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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2차 성전시대(538 B.C.E.-70 C.E.)

영국신사77 2007. 2. 3. 23:22
                5. 제2차 성전시대(538 B.C.~70 B.C.)
2006/10/25 오후 11:49 

3. 제2차 성전시대(538 B.C.E.-70 C.E.)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잇는 시리아-팔레스틴 회랑 지대의 남단에 위치하여 독립해서 살아오던 이스라엘은 6세기 B.C.E.에 접어 들면서 그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지리적, 사회적, 정치적 틀이 크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근동 지방의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이에 따른 이스라엘의 멸망은 민족의 강제적 이동과 추방,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의 이민등으로 인하여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다양한 문화와 사상들의 교류로 말미암아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발생한 새로운 사조(사조)들은 이 시대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삶의 터전을 잃고,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열강들의 지배 과정을 겪으면서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사조들과의 충돌과 갈등을 통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사상을 낳게 되며,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새로운 종교 전통으로 연결되어 발전하게 된다.
  흔히 "신구약  중간사"(The Intertestamental Period)라  일컬어 지기도 하는 이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의  포로 생활을 거쳐 본토로 귀향하게 되는 과정과 그로 인하여 발생한 사회 구조의 변화 및 사상 체계, 그리고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배 체제와 헬레니즘과의 충돌로 인하여 발생한 문화적 변화,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등 약 600여년의 과정에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기간이다. 아울러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예수 공동체의 본질과 특성을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더불어 고찰하게 됨으로써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신학적 본질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연구가 될 것이다.

 

(1) 바빌로니아 포로시대(586-538 B.C.)
① 성전 멸망과 바빌로니아 유배

  721년 B.C.E.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로부터 멸망  당한 후 남유다는 여러 왕들의 개혁과 발전 의지를  통하여 독립을 계속 유지해 왔다. 그러나 약소 국가인 유다는 강대국인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Zedekia)는 예언자 예레미아의 강력한 권고(렘27장)에도 불구하고 국제 질서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채 바빌로니아와 맺은 맹약을 깨뜨리고 이집트에게 기울어 지고 말았다. 이러한 약소 국가의 반역은 대제국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 왕을 머뭇거리지 않고 신속하고 강하게 불러들인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589년 B.C.E.정월  예루살렘은 포위 되었으며, 3년  5개월 동안의 포위는 급기야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예레미아는 이미 선언하기를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내가 그들(유대인)을 그 땅(바빌로니아)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렘27:9b,11) 하였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의 삶을 크게 변화 시켰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신앙적 삶의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바로 이러한 모든 삶의 터전을 상실한 채 바빌로니아에서의 유배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② '이산'(Dispersion)과 '포로'(Exile)
  예루살렘 멸망 이후 가장 중요한 외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산'(리산)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바빌로니아 '포로'(포로)는 유다가 완전히 멸망 당한 이후에 일어난 일시적인 강제 이주를 암시하는 것으로써, 유다 백성의 극히 일부만이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성경에의하면 4,600명의 유다 백성이 세 차례에 걸쳐 추방 되었으며, 그 가운데 약 3,023 명은 제1차 추방 때에 강제 이주 되었다(렘52:28-30). 이런 자료에 의하면 제1차 추방 때에 약 1만명이 추방 되었다(왕하25:14-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 이송된 왕족, 국가 관리,  사제, 군대 장관 및 기술자 등을 모두 합쳐도 이 숫자는 고작 당시의 전주민의  5%를 넘지 않는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며(cf.애2:11-21;4:9f.),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의  및 타의에 의해 팔레스틴을 빠져 나가 바빌로니아보다 훨씬  가까운 이집트(왕하25:26;렘42장) , 페니키아, 시리아, 요르단 동편 등지로 펴져 나갔다. 많은 경우 이들은 불확실하고 불리한 팔레스틴의 생활  조건보다는, 더 나은 것으로 믿어지는  지역으로 이주하여 흩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에  계속 남아 거주하였던 다수의 유대인들(겔33:24)은, 나름 대로의 생활  문화를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비록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땅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전통 문화와 관습에 충실하였다. 적어도 이들은 새로운 이방 문화와의 접촉을 통한 영향을 적게 받고 살았다는 점에서, 민족적, 종교적 긍지를 어느 정도 가지며 살아온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정한 구심점은 그들에게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멸망은 백성들을 이산 집단과  계속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아가는 거주 공동체로 나누어  놓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두 집단 사이의 구조적 차이는 점차 커져  갔던 것이다. 나아가 바빌로니아로부터 귀향하게 될 때, 이산 공동체 가운데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바빌로니아에 남아 살게 되는 집단이 있게 되는데,  소위 바빌로니아로부터 돌아온 복귀 공동체와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거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특징으로 요약된다.

 

③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바빌로니아에 잡혀간 유대인들은 유다의 정치적, 종교적, 지성적으로 지도층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에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하면서 이스라엘의 장래를 설계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식민 정책은 비교적 온건하였다. 북이스라엘을 멸망 시킨 앗시리아의 경우  식민지의 지도자들을 추방하고  본토인들을 이주, 혼혈(혼혈) 시킴으로써 식민지의 백성들을 지배자 집단과 동화시킴으로써 식민지의 정치, 종교, 사회,문화를 모두 파괴하고 말살시키는  것과는 달리,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은 제국 국민의 집단 이주등의  정책은 실시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미스바에 그의 직위 관청을 가지고 있었던 그달리야를 임명하여, 폭넓은 권한을 가지고 그 땅의 주민들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달리야가 그 땅에 남아 있던 왕족에게 암살을 당한 후(왕하25:25;렘41:1-3) 주변의 암몬,  에돔 사람들이 팔레스틴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바빌로니아의 팔레스틴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크거나 중요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느브간네살의 후계자인 아멜 마르둑(Amel Marduk,561-559 B.C.E.)은 감옥에 오랫동안 갖혀있던  여호야긴왕을 석방시켜 자유롭게  하는등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다(왕하25:27-30;렘52:31-34).
  이러한 바빌로니아의 식민 정책은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포로민들의 생활 상에 관하여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주로 황폐한  농업 지역에 정착하여 조밀한 포로 수용소 같은 집단을 건설하고 살았으며(cf.겔3:15;스2:59;8:17;시137),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렘29:5-7;cf.겔8:1;14:1;33:30f.). 토착민들과  포로민들 사이의 법적인 차별은 발견되지 않으며,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생활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대인들의 전혀 새로운 문화적 배경을 가진 바빌로니아에서의 포로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전통적인 유대의 신앙과 전통에 관하여 재정립을 요구하였다. 성전 예배기능을 계속할 수 없었던 이들로써는 새로운 예배 형식을 개발해 내지 않으면 안되었고, 예배에 필요한 문서들의  작성을 요청 받게 되었다. 여기서 율법 교사들의 역할과 지위가 부각되기 시작하였으며, 다양한 의견을 가진 다양한 종파들이 각각 생겨나기 시작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려는 희망과 소원은 암담한 그들의 현실 속에서 점차 싹터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꿈꾼 희망은 제2의 이집트 탈출 같은 정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야훼의 전적인 능력으로 인한 종말론적 회복이었다: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렘11:17).

 

④ 팔레스틴의 유대인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가난한 땅의 백성들"(Am Ha-aretz,왕하24:14;25:12)이라 불리웠는데, 이들의  경제적 조건은 매우 열악(렬악)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황폐해진 도시와  농경지에 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가 증명해 주고 있으며, 이는 과다한 과세와 소작으로 인한 영세성이 주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유대인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주체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은 세겜,  실로, 사마리아 등지에서 온 자들과 함께 예배가 드려졌으며(렘41:4-8),  이 제의는 추방을 면한 하위직 사제들이 관장하는 동물 희생 제사였다. 특히 성전 멸망을 기념하는 금식 기간 중에는 애가와 시편 70편, 105편, 106편등이 공적으로 읽혀졌다(슥7:2-7;8:18-19).
  한편, 일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중앙 집권화로 인하여 뒤로 물러났던 이전의 지방 제단들이 복구 되면서,  이스라엘 종교의 혼합주의적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였다(렘44:16-17). 특히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심산 제의는 대표적인 이 시대의 모습이었다.

