물론 북쪽  시리아 지역에 이르는 접경을 장악하였다. 그에게 속한 속국들로부터 많은 조공을 거두어 들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거의 완벽한 행정  기구를 두고 관료들을 임명하였다(삼하8:15-18;20:23-26). 지방의  하위 관리들도 갖추었다.  그는 호구조사(삼하24장)를 통하여 징집과 세금 징수의 기초를  놓았다. 예루살렘의 종교 제의를 위한 기구도 설치하였다.


  다윗왕에 관한 성경의  입장은 매우 특별하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에게 이르시기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하였으며(삼하7:11b-16), 다윗의 마지막  기도에서도 이르기를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삼하23:5). 이처럼 다윗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장  이상적인 왕(the Ideal King)으로서,  하나님은 그의 가문(the Houseof David)과  무조건적인 계약(unconditional covenant)을  세우시고, 대대로 그의 집을 견고하게 세워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그의 가문에서 메시아(Messiah)가 나오도록 예언하고 있다(사9,11장).


  다윗의 임기중 일어난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삼하14:25-15:37;18:1-33)은 진압되었으나, 그가  나이 많아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하자"(왕상1:1) 왕위 계승을 위한 유력한  후계자로 아도니야와 솔로몬이 있었다(왕상1:5-2:46). 아도니야는 다윗왕의 군사령관이었던 요압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솔로몬은 그의 어머니 밧세바의 후광과 브니야의 지지를 업고 있었다. 성경에서는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아도니야의 구테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한다(왕상1:1-53).  이러한 왕위 계승 과정에서 한쪽은 이득을 보았고, 다른 한쪽은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② 솔로몬(970-931 or 965-926 B.C.E.)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벌인 후에(왕상1:5-53) 다윗왕의 계승자가 된 솔로몬은 다윗이 자신의 부하의  아내를 취하여 얻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부와 지혜, 그리고 명예의 상징이었다.


  이 시대의 국제 무대에서는 이집트의 쇠퇴, 앗시리아의 침묵으로 이스라엘은 가장 안정된  시대를 맞이하던 때였다. 그는  그의 경쟁자였던 아도니야를 지지하는 강력한 파벌을 "철권"으로  진압한 후(왕상2:13-24), 왕국의 부를 증대하기 위하여 야심적인 정치개혁을 착수한다. 특히  그는 옛 사제 가문의 하나인 에비아달이 속한 가문을 축출하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독 계열만을 존속시킴으로써 왕권과 사제직 사이의 관계를 밀착시켰다.


  외국과의 외교적인  동맹 정책과   이를 통한 대상무역(왕상10:22)과 무기판매, 통행세 부과(왕상10:14-15), 광업등으로 수입을 늘리고, 곳곳에 군사적 요새를 건설하고(왕상9:15-22), 대규모 전차 부대(왕상10:26-29)를 둠으로써 막강한 군사력을 키워 나갔다. 그는  또한 새로 창출된 부로 화려한 건물을 지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자기 궁이었다(왕상6:1-7:51). 이러한 엄청난 공사는 국민들의 강제부역을 위한 행정조처를 필요로 하였으며, 모든 국민은 적어도 1년 중 1개월은 의무적으로 이 일에 부역되었다(왕상5:14).


  이렇게 시작한 경제적 대변혁은 심각한 국면들을 야기시켰다. 마치 고대 근동의 절대 군주처럼 군림한 그의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경제 개발은 상호 모순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 셈이다.  즉, 비생산자들인 특권 상층계급은 생산자들인 하층계급으로부터 착취를 자행하였으며, 과도한 건설과 외국산 목재와 금속등의 수입은 국내경제의 한계를 넘는  일로써, 외채의 지불 능력을  상실한 솔로몬은 급기야 북쪽 갈릴리 영토의 일부을 떼어 팔아버리는 실정을  하기에 이르렀다(왕상9:10-14).


  이러한 과중한  세금(왕상4:7-19)과 강제  부역(왕상5:13-18), 그리고 솔로몬의 사치 생활(왕상4:22-23)은 백성의 원성(원성)을 사게 되었고, 솔로몬 통치 말기에는 북부의 부역 감독관이었던  여로보암이 저항 세력을 규합하였다가 이집트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솔로몬이 죽은  후 그는 귀국하여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실정으로  인하여 발생한 계층간의 갈등과 빈부의 격차를 유발하여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분열 왕국 시대를 맞이해야만 하였다. 선지자 아히야는 분열의 예고를 상징적으로 행하였다(왕상11:29-33).


