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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예루살렘

영국신사77 2007. 2. 3. 23:48

                            예루살렘 [Jerusalem]

 

 

    요약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

   인구는 62만 2091명(1997)이다. 아라비아인은 이 도시를 쿠드스(신성한 도시)라고 부른다. 행정수도는 텔아비브 야파이다.

  동부는 요르단령이며, 서쪽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령이 되었고, 1950년에는 그 수도가 되었다. 1967년 6월 중동전쟁 이후로 유대교도·그리스도교도·이슬람교도가 저마다 성지()로 받들고 있는 동쪽 지역도 이스라엘의 점령지이다.

   사해()로부터 25km,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5km, 높이 790m 가량의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의 분수령상에 있는데, 지중해성기후사막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북위 31°41'에 위치하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고 봄·가을에는 이따금 37℃의 더위를 겪는다.

 

   동()예루살렘에는 사적()·성적()이 많으며, 통곡의 벽(유대교), 성묘()교회(그리스도교), 오마르사원(이슬람교)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많으며, 순례자와 관광객을 위한 호텔·레스토랑·상점 등이 많다.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이며, 정부 청사와 헤브라이대학·국립박물관·미술관 등이 있다. 또 금속·담배·플라스틱·신발·전기기구 공장 등이 있다.

 

                                          예루살렘의 역사
본문

   BC 3000년대 말경에 에브스(여부스)라는 가나안인()의 한 부족이 그 동부에 성시()를 지어 거주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이 도시는 우루살림이라고 불렀는데,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BC 2000년대 중엽부터 이집트파라오()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BC 1000년 무렵까지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뒤 헤브라이인이 이곳을 점령하였고, 다윗왕이 에브스인을 쫓아내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음에는 솔로몬왕이 지금의 아크사 이슬람교사원이 있는 지점에 궁전을 지었고, 그 북쪽, 지금의 바위사원(쿠바트 앗사흐라)이 있는 곳이며, 일찍이 다윗이 건립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제단 앞에 야훼의 성전을 건립하였다. 이 무렵에는 주민들도 늘어났고, 도시 둘레에 성벽도 만들었다.

   BC 935년 왕국이 이스라엘과 유대로 양분되자,
예루살렘은 유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BC 586년 신()바빌론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가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BC 538년까지 억류하였다(바빌론의 포로). 그뒤 페르시아 왕 키루스(고레스)가 이들을 석방해 줌으로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야훼의 성전도 재건하였으나, 옛날의 번영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뒤 여러 차례 파란을 겪은 끝에 BC 63년 폼페이우스가 거느린 로마군이 성벽을 파괴하고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37년부터 헤로데스(헤롯)왕이 이곳을 점령하고 야훼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솔로몬왕 이래의 번영을 되찾았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의 색채가 농후한 것이 옛날과 다른 점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무렵(AD 30년 4월)에는,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과 매장지가 북서부의 성벽 밖에 있었는데, 10여 년 뒤에는 이 지역을 둘러싼 새 성벽이 만들어졌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70∼71년에 이 도시를 공격함으로써[제1차 유대전쟁] 헤롯 시대의 번영은 사라졌다. 유대교도들은 헤롯이 지은 성전의 벽, 나중에는 그 성벽을 ‘통곡의 벽’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찾아가서 통곡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뒤에131~134년에 일어난 유대교도의 대규모 반란[제2차 유대전쟁] 때문에, 로마인은 135년 야훼의 성전을 파괴했으며, 예루살렘을 '
콜로니아 아이리아 카피토리나'라 부르고 직속지로 삼아, 유대교도들을 전원 추방함으로써,세계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이산)라고 한다.

 

  로마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자로 붐비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성묘() 등에 최초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614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비잔틴 제국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많은 교회를 불사르고 다수의 시민을 끌고 갔다.

   638년
이슬람교로 단결한 아랍인이 이곳을 함락시켰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비잔틴제국에서 이탈하여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바위사원에 있는 큰 바위는, 마호메트가 꿈에 대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제7천에 있는 알라신() 앞까지 갔다는 승천(미라지)의 장소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아랍인들은 솔로몬의 궁전이 있던 곳에 ‘아득한 회교사원(아크사의 마스지드)’을 지었으며, 우마이야왕조칼리프,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 때에는 다윗이 제단을 마련한 곳에 바위 사원을 건립하였다.

   이때부터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는 서로 상대편의 성지를 존중하였다. 예외로는 이집트의
파티마왕조의 칼리프 하킴(재위 996∼1021)이 그리스도의 성묘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도의 몇몇 성지를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비잔틴제국의 도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099년에는 제1차 십자군이 성시()를 침략하였으며,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대학살을 자행하고, 이곳을 수도로 하는 예루살렘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187년 이집트에 아이유브왕조를 건설한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모아 이를 탈환하였다. 그뒤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으나, 1229년 2월에서 1244년 8월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의 화의()로 이 땅을 회복한 적이 있을 뿐, 성지 탈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 땅은 맘루크왕조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다마스쿠스 총독이 이를 관할하였다.

 

   그러나 1516년 12월 말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셀림 1세가 시리아에 있는 맘루크왕조의 세력을 꺾고 예루살렘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현존하는 성벽의 대부분은 투르크령이 되고 난 뒤, 쉴레이만 1세(재위 1520∼1566) 때 축조된 것인데, 투르크령 시대에는 차차 쇠퇴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인구가 1만 1000명 정도로 감소하였다.

   한편, 19세기 중엽부터는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등이 투르크에 압력을 가하여, 이곳의 성지 보호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투르크군이 패퇴하고 앨런비 장군이 거느리는 영국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으며,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가자, 그 수도가 되었다.

 

   그뒤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밸푸어선언에 따라 유대교도의 이민이 격증하였으며, 아랍족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1948년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도와 아랍 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이듬해 2월에 이스라엘국이 성립하였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은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동서로 양분하여 각각 한 쪽을 영유하였는데,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동부마저 점령하였다.

 

이미지
예루살렘 시내거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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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브라이대학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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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신시가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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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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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전경
603*600, 134kb
이스라엘 올리브나무
800*604, 217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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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 (Jerusalem) 

 

요약

서남아시아 팔레스타인 내륙부에 있는 도시. 인구 68만 500명(2002).

설명

  서남아시아 팔레스타인 내륙부에 있는 도시. 인구 68만 500명(2002). 사해로부터 서쪽 24㎞, 지중해 동쪽 56㎞ 지점에 있다. 해발고도 약 800m의 유대산지 분수령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후는 여름에 건조하고 겨울에는 지중해성기후의 영향을 받아서 강수량이 많다.
  옛 시가지 동예루살렘은 요르단, 신시가지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지배했으나, 1967년 제3차중동전쟁 이후 동예루살렘도 이스라엘이 점령하였다.
  동예루살렘은 오스만투르크시대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중세 성곽도시의 모습이 남아 있다. 연간 약 11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의 순례자들이다. 3종교의 사적과 성지(聖地)가 많고, <통곡의 벽(유대교)> <성묘교회(聖墓敎會, 그리스도교)> <바위돔(이슬람교)> 등이 유명하다.
  서예루살렘은 역사가 100년도 안되는 신생도시이지만, 이스라엘의 정치·학문·예술의 중심지이고 크네셋(이스라엘의회)과 헤브라이대학이 있다.