 

⑤ 포로생활과 이스라엘의 신앙
  이스라엘에 몰아 닥친 엄청난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앙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않되도록 하였다: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들의 손에의해 무너진 것은 어떤 이유에서이며, "영원한 기업"으로  삼으시겠다는 다윗왕에 대한 약속은 파기된 것인가?하는 질문과  함께,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사63:19;겔33:10;37:11). 이러한 질문들은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제기된 적이 없는 질문들이었는데,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은 언제나 인종적으로나 제의적으로 잘 정의된 하나의 단일 공동체를 의미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망가뜨린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신앙은 이러한 질문들을 단순한 물리적인 생존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에 관한 신학적 해명을 제시하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의  불꽃을 살려 나갔다. 이러한 작업은 백성들과 함께 바빌로니아로 잡혀갔던 예언자 예레미아와  에스겔에 의해 준비되었다. 이들은 멸망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위해 이스라엘을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갈 것을 역설하였다(렘31:31).
  특히 그들은 귀환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포로 공동체의 대부분은 자기들의 처지가 잠정적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미래에 대한 유토파아적인 꿈은  강력하게 형상화 되었다(겔40-48장).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 속에서 싹터 나갔으며, 이것은 곧 이방 제의나 문화와의 단호한 격리주의적 조처로 이어지면서 불가피하게 배타주의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경향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세계를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이해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악의 문제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쓰여진  작품들에서 천사, 사탄, 악마, 귀신 등의 주제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며, 아울러 하나님의  사후 심판과 상급에 관한 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예정된 '하나님의  날'에 있을 임박한 심판과 미래에 대한 완성의 희망은 점차 일관된 체계를 갖춘 종말론적인 역사 의식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묵시문학과 묵시문학적 사상의 태동(태동)을 가져 다 주는 기회가 되었다.
  또, 그들은 성전 없이도  이룩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하면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해  나갔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켜주는 두 기둥-성전과 율법-중에서 파괴된 성전에 대한 재건의  희망과 열정이 식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율법을 보다 강조함으로써 성전대신  율법을 중심으로 한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재편과 신앙적인 삶을 이어나가려는 이들의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즉, 새로운 공동체의 재건이라는 목표는 바로 율법을  통하여 이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성문화된 토라가 바로 이 시기에 정리되어  편집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필연적으로 율법  중심의 유대교(Judaism)를 출현시켰다. 율법은 이제 단순히 공동체와 그 일원들을 규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공동체를 창출하고 결속하며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주체가 된 것이다.

 

 

(2) 페르시아 시대의 이스라엘(536-332년 B.C.E.)
① 고레스의 칙령(칙령)과 이산 공동체의 귀향

  메소포타미아 동쪽 고지대에서 발흥한 페르시아의 고레스(Cyrus,539-529B.C.E.)는 539년 B.C.E.에 바빌로니아의 수도에 무혈 입성하였다:"나 고레스, 세계대국의 왕, 위대하고 힘있는 왕, 바빌로니아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세계 4대 강들의 왕, 캄비세스의  아들... 내가 평화롭게 바빌로니아에 입성하였을 때 나는  군주들의 궁전에서  환호와  기쁨으로...통치자의  권좌를 세웠노라..."(Cyrus Cylinder, 22-23줄).
  바빌로니아의 힘은 느브갓네살이  죽자 급속도로 기울었다. 신비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Nabonidus,555-539  B.C.E.)의 실정(실정)에 불만을 품은 바빌로니아의 관리들과 사제들은 고레스의  편이 되어 환영과 함께 무혈 입성을 가능케 하였다.  이로써  페르시아는 동쪽의 인도 국경으로부터  서쪽의 그리이스 맞은 편 에게해, 남쪽의  이집트에 이르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2배가 넘는 영토를 다스리는 대제국이 되었다.
  고레스는 일부 피지배 민족들에게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하고, 그들의 고유한 문화 및  종교 생활을 존중하는  이른바 개화된 페르시아  정책을 발표하였다. 538년 B.C.. 신년 축하식(New Year Festival)에서 고레스는 [고레스 칙령](The Edict of Cyrus)을 발표하였는데,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관하여 언급하였다:"칙령. 고레스왕 원년에 고레스왕은 지시한다: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일, 그 성전은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는  제단을  다시   세워라.  그  건물의  크기는  다음과  같이 하라..."(스6:3-5;cf.1:2-4). 성경의 이 본문은 칙령의 언어인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고레스의 이 칙령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꿈같은 사실이었다. 예언자 이사야는 고레스를  일컬어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사45:1)라 하였으며, 동시에 "그는 나의  목자"(사44:28)라 불렀다. '기름 받은'의 히브리어는 메시아(Messiah)를 의미하는 말이며,  '목자' 역시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고레스에 대한 이사야의 칭호는 곧 그의 등장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조의  회복(cf.사11:1-10;54:10)과 성전의 중건(사44:28,45)이라는 그들의 꿈같은 희망을 이방의  왕 고레스를 통하여 이루시는 역사를 하나님의 승리라는 구원사적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② 성전 건축과 반대자들
  고레스의 칙령이 포고된  직후 페르시아의 왕실은 포로민 유대인들의 대표단을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여 공동체 재건을 위한 정지(정지) 작업을 하도록 지시하였다(스1:5-11;5:13-15). 이  일을 맡은 첫번째 유다  총독(nasi leyehuda,스1:8)은 다윗 왕가에 속한 세스바살(Scheschbazzar)이었다.
  그는 제1차로  약 42,360명의 귀향자들을  이끌고 바빌로니아에게 빼앗겼던 제기(제기)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스2장,느7장). 그러나 어느정도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 상부 도시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가 시행한 가장 중요한 일은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를 놓는  일과, 귀향자들의 거주지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는 성전 건립을 위하여  금전과 헌물을 봉납받았고,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여러가지 갈등과 재정난으로 인하여 고레스의 후계자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II,529-522  B.C.E.)의 통치 기간에 이르기 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또한 세스바살이 취한 귀향자들의  지방 분산은 일종의 강제 형식을 띤 조처였기 때문에 상당한 반발과 불만이 내재된 것이었다. 이러한 불만은 성전 재건이라는 명분에 얼마동안 잠잠하였으나, 점차  지역간의 갈등과 충돌로 말미암아 벽에 부디치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특히 귀향 공동체와, 그 땅에 계속해서 머물러 살던 토착민 공동체 사이에 점차 심화되는 현상을 낳게 된다.
  한편,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 원정 후 메데인들의 폭동 소식을 듣고  귀국  길에  시리아에서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  다리우스  1세(DariusI,522-485 B.C.E.)가 등극하였다. 그는 여러 지방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한 후 확고한 왕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520년  B.C. 예루살렘에 스룹바벨(Zerubbabel,스3:2)을 임명하였다.
  유다 총독(pehah)  스룹바벨은 유다의 첫번째  총독(nasi)인 세스바살의 조카요, 여호야긴의 손자였다(학1:1). 그는 선임자의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사업은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업이었다:"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지 이년  이월에...무릇 사로 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 온 자들이 역사를 시작하고"(스3:8) 비로서 성전의  초석을 놓았다. 그들은 큰 소리로 기뻐하며 찬양하였다(스3:11). 그리고 그는 적절한 협력자를 찾았다. 역시 포로에서 귀향한 대제사장 여호수아(Joshua,학1:1,14)와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바로 그들이었다.
  성전은 520-515년 B.C.E. 동안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감독하에 착실히 건설되었다(스5:1-2;학1:1-2:9;슥4:9). 그러나  성전 공사는  다리우스 1세  제2년인 520년 B.C.E.에 강제로 중단되었으며(스4:23-24), 이 때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 재건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백성들을 격려하며(학1:2-3), 큰 힘을 북돋아 주었다.
  이 때의 자세한 상황은 자세히 알 길이 없지만, 매우 큰 좌절과 역경을 겪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팔레스틴의 유대 공동체는 극히 작은 규모였다. 당시 유다의 인구는 약  20,000명을 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희박한 인구 밀도(느7:4)는 성전 공사를 어렵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궁핍은 그 자체가 힘겨운  과제였다. 흉작(학1:9-11;2:15-17)으로 양식이나 의복을 구하는 일 조차  어려웠다(학1:6).