  성경이 전하고 있는 솔로몬 시대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안정과 화려한 생활(왕상10:23-25,27a-29), 그리고 그의 지혜(왕상4:29-34)는 다분히 과장적이라 하더라도 신빙성이  많은 것들이다. 솔로몬의 책이라고  일컬어 지는 시편과 지혜서들이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춘 것은 분명히 포로기 이후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와 지혜서들은 이스라엘에서 매우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문학 양식들이다. 특히 다윗과 솔로몬이 중앙  집권식 제의 제도와 궁중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궁중 관료들이 시문학과 지혜문학을  연마할 좋은 여건이 조성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성경이 이 시대부터 창작, 수집 및 집대성 된 것들을 모두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③ 군주제가 지속적으로 끼친 주요한 구조적 영향들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다른 국가들의 우산국의 형태에서 벗어나 명실공히 "계급적 왕권제"(Hierarchic Kingship)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왕권제는 솔로몬 사후의 분열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왕에 대한 개념이 지금까지의 그것에 비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즉, 고대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개념은 신의 대행자라는 절대  권력적인 측면과,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하나님이시다는 신정 정치적 개념이 동시에, 때로는 각각 형성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그동안 내려오던 이스라엘의 사회, 정치, 경제등의 커다란 변혁을 가져다 주게 된다.

 

㈎ 정치적 중앙 집권화
  이스라엘은 왕을 세움으로써, 이제 그가 과세권과 징집권을 갖고 백성들에 대한, 그리고  백성들을 초월하는 권력을 독점한  중앙 집권적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권력을 집행하기  위하여 군대와 권력을 위임받은 관료가 탄생하였으며, 이 권력을 가진  관료들의 영향력은 사회 구석 구석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 동안 부족과 부족의 족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사회 구조와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특히 왕정의 시작부터 왕정  제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 했었으며, 왕정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았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왕권을  전적으로 이교도적인 것으로 여기는  세력이 아직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윗과 솔로몬의 군주제는 이러한 왕권에 대한 종교적 불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포용하거나, 그들과의  긴장을 메꾸는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 사회적 계층화
  신흥 국가에서의 권력 독점이란  항상 특정한 사회 집단의 독점을 의미한다. 국가의  부를 생산 대중들로부터 비생산  계급으로 이전시키는 국가 정책은, 지배 관리 계급뿐 아니라 정부의 허가와 독점 허락 등으로 특정한 인물이나 계층에게 특권을 부여해 주었다. 따라서 지주와 농민,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계층화가 생겨나며, 이들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을 반드시 겪게 된다.

 

㈐ 국제 관계의 확산
  국가의 영토가 확대되고  대외적인 관계-외교, 무역, 국방 등-교류의 빈번한 활동은 국내의 정치  변화에 여러 가지로 작용하게 되어있다. 특히 솔로몬 이후의 국제 무역과  외교는 외국과의 문화적 교류와  생활 범위의 국제화를 꾀하게 됨으로써, 국내의 그것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

 

(4)남북 분열의 원인과 그 의미
① 남북 분열의 원인

  솔로몬이 죽고난 후 다윗에 의해 세워진 국가 체제는 무너져 내리고, 926년 B.C.. 고대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의 남유다과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고 말았다. 국가 이전의  영웅 시대도 아니고 막강한 국가도 아닌 이스라엘은 약2세기 동안이나 분열 왕국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왜 이스라엘은 분열되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며, 분열 이 후 남북 관계는 어떻게 유지 되었는가?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의 시각에서 볼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반역의 무리였다. 그러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볼 때는 다윗 왕조야말로 사울 왕국을 찬탈한 반역자였으며, 각 지파의 전통과 독자성을 제한하고 백성들의 재산과 인권을 침해한 달갑지 않은 통치자들이었다. 다윗 왕조의 시각에서는 남북 분열은 하나의 반란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볼 때는 이스라엘의 정통성의 회복이요, 다윗 왕조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사건이었다.

 

㈎ 정치적 원인
  남북 분열의 원인은, 실수를 범한 르호보암(왕상12장)에게서보다, 솔로몬의 실정(실정)과 그 이전의  역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사울의 왕권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의 지지를 얻어 세워졌다. 그러다가 다윗왕은 '유다 지파 사람들'의 지지(삼하2:4)로 왕위에 오른 후, 나중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와서 다윗과 계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었다(삼하5:1-3).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지파간의 세력 갈등과 관계의 구분이 있었다. 다윗왕은 각 지파를 하나의 국가로 이끌어 가기 위해 그의 수도를 남쪽 헤브론으로부터 35Km 북쪽의 예루살렘으로 옮겨 공정성을 꾀하였으며,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남북의 종교적 통일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각  집단들은 별개의 세력을 가지고  중앙 정부에 협력 또는 반대하였다. 이러한 세력들은 새로운 왕의 등극 과정에서 막후 세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받아 등극하면서  그가 취한 일련의 개혁들은 매우 편파적인 것들이었다. 우선 그를 지지한 국가 관리들을 보면 제사장 사독, 예언자 나단, 왕비 밧세바, 용병대장 브나야등은  모두 남쪽 유대 출신들이었으며, 그의 경쟁자인 아도니야를 지지한 인물들은 민병대장 요압, 아나닷 출신의 제사장 아비아달 등 주로 북쪽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지역간의 편차와 차등 정책은 국가 내에 지속적으로 남아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그의 부왕 솔로몬과 같이 차등 정책을  발표하자,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분열되게 된다(왕상12:11,16).