 
                                  예루살렘의 역사
 
《구약성서》에서는 예루샬라임(Yerushalayim), BC 1300년대의 아마르나 문서에서는 우르살림(Ursalim)으로 되어 있다. 우르살림은 <신이 평안을 주시도록>이라는 뜻이며, 아라비아어로는 이 도시를 쿠두스(성지)라고 한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인(유대인·헤브라이인)의 가나안 점령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었다는 것이 고고학 조사에서 밝혀졌다. BC 3000년대 말에 여부스라는 한 부족이 예루살렘 동부에 성채를 쌓고 살았기 때문에, 여부스라고 하며, 성채는 시온이라고 했다.
 
  BC 1400년 무렵부터 이집트의 침입으로 예루살렘은 이집트가 지배했으며, BC 1230년 무렵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온 이스라엘민족은 먼저 여리고를 점령했고,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BC 1010년 무렵 다윗[다비드]이 이스라엘왕이 되었고, BC 955년 무렵 다윗[다비드]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이 된 솔로몬의 시대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였다. 지금의 아크사모스크가 있는 지점에 웅대한 궁전을 세우고, 동시에 다윗이 세운 지금의 <바위의 돔>에 있는 제단 앞에 신전을 건축했다. 또한 도시 주위에는 성벽을 쌓았고, 점차 증가하는 주민들을 그곳에서 살도록 했다.
 
  BC 931년 이스라엘왕국이 북부의 이스라엘과 남부의 유대왕국으로 분열되자, 예루살렘은 유대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BC 597년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왕과 주민들을 바빌론으로 보냈으며(제1차 바빌론유수), 이어서 BC 586년 유대왕국을 멸망시켰고, 이때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다(제2차 바빌론 유수).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BC 538년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왕 키루스 2세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에 돌아왔고 도시와 신전을 재건했으나, 그 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과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시리아의 셀레우코스왕조 등의 지배를 받은 뒤에, BC 63년 로마의 M.G. 폼페이우스에 의해 점령당했다.
 
  BC 37년에는 로마로부터 유대왕의 칭호를 받은 헤롯왕이 통치했고, 여호와 신전을 복구했다.
 
  AD 30년 무렵 예수 그리스도가 처형된 뒤 그리스도교가 생겼으며, 로마장군 티투스가 점령한 70년 이후 예루살렘의 번영은 소멸되었지만, 로마가 그리스도교국이 되고부터는 그리스도교도의 순례가 많아졌고, 콘스탄티누스대제는 그리스도의 성묘자리에 교회(성묘교회)를 세웠다.
 
  614년 예루살렘은 사산조 페르시아에 의해 점령당했으나 로마가 다시 탈환했고, 637년에는 아랍인들에게 점령당했는데, 이때 쿠두스라는 아라비아어 명칭이 붙여졌다.
 
  옴미아드왕조 칼리프 압둘 말리크 때 유대인이 <뿌리의 바위>, 즉 세계의 토대가 되는 바위라고 하는 장소에 금박지붕의 웅장한 <바위돔>을 세웠다. 이 모스크가 있는 장소가 이슬람교도에게는 메카·메디나에 이은 성지가 되어, 이슬람교의 순례자들이 증가했다.
 
  아랍인들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유대인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1099년 제1차십자군 때에 유대교 교회당인 시나고그에서 많은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회복했을 때, 유럽인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왕국을 건설했고, 투르크의 안티오크(지금의 안타키아)에서 에데사와 트리폴리를 포함한 영지를 그 세력권에 넣었다. 십자군 가운데에서 고드프루아드 부용이 국왕에 추대되었고, 성묘 보호자라고 자칭했다. 서유럽의 봉건제도가 이곳에 도입되어, 십자군의 전사는 봉토를 받고 영주가 되었다. 십자군의 성채는 지금도 지중해 동쪽 기슭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1187년 아이유브왕조의 살라딘은 이슬람교도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그리스도교도와 여러 차례 십자군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1260년 예루살렘은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1517년부터 예루살렘은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 아래 들어갔고, 1918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제국 총독의 통치를 받은 예루살렘의 주민은, 총독의 착취로 경제적인 고통을 받았다.
 
  제1차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예루살렘은 영국군 E.H.H. 앨런비경의 군대에 의해서 점령되었고, 이때부터 영국군 사령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또 전쟁 뒤의 영국위임통치 아래에서는 영국 고등판무관의 소재지였다. 그러나 시오니즘운동이 고조되면서 해외유대인 귀환자가 증가했고, 유대인과 아랍인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무력충돌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영국의 위임통치는 1948년까지 계속되었으나, 통치기간의 종료와 함께 영국군이 철수하자, 유대인들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공화국 독립을 선언했다. 주변의 아랍 여러 나라들은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군과 전투를 시작했으나, 1949년에 정전(停戰)되어 사실상 이스라엘공화국이 탄생했다. 예루살렘은 분할되어 동예루살렘은 요르단령,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령이 되었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대립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고, 1967년 6월 제3차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요르단강 서쪽을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언했고, 지금의 예루살렘은 모두 이스라엘의 통치 아래 있다. 1980년 크네셋은 통일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결의했으나, 국제연합(UN)이 무효화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13개국 대사관이 텔아비브로 옮겨갔다.
 
  동예루살렘의 인구분포는 아랍인 11만 5000명, 유대인 7만 명이며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뒤로 유대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를 위한 아랍인 토지의 강제수용이 시행되고 있다. 이에 대해 선거 보이콧, 이스라엘 시민권 취득거부, 게릴라활동 등 아랍인들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다. 또 아랍인 대부분이 급사·가정부·건설노동자 등 서예루살렘의 하층노동자계층을 구성하여 동서예루살렘의 계층분화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이 아랍측의 반감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분류
지리·관광정보 > 아시아 >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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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예루살렘

2007/01/18 오전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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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800m(765m) 고원상의 종교 도시인 예루살렘은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125:2)라고 시편기자가 읊은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의 고향이자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중생대 세노마니아 기의 담황색의 석회암으로 형성된 유다 구릉지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예루살렘은 5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세계 최고의 역사적 도시로, 현재 인구 약 40만명 중 유대인이 30만이고, 종교별로는 이슬람 교도가 약 10만명을 차지하고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는 예루살렘은 각 종교의 이채로운 종교적 건축물의 조형과 색채가 조화되어 특이한 도시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예루살렘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고고학적 이해는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본고는 이 예루살렘에 대한 역사적, 고고학적 이해를 돕기 위해 ?자료집?(The New Encyclopedia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과 기타 도서들을 참고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본문에서 각주로 따로 구분하지 않은 부분은 전적으로 ?자료집?의 내용을 번역하거나 요약한 것이고 기타 도서의 참고 부분은 각주로 구분하였으며, 4명의 발제자가 시기별로 나누어 기술하였음을 밝혀 둔다.