  이러한 와중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사실은 성전 공사를 방해하는 자들의 문제였다. 계속해서  유다 땅에서 살아 왔던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주자들의 유입과 성전 건축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사업은 감당하기 벅차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은 "다리오왕  제6년 아달월 3일에 필역하였다"(스6:15). 성전 봉헌일인 이 날은  마침 유월절 축제와 겹쳐 큰 축제를 겸하여 치루어졌다(스6:16-22). 이 해가  바로 516/5년 B.C.E.였다. 이로써 예레미아의 예언("이나라들은 70년 동안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리라",렘25:11)과 다니엘의 예언("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만에  마치리라",단9:2b), 그리고 스가랴의 예고("70년 동안...금식하고 애통하리라",슥7:5)가 이루어 진 셈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제의 공동체를 세워나갈 준비를 완료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전 재건의  가장 큰 장애가 되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사로 잡혔다가 돌아온 자들"과 "그 땅의 백성"(am haaretz,스4:4)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소위 이들의  갈등은, 표면적으로 유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귀향한 자들에게 성전 건축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스룹바벨이 이를 거절한데서 비롯된다(스4:1-6).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홀로 건축하리라"(스4:4a)한 데서 그들이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귀향 공동체가 "그  땅의 백성"들과 함께 성전 건축을 할 수 없었던 이유를 밝혀야 할 것이다. 아울러 도대체 "그 땅의 백성"들은 누구였는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먼저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은  페르시아가  파견한  사마리아의 총독  닷드내(Thatnai)와 스달보스네(Sether Bosnai)로부터 표면화 된 것으로 여겨진다(스5:3).
  이들은 지방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이 행정적,  종교적 중심지로 부흥하고 발전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고레스왕의 칙령을 실천하는  방식에 있어서 위험한 요소들을 지적하면서 저지하려 하였다(스4:12-16).
  나아가 성전 건축을 반대하였던 자들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스4:1)이라 불렀으며, 연구에 의하면 이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한 후에도 여전히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았던 사마리아인(Samaritians)으로  알려졌다. 귀향한 유대인들은 그들을 가르켜 귀족이나  제사장 그룹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통칭하던 "땅의 백성"이라는 칭호로 불렀던 것이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 귀향 공동체와 토착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은 성전이 재건되던 시기에 이르러 매우 첨예하게 대립되었으며, 이는 개혁 주도 세력과 수구 세력간의 다툼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③ 에스라와 느헤미아의 개혁운동
  515년 B.C. 성전 재건  이후 458년 B.C.E. 학사(sofer) 에스라(Ezra)가 부임하기까지, 반세기가 넘는 동안의  유대인 공동체에 관하여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은 더이상 언급되지 않으며, 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후 총독보다는 성전의  대제사장의 역할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특히 성전 건축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사마리아의 귀족들조차, 예루살렘의  종교적  리더쉽을  인정하고  예배한  것으로  알려졌다(슥2:11;8:23;사56:3-7).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전 건축 이후 유대인 공동체가 무엇인가 분명치 않은 채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 공동체의 장래가 여전히 불투명했다는 사실이다.
  구약 성경에서  아하수에로(Ahasuerus,스4:6)로 나오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Xerxes, 486-465 B.C.E.)는  다리우스 왕가를 잇는 왕으로서, 페르세폴리스와 엑바타나에 세운 그의 거대한 건물이 증명하듯이, 매우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즉위할 때에" '땅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관하여 상서(상서)하는 기록이 있으나(스4:6) 연대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한편, 크세르크세스의  아들이며, 그의 후계자인 아르닥크세르크세스(ArtaxerxesI, 464-424 B.C.E.),  즉 성경의 이름으로는 아닥사스다(Arthahsastha,스4:7)인 그는 이집트까지 그의  세력을 뻣어 나갔는데, 이  때 팔레스틴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유대 학사 에스라와 유다 총독 느헤미아를 파견하여 유다의 새로운 변화를 위한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왕  제7년(457년 B.C.E.)에...예루살렘으로...올라왔다"(스7:7-8).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께서 주신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sofer,스7:6)였으며, 제사장 가문의  고급 관리였다(스7:1-5). 그는 바빌로니아로부터 백성들, 제사장들, 레위인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도합 약 1,500여명과 그 외의 많은 재물을 가지고 귀향하였다(스8장).
  에스라의 주요  관심은 모세의 율법을 이스라엘의  민법과 종교법의 토대로 삼고, 이에 준하는 개혁을 단행하여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특히 그는 당시의 귀족들과 제사장  계층 사이에 유행하던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 즉 국제 결혼을 강력히 거부하면서 예루살렘에 성회를 베풀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이 땅의 족속들(me-amei  ha-aretz)과 이방 여인(min ha-nasim ha-nakriot)을 끊어 버리라"(스10:11)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에스라는 "이방 여인을 취한 자의 일을 조사"(스10:16-17)하여 그 명단을 모두 공표하였다(스10:18-44).
  여기까지 에스라에 관한 기록은 끝을 맺고 있는데, 아마도 그의 과격한 개혁 조치들은 여러 귀족들로부터 상당한 반대에 부디쳐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한채 중단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새로운 모세로 인정되었으며(느8:4은 출24:1,9의  모방이다),   가장  위대한  율법학자로   일컬어지게  된다(IV  Ezra14:37-47).  그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토대로 세워진 공동체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성공 여부를 떠나 큰 의미를 가진다.
  한편,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아(Nehemiah)가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은 "아닥사스다왕 제20년"(느1:1;5:14)이었다. 햇수로는 444년 B.C.E.인 셈이다. 그는 본래 페르시아의 환관으로 활동적이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총독으로서 그는 예루살렘을 요새화하고 정착 생활 양식과  지방 행정을 재조직할 수 있는 충분한 권력을 가진 지방 장관으로 유다에 파견된 것이다.
  그가  파견되던 때의 예루살렘은 아직 요새화 되지 않은 인구가 매우 적은 도시였다(느2:3-5).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는  성문과 성벽, 그리고 새총독의 관저를 건축하였다. 역시  많은 반대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52일만에 완성된다(느3-4장;6:15).
  느헤미아는 주요 개혁 사업(느1:1-7:4;11:1-13:31)을 활발하게 진행하였으나, 부임한지  12년  후인   432년  B.C.E.에  페르시아로  돌아간  것으로  여겨진다(느5:14;13:6a).  그 다음해인  431년 B.C.E.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활동하였으나 그 기간에  관하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느13:6ff.).  에스라와 마찬 가지로 그는 반대자들로부터 조직적인  방해를 받으면서(느4:7-12) 더이상  그의 목표를 수행할수 없는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은 앞서 언급한 대로 성벽을 재건하는 일로써, 성전이 재건된 이 후 70년이 지나도록 무너진 성벽에 여전히 머물러 살던 백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그가 취한 조처들 가운데 핵심적인 내용은 일종의 도시 통합(synoecism)이었는데, 이것은 종종  아테네 중앙 정부 통치하의 아틱(Attica) 전체의 통합과 비교된다.  그는 예루살렘 축성과 더불어  유다 인구의 1/10을 추첨으로 선별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킨 것이다(느11:1). 이  조처는 성벽 재건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선 사마리아의  산발랏(Sanballat,느4:1) , 암몬의  토비아(Tobiah,느4:3), 아랍의 게셈(Geshem,느2:9),  그리고 아스돗인(느4:7)에게 상당한 힘으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느헤미아는  농업과 상업의 이유로 안식일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에 반대하여 엄격한 안식일  준수를 강행하였다(느10:31;13:15-22). 또 외국 여인들과의 결혼을 반대하였으며(느10:30;13:23-31),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잃어버린 사실을 책망하였다(느13:24,cf.8:8).
  그가 취한 가장 강력한 조치가운데 하나는 역시 부채 탕감(seisachtheia)이었다. 느헤미아는 특권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는 부자들과,  이로 인하여 부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 사이의 계층 분화가 유다의 안정을 해치는 심각한 위협이 되자 취한 조치였다.   이 개혁은 종종 594-593년 B.C.E. 아테네의 솔론(Solon)이 취한 조처에 비교되곤 한다. 느헤미아는 자신과 측근들에게 지급되는 식량권 조차 포기한다(느5:14-19). 그러나 이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은 두 계층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보다는 한 쪽만을 위한 개혁 조치였다는 점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그가 취한 조처는 "그 땅의 사람"들과의 분리 정책으로써(느10:29-31) 상당수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디쳐 페르시아로 돌아가고 만듯하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형제 하나니(Hanani)가 유다의 총독으로 부임하였으나 ,  그가 취한 조치들에 관하여는 기록이 없다.