  "온  이스라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ma        lanu  heelek bedavid)...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12:16)

 

㈏ 종교적 원인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부역 감독관으로  있을 때, 실로 출신의 예언자 아히야가 장차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10지파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적이 있어, 이를 솔로몬이 알게  되자 그는 이집트로 피난하였었다(왕상11:29-40). 아히아의 이 발언은 매우  강력한 정치적인 발언으로써, 이러한  반역 행위를 조장하였다.

 

 야훼종교의 기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지만, 북쪽의 실로는 적어도 법궤가 머물던 곳으로써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다윗은  이 법궤를 남쪽 예루살렘으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실로의  성소는 불레셋에게 파괴되었다(렘26:9). 솔로몬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지방 성소들이 그 종교적 세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는 남북이 분열된 이 후 북이스라엘이 취한 정책을 보면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즉, 북쪽 이스라엘 지도자는 예루살렘 중심적인 종교권력을 분산시키고자 벧엘과 단에 성소를 건축하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순례자들의 행렬을 막고, 레위 제사장들을 쫓아 내고,지방성소의 제사장들로 대치하였다(왕상12:25-33).

 

㈐ 경제적 요인
  솔로몬의 대규모 관료제도와 과도한  건축 및 군사력 증강은 지출을 확대시켰으며, 이를 위한 과다한  세금 징수와 강제 노동은 국민들의 불만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솔로몬의 천재적인 모든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이러한 노역에 불만을 가진 여로보암이 이러한 정책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다가 쫓겨나기도 하였다(왕상11:26-12:33). 이러한  불만은 북쪽 백성들이 유다 사람들보다 인구도 많고 군사력도  더 크게 지닌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힘이 분산되고 지리적으로 단결되지  못한 이유로 인하여 얼마간  억압당하다가 '과중한 세금과 강제부역'이라는 고통을  당하면서 그 결집력이 생겨나  다윗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 국제적 요인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통일  왕국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의 세력 약화를 틈타 정복과 우호적인 관계 유지라는 양면 정책이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집트 제22왕조의  시삭(Sheshonk I)은 솔로몬에게  쫓겨온 여로보암을 보호하고 환대하였다(왕상11:40,LXX의 왕상12:24). 또, 시삭은 솔로몬에게서 쫓겨난 에돔왕의 아들 하닷을 보호해 줌으로써(왕상11:14-22) 다분히 이스라엘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나아가 시리아, 두로, 암몬,  모압, 에돔들의 주변 국가들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벗어 나려고 몸부림 쳤으며, 기회 있는대로 이들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② 분단의 결과와 그 의미
  분열을 유발한 것이  무엇이었든 그 분열의 결과는 비참하였다. 이스라엘의 번영은 남북의 분열로 인하여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대부분의 영토를 주변 국가들로부터 빼앗겼으며, 이스라엘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북이스라엘의 다윗왕가 거절은 남과  북의 이분법적 사상을 싹트게 하였으며, 이것은 상호간의 정통성 주장으로 이어져  이스라엘의 사상적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 물론 두 나라간의 교류는 어느 정도 계속되었으나,  이러한 사상은 더 이상 통일에 대한 가능성을 한 번도 시험하지 않을  정도로 굳어져 갔다. 특히 종교적인 분열은 두 민족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결국  북(사마리아인)과 남(유다인)의 영원한 분열을 가져다 주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분열은 일부  예언자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의 통일이라는 희망을 싹트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조의 회복이 이스라엘의 이상이요 희망이라는 사상은, 바빌로니아 포로  이후에나 나타나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사상은 결코 분열 이 후에 형성된 통일에 대한 기대와는 관련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수 있다.

 

(5)남북 왕조의 역사
  분열 왕국의 계속되는 역사는 열왕기서의 나머지 부분(왕상12:21-왕하25장)에 나오고 있다. 개별적인 왕들에 대한 보도들은 고정된 표현과 형식들로 작성되어 보존되어있다. 이러한 일정한 틀 안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공시적 연대기(synchronoism)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시적 연대기란 왕의 통치 기간 옆에 기록되는 연대가 "...왕 ...년", 혹은  "...세에 왕이 된 ..."등의 방식으로 표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대기는 고대 근동의 종합적인 연대기 체계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이러한 연대의 기록이 고대 여러 나라들의 연대기와 비교하여 왕국 시대의 연대기를 확정짓는 중요한 자료로 이용된다.