초기의 시기들과 제1성전 시대
지명>
B.C. 20, 19C에 이집트인의 저주(execration) 문헌 속에 루살리뭄(Rushalimum)으로 읽혀지는 형태로 자주 나온다. B.C. 40C 엘 아마르나 문서에서는 우르살림(urusalim)으로 나오고, 앗수르 문헌에는 우르살리무(urusalimu)로 나타나고 사사 시대에는 ‘여부스’로 불려졌다(삿19:10). 왕국 시대에는 ‘아리엘’로 알려졌고(사29:1), 신약 시대에는 ‘거룩한 성’으로 불려졌지만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파괴된 후 ‘아엘리아’(Aelia)로 개칭되었다가 콘스탄틴 대제 때 다시 예루살렘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초기 히브리 발음은 예루살렘(Yerushalem)이다. 이름의 뜻은 ‘살렘(shalem)의 토대’로 해석될 수 있다. 살렘이란 우가릿의 신화텍스트에 나오는 ‘아름답고 은혜로운 신’ 샤하르와 샬림, 둘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창14:18, 시편76:2에 나오는 짧은 형태의 살렘이란 이름은 꽤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은 아브라함이 사로잡혀 있는 조카 롯을 구원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이야기에서이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이 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났다는 말이 있는데, 이 살렘이 지금의 예루살렘이라고 여겨진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정복하고 이스라엘인이 정착하던 그 시기에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민족적 명칭인 ‘여부스’로 알려져 왔다. 이스라엘이 지배하기 전 그 도시의 마지막 지배자인 Araunah는 ‘여부스족의 Araunah’로 나타난다. 다윗의 정복 설화에서 ‘왕과 그의 부하들은 여부스 족에 대항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다윗은 시온 즉 다윗의 성을 정복했다(삼하5:6-7)라는 구절과 관련이 있다.
  시온이라는 초기 이름은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을 지은 ‘주의 집이 있는 산’, 성전 언덕으로 알려진 북쪽 꼭대기(시온산)과 함께 도시의 동쪽 언덕을 지칭한다. 몇 세대가 지난 후 시온이란 이름은 완전한 도시의 지명으로써 시적 함축을 가지게 되었고 성전 언덕은 역시 모리아산(대하3:1)과 모리아땅의 거룩한 산(창22:2)으로 지칭된다. 예루살렘의 다른 초기 이름은 유다 왕국의 수도임을 나타내는 ‘유다의 도시’와 ‘그 도시(the city)'가 있다.

역사>
다윗의 도시 이전
고고학적 발견과 금석문학적, 성서학적 증거는, 그 도시가 성전 언덕 아래 남동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을 정도지만,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의 역사와 발전을 재구성하는데는 미흡하다. 그 도시의 역사가 겪은 많은 변화와 계속되는 건설, 파괴는, 청동석기 시대(Chalcolitic)부터 계속되어 온 정착의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초기 정착의 흔적들을 거의 지워버렸다. 초기 청동Ⅰ기의 색깔도기가 여기서 발견되었고, 초중후기 청동기의 유물이 남동골짜기와 그 비탈에서 이루어진 많은 발굴에서 발견되었다.
초기 정착의 흔적은 동쪽 언덕 맞은 편의 올리브 산과 기드론 골짜기의 중후기 청동기의 무덤들이다. 프란시스코 신부에 의해 발굴된 일단의 무덤들에서 아주 풍부한 양의 도자기들이 발견되었다. 석고와 유약토기와 이집트 돌인장, 그것의 대부분이 중기 청동기ⅡC와 후기 청동기Ⅰ-ⅡA이고, 특히 B.C.14세기 전반(아마르나 시대)의 것인데 Rehavia 근처의 Nahalt Ahim의 무덤의 도자기들과 섬 남쪽의 초기 정부기관의 발굴장에서 나온 도자기들과 같은 형태의 것이다. 이런 발견들은 요새화 된 성의 바깥에 산재해 있는 정착을 의미한다. 거기엔 놀랄만큼 많은 수의 시프러스, 에게, 이집트로부터의 수입도자기와 다른 물건들이 있다.
B.C.14세기 이집트가 가나안을 지배하던 때에 예루살렘에 대한 정보는 엘-아마르나 문서에서 발견된다. 예루살렘의 통치자는 이집트의 적들, 즉 배신한 가나안의 통치자들과 그들의 동맹, 그리고 합비루를 격퇴하기 위한 원조를 요구하면서 가나안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슈와르다타가 보낸 다른 편지는 합비루의 위험에 쩔쩔매고 있는 이집트의 군주에 대해 알려 준다. 모든 그의 동맹이 그를 배신했지만 오직 그와 Arad-Hipa만이 그들과 싸웠음을 알려 준다. 이 문서는 B.C.14세기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잘 보여 준다.
이 시기 예루살렘의 땅은 남쪽 언덕 지역에서 더 큰 지역으로 확장되어 간 것 같다. 초기 예루살렘 인구를 다루는 성서자료, 아모리어를 사용하는 예루살렘 남쪽의 이웃들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유다 지파가 정복할 때까지 여부스 족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여부스 족의 민족 합병에 대한 단서가 에스겔16:3에 주어져 있다. “주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대해 너의 기원과 출생은 가나안 땅에 있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였고 어머니는 히타이트였다” 그 도시의 주민은 성전 언덕에 집을 갖고 있던 히타이트 족의 우리야였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와 동등한 관심은 다윗이 그곳을 정복할 때 그 도시의 지배자였던 성전 언덕 유적지의 소유주의 이름이다. Araunah(삼하24:16)는 개인 이름이기보다는 히타이트에서 발견되는 후리족 단어 ewrine(주님)인 것 같다. 그래서 여부스 족은 히타이트 족과 관련이 있고 그들은 B.C.14-17세기 이스라엘에 의해 둘러쳐진 외국 고립지로 남아 있는 예루살렘을 통치했다.

다윗의 성과 성전 언덕

  시온 정복과 그것이 다윗 성이 되는 것은 삼하5:6-9에 왕의 용감한 업적으로 묘사되지만 대상11:4-7에는 다윗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요압의 업적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다음을 추측하게 한다. 다윗은 기브온의 샘을 둘러 싼 사건(삼하2:12-32)과 Abner의 죽음 이전에(삼하3:20-27) 초기에 그의 영역에 예루살렘을 넣었다. 요압은 이미 유대 군대의 사령관이었고 유다와 베냐민 사이의 외국 고립지는 이미 제거되었다. 여부스 족은 말살되지 않고 오히려 그 날에 예루살렘에서 베냐민 백성과 함께 계속 살았다(삿1:21).
다윗은 그의 자리를 헤브론에서 새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했다. 그가 시온을 정복한 지 몇 년 후에 말이다. 성경에는 다윗의 건축 활동에 대한 얼마간의 언급이 있다. 밀로로 완전하게 둘러쳐진 도시를 건설하려는 그의 근본적인 노력은 그의 초기 시절에 속하는 것이다. 띠로의 왕 히람이 보낸 기술자가 지은 백향목 집은 명백히 후기에 속한다(삼하5:11). 이것으로 다윗이 성전 언덕을 향해 북쪽으로 요새화 된 성을 확장시켰음을 가정할 수 있다.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을 보수할 때까지(왕상11:27), 또 밀로를 강화시키고 성전 언덕에 엄청난 구조를 포함해서 그의 새로운 성채를 건설할 때까지, 이것은 오래된 시온 성의 북쪽 성벽이 파손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계곡문(valley Gate)은 서쪽 계곡에 세워졌다. 여기에 호화로운 건축들, 전능자의 집, 백향목 집, 다윗의 성이 지어진 것 같다.
사람과 자연이 이들 건축물을 없애 버리는 데 함께 작용했다. 군주제 시대 조차 계속 밀로를 수리해야 했다. 군주제의 전성기 때 발견물은 K. M. Kenyon과 Y. Shiloh가 다윗성에서 발굴해 낸 것이다. 다윗은 법궤를 옮겨 왔고 고위 관리와 항구적인 수비대를 예루살렘에 주둔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전 백성의 수도요 이스라엘 하나님의 예배 장소로 예루살렘을 설립했다. 그의 통치 말년에 다윗은 성전 언덕에 제단을 건설했다(성서의 전승에 따르면 다윗은 제단을 건설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여부스 족의 Araunah의 탈곡장에 제단을 건설했다). 지역 제사 장소로 쓰이기 위해 도시에 접근하는 고상하고 개방되어진 장소로써 다윗 이전에도 그 유적 장소가 신성시 되었음은 분명하다. 성전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예루살렘의 신성성은 창세기에(모리아산) 이미 언급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살렘왕이요, 족장을 축복하고 승리를 확신시키고 십일조를 받는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멜기세덱과 관련된 이야기는 두드러진 예이다. 이삭을 신성화하는 이야기(창22장)는 이미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만들었던 모리아 땅의 산 중 하나는 다윗이 아주 후대에 제단을 건설했던 장소로, 주님이 제공했다고 이야기 되었다. 그래서 다윗은 이 거룩한 장소에 아브라함의 제단을 재건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왕의 성전과 왕궁