  페르시아의 개막과 함께 큰  희망으로 시작된 귀향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의 역사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목표를  달성한 듯하나, 유대 사회의 내면적 갈등과 분열은 이 시대의 흐름을 혼돈으로 규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 공동체는 그런 애매한 상태로는 존속할 수도 없었고, 과거의 체제를 되살릴 수 있는 능력도 가지지 못한 매우 불완전한 시대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많은 문학 작품이 생산 되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로부터 받은 영향과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④ 페르시아 시대의 유대인의 종교생활
  느헤미야 이후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까지  팔레스틴의 역사에 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며, 그  이외의 자료도 매우 빈약하여 우리가 아는 바가 매우 적고 불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에 쓰여진 많은 문학 작품들을 가지고 있어, 이들을 통하여 이 시대의 다양한 시대적 특징을 어느정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적어도 이  시대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모든 유대인-팔레스틴내의 유대인과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 세운 그들의 성전에서 예배하였으며, 이집트의 엘레판틴에 머물던  유대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성전과 제의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들이 예루살렘의 성전과의 교류를 단절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전통적인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사실은 유대교의 종교적 삶이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통합되어 있지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이러한 다양한 시대적인  상황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켜 나갔으며, 이러한 갈등은 포로기 이후의 계층간의 갈등, 특히 포로로부터 귀환한 공동체와 그 땅에  남아 있었던 공동체 사이의 갈등과 더불어, 에스라, 느헤미아의 개혁 조처들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분리되어 간 것으로 보여진다.
  이 시대의 다양한  종교 제의와 더불어 계층간의  다양한 사상 구조는 이 시대에 쓰여진 작품들에서도 나타난다. 성전 재건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공동체와 팔레스틴 공동체 사이의 갈등,  이방 문화와의 혼합 현상, 메시아 도래와 유대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등이 이 시대의  많은 작품의 주제가 되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작품은 저자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다.
  에스라-느헤미아서를 통해  우리는 유대인의 종교 생활의 일면을 볼 수 있는데, 특히 분리주의자(Separatists)와  동화주의자(Assimilationists) 사이의 갈등이 잘 드러나 있으며, 토빗(Tobit)과 유딧(Judit)서에서는 공통적으로 이 시대의 예배 의식의 발달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룻기(Ruth)와 에스더(Esther)서를 통하여 이방 문화와의 동화를 정당화해  나가는 과정과 함께 유대인의 민족 구원이라는 신앙과의 조화를 잘 엿볼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이 시대의  역사와 유대교의 종교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유대교가  이방의 여러 문화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내외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해  가고 있었으며, 그러한 변화의 과정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정착에 많은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이 시대를 매우 어두운 침체기로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떤 통일적인 종교 생활보다는 다양한 생활 방식, 가치관, 사상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3)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과 헬레니즘
① 알렉산더 대왕(336-323년 B.C.E.)
  소년 시절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은 마게도니야의 빌립의 아들 알렉산더(336-323년  B.C.E.)가   희랍의  도시  국가들을   통합한  후  그라니쿠스(Granicus)와 이소스(Issus)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 군대를 패퇴시키고 새로운 역사의  무대에 오른 것은 334/3년  B.C.E.의 일이었다. 이집트로 진군하는 알렉산더를 맞은  시리아-팔레스틴은 거의 전쟁다운  전투를 하지 못하고 저항없이 항복하였다.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은 바빌로니아와 수사, 페르세폴리스  및 인더스강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33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죽었지만, 그의 짧은 생애는 고대 오리엔트의  삶과 역사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로써 약 1,500여년 동안이나  팔레스틴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쳐왔던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은, 4세기 B.C. 이 후 그 세력이 약화되면서 팔레스틴의 역사의 무대로부터 물러나게 되었다. 알렉산더의 등장은 팔레스틴뿐만 아니라 근동의 정치사 및 문화사의 새로운 장을 맞게 된다.

 

② 동방과 서방의 만남과 헬레니즘(Hellenism)