  남북의 통치 햇수  계산 법은 각기 달라  사실적인 연대 구분이 매우  어렵다. 북이스라엘의 경우 니산(Nissan)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고, 또 왕이 죽었을 때 그가 사망한 해를 그의 마지막 통치의 해로 계산하였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같은 해 새 왕이 즉위하면서 같은 해의 남은 기간을 첫번 통치의 해로 계산하였다. 반대로 유다에서는 앗수르의  계산법을 따라 티슈리(Tishri)월을 새 해로 지켰으며, 새로운 계승자가 왕위에 올랐던 그 해의 나머지 기간을 햇수로 셈하지 않고, 그 왕이 만 1년을 다스리게 되는 해부터 계산에 넣었다.


  둘째로 왕들의 행적과 진술(진술)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수행되었던 예배를 허용하였느냐? 아니냐?에 따라  철저히 시행되었다. 이러한 신명기 사가의  신학은 주전 7세기 요시아에 의해 확정되면서 모든 역사를 그러한 시각에서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 밖에 남유다의 왕들 중에서도 상당 수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히스기야, 요시아왕만이 무조건 인정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왕의 기록에 대한 결어(결어)  공식은 사용된 자료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유다 왕들에게는 "유다왕의 실록"이, 이스라엘왕들에게는 "이스라엘왕의 실록"이 그것이다. 동일한 원칙에서 "솔로몬의 실록"도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이 보존되어 있지 않음은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① 북이스라엘의 역사(931-721 B.C.)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으로부터 마지막  왕인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19명 의 왕이 통치하였는데,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를 제외하고 비교적 짧은 통치 기간으로 마감하고 있다. 19명의 왕 가운데 8명이나 암살되는등 비교적 안정되지 않은 파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여로보암 왕조와 바사왕조(931-884 B.C.E.)
  통일 왕국 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은  솔로몬의 억압적인 정책과 시정 방침에 있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초대 왕이 된 여로보암이 이끄는 에브라임의 노동자 집단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구동맹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울 시대로부터 잔존해 있던 지파간의 갈등이 다시 시작된 셈이다.


  여로보암 1세는 세겜을 수도로 정하고(왕상12:25), 즉각 단과 베델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제의를 시행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성전 제의를 대치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다(왕상12:27-30). 그는 레위인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사제를 임명하였으며,  절기의 날짜를 임의로 바꾸어  버렸다(왕상12:31-33). 이러한 종교 정책은 유다로부터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과 함께 종교적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이집트의  시삭이 쳐들어 왔으며(왕상14:25,926년 B.C.E.), 다마스커스의 아랍족과의 전쟁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남쪽 유다와의 관계는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를 수비하는 정도의 마무리가 있었다. 여로보암과 바사 왕조는 모두 단기간 통치하다가 구테타에 의해 타도 되었다.

 

㈏ 오므리 왕조(880-841 B.C.E.)
  군사 구테타의 산물로 정권을 장악한  오므리는 4년에 걸친 내전에서 승기를 잡고 보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군주 국가를  만들어 나갔다(왕상16:21-23). 그는 사마리아에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였으며(왕상16:24), 페니키아, 다마스커스 및  유다와 군사 동맹을 맺고 무역을 실시하였으며, 모압을 정복하고 봉신국으로 삼았다(왕하3:4). 오므리는 외국에서 볼 때도 '오므리 왕국'(bait hmuri)으로 표기 되었다.


  오므리 왕조의 정책은 북이스라엘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물질적으로 상당한 번영을 누렸으며, 오므리에 의해 착공되고 아합에 의해  완공된 수도 사마리아는 고고학이 밝혀 준대로 탁월한 기술과 화려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어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 하솔과 므깃도의 마병장과 수로용 터널은 이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왕위에 오른 오므리의 아들  아합왕(869-850년 B.C.E.)은 853년 B.C.E.에 카르카르(Qarqar)에서 일어난 전쟁에 앗시리아의 샬만에셀 3세에게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파견할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국제적  지위도 격상되었다(ANET,278-279). 또 그는  사마리아에 상아궁을 짓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으며(왕상22:39), 시돈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왕상16:31), 바알을 섬겼다. 아합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백성을 죽이기까지  하는 죄를 범하였다(왕상21:1-16).


  아합은 이처럼 국가의 부흥과 번영을  가져온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왕상21장)이나 이방 여인 이세벨과의 결혼, 바알 신 숭배등 신명기 사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이러한 오므리 왕가의 잘못된 종교 정책은 이 때에 활동한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Elijah)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왕상17-19장).


  무엇보다도 길르앗 출신의 예언자  엘리아는 종교적으로 어두운 억압의 시기에  이스라엘의 신앙과 종교를 새롭게 일으킨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우뚝솟은 인물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합의 후계자인 아하시야(850-849년 B.C.E.)는 유다의 왕 여호람에게 자기의 딸 아달리야를 아내로 주어 남북관계가 우호적으로 유지 되었으며, 군사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주도권을 잡고 그 힘을 행사한 것이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오므리 왕조에 대한 반감이  계속 고조되고 있었다. 이 저항 운동의 지도자는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였다. 그는 국가 정책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면서 "선지자 집단"(bene hanebi'im)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은 열열한 애국자들로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여전히 옛 질서와 민중들에 뿌리를 박고 여호와의 언약과 율법에 비추어 왕과 왕권을 자유롭게 비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오므리 왕조의 몰락을 몰고 간 인물들이었다.