  성전과 왕궁을 포함하는 예루살렘 성은 나단 선지자의 영감있는 지도 아래 다윗과 솔로몬 통치 기간 중에 이미 계획된 것임이 분명하다(삼하2:7). 그러나 실제적인 건설은 다윗이 죽고 솔로몬 치하 4년만에 시작되었다. 티로에서 온 기술자들이 20년간 일했고, 그 건물은 신-히타이트 양식과 당시 아람인의 왕궁 유적의 양식에 따라 지어졌다.
솔로몬 성전의 평면 구조는 성소 앞에 있는 낭실과 성소, 지성소의 삼분된 양식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가나안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으로 주전 3천년기의 신전으로부터 후기청동기시대의 신전에 이르기까지 나타난다. 특히 북부 시리아의 텔 타이나트(Tell Tayinat)에서 발굴된 신전은 솔로몬 성전보다 약 100년 뒤에 세워진 것으로, 낭실이 있고 왕궁 옆에 세워졌다는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소와 지성소의 외부를 돌아가면서 지어진 다락과 골방들은 가나안 신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며, 그 크기에 있어서도 모든 가나안 신전들을 능가하였다.
솔로몬이 첫 성전을 지었지만 그의 의도는 단순히 하나님의 집을 짓고, 법궤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윗 왕조의 후원 아래 이스라엘 중앙 성소를 확립하고, 왕조와 성전 사이의 영원한 결속, 제1성전 시대에 계속 지속된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 그 도시는 성채 뿐 아니라 국제 교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시장까지도 그 안에 포함했었다. 그때 그 도시는 그 성벽을 넘어 서쪽과 북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유다의 성

  솔로몬의 즉위에 이어(B.C.930) 군주제의 분열 시기에서부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솔로몬 치하의 끝에 왕족과 사제 계급 사이에서 세속 권력과 종교적 권력 사이의 권위의 분점을 놓고 당파적인 차이가 발생했다. 이들 차이는 다양한 외국(페니키아, 아라메아, 아시리아)의 영향력과 함께 분열된 군주제 기간동안 계속 재발했다. 이것은 순수한 당파의 강화와 종교적 개혁의 강화를 유발시켰다. 계속해서 성전은 국민의 국가적, 종교적 정서의 초점 역할을 수행했다.
성서의 역사적 자료는 유다의 왕들이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강화하고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함을 보여 준다. 예루살렘 역사의 새로운 국면은 이스라엘과 그 수도가 파괴되고 사마리아가 유다와 북쪽 왕국의 나머지 백성을 새롭게 결속할 때 헤제키아 아래서 시작되었다. 그 도시 역사의 다른 국면은 앗시리아의 후견 아래 유다의 자치를 허용받은 왕, 므낫세 치하 말년에 시작되었다. 므낫세는 예루살렘을 재강화하고 요새를 견고히 하고 새 외벽을 건설했다(대하33:14). 서쪽으로의 도시 확장은 남서쪽 언덕의 발굴과 특히 연속되는 도시 성벽의 발견으로 명백히 나타난다. 요시아의 노력은 성전을 수리할 때 발견한 신명기서의 핵심인 율법 두루마리에 기반해서, 성전제의에 집중하는 것으로 절정에 도달했다. 다윗 왕조의 영광의 회복과 함께 솔로몬 때부터 성전에서 일해 온 사독 가문의 영예도 회복되었다.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이후에도 그 도시는 포로되었던 자나 남아있던 자 모두의 국가적 열망의 초점으로 계속 남아있었다. B.C.538년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칙령은 포로 유수를 각성시키는 표현이 되었다. 귀환 운동과 함께 제단을 세우고 새 성전을 짓기 시작하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정착이 새로 이루어졌다.

지형학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토의 대략 중앙에 해당되는 북위 31도52분 동경 35도13분으로 위도상으로는 서귀포(북귀33도)보다 조금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중해의 동쪽 52Km지점, 사해의 북쪽 서단에서 안으로 22Km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북쪽의 사마리아 지방과 남쪽의 헤브론을 연결하는 남북 간선 도로와 동쪽 요단 계곡의 여리고에서 서쪽의 지중해안의 욥바와 가이사랴를 연결하는 동서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또한 전략상의 요지이다.
고대 예루살렘은 몇몇 언덕이나 계곡을 넘어 확장되었다. 동쪽 경계는 기드론 계곡이고, 서쪽 경계는 힌놈 계곡, 남쪽은 엔 로겔 샘 근처 기드론 계곡과 합류하는 시온산이고, 북쪽 경계는 대체로 고대 예루살렘이 세워졌던 북쪽 언덕이다. 이들 골짜기는 예루살렘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이 도시는 다마스커스 문 북쪽, 현재의 모라샤 근처, 북쪽에서 시작되는 중앙계곡(두로인의 계곡)에 의해 두 개의 구릉지로 나누어진다. 그 계곡은 다메섹 문을 지나 오늘날 유대인 거리에서 성전 언덕까지와 시온산부터 다윗성의 계곡까지를 나누고 있는 현재 구 도시의 하-가이 거리를 따라 남쪽으로 뻗어 있다. 이 중앙계곡은 이제 아람인이 차지하고 있는 소위 서쪽 언덕과 유대인 구역과 제2성전시대에 윗 도시로 불리어진 남쪽의 시온산을 나눈다. 그리고 동쪽 계곡의 주요 부분 다윗성과 성전 언덕 꼭대기도 나눈다. 성전 언덕의 남쪽은 제2성전 시대의 아랫 도시를 포함한다. 요세푸스는 두로인의 중앙계곡(즉 치즈쟁이의 언덕)과 동쪽 산등성이를 오벨(Ophel)이라 이름지었다. 도시의 전 역사 동안 주요 水源이었던 기혼샘은 다윗성의 동쪽 비탈 끝에서 분출되었고 아직도 과수원과 기드론 계곡의 경작지에 물을 대고 있다. 근처에 샘과 경작지가 있다는 사실은 B.C.네번째 천년의 끝에 예루살렘의 영구적인 정착을 가능하게 했고 다윗성 산마루의 정착도 가능하게 했다.