  알렉산더의 원대한 꿈은  동방의 인도까지 점령하면서 서서히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꿈은 다름아닌 동서 세계의 통합(Cosmopolitanism)이었다. 그의 이상은 희랍의  스토아(Stoa) 철학에 기초한 것으로써  '하나의 세계', '하나의 시민권'을 꿈꾸는 통합을 중요한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나아가 그의 동서 문화의 통합이라는 꿈은 단지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침식하고 정복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문화를 통합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발생하게 되는 혼합주의(Syncretism) 현상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의 사상 체계를 헬레니즘(Hellenism)이라 부른다.
  이러한 꿈은 그가 비빌로니아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되면서 직접적인 실현의 빛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영향력은 수 백년동안 동서양의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교류의 길을 열어 놓았다.
  특히 팔레스틴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러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길목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유대인과 비유대계 그룹간의 정치적 사건,  종교적 경향, 사회적 특성, 문화적 혼합등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급진적인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쓰여진 벤 시라(Ben Sira)서는 헬라 문화가 유대  전통 문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유대인들은 헬라 문화와의 접촉과 헬라 사고 방식의 흡수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사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해 가기 위하여 도시(Polis)를  건설하고, 도시 문화를  정착시켜 나갔다. 시민들에게 시민권(Politeia)을 부여하고,  원로원을 두어 소위 민주  의회 제도를 정착시켜 나갔다.
  도시는 극장,  목욕탕, 경기장, 및 체육관의  시설을 갖춘 헬라식으로 건설되었다. 이 시기에  건설된 헬라식 도시로는 세바스테(사마리아), 프톨레미(악고,행21:7), 스키도폴리스(벧산), 필라델피아(암만)등이 있다.
  확산된 그리이스  문화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은 헬라어(Greek)를 통하여 퍼져나갔다. 이오니아 방언이 가미된 아틱(Attic) 방언인 코이네(Koine)는 새로 출현한 세계의  공용어로 발전하였으며, 근동에서  사용되던 아람어(Aramaic)를 밀어내고-물론 얼마간은 이중 언어(lingua  franca)로 남아 있었지만- 정치와 행정, 상업과 철학을 위한 언어로 자리잡아 갔다.
  팔레스틴에 많은 그리이스의 문학과  신화가 소개 되면서 당시 시민들의 생활 양식, 신앙, 철학 등은 바뀌어  나갔다. 그들의 이름은 점차 헬라식 이름이 가미된 이중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도시의 이름들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대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헬라 문화와 사상은, 그들로 하여금 그 문화에  몰두하도록 하여 유대인의 고유한 율법과 관습을 저버리도록 만든 경우도 많았으며, 이러한 태도에 심한 적개심을 가진 전통적인 유대인들도 생겨나게 되면서 점차 두 계층간의 심각한 위기 상황의 국면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③ 알렉산더의 후계자들(Diadochi)
  323년 B.C.E. 알렉산더 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마게도니아와 그리이스의 장군들의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은 시작 되었다. 소위 힘겨루기에서 승리한 자들을 헬라어로 디아도키(Diadochi)라  부르는데, "후계자"라는 뜻이다. 알렉산더의 고향 마게도니아를 차지한 안티고누스(Antigonus)와 이집트 및 리비아를 차지한 프톨레미(Ptolemy),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틴과   페르시아를   장악한  실룩커스(Seleucus)가 그들이다.
  프톨레미와 실룩커스 왕국 사이에 위치한 팔레스틴은 320년 B.C.부터 프톨레미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200년 B.C.E.부터는 실룩커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팔레스틴은  일종의 자치구로써 게루시아(Gerousia) 라  불리우는 원로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 프톨레미 왕조(320-200년 B.C.E.)
  헬라어로 '전사(전사)'라는  의미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는 알렉산더의 가장 유능한 장군 가운데 하나였다. 알렉산더가 죽자 그는 재빠르게 이집트를 장악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팔레스틴 정벌을 나섰다. 312년 B.C.E. 가자에서 승리한 그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차지하면서 그 세력을 시리아-팔레스틴 전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상당수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이집트로 끌고가 리비아의 동북부에 정착시켰다.
  그는 마게도니아의 안티고누스로부터 공격을 당하였으나 격퇴하였으며, 페니키아 해안의 통치권을 확보하였다.  그의 후계자인 프톨레미 I세(306-285년 B.C.E.), 프톨레미 II세(285-246년 B.C.E.), 그리고 프톨레미 III세(246-221년 B.C.E.)로 이어지는 왕조는, 셀룩시드 왕조와 경쟁 가운데 고대 이집트의 땅을 헬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만들어 갔다.
  그 가운데서  프톨레미 왕조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가장 왕성한 상업과 무역, 놀라운 문화를 이룩하였으며, 당시 수십 만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Museion)은 너무나 잘 알려진 곳이었다. 또 이곳에서는 프톨레미 II세의 명령으로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어 희랍어 성경(Septuagint,LXX)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희랍어 성경의 출간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간의 의사 소통을 위한 길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헬라 사상이 유대인들의  정신 세계에 영향을 미칠 길도 마련된 것이었다.
  이 시기의 유대인의 이집트 거류는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프톨레미 1세는 다수의 유대인을 이집트의 용병으로  데려가 거주시켰다(아리스테아의 편지 4:12). 알렉산드리아는 흩어진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집트의 도처에 흩어져 살았다.
  팔레스틴 자체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곳이 되지 못하였다. 다만 페니키아 지방의  풍부한 삼림(삼림) 자원을 이집트 지역으로 옮기기 위해 악고(Acco)라  불리우던 항구를  크게 만들면서  프톨레미아(Ptolemia, cf.행21:7, "돌레마이")라 칭하였다.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도로가 건설되면서 팔레스틴은 행정적,  경제적 발전의 기초를 놓아갔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제논 파피루스(Zenon Papyri) 는 이러한 팔레스틴의 경제 및 행정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예루살렘은 이러한 프톨레미 왕조의 정책에 의해 마치 중심부에서 격리된 성역처럼 취급되었으며,  유대인의 정신적 지도자인  대제사장에 의해 상당히 자치적으로 다스려 졌다. 대제사장은 매년  약 20달란트를 황실에게 지불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종교적 권한을 모두 가지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주전 3세기 말, 셀룩시드 왕조의 안디오커스 III세(Antiochus,222-187년 B.C.E.)는 예술 애호가요 여성 찬미가인 프톨레미 IV세(221-204년 B.C.E.)를 공격해 왔다.
  프톨레미 IV세는 218년  B.C.E. 라피아(Raphia)에서 그들을 격퇴시키는데는 성공하였으나, 프톨레미  왕조 내의 귀족들은 서서히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으며, 왕국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 때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인 오니아스 III세(Onias)는 매년 내는 황실세를 중단하였다. 그러자 프톨레미  왕조는 유다를 군사적 식민지로 만들겠다고 위협하였다.
  이 때 재력있는 토비아  가문의 요셉(Joseph,son of Tobias)이 황실세를 대신 지불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셀룩시드  왕조의 공격은, 급기야 200년 B.C.E. 프톨레미  V세(204-180년 B.C.E.)를 팔레스틴으로부터 몰아 냄으로써 팔레스틴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 셀룩커스 왕조(200-167년 B.C.E.)
  200년 B.C.E. 파네이온(Paneion)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안디오커스 III세(222-187년 B.C.E.)는 팔레스틴에서 100년을 통치하던 이집트의 프톨레미를 쫓아낸 후 소아시아, 트로이카, 및 마게도니아로 진격하였다.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의 정복 길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패전을 거듭하면서 엄청난 전쟁 배상금의 부채를 안고 187년 B.C.E. 엘리마이스(Elymais)에서 암살 당하고  말았다. 선왕의 부채를 안고 후계자의 자리에 오른  셀룩커스 IV세(187-175년 B.C.E.)는 그의  동생이었다. 그는 부채를 값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전 금고를 탐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틴을 정복한  안디오커스 III세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V세를 자신의 사위로 삼아 예루살렘으로부터 받던  황실세를 계속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  일을 맡았던 토비아 가문의  요셉은 계속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셀룩커스  IV세가 등극하면서 예루살렘의 성전 금고를 탐내게 되면서 유다의 귀족들과의 정치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성전  금고는 요셉의 아들 힐카누스(Hyrcanus)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시리아의 총독  헬리오도로스(Heliodorus)는 예루살렘 민중의 소요와 반감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 일을 중단하였다. 유대인들은  이 일을 기적으로 축하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헬리오도로스는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셀룩커스 IV세를 암살한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동생 안디오커스 IV세(175-164년 B.C.E.)는 그의 선왕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얼마동안 로마에 볼모로 잡혀갔던 적이 있었다. 귀국길에 헬리오도로스의  음모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삼아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는 선왕의  정치 노선을  이어 받았다. 나아가  스스로를 제우스의 에피파네스(Epiphanes,"신의 현현")라 불렀으며,  자신을 올림피아의 제우스로 숭배하도록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제우스 신전을 짓고 이러한 자신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하여 문화적, 종교적 강압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책이 토착 종교를 탄압할 의향을 가지고 시작된 것은 이니었다 할찌라도,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오던 소수 민족의 토착 제의를 헬레니즘적인 삶의 양식으로 대치시켜 나갔다는 의미에서 격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킬 만한 정책이었음은 확실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예루살렘의 개방적인 헬라주의자들에게는 협력과 지지를 얻었으나, 유대 율법에 충실한 자들에게는 심한 반대에 부디치기 시작하였다. 적어도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디오커스는 가장 나쁜 폭군이었다. 나아가 프톨레미 왕조의 정책과는 대조적인 셀룩시드  왕조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은, 서로 다른 이상을 가진 유대 민족  내의 서로 다른 계층간의 갈등을 자극하였으며, 급기야 시민전쟁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다.

 