 

㈐ 예후 왕조(841-752 B.C.E.)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아람 사람들로  받은 굴욕적인 경험의 시기와 8세기 초 앗시리아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아람의 그늘로부터 조금은 벗어 날 수 있던 시기로 크게 나누어 진다.


  오므리 왕조는 극심한  타락과 호화스러운 생활로 인하여  백성들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으며, 백성들의 불만이 계속 번져 나갔다. 특히 길르앗  출신의 선지자 엘리사는 그의 제자를 통하여 라못 길르앗에 사는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왕하9:1-3). 예후는 곧 혁명을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왕 요람과 남쪽 유다의 왕 아하시아를 처형하고(왕하9:14-29), 또 아합 왕비인 이세벨과 아합 가문의 모든 남은 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왕하9:30-10:11).


  이러한 예후 왕조의 피의 숙청은 오므리 왕조의 정책에 의거하고 있던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를 한꺼번에 파괴시키고 말았다. 이세벨의 처형으로 두로와의 관계는 단절되었으며, 아하시아의 처형은 남유다와의 관계를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이러한 주변 국가와의 동맹 체제 와해는 이스라엘의 물질적인 번영의 주요 원천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해로울 수 밖에 없었다.


  예후는 이러한 혁명을 저질러 놓고  국가를 정상으로 회복시킬 만한 능력이나 효과적인 조처를 전혀 취하지 아니하였다.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스가랴는 살룸에게 암살 당함으로 왕조의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그 후 다섯 왕들 가운데 4명이 암살 당하는등 매우 불안정한 말기 현상을 노출 시키고 있었다.


  예후 왕조는 바알 숭배를 근절하기 위해 사마리아의 바알 제단에 모든 사제들을 불러 모으고 신전과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왕하10:18-27).  "이렇게 하여 예후는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뿌리 뽑았다"(왕하10:28).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혁명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종교 개혁을 통하여 고대의 신앙을 회복하였으나 그는 그의 피 흘림의 댓가를 치러야만 하였다(호1:4).


  이 시기에 활동하였던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는 그의 착취와 불의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심판을 선언하였다. 특히 아모스는 소수에게 편중된 부와 권력의 구조를 비판하였으며, 경제적 착취를 날카롭게 고발하였다.

 

㈑ 북왕국의 붕괴(752-721 B.C.E.)
  예후 왕조가 붕괴된 이 후  세계 정세는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해 지기 시작하였다.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III세는 정복에 나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과 무기들을 동원하여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주전  743년 그는 상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였으며, 북 시리아의 아르파드(Arpad)왕국과 하맛(Hammat) 왕국을 정복하였다. 그  후 그는 이집트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팔레스틴을 침공하였다.


  이 시기에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 남유다의 웃시아같은 유능한 왕이 있어 새로운 재기를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로보암 2세(786-746년 B.C.E.)는 북쪽 다마스커스와 동부 아람족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국경을 넓혀 나갔으며, 18세의 젊은 나이로 유다의 왕에 오른 웃시아(783-742년 B.C.E.)는 예루살렘을 개수하고 군대를 재편하는 동시에  새로운 무기를 수입하여 에돔 및 서북 아라비아 부족들을 공격하여 교역로를 활짝 열기도 하였다(대하26:6-9,11-15). 남북 관계도 매우 원만하여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에 손색이 없을 만큼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면모는 상대적으로  동시대의 이스라엘 사회 내부의 부패가 진척되면서 번영이 망국병으로 번져나갔다. 이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의 두드러진 부패상은 빈부의 격차였다. 부자들의 탐욕은 부정직한 관행을 낳았으며, 권력을 이용한 재산의 강탈과 토지의 몰수는 가난한 자들이 구제받을 길이 차단되어 버렸다(암2:6f.;5:10-12;8:4-6).


이러한 사회적 부패는 종교적  부패와 보조를 같이 하였다. 대부분의 성소에는 예배자들로 붐볐지만(암4:4f.;5:21-24), 순수한 형태의 여호와 신앙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 가나안의 토착신 '바알'과의 혼합주의는 여호와의 신앙과 구별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드고아 목동 출신의 아모스와 사랑했던 아내의 배반을 경험한 호세아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여로보암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스가랴는 단지 6개월의 통치  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에게 암살당하였고, 살룸도 한  달 뒤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745-737년 B.C.E.)에  의해 살해되었다.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군관이었던 베가가 일어나 그를 살해하고 왕권을 장악하였다.


나라 전체는 내란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예언자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호9:11-17;13:9-13).