발굴 결과

  예루살렘의 과학적인 탐사는 1867년부터 1870년까지 시행된 워렌(Charles Warren)의 고대 성벽 조사로부터 시작된다. 이후로 여러 사람의 성벽 조사 및 발굴이 이루어졌지만, 1961-1967년에 이루어진 Kenyon과 드 보(R. de Vaux)의 층위학적 발굴이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여부스 족들의 성벽과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 규모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Kenyon은 부뤼셀에 있는 저주 문서에 언급된 B.C.1800년 경에 이 도시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1967년 전쟁 이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집중적으로 발굴하였다. B. Mazar은 벤-도브(M. Ben Dov)의 도움으로 1958-1978년 사이의 발굴의 처음 기간을 지도했는데, 주로 성전산의 남서쪽을 발굴하였다. 이곳에서 철기Ⅱ기부터 오스만 제국까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1978-1984년 동안에 Y. Shiloh는 기혼 샘 위에 있는 남동 언덕을 발굴하여 기원전 4천년기 주거 유적과 3시기에 걸친 예루살렘 수로시설 등을 찾아냈으나 중기청동기 시대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성전 언덕을 제외한 다윗성의 영역은 작다. 산등성이 근처의 폭이 60-100미터 정도이고 12a구역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이다. 그래서 거주자들은 부가적으로 건물을 짓기 위해 동쪽 사면을 이용해야 했다. 실로의 발굴은 초기 청동기 전부터 이 사면에 건물이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B.C.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가나안인과 이스라엘인 도시의 부분이 되어왔음도 보여 준다. 언덕의 지형은 중기 청동기ⅡB이후부터 도시계획가들이 가파른 동쪽 비탈을 이용하게 했고 경사면에 도시방어를 위한 건물을 필요로 하게 했고, 동쪽 요새의 위치를 결정하게 했다. 이 방어선은 1200년간 그 도시에서 사용되었다.
철기 시대 끝무렵 몇세기 동안 자연석들은 다윗성 언덕 여러 곳에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동쪽 경사면의 급격한 경사 때문에 모든 시기의 건축가들은 토대로서 바위를 사용하려 했고, 초기 시기부터 생존을 위한 성벽을 만들었다. 이들 습관들은 주로 언덕의 조건에 자신들의 기술을 적용하지 못하던 초기 발굴들에서 층위학적, 연대기적 해석을 복잡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1960년대 고고학적 탐험은 연속적인 심각한 실수들을 포함하고 있다.

청동석기에서 철기1 시대까지(층21-15)

  유적의 가장 초기 거주층에서 청동석기 시대의 도자기들이 나왔다. 동쪽 경사 끝부분인 실로 발굴의 b지역에서는 이 층에서만 도자기가 있었다. 다른 지역의 경사지에서는 이 층위(청동석기시대)의 도자기와 초기청동기Ⅰ(층20)의 도자기가 섞여 있다. E1지역, 경사면 중간에는 초기청동기Ⅰ-Ⅱ건물이 발굴되어졌다. 그것들은 기반암 위에 세워졌고, 벽 안쪽을 따라 벤취가 있었다. 이 빌딩과 층20의 도자기와 다른 매장물은 도시 이전 시기에 다윗성의 영구적인 정착을 드러내는 첫 번째 증거이다.
  그 도시는 중기청동기ⅡB(층18-17)초에 처음으로 성벽으로 둘러쳐졌다. Kenyon은 이 벽의 일부를 발굴 현장 A의 아래쪽에서 드러내었다. 실로의 발굴은 E지역에서 이 벽의 30m를 발견했다. 그 벽은 경사 아래쪽보다 25m 높은 가파른 바위 위에 지어졌다. 다음층(18A층)에서 그 벽은 좁은 버팀벽을 세워 다시 강화되었다. 그것은 층20이나 기반암에 남아 있다. Kenyon은 그녀의 발굴에서 발견된 것을 기혼 샘 위 수문 근처에 있는 동쪽 망대로 해석했다. 실로는 성벽의 3단계를 밝혀내었다. 그것들은 벽의 건설과 B.C. 18C에 대한 초기 자료를 가르킨다.
B.C. 14C의 6개의 엘-아마르나 문서는 예루살렘에서 이집트 파라오에게로 예루살렘 왕 Arad-Hipa가 보낸 것이다. 그러나 Kenyon의 발굴 이전 후기청동기시대 예루살렘 정착의 유일한 증거는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거기에서는 B.C. 13C, 14C의 수입도자기와 그 지방도자기가 다량 발견되었다. 이 시기 그 도시에서의 실제적인 정착의 첫 증거는 Kenyon의 발굴 현장A 맨 위에서 나왔다. 그녀는 계단지의 부분으로써 유지되어 온 벽이 거주건축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해석했다. G지역에서의 실로의 발굴 작업은 B.C.13C, 14C가 포괄적인 건축행위가 있던 시기였음을 밝혀내었다.

군주제 시기(층14-10)

성서는 어떻게 여부스가 B.C. 10C에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가 되었는지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솔로몬이 역군을 일으켜 여호와의 집과 자기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의 성을 건축했다’(왕상9:15) 이것과 다른 성서 구절은 다윗과 솔로몬이 지은 건축물을 상술하고 있다.

B.C. 10C(층14)

14번층(B.C. 10C)의 유물은 D1과 E동쪽 경사면에서 발견되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새 건축행위가 다윗성 계곡 북쪽에서 제1성전 시대에 성채가 되었던 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문학적 자료로 알려져 왔다. Macalister는 여부스 성과 다윗, 솔로몬 시대에 속한 첫 유물을 발견하여 샘 위 동쪽 비탈 꼭대기의 인상적인 유적인 돌비탈 같은 계단화 된 돌 구조를 여부스성의 요새의 일부로 해석하고 커다란 사각 망루를 다윗의 부대적인 요새로 설명했다. 그러나 Avigard는 산등성이 정상의 성벽과 구조가 제2성전 시대보다 초기 일 수 없다고 논박했다. 이것은 Kenyon의 H, M, R 현장의 발굴로 증명되었다. 그녀는 사각 망루가 B.C. 7C, 6C에 파괴된 건물의 돌덩이 위에 부분적으로 건축되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것은 제2성전 시대 이전에 건축될 수 없었다. 동시에 그 망루는 예루살렘 제1벽으로 불리는 요새의 부분이었다. Kenyon은 그 계단식 돌 구조도 이 요새의 후기 체계에 속한다고 가정했다.
실로의 발굴은 계단식 돌 구조의 아랫 부분을 보여 준다. 그 구조는 18m 높이로 유지되어 왔다. 그것의 기초적인 부분은 가나안 성 요새의 돌로 채워진 주춧돌에 유적에 남아있다. 한편 그 기초적인 부분은 B.C. 10C말, 9C경으로 추정되는 석조건물과 얇은 지층 아래 묻혀 있었다. B.C. 7C, 6C경 중간 아래의 모든 것은 제1성전 시기 말에 파괴된 잘 지어진 건축물 아래에 묻혀 있었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실로는 B.C. 10C경의 인상적인 구조물을 측정했다. 그는 그것을 당시 예루살렘 성채의 방어를 위한 거대한 옹벽과 튼튼한 토대(플랫폼)으로 해석했다. 이 구조의 윗 부분은 Macalister가 이미 발굴했는데 그의 발굴 분석은 제2성전 혹은 그 이후로 측정되는 건축물이 초기 건물의 어떠한 흔적도 거의 사라지게 했음을 보여 준다.
Kenyon은 계단식 돌 구조의 북서쪽 모서리와 안쪽에 있는 발굴현장 H에서 성벽의 일부가 서쪽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녀는 그것을 B.C. 10C 포곽(Casemate)의 일부로 해석했다. 계단식 돌 구조물 북서쪽 Kenyon의 발굴현장에는 다량의 다듬은 돌 조각과 원-아이올리스인 수도가 있었다. 이 두 건축학적 요소들은 철기Ⅱ에 세워진 행정센터(사마리아, 므깃도, 하솔, 라마트라헬)같은 행정 빌딩이 세워졌을 것이라 가정하게 한다.
예루살렘 서쪽 방어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1927-28년에 W. Crowfoot는 27m 길이에 8m의 두께와 7m의 높이를 가진 벽을 발굴했다. 다윗성의 서쪽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이 벽은 서쪽문, 계곡문으로 알려져 있다. 다윗성이 서쪽 언덕 쪽으로 확장하기 전 그것들은 B.C. 10C-8C 다윗성 서쪽 요새의 일부였을 것이다.
밀로의 위치와 성격은 의심스러운 주제이다. 밀로는 어떻게 성전 언덕과 다윗의 요새 사이에 위치했을까? 이들 지역 사이에는 Shallow saddle이 있었고 이 Saddle은 옛 요새와 북쪽 합병 지역 사이의 지형적 개념적 고리(link)를 형성하기 위해 B.C. 10C에 채워지고 평평하게 되었다. B. Mazar와 E. Mazer의 발굴 현장 남쪽 모서리에서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거대한 벽이 발견되었다. 1.4m의 두께를 가진 일부 벽은 철기 시대에 파괴된 기념 건축물의 일부일 것이다. B. Mazer는 이러한 것들이 “밀로의 전”(왕하 12:21)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B.C. 9 C (13층)

13층(B.C. 9C)에 남아 있는 유적은 이층의 이전과 이후에 비교해 볼 때 빈약하다. 이 세기의 유물들은 B.C. 10C의 거대한 건축 행위와 히스기야 시대 동안의 건축 붐 사이에서 파괴된 것이 틀림없다.