(4) 마카비(Maccabee) 전쟁(167-164년 B.C.E.)
① 마카비 전쟁의 배경

  안디오커스 4세는 이집트 원정을  떠나기 전에 먼저 유다의 헬라화 정책을 발표하였다. 보수적인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 오니아드(Oniads)  3세의 동생 야손(Jason)은 그의 형과는 달리 매우 진보적이고 헬레니즘적인 성향을 가진 자였는데, 그는 왕에게 헬라화를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제안하면서 174년 B.C.E.에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II Macc.4:1-9).  야손은 예루살렘 성안에 경기장(Gymnasion) 과 청년 훈련소(Ephebeion)를 건축하고,  청년단을 결성하는 권한을 얻는 조건으로 왕에게 150 달란트를 바쳤다(2 Macc.4:9). 그는 온갖 형태의 헬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안디오커스(Antiochus) IV세가 제1차  이집트 원정(170-168년 B.C.E.)에 나간 사이에 야손은 171년 B.C. 성전 경비 대장의 형제요 사제 가문(Zadokite)에 속하지 않았던 마넬라우스((Menelaus)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 역시 왕에게 돈을 바치고 대제사장의 직을 사들인 자였다(2 Macc.4:23-26). 그의 임기 동안 예루살렘은 그리이스식 도시로 건설되었으며,  체육 학교(gymnasium)를 세워 유대 청년들에게 그리이스의 운동 경기를 보급시켰다.  또한 왕에게 약속했던 뇌물을 조달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성전의 기물들을 내다 팔기 시작하였다(II Macc.4:27-32).
  제2차 이집트  원정(168년 B.C.E.)을 실패하고  돌아온 안디오커스 4세는 자신의 실추된 정치적 위신과 경제적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팔레스틴의 땅과 민족을 제의적으로 헬라화 시키는  종교 정책(1 Macc.1:41-51)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 위에  '파멸의 우상'(shikutz  meshemem)을 세웠으며,  율법책을 불살랐다(1.Macc. 1:54-57). 그리고 성전의  기물들을 약탈해 갔다. 이러한 종교 정책의 목적은 반유다적(anti-semitic)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의 상황과 그때에 사용된  방법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바와  같이 반이집트적(anti-Egyptian)이고 친시리아적(pro-Syrian)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그동안 헬라주의자(Hellenizer)와 전통주의자들 사이의 종교-문화적 갈등과 계층간의 정치적 대립의 양상을 폭발시키는 작용을 하였으며, 이는 안디오커스 3세로부터 어느정도 보장된 유대인의 종교적  자유를 빼앗는 명백한 배교 행위로 간주 되면서 유대인들은 일종의 문화 투쟁을 벌였다.
  더우기 정통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분노는 훨씬 더 커서 이 행위를 '황페케하는 가증한 일'(단11:31;12:11)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종교적 자유를 위한 투쟁의 성격의 것이었다. 이러한 저항은 느헤미아와 그를 따르던 자들이 행했던 개혁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들은  율법에 충실한 자들로써 제사장 가문의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저항은 마따디아의 다섯 아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 그의  아들  중  가장  유명한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의 이름을 따서 '마키비  일가', 혹은 '마카비 전쟁'이라고 일컬어 졌다. 이 가문은 귀족에 속하지 않은 지방의 사제 가문으로서(1 Macc.2:1) 토비아 가문과는 달리 헬레니즘화를 거부하였다.
  결국 유대의 헬라화 과정은  두 집단 사이의 적대 행위에 의해 이용되었으며, 두집단 사이에 있었던 많은  유대 백성들은 분명한 입장에 서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전쟁은 유다와 헬라와의 대결이라는  형식보다는 유다 공동체 내의 헬라주의자들(Hellenizing Party)과 민족주의자들(National Party) 간의 시민 전쟁(Civil War)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특히 헬라의 정책에 동조하면서 개인의 이익을 누리던 제사장을  포함한 귀족 계층들은, 종교적으로 전통적인 율법에 대한 이해를 크게 달리하면서 헬라화 정책에 앞장섰으며, 그들은 헬라식 교육과 생활을 장려하던 자들로서 헬라 문화를 통한 유대교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이에 반대하는 전통주의자들은 적극적으로 이에  맞서 급기야 시민 전쟁의 양상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마카비  전쟁에 관하여 적고 있는 마카비서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② 유다 마카비, 요나단, 시몬(167-141년 B.C.E.)

  167년 B.C.E.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는 정치적,문화적 통합(unification)을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제사 행위를 금함.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짐승을 희생 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음란과 더러운 일로 스스로 몸을 더럽힐 것.
*율법서를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상과 같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1 Macc.1:44-50).

  이 무렵 모디인(Modi'in)에는  마따띠아(Mattathias)라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제사장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는 정부가 파견한 제의 관리들에게 "왕의 영토에 사는 모든 이방인이 왕명에 굴복하여 각기 조상의 종교를 버리고 그를 따른다 작정하였다 하더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끝까지 지킬 결심이오"(1 Macc.2:19-20)라 말했다.  이에 개의치 않고 제의를 드리려고 나선 한 유대인을 쳐  죽이고, 이어 왕의 사신까지  죽여 버렸다(1 Macc.2:23-26). 그는 그의 다섯 아들을 데리고  유다 광야로 나아가 그곳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헬라주의의 신봉자들과 맞서 싸웠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종교의 자유와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제의의 회복이었다. 이  때 율법에 열심인 하시딤(Hasidim) 도  합세하였다(1 Macc.2:42;cf.단11:33).
  166년 B.C.E. 마따띠아가 유언을 남기고 죽은 후  그의 세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166-160)가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그가 전사한 160년까지 "사자처럼 용맹했다"(1 Macc.3:4). 그는 종교적인 인품보다는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역량을 가진 유다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와 그의 군대는 유다의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1 Macc.3:8)을 찾아 진멸시켰다. 시리아의 군대 장관은 리시아(Lysias)였으며, 그에게는 "하나님을 배반한 유대인들"(1 Macc.3:15)이 따르며 전투에  참여하였다. 유다 마카비는  벧 호론(Beth-Horon), 엠마오(Emmaus), 벧쥬르(Beth-Zur)등지에서 승리하였다(1 Macc.3:10-4:35).
  이어 예루살렘에서 "황폐케하는 가증한 것"인 제우스 제의를 제거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증한 것이 들어  선 이 후 3년 반(단7:25,cf.계12:6)만인 주전 164년 12월 25일에 레위인의 희생 제사를 부활시킨 것이다(1 Macc.4:36-58). 이를 기념하는 축제가 해마다 열렸는데 그것이 바로 하누카(Hanukkah), 즉 성전 봉헌일이었다(1 Macc.4:59; 요10:22; 2 Macc. 10:1-9).
  주전 164년 안디오커스  4세가 페르시아에서 갑자가 사망하자(1 Macc.6:1-16) 그의 뒤를 이어 등극한 안디오커스 5세(164-162 B.C.E.)는 그의 나이 겨우 10세였다.
  이 때 시리아의 군대  장관 리시아(Lysias)는 섭정관이 되어 유다 반란군을 본격적으로 토벌하기 시작  하였다. 그들의 군대는 벧 사가리야(Beth-Zacharia)를 격파한 후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1 Macc.6:28-54).  그런데 바로 이 때 왕위를 노리는 리시아의 정적(정적) 필립비(Philippi)가 페르시아로부터 시리아를 공격해 오자 리시아는 급히 철군하고 말았다(1 Macc.6:55-59).
  이어 셀류커스의 아들 데메드리오 I세(Demedrio I,162-150)가 등극하면서 헬라주의자 알키모스(Alcimus)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1 Macc.7:9). 또 그가 임명한 니가노르(Nikanor) 장군은 사정없이 유대인을 공격하였다. 예루살렘을 포위한 그는 벧  호론   전투에서  사망하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이  날을  나카노르의  날(Nikanor'day)로 경축하였다(1 Macc.7:50).  그러나 그 후 얼마동안 유지된 그들과 의 평화는  주전 160년  베레아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영웅  유다 마카비가 전사(1Macc.7:1-9:22)하게 되자 곧 깨어지고 말았다:"유다가 죽은 후 이스라엘 전 영토에서 율법을 저버린 자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고 악을 일삼는 자들이 사방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1 Macc.9:23).
  유다 마카비의 후계자는 그의 막내 동생 요나단(Jonathan,160-142년  B.C.E.)이었다(1 Macc.9:28-12:53). 그는 형 유다와는 달리 그가 지닌 비상한 외교술로 그가 활동하던 기간에 일어난 국제 정치의 변화에 매우 적절히 대응하였다. 즉 셀류커스 왕가의  데메드리오  1세  보다  안디오커스  왕가의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150-145 B.C.E.)에게 더 접근하면서 이익을 취하였다. 또 로마와 스파르타와의 관계를 맺으면서  국제 정치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였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는데 데메드리오 I세가 화친을 요청하면서 얼마간의 평화의 기간을 맞이한다. 요나단은 152년 B.C.E.  예루살렘 성을 수축하고 맞은 초막절에 스스로 대제사장(kohen hagadol)이 되어 사제복을 입었다(1 Macc.10:21).  이로써 마카비 일가의 힘은 견고해 졌으며, 이어 주전 150년에는 요나단이 왕으로서 자색 옷을 입고 당당히 나서게 되었다. 이로써  일각에 왕과 대제사장의 역할을 한 몸으로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헤스모니안 일가가  유다의 공식적인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게  된다. 동시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진 후 계속되어 오던 사독 가문의 제사장의 전통은 무너지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외교적 기술은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시리아의 야전군 사령관인 트리폰(Tryphon)은 요나단을 매우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주전   143년   벧  산(Beth-Shean),   즉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전투에서 요나단을 포로로 잡아 처형하였다(1 Macc.12:39-53).