  드디어 북이스라엘은 호세아왕 때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V세의 공격을 받고 3년 동안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수도 사마리아는  721년 B.C.E.에 함락되고 말았다(왕하17:1-6).  귀족들은 포로로  끌려 갔으며, 이 지역은 앗시리아의 총독이 다스렸다. 더구나 이 지역에는 앗수르인들이 이주해 들어와 살면서 혼혈 정책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과 종교적 전통이 말살 되어 갔다.


  다윗과 솔로몬의 억압 정치로부터 벗어나려고 독립하였던 북이스라엘은 군주들의 계속되는 억압과 권력 남용으로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성경은 멸망의 원인은 이스라엘이 야훼의 법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방의 신을 섬겨 야훼의  눈에 벗어났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17:7-18). 그리고 열방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2의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cf.호2:14-15).

 

② 남왕국 유다의 역사(931-586 B.C.E.)
㈎ 남북 분열부터 북이스라엘의 멸망까지


  남북 분열 이 후 남쪽  유다 왕국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큰 변화를 겪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중앙 집권화  현상은 날로 심화되어 갔다. 르호보암으로부터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19왕은 모두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 왕가를 계승해 나아갔다. 이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대부분 종교적 관점에만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경제, 사회적 측면에 관한 사실등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대에 활동했던 이사야, 미가, 스바냐, 예레미야, 에스겔등의 예언자들의 활동을 통하여 부부적으로나마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남북 분열 이  후 남쪽 유다의 경우 역시 북쪽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으로는 매우 타락한 상태에 머물러있었다.  르호보암의 우상  숭배는  극심하였고(왕상14:21-28),  그의 뒤를  이은  아비얌(15:1-8), 아사(15:9-24)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 오므리 왕조 때에 유다는 사실상 봉신국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예후 왕조의 혁명으로 인하여 그 관계가 악화되었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 때의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은 공명정대하고 유능하였다. 그는 사법제도의 개혁에 착수하여 소송절차를 정상화하여 부정을 뿌리뽑고, 분할되어 있던 행정 구역을 재편함으로써 재정문제도 조정하였다.


  그러나 북부 이스라엘과의 동맹의 결과  그의 뒤를 이어 계승한 여호람은 오므리 가문의 왕비 아달랴를 맞이해야 했다(왕하8:16-24). 그들은 합법성이 인정되지 않은 그의 정권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목격한 유다는 당분간 앗시리아의 위성국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 아하즈와 히스기야(722-686 B.C.E.)
  북 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유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군사적으로 늘 위협이 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멸망은 오히려 보다 강한 앗시리아로 부터의 충돌 위험 앞에 더 큰 부담이 되었으며,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에 유다는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의 유다 왕은 아하스 였다. 반앗시리아 연합 세력에 가담하지  않았던 유다는 즉각적인 재난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그는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에게 막대한 금,은과 함께 사절단을 보내어 보호를 요청하였다(왕하16:1-16).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의 경제  상태는 몹시 피폐하였다. 대부분의 영토는 주변의 에돔에게 빼앗겼으며, 앗시리아에게 바칠 조공을 위해 성전 금고는 바닥이 났다(왕하16:8,17).
이 무렵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는 바빌로니아의  군주 마르둑 아팔리디나(Marduk-apaliddina)의 공격을 받고 바벨로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으며, 남쪽의 이집트는 비교적 강력한 지위를 회복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점차 앗시리아의  봉신국들의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유다의 국론이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예언자 이사야는 앗시리아에게 반기를  들고 이집트를 신뢰하는 것을 격력하게 반대하였으며(사20장), 유다가 즉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점차  유다는 기울어져 가는 앗시리아로부터 독립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왕이 된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715-687 B.C.E.)는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통하여 바알과 아세라  신상들을 부수고 불 살랐으며, 사르곤에  이어 산헤립이 왕위를 계승하자 히스기야는 분명히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앗시리아에게 반기를 들고 그들의 지배에서 벗어 났다(왕하18:1-8). 히스기야 제14년, 즉 701년 B.C.E.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704-681 B.C.E.)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침공하였다. 라기스(Lachish)를 점령하고(왕하18:13-16)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대로 유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헤립의 군대를 진멸하고 말았다(왕하19:1-35).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에 터널을 파서 기혼 샘의 물을 성 안에 있는 실로암 연못으로 끌어 들이는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실시하였으며(왕하20:20;대하32:30),  예루살렘 성벽 확장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사22:10). 고고학적으로 보면 이 때 예루살렘은 구약시대 가운데 가장 큰 예루살렘이 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 후 북쪽 주민들의 상당 수가 남으로 이주해 온 결과로 여겨진다.

 

㈐ 므나쎄(686-642 B.C.E.)
  히스기아의 뒤를 이어 20세에 왕이 된 므낫세는 친 앗시리아 정책을 추구하면서 그에 의존하였다. 사실상 앗시리아의  예속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앗시리아의  문화와 종교 제의들을 받아 들였으며, 예루살렘 성전  앞 마당에는 앗시리아의 하늘의 여왕인 이스타르의 상징과 별의 신들을 위한 제단이 세워지기도 하였다(왕하21:1-9). 야훼 신앙은  사라지고 가나안의 바알 종교와 앗시리아의 종교가 혼합된 종교형태가 극심하게 번져 나갔던 시대였다.