B.C. 8C-6C (12-10층) 그리고 서쪽으로의 도시 확장
B.C. 8C 도시는 발전의 절정에 도달했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정복당한 주변 국가의 난민들이 사마리아와 주변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가 남쪽으로 유다를 침략할 것에 대비해 왕궁과 수도를 인구의 증가와 주변 지역의 증가에 맞게 개축했다.
실로가 D, E 지역에서 발굴한 12-10층에서는 B.C. 8-6 C의 풍부한 유물이 나왔다. 동쪽 비탈의 성벽은 120m길이가 새로 발굴되었다. El과 E3 지역의 일부에서는 중기 청동기ⅡB와 그 이후에 동쪽 경사의 마지막 단계의 요새였던 이전 성벽을 사용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다. El지역의 상당히 큰 주거지 단위가 성벽에 접해 있는 ‘낮은 계단지 집’과 11층으로 측정된 ‘Ashlar의 전’을 포함해 확정되었다. 비슷한 집들이 E2 E3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층에서 발견된 유물은 12, 11, 10층에 자신을 표시했다. 그것들은 10층말에 파괴되었다. 12층의 독특한 모습은 B, D, E2 지역에서 실로의 발굴로 추적되었다. B.C. 8C 단순한 설계의 몇몇 구조물들이 성벽 바깥 경사면에 있는 암반 위에 세워졌다. 이 발견물들은 그들의 연대를 나타내 준다. 그들 중 대부분은 B.C. 7C이전에 폐기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B.C. 701년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초기, 예루살렘의 고고학적 발굴 때부터 학자들은 예루살렘의 경계를 놓고 미니멀리스트(최소주의자)와 맥시멀리스트(최대주의자)로 나누어졌었다. 최대주의자들이 그 도시가 서쪽과 동쪽 언덕 양쪽을 그들에에 유용한 철기Ⅱ시기에 나온 고고학적 자료의 위치와 관련해서, 그 도시는 동쪽 산등성이- 다윗 성과 그 위의 다윗 성전으로 한정된다고 논쟁한다. Kenyon의 발굴 현장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이다. 오늘날 철기Ⅱ시대에 대한 풍부한 정보로 인해, B.C 10-6C, 명확한 예루살렘 도시 지역의 발전상이 드러났다. 다윗이 정복한 여부스 성은 산등성이에 있는 요새와 함께 다윗성 절벽의 경계 안에 세워졌다. B.C 10C, 그 도시는 북쪽으로 확장했다. 초기 도시의 영역은 성전 언덕이 덧붙여짐으로써 거의 배가 되었다.
철기 Ⅱ때의 유대 구역의 벽과 마루만 남고 무너져 내린 건축물이 소멸된 것은 후기 건축물 탓이다. 작은 발견물은 그 시대의 풍요 다산 동물 입상이었다; lamelekh도장 흔적과 개인 도장 흔적이 있는 항아리 손잡이, 그리고 신적인 묘사(E1, 땅의 창조자)가 쓰여진 몇몇 도편(ostraca)들이었다. 이 발견물들은 B.C 8C부터 제1성전 끝 시기까지, 서쪽 언덕(성서적으로 미쉬네)이 정착지였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도시가 중앙계곡을 넘어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B.C 8C, 서쪽 언덕 지형이 건축에 용이했기 때문에 서쪽 언덕 지형이 사용되었다.
Avigard가 발견한 소위 ‘넓은 벽’(broad wall)이란 게 있는데 이 성벽은 성의 새로운 방어망을 확장시킨 것으로 히스기야 치하에 건설되었다. 그 성벽은 7m의 두께이고, 65m정도가 발굴되었다. 넓은 벽은 이 지역의 요새의 설계를 이해할 수 있는 증거이다.
Kloner는 시온산 옆 힌놈계곡의 동쪽 기슭에서 이 시기의 묘지를 발견했다. 남서쪽 계곡 스코트인 교회에서도 똑같은 무덤이 발견되었다. Amiran은 Mamilla지역의 당시 무덤에서 나온 그릇들을 발표했다. 오늘날의 실완 마을 지역에서 무덤들은 계속 발굴되었다. B.C 9-6C 예루살렘에 있던 묘지들의 분포의 예는 히스기야 때부터 제1성전 파괴 때까지 예루살렘의 요새화된 지역과 확장된 건설 지역의 증거를 보여 준다.
예루살렘은 B.C 8,7C 말을 향하는 제1성전 시대에 확장의 절정에 도달한다. 예루살렘의 주거지역은 110a보다 더 많이 확장되었다. Mishneh같은 새로운 구역과 Makhtesh(왕하 22;14 스바냐 1;10-11)은 서쪽 언덕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것은 B.C 10-8C로 한정되는 도시로 간주할 때만 옳은 이론으로 간주되는 최소주의자와 B.C 8-6C말로부터 도시의 경계를 확정하려는 최대주의자 사이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한다.
B.C 7C 특히 이 세기의 후반부, 아마도 요시아 치하에서의 건축 활동의 증거는 Shiloh의 G지역에 있는 다윗성에서 발견된다. 계단식 구조물의 가장 낮은 부분과 성의 외벽 사이, 샘 위에, 상당수 계단식 테라스들은 층10의 건물들을 위한 견고한 토대로 쓰이기 위해 지어졌다. Shiloh가 발굴한 주요 테라스는 폭이 12m 길이 27m이다. 3개의 주요 구조물은 2개의 위쪽 테라스로 밝혀졌다. 북쪽은 B.C 586년의 격심한 화재 때문에 명명된 ‘불탄 집’이 있다. 거기에는 도기, 돌 그릇, 자기 그릇, 금속 숟가락이 들어 있었다. 북부 시리아에서 수입된 나무로 만든 가구와 대들보가 포함된 불탄 나무 유물들은 야자나무 형태로 조각되어있다.
윗 도시와 오펠(ophel) 사이 경계에 위치해 있는 Bullae의 집은 공문서 보관소이거나 관공서였을 것이다. 층12는 B.C 8C 말로 지정되어야 한다. 층11은 B.C 7C초이고 층10은 B.C 7C말과 주로 6C이다.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공백(gap)이 시작되엇다. 이들 시기의 완벽한 토기의 도기들은 유다의 다른 현장과 유사하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것은 성서 자료에 잘 기록되어 있다(왕하 25:8-10,대하 36:18-19). 그것은 집과 성벽이 불타고 파괴되었다고 멸망을 기술하고 있다.