  요나단의 뒤를 이은  시몬(Simon,142-135년 B.C.E.)은 요나단과 유다  처럼 많은  성과를 올렸다.  특히  그는  요나단과는 정  반대로  데메드리오 2세(145-138B.C.E.)와  동맹을 맺으면서  그로부터 세금을  면제  받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1Macc.13:31-40). 무엇보다도 시몬은 "유대인의 대사제(haKohen haGadol, s)이며, 사령관(sar haTzaba,   s)이며, 지도자(nasi'  Hayehudah,   s)"(1 Macc.13:41-42)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독립적인 화폐를 주조하였으며(1 Macc.15:6), 이 주화들은 141-136년 B.C.E.경부터 사용되었다. 주화의 표면에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이면에는 한 세겔 또는  반 세겔의 액면이 부각되었다. 이로써 모디인에서의 반란 이후 25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 후 약 444년 만에 처음으로 주전  142년에 다시 독립국가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79년 동안(142-63 B.C.E.)에 걸친  헤스모니안 왕국(Hasmonean Kingdom) 의 자유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정치적 자유'를 얻는데까지 이른 것이다.
  시몬은 그가 이끄는 군대를  욥바(Jaffa)에 보내 안디오커스 IV세 아래 주둔하고 있던 외국인들을 몰아 냈으며, 게젤(Gezer)을 점령하고 그곳에 자신의 왕궁을 짓고 (I Macc.13:43-48),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를 그 도시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나아가 시몬은 141년 B.C.E.예루살렘 요새를 점령하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환호소리도 드높게  비파와 꽹과리와 거문고 소리에 맞춰 찬미와 노래를 부르며 요새안으로 들어왔다"(I Macc.13:51). 이 날을 경축일로 정하여 지켜 나갔다.
  또 시몬은  로마와 스퍼르타와 동맹을  갱신하였으며(I Macc.14:16-24), 온 유다백성들은 모여  시몬에 대한 찬사를  보내며 그의 지도에  따를 것을 다짐하였다(IMacc.14:25-49). 이러한 번영과 평화의 시대는 1 Macc.14:8-15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들은 "...백성은 평화롭게 자기 땅을  가꾸었고,...노인들은 거리에 나와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며 태평세월을  구가하였고...율법을 저버린  자들(poshe'i batorah)과 악한들을 모두 없애 버렸다.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기물들을 많이 갖추어 놓았다"고 적고있다. 이는 마치 묵시 문학적 환상(암9:11-15;미4:4;사32:15;35:1-10등)의 성취된 모습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마카비의 다섯 형제가 영웅적인  헌신으로 싸우던 30년간의 마카비 전쟁은 134년B.C.E. 시몬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지마는, 존폐의  위협에 놓였던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적인 기간이었으며, 유다는 다시금  종교적 자유와 더불어 정치적 자유를 이룩한 한 왕조의 막을 열어놓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② 미쉬나(Mishnah)
㈎ 미쉬나의 형성과 특징
  제2차 성전 멸망 이후  율법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현자들의 많은 가르침이, 마침내 기원 2세기 말경 수집되어 기록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편집된 책이 미쉬나(Mishnah)이다.
  미쉬나란 히브리어로  '반복한다','연구한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 특히 토라의 해설인  미드라쉬(Midrash), 그리고 토라와 상관없이 내려온 전통적인 법과 규례에 관한 설명인 할라카(Halaka)가 포함되어 있다. 미쉬나 편집을 위한 수집과 편집 작업은 '미쉬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야브네의 아키바(R.Akiva)와 여호수아(R.Yoshua ben  Hananya), 엘리에젤(R.Eliezer ben Hyrcanos),메이르(R.Meir)   및    그의   동료로부터    시작하여   유다    나시(Rabbi   Judah Ha-Nasi,c.180-220년 C.E)가 담당하였으며, 여러 시대에 걸처 수백명의 랍비들에 의해 첨가, 수정되어 최종 확정되었다.
  미쉬나가 취급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다양할뿐 아니라 상호 대조되는 자료들이 함께 편집되어 있다. 미쉬나의 마지막 편집자의 목적은 법규를 변경할 수 없도록 최종 확정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가능한 해석들을 종합하여 나타내고자 함에 있다. 그런점에서 미쉬나는 법 교재라기보다는 문학 작품으로 규정된다.
  표현의 방식이나 특징에 있어서 현자와 랍비간의 대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들이 선택하고 사용하는  어휘나 문장은 취급하는 내용과 더불어 미쉬나의 문학적 가치를 잘 대변해  주는 증거가 된다. 나아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두운법(alliteration),  교차배열법(chiasmus),  반복법(repetition),  그리고  대구법(parallelism)등의 많은 수사학적 표현  방식 역시 미쉬나의 문학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미쉬나의 편집 원칙은  할라카를 한 법전으로 묶는다는 의도 하에서 이루어  졌으며, 특별한 교육적  원칙에 의해 좌우되었다. 아카데미아에서 구두로 가르쳐온 내용을 체계적으로 묶는 작업  자체가 교육적 기능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교육적 원칙이 편집의 원칙 가운데 중요하게 인정된 것이다. 이러한 의도 하에서 다음의 몇 가지 편집 원칙을 정리해 볼 수 있다:
  (1) 미쉬나는 익명(익명)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특정한 주제와 가르침이 특정한 상황의 제약을 가능한한 받지 않도록 보편화하는 과정을 반영한다.
  (2) 토론 과정에서 상호 다른  입장과 의견이 소개된다. 경우에 따라서 다른 견해를 매우 길게 소개한다. 이러한 과정을 학생이나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경험하고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최종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보다 자연스럽고 확실하게 해 나간다.
  (3) 각기 다른 장소에서(경우에 따라서  각기 다른 시대에) 이루어진 복잡한 토론을 소개한 후  이를 한 대화의 형식으로  묶은 다음 최종적으로 의견을 결정할 때 가장 권위있는  랍비를 내세워 토론을 종결하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각각 살던 랍비들이 같은 토론의 한마당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4) 한 주제의 최종 결론을  얻어 내기 위하여 매우 폭넓은 다양한 자료를 선택하여 취급하고 있다. 이는  아카데미아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된 많은 자료를 그대로 선택하여 기록함으로써 교육적 효과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 미쉬나의 구조
  미쉬나는 모두 6개  조(조,Orders,sedarim)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조는  몇  개의  항(항,tractates,massekhtot)으로,  각  항은  다시  몇 개의  장(장,chapters, perakim)으로, 각  장은 다시 몇 개의 절(절,mishnayot)로 나누어 진다.
전통적인 미쉬나의 편집에 따르면  모두 6조 63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3세기에 60 항으로 최종 확정, 편집되었다. 