 

㈑ 요시아(641-609 B.C.E.)
  국내적으로 외부 종교와의 극심한 혼합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동안 국제적으로 매우 큰 변화가 시작었다. 앗시리아는 형제들 끼리의 권력 다툼으로 그 세력이 점차 약화 되어 갔으며, 신흥 바빌로니아가 서서히 일어 나기 시작한 때이다. 예언자 나훔과 하박꾹은 앗시리아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었으며,예레미아는 신흥  세력에 의해 일어나게 될  유다의 커다란 위기를 예고  하였다. 결국 앗시리아는 612년 B.C.E.에 신흥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나느웨성이 정복되고 말았다.


  아몬왕의 뒤를 이어 8세에 등극한 요시아는 이스라엘의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훌륭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622년 앗시리아와의 정치적, 종교적 관계를 단절하고, 성전 수리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한 법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의 복구를 추진하였다(왕하22:3-20).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통하여 모든 이방 제의와 관습, 우상을 청소하였으며(왕하23:4-18), 유월절 절기를 회복하여(왕하23:19-23), "요시아 처럼 야훼께로 돌아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모세의 법을 온전히 지킨 왕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왕하23:25)고 극찬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종교 개혁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두 예언자는 스바냐와 예레미야였다.


한편 612년 신흥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수도 니느웨를 빼앗긴 앗시리아는 이집트의 느고 II세와 동맹을 맺고 니느웨 탈환을 위해 유프라데스로 출병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요시아왕은 그의 영토에 들어와 메소포타미아로 향하고 있는 이집트의 느고왕을 맞아 므깃도(Meggido)에서 싸우다가 609년 B.C.E.그만 전사하고 만다(왕하23:29-30;대하35:20-24). 유프라테스로 계속  진격한 느고의 군대는 하란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메소포타미아는 확고하게 바빌로니아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기야(609-586 B.C.E.)
  요시아가 죽은 후 유다는 친이집트  인사인 요아하스가 왕위를 이어 받았으나 3개월 만에 이집트로 끌려 간 후 거기서 죽고(왕하23:31-34),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킴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609년 B.C.E. 이집트의  느고의 원정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605년 그는 완전히 패퇴하고 말았다.


  여호야킴이 통치하는 동안 바빌로니아 느브갓네살은 유다를 포함한 이집트 국경에 이르는 전 지역을 정복하였다(왕하24:1-7).


  뒤를 이어 받은 여호야긴은 바빌로니아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 겨우 3개월 간의 통치의 끝을 맺게 되었다(왕하24:8-12). 뒤를 이어 왕이 된 시드기야는 589년 바빌로니아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왕과 백성에게 이러한 행위를 즉각 중지 할 것과, 결국 예루살렘 이 멸망하여 모든 유다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갈 것과, 얼마 후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바빌로니아의 대응은 신속하였으며, 그의 군대가 588년 1월 예루살렘을 봉쇄하고(왕하25:1;렘52:4. cf.렘21:3-7), 이듬해 여름까지 완강하게 버틴 예루살렘은 예레미아의 예언대로 성벽이 뚫리며 불 탔고, 페허가 되고 말았다(왕하25:1-12;렘39:1-10;52:4-16).


  여리고 부근에서 붙잡힌 시드기야에게는  어떠한 자비도 베풀어지지 않았다. 시드기야왕의 아들들은 왕이 보는 앞에서 처형 되었으며, 그 자신도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거기서 죽었다(왕하25:6f.;렘52:9-11). 대부분의 귀족들과 주민들은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갔으며, 바빌로니아의 느브간네살은  그달리야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미스바를  그  수도로 정하였다(렘40-44장.cf.왕하25:22-24).


  이로써 586년 B.C.E. 남유다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으며, 바빌로니아에서의 긴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모세로부터 시작된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결속된 신앙 공동체가 무너지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다시 이방인의  노예로, 방랑자로 돌아간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의 시작은 제2의 탈출을 꿈꾸는 새로운  희망을 낳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희망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어두운 역사속에서도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해 주었다.

 

(6) 분열왕국의 남북관계
분열 초기의 남북관계

남유다는 영토가 작고 가난했지만 동질적인 주민이 어울려 살았고 지리적으로 비교적 주변과 격리되었기 때문에 확고한 왕조 전통을 바탕으로 정돈되어 갔다. 유다 내부의 왕조는 비교적 큰 변화없이 안정되었고, 동질적인 경향의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다만 분열 초기의 다윗 왕조는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소위  "르호보암의  방어선"(대하11:5-12)이라 불리우는 성들을 살펴보면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국경선의 도시들이 아니라 유다 내부의 산지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들이다.