페르시야 시기(층9)

  포수기 이후 기간 동안 귀환자들은 다윗성의 골짜기 쪽 예루살렘의 구지역에 정착하였다. 스룹바벨은 북쪽에서 다위성을 내려다 보며 성전을 건축하였다(에스라3:8-10). 예루살렘에서 페르시아 층은 잘 보존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스라엘 성의 파괴와 헤롯과 하스몬 시기의 왕성한 건축 붐 사이에서 지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파괴적인 상황에서 동쪽 경사면에서 건물이 증축되고 성벽이 보수되었다. 도시는 다윗성의 협곡의 꼭대기에서 B.C 10C때보다 더 작은 지역이지만 발전하였다. 방어지역은 더 이상 동쪽 경사면을 포함하지 않았다. 단지 몇몇 흔적들이 성경에 묘사된 코스(느헤3:1-32)를 따라 느헤미야가 재건축한 성벽에 남아있다.
처음에 동쪽 경사면의 몇몇 지역은 층9 페르시아 시기의 것으로 측정될 수 있었다. 이들 층 중 층10의 잔해 위에서 그리고 헬라-하스몬가 시기에 층8-7의 성벽을 보수하고 흙을 채운, 그 아래의 위치에서 발견되었다. 거기서 약간의 건물 흔적만이 발견되었지만 많은 양의 자그마한 유물들, 주로 도기 덩어리들과 항아리 손잡이의 도장 흔적이 발견됐다. 유대인 구역 발굴에서 복구되지 않은 페르시아 시기 유물은 없다.
물 공급체계

다윗성의 물의 근원은 기드론 계곡 표면의 기혼 샘이다. 그 샘은 일년 내내 풍부하게 채워져 있다. 그러나 수도지형학적으로 그 샘은 다른 고대 도시의 샘과는 다르다. 기혼 샘은 며칠 동안 물이 세차게 분출되어 기드론 계곡으로 흐르는 간헐천(intermittent)이다.
다윗 성 계곡에는 3개의 지하 수도 체계가 있다. : Warren의 통로, 실로암 터널, 히스기야의 터널이 그것이다. 실로는 이 시스템의 모든 것을 발견했다. 동굴 입구는 동쪽 경사 중간인데, 처음에는 바위를 깎아 조금씩 뻗치다가 41m 정도 수평을 이루고 수직 통로 꼭대기쪽으로 13m 하강한다. 기혼샘과 히스기야 터널 단계에 대한 통로의 깊이는 약 12.3m이다. 히스기야 터널이 깎이기 전에는 이전의 터널이 통로(shaft)의 기초에 기혼의 물을 공급했다.
Kenyon의 발굴 전까지 학자들은 성벽 옆에 있는 이 시스템의 입구 위치에 대해 궁금해 했었는데 그것은 이제 Ophel 옆에 있는 아랫 도시의 방어 지역 안에 물 공급 시스템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졌다. 수도 지형학적 조사는 수직 통로와 수평 터널이 원래 자연적인 카르스트식 터널이며 그것을 설계자들이 필요한 곳에 바위를 깎아 적응시켜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Warren의 통로의 독특한 성격은 물 공급 시스템 없이는 도시로 관통할 수 없게 하는 수직 통로의 개발이다. 실로암 터널은 기혼 샘의 수도 지형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실로암 터널은 기혼 샘의 수도지형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실로암 터널은 기드론 계곡 서쪽 기슭을 따라 400m정도 물을 운반한다. 창문같은 틈(windowlike openings)이 이 계곡 농업 용지에 관개할 물을 역류케 하는 수로의 동쪽면을 관통한다. 이 터널은 기혼의 물을 실로암 연못 근처까지 운반한다. 실로암 연못은 물을 저장하고 규칙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이다. 언덕 바위에 떨어지는 빗물이 수로 천정의 틈을 통해 흘러 들어간다. 이 시스템의 주된 결함은 그것이 도시의 방어선 바깥에 있고 그래서 전쟁이나 위기에 아주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 점이 히스기야 터널을 깎는 동기가 되었다. 히스기야 터널은 Cenomonian바위를 굽이치는 수로이다. 그것은 길이는(샘에서 저장소까지 533m) 둘러쳐져 있다. 터널 층의 단계는 잘 계산되어 있다. 샘 어귀와 터널 끝의 높이 차이는 최대 35Cm로 아주 알맞은 경사이다. 그 터널은 고고학적 증거로 확인된 히스기야의 예루살렘 건축 계획과 관련해 성서에 가끔 언급되고 있다(왕하20:20, 대하32:3-4, 32:30). 히스기야 터널은 히스기야 도시의 설계자들에 의해 디자인 된 포괄적인 부분으로서 설계되고 실행되어진 것이다; 서쪽 언덕은 다윗 성 남쪽 끝에까지 시온산을 둘러 싸고, 중앙계곡 출구를 막고 방어하며 그리고 저장지역을 성의 방어한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넓은 벽으로 에워싸여 있다. 히스기야 터널은 실로암 터널을 대신했고, 평화시나 전쟁시거나 간에 방어되는 저장소 안으로 밀폐된 수로 안의 물의 흐름이 끊이지 않게 했다. 이 세가지 물공급 프로젝트의 연대는 성서적 자료, 그들 사이의 지형학적 관계, 도시계획과 그것들 사이의 연관 그리고 그 나라 안 다른 곳의 비슷한 물 공급체계와의 비교 연구에 의존하고 있다. 성서적 자료에 따르면, 히스기아의 터널은 B.C. 8C말 그의 통치 기간동안에 깎여졌다. 그것은 아마도 실로암 터널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를 이어받은 것 같다: 중앙계곡에 있는 저장소로 물을 공급하는 것.
실로암 터널 남쪽 끝에 있는 지반은 물의 흐름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3.5m정도 낮아졌다. 이러한 수정 이후 저장소에서 과도하게 물이 배출되는 수로의 관련부분이 성밖의 부속 저장소가 있던 기드론 계곡의 바닥으로 물을 옮겼다. 그래서 실로암 터널이 히스기야 터널을 앞선다는 것은 분명하다. 처음에 히스기야 터널은 샘에서 Warren의 통로 바닥으로 물을 옮기던 그것의 북쪽 끝에 있던 이전 공급수로를 이용하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 시스템 역시 B.C. 8C이전 연대의 것이다. W. F. Birch와 L. H. Vincent는 Warren의 통로가 다윗의 예루살렘 정착이라는 성서 이야기에 언급된 Zinnor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Warren의 통로가 어떠한 타당한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서 입증되지 않은 가나안인의 물 시스템이라고 해석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은 본문적, 건축학적, 고고학적 이유로 거부되어왔다. 그러한 물 시스템은 유다와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 행정센터의 계획을 구성하는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성 근처에 파여 있는 Warren의 통로는 B.C. 10C의 예루살렘의 왕의 성에 사용되었다. 주로 그것은 바깥에 있는 수원에 접근하려는 성안 주민들에게 제공되는 수로와 함께 가장 평범한 물 시스템 형태를 나타낸다. 실로암 터널은 기혼의 물을 저장소로 공급하고 기드론 계곡 기슭에 있는 경작지에 규칙적으로 관개 용수를 공급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철기 시대 끝에 막혀 버리기 전까지 철기 시대동안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것의 남쪽 부분 역시 히스기야 터널이 깎여있던 B.C. 8C말경에 이미 사용이 중지되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 터널이 기혼 샘에서 실로암 연못까지를 물이 흐르는 주된 루트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세가지 시스템 모두는 B.C. 8C말에서 B.C. 586년까지 동시에 가능했던 것 같다. 제2성전 시기에 아랫 도시의 거주자들은 계속 기혼의 물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도시의 물 공급체계는 하스몬가와 헤롯 시기에 다양한 변화와 확장을 겪었다.
특별히, 샤로운 수로는 헤브론 언덕의 샘과 베들레헴 근처의 풍부한 물을 도시의 윗쪽 구역으로 옮기기 위해 건설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역사 초에 도시의 몇몇 중요한 거주지는 더 이상 기혼 샘에 의존하지 않아도 됐다.