 

③ 탈무드(Talmud)
  3세기 중엽에 미쉬나가 완성된 후, 약 2세기 반에 걸쳐 미쉬나에 대한 주석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시기를 우리는 탈무드 시대(Talmudic Period)라 부른다. 히브리어의 '탈무드'란 '라마드'(lamad,"연구하다"), 림마드(limmad,"가르치다" 또는 "주석하다")라는 말로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주석과 가르침을 총괄적으로 포함하는 어휘이다. 탈무드는 그런 의미에서 미쉬나의 주석일뿐 아니라, 미쉬나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탈무드에는 [팔레스틴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있다. 이 두 탈무드는 각각 편집 시기와 장소가 다르다 하더라도 둘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다. 팔레스틴 탈무드의  가르침과 내용이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 발견되기도 하며, 편집 구성에 있어서  모방이 있기도 하다. 또, 바빌로니아에서 팔레스틴으로 건너온 랍비들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두 탈무드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편집 형식과 내용이다. 편집 형식에 있어서 팔레스틴 탈무드가 보다 단순하며, 여러 조항의 차이를 보인다.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보다 후기에 편집되었기 때문에  팔레스틴 탈무드보다 후기 자료가 재편집되어 첨가되어있다. 전승에 대한 해석에 있어 두 탈무드는 각각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상황의 차이때문에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 팔레스틴 탈무드
  4세기 말에 완성된 팔레스틴  탈무드는 팔레스틴 내에 있던 많은 아카데미의 현자들의 할라카적 가르침과 결정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초기의 가르침이 비교적 원형의 변경없이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적 구성과 문학적 표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제한된 주제의 토의를  하나로 묶은 Sugya("과정")라 불리우는 문학적 단 위는 탈무드  시대의 모든 문학적 성격을  규정짓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팔레스틴 탈무드의 가장 특징적인 가치가 있다.
  아모라 시대에 팔레스틴의 가장  중요한 토라 연구 도시로는 갈릴리 지방의 티베리아(Tiberias)와   지포리(Sepphoris),   남쪽의 룻다(Lydda)와   가이사랴(Caesarea)이다. 특히 로마  총독부가 자리잡은 지중해의 가이사랴는 4세기 중엽 팔레스틴 탈무드의 가장 오래된  자료의 편집 장소로도 잘 알려진 학문의 도시였다. 탈무드의 초기 편집  자료인 Bava Kamma, Bava Metsia, Bava Bartra등은 "가 이사랴의 탈무드"라고 불리워지며,  이는 보다 후기에 티베리아에서 편집된 탈무드의 자료를 "티베리아 탈무드"라  부르는 것과 비교된다. 팔레스틴 탈무드의 대부분은 최종적으로 4세기 말 티베리아에서 편집되었다.
  티베리아에서 편집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한 학파의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지포리, 룻다 및  가이사랴의 학자들과 랍비들의 각기 다른 해석과 주석이 종합되었을 뿐이다.  이 곳에서 편집된  팔레스틴 탈무드는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완성된 이 후에도 팔레스틴과 이집트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탈무드로 그 권위를 인정 받아  왔을 뿐만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에 이르는 유대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7세기 팔레스틴이  모슬렘에 의해 정복되고, 8세기 바그다드(Bagdad)가 칼리프(Caliph)의 수도가 되면서  바빌로니아의 영향력이 아랍 세계는 물론 모든 유대인의 문화에도 지대하게 미치면서, 팔레스틴  탈무드의 권위와 지위는 점차 바빌로니아 탈무드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스페인과 남부 프랑스 등지에서는 11세기에도 팔레스틴 탈무드에 관한  언급을 계속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으나, 팔레스틴 탈무드의 영향력은 바빌로니아 탈무드에게 거의 넘겨주게 된 셈이었다.

㈏ 바빌로니아 탈무드
  제1차 성전이 멸망하고 유다의  귀족과 중요한 역할을 해 오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 후부터  바빌로니아는 유대교의 중요한 장소로 그 기초를 놓아 갔다. 특히 페르시아 고레스의 칙령 이 후 예루살렘으로 귀향한 바빌로니아 유대인 공동체는 새로운 유다  건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팔레스틴과 바빌로니아 사이의 많은 인적, 물적 교류와 더불어 학문적 교류 역시 빈번하였다.
  그러다가 제2차 유대  반란 이 후 팔레스틴의  정치적 상황이 바빌로니아의 그것에 비하여 보다 억압적이었으며,  유대인의 자유로운 학문 연구를 보장해 주지 못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공동체가 자료 전승과 관리 및 체계적인 학문 연구에  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빌로니아의 중요한 현자들이  팔레스틴으로 건너가 팔레스틴의 토라 연구의 주도권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초기  바빌로니아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은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니시비스(Nisibis)와 중부의 네하르데아(Nehardea)  및 후잘(Huzal)이었다. 그 후 아모라시대에는 중부의 네하르데아와 품베디타(Pumbeditha), 그리고 남부의 수라(Sura)와 마타 메하시아(Matha Mehasya)등으로 그 중심이 이동해 왔다. 그리고 지역 사이의 도시인 마호자(Mahoza)와 나레쉬(Naresh)등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도시들에서 이루어진 미쉬나에 관한 토론과 해석은 팔레스틴 학파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각각의 지역이 서로 다른 정치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며, 때로는 두 지역간의 권력 다툼에서 온 결과라고 여겨진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독특한 성격 가운데 하나는 특정 자료의 주제를 해석함에  있어 모든 해석의 가능성들을 변증법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정리하였다는 점에 있다:
  미쉬나에 나오는 용어의 새로운  개념을 많이 정리해 놓았으며, 각기 대비되는 가르침이나 해석들을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목적을 향해 교묘하게 조직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이  과정에서 가르침의 용어들을 재해석하는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포괄적으로 발전된 해석을 가능케 하도록 유도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편집에 관한 문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전승에 의하면 아쉬(Rav Ashi,d.427년 C.E.)의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편집이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어(b.Bava Metsia 86a) 그가 곧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최종 편집자로  인정되어 왔으나, 그 이 후에도 여러 차례의 편집과정이 지속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팔레스틴 탈무드가 완성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발전해온 것은 후기 유대  전승에 있어서 그것이 최고의 권위를 갖게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보다 방대한  문학 작품으로써 방대한 주석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중요성을 가중시켰으며, 결국 일반적으로 탈무드(The Talmud)하면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지칭할 만큼 되었다.
  바빌로니아가 아랍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아랍문화의  중심지가 되면서 유대문화의 명성이 퍼져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아랍의 억압이 심화되어 가면서 그 역할이 위축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무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종교, 사회사에 있어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써 작용하였으며, 이방 세계 안에서  점진적인 붕괴의 과정속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삶의 뼈대를 놓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7) 콘스탄틴 황제와 유대-기독교 논쟁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역시 324년 C.E.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다.  첫 기독교 황제인 그는 팔레스틴에 정치적, 종교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새 황제는 유대인 사회에서 유대인들의 역할을 제한하였으며, 유대인의 법적 지위는  점차 제약을 받게 되었다. 또한 수많은 기독교의 순례자들이  소위 [성지](Terra Sancta)를  방문하면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팔레스틴에 인구 통계학적 변화를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신학적 논쟁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이제 그 논쟁은 신학적 논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쟁점이 되었으며, 신학적 해결 보다는 정치적 해결 쪽으로 기울어 졌기 때문이다. 이제 산헤드린과 회당의 활동은 로마  기독교 법률의 통제하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는등  이러한 변화는 4-5세기에 이르러 점차 심화되어 갔다.
  팔레스틴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통치 방식도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한 유대 자치기구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나갔다. 팔레스틴을 세 구역-제1구역(Palestina Prima)은 가아사랴를  수도로 한 유다-사마리아 및 아두메, 베레아 지역으로, 제2 구역(Palestina Secunda)은 갈릴리와 데가폴리스 및 골란으로, 제3 지역(Palestina Tertia)은 페트라를  수도로 한 네겝 지역-으로 각각 나누어 통치하였다. 이러한 통치 정책은 각 지역의 유대인의 활동을 분리 시킴으로써 그 힘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며 갈루스(Gallus)에  대항하는 유대인의  반란이 351년C.E. 지포리에서 일어났다. 이  반란은 갈릴리와 룻다에까지 퍼져 나갔으나 예루살렘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  반란은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반란이라기 보다는 갈루스의 부도적한 통치 행위에 대한 거부 행위였다.
  이러한 기독교의  세력 하에서 363년 C.E.봄,  콘스탄틴 황제의 조카인 율리안황제(Julian,361-363년 C.E.)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계획은 당시 기독교에 대한 황제의 공격이었다. 70년 C.E.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유대교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간 증거였다.
  나아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성전이 파괴된 채로 남아 있는 한 더 이상 유대교는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였다.
이 때에 로마의 황제  율리안은 예루살렘에 유대인을 위한 성전 재건을 명령하였으며, 그 공사는 즉각  착공되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천재 지변(지진)에 의해 즉각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율리안 황제는 그로부터 수 주일 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율리안 황제의  성전 재건의 목적은 기독교의 정당성을 파괴하려는 것이었으나, 이 정책의 실패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유대교가 하나님에게로부터 버림받았음을 확증하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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