  한편 북이스라엘은 영토가 넓고 비옥했으며, 그리고 옛지파 동맹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주민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지리적으로 외세의 영향을 받기가 쉬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왕조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북쪽의 여로보암(931-910 B.C.E.)은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일련의 조처들을 적절하게 취하였다. 세겜을 수도로 하였고(왕상12:25),  벧엘과 단을 종교  성소로 건설하였으며, 예루살렘과의 정치적, 종교적 결별을 선언하였다.  종교제의 뿐 아니라 달력과 축제일도 변경하여 독자적인 국가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이룩해 나갔다.


  북쪽의 정치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여로보암은 그의 아들 나답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2년이 채 못되어 살해 되었으며(왕상15:25-27), 그 역시 아들 엘라에게 왕위를 계승 한 뒤  2년 만에 시므리에게 구테타를 당한다(왕상16:8-10). 첫 50년동안에 세차례나 구테타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북왕조의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던 전통이 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바침해 준다. 이러한 혼돈 상태를 북왕조는 오랫동안 견디어 내야 했다.


남북의 경계가 불분명한 연유로 국경선에서는 소규모의 국지적인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유다왕 아사(911-870 B.C.E.)가 외국 군대인 시리아를 끌어들여 북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남북관계는 한층 악화되었다(왕상15:16-22).


  이러한 국내 정세의 불안정은 외세의 잦은 침략을 불러 들였다. 르호보암(931-913  B.C.E.) 제5년 이집트 시삭의 침입(왕상14:15), 블레셋의 침략(왕상15:27;16:15), 유다왕  아사의 요청으로 시리아 군대의 북이스라엘 침략(왕상15:16-22;대하16:1-6)등이 그것이다.

 

② 이스라엘의 봉신인 유다
  쿠테타를 일으키며 왕위에  오른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왕(880-874 B.C.E.)은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남유다  왕국을 봉신으로 만들었다(왕하3:7;왕상22:4). 그의 왕조는 오므리,아합,아하지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거의 남쪽의 유다를 지배하였다.오므리 왕가의 공주  아달리야가 다윗왕가의 왕 여호람의 왕비가 되기도 하였으며, 여호람은 남북을 동시에 통치하는 왕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남북관계는 두  왕가가 각각 존재하는 통일 국가로 보아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외세와의  전쟁을 위해서는 하나로 출전하였으며(주전853년 카르카르 전투,ANET,278-279;왕하3:4-27;대하25:5-13), 왕실은 서로 사돈을 맺고 친밀히 교류하였다.


  오므리 왕조를 뒤엎고  등장한 예후왕(841-814 B.C.E.)은 이스라엘의 왕족뿐 아니라 유다의 왕족을 학살하였다(왕하9:14-10:14). 예후의 시각으로 볼 때 이 둘은 모두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예후  왕조도 유다를 지배하였으며, 유다의 몇 차례의 반란이  실패로 그치고  말았다(왕하14:11-14).  그 후  유다의 아하스왕(731-716B.C.E.)은 친 앗수르 정책을 펴면서 독립을 선언 하였다(왕하16:1-16).

 

③ 남북간의 교류
  오므리 왕조와 다윗 왕조 사이의 유대 강화는 두 국가간의 분쟁과 마찰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나 남북 통일을 위한 노력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는 단지 오므리 왕조의 세력 확장의 결과로 얻어진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두로와 시돈과의 정략 결혼을 통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였으며(왕상16:31), 모압을 정복하였고 에돔에는  섭정왕(deputy)을 두었다. 따라서 그는 주요 교역로를 확보하였으며, 나아가 유다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어느정도의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엘리야,엘리사,아모스,호세아, 미가등-은 두 왕국을 오가면서  예언 활동을 하였으며, 정치,군사,경제등 각 분야에 걸친 남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정도 하나의 민족, 하나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남북  관계는 721년 B.C.E.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먼저 멸망당하고, 그의 영토에 편입되면서  깨어졌으며, 이 때 북 왕국의 많은 피난민들이 남쪽 유다로 모여들면서 예루살렘의  인구는 급증하게 된다.그리고 앗수르는 남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집단으로 추방시키고, 그 대신 다른 민족들을 그 곳으로 이주 시켰다.


  이로써 남북으로 분열된 고대  이스라엘은 통일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북이스라엘은 721년 B.C.E.  앗수르에게, 남유다는 586년 B.C.E.바빌로니아에게 각각 멸망당한다.

   http://kr.blog.yahoo.com/yydeokk196/5204 주소복사 
 

'偉人*人物'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팔레스틴의 새주인들  (0) 2007.02.03
5. 제2차 성전시대(538 B.C.E.-70 C.E.)  (0) 2007.02.03
3. 이스라엘 중간사  (0) 2007.02.03
2. 이스라엘 역사  (0) 2007.02.03
1. 유대 민족 역사(창조와 타락)  (0) 2007.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