무덤

예루살렘 제1성전 시기 유물 발굴자들은 성서에 따르면, 다윗성에 있는 유다왕의 무덤을 찾기를 갈망했다. Ophel에서 R. Weill은 3개의 바위를 깎은 무덤을 발견했다. 특별히 흥미있는 것은 그것들의 크기와 형태이다. 이 고분들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거대한 방같은 아치형의 터널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다. 상당한 발걸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길이이다. 16m길이, 넓이 2.5m, 전면높이 4m, 후면높이 1.8m, Weill은 이 무덤들이 유다왕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당시 그의 의견은 다른 학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특히 아직까지 그것들이 이스라엘 시대 것이라는 것을 확증할 다른 증거가 없다.
기드론 계곡 건너편 실로암(실완) 마을에는 제1성전 시대의 묘지 유적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잘 알려지고 두드러진 것은 소위 파라오 딸의 무덤이다. 그것은 육각형(5m,5.8m,4m) 형태의 바위로 깎여져 있다. 그 무덤은 꼭대기에서 거의 남아있지 않은 피라미드에 의해 솟아있는 이집트 처마 돌림띠를 끝맺는다. 이것은 조그만 이집트 예배당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무덤 안은 작은 복도와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은 고대 히브리어 필체로 입구 위에 새겨져 있다. 바위 비탈에서 ‘파라오 딸의 무덤처럼’ 박공 구조(gabled)로 된 지붕을 가진 상당수 무덤들이 발굴되었다. 마을 안에서 다른 바위를 자른 두 개의 방을 가진 무덤들이 지면 위에서 발견되었다. 고대 히브리 필체의 두 개의 비문은 무덤 정면에 조각되어 있었다. 이 무덤은 ‘집의 집사’라는 제목을 가진 왕실 법정 관리와 그의 하녀의 무덤이다. 비문에는 무덤을 열려는 자들에 대한 저주도 쓰여 있다. 이 무덤은 B.C. 7C초로 측정된다. 비슷한 비석의 파편이 기념비적인 바위로 깎은 무덤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제1성전시대의 다른 무덤들은 성전 언덕 맞은 편 남서언덕의 동쪽 경사에 대한 Mazar의 발굴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들은 B.C. 8-7C경의 자료를 갖고 있는 돌로 깎은 무덤이었다. 1967년까지 제1성전 시대 예루살렘의 묘지에 속하는 무덤 동굴들이 발굴되고 조사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130개의 무덤들이 실완 마을과 힌놈 계곡, 다메섹 문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많은 무덤들은 이전에 이 나라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형태를 갖고 있었다. 세밀한 건축학적 특징들은 외국(아나톨리, 페니키아, 이집트)의 영향을 나타낸다. 이들 무덤들 특히 예루살렘 북쪽과 서쪽의 것은 이 도시의 지형학 연구와 제1성전 시기 말(B.C. 8-7C) 건축지역의 확장 연구에 대단히 중요하다.

실완 마을

실완 마을의 묘지들은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몇몇 무덤과 50기의 무덤을 포함하고 있다. 이 무덤들은 다윗 성에 접해 있는 기드론 계곡의 동쪽 바위 기슭에 깎여져 있었다.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후대에 채석장을 만들고 사용하는 바람에 몇몇은 타격을 입었다. 이 지역은 가장 초기의 것이 B.C. 9C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주로 B.C. 8C-7C경에 매장지로 사용되었다.
실완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몇가지 범주로 나뉘고, 건축학적 세부사항과 경사면에서의 그들의 위치에서 차이가 있다. 그들의 건축학적 디자인은 독특하고, 돌을 깎는 작업자의 수준은 고급이었다. 한 무리의 무덤은 길고 가느다란 박공형식의 천장을 가진 하나의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방들은 시체의 머리를 받치는 베게와 물받이를 포함하고 있다. 2-3개의 커다란 바위방(석실)을 갖고 있는 다른 무리의 무덤은 뒤쪽에 배열되어 있다. 이들 방들 대부분은 몇몇 무덤의 물받이를 위한 설비를 제외하고는 어떤 장치도 없다. 다음으로 좀 더 작은 무덤들은 비문과 지하방으로 구성된 돌로 깎은 기념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은 지면 위에 있다. 이 그룹의 두 가지 예는 초기 발굴물에서 알려진 것들이다. 파라오의 딸의 무덤과 왕실 집사의 무덤

구도시의 북쪽 묘지들

이 묘지의 무덤들은 다메섹 문 북쪽, Tyropoen 계곡(중앙계곡) 위쪽으로 뻗은 바위 비탈을 깎아 만든 것이다. 제1성전 시대로 보이는 15기의 무덤들은 여기서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었다: 몇몇은 19C 말까지도 알려짖 않았다. 몇몇 무덤동굴은 다시 조사되었는데 조심스러운 건축학적 흔적에 대한 분석은 그것들을 제1성전 시대 말(B.C. 8C-7C)로 측정했다.

정원 무덤(The garden Tomb)

고든의 골고다(Calvary)로 알려진 정원 무덤은 바위 옆을 깎아 만든 2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쪽 방의 벽을 따라 3개의 묘지의자 유물이 있음을 아직도 볼 수 있다. 제1성전 시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성 Etienne수도원의 평지 무덤

이 지역에는 2기의 바위로 깎은 무덤이 있다. 그것은 가장 크고 정교하게 측정된 유대왕국 시대의 것이다. 무덤 1기의 설계는 앞뜰과 특히 높은 천장을 가진 입구의 홀을 포함하고 있다. 홀 입구는 전형적인 아시리아 건축물의 특징인 2개의 튀어나온 문구멍이 있는 안쪽 계단을 갖고 있다. 벽은 오목한 직사각형의 패널로 장식되어 있고, 벽과 천장의 이음새에는 두 개의 모난 천장돌림띠로 장식되어 있다. 벽의 벌어진 틈은 무덤 의자를 포함하는 똑같은 규격과 설계의 5개의 매장실을 보여 준다; 머리 받침이 있는 쪽은 이집트의 여신 Hathor의 머리스타일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너울거린다. 각 방의 마루는 불규칙하게 형성된 매장소이다. 2개의 안쪽 방 중 하나는 설계에 있어서 다른 것과 차이가 있다. 입구 홀과 똑같은 스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그것의 뒤쪽 다른 방에는 벽을 따라 돌로 만들어진 3개의 석관이 있다. 무덤 그 약간의 조그만 차이를 제외하고는 처음 것의 설계와 건축학적 흔적이 비슷하다.

슐레이만 거리(Suleiman street)

제1성전 시대 말 2개의 무덤이 다메섹문 근처에서 1937년 발견되었다. 그 중 하나의 무덤은 평범하지 않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 무덤은 중앙홀과 5개의 방을 포함하고 있다. 제1성전 시대 말의 도기류들이 이 현장에서 발굴되었다. 두 번째 무덤은 아름답고 정교하게 깎여있다: 두 번째 무덤은 불거진 날과 말굽 형태의 머리받침이 있는 무덤의자가 있는 2개의 방을 포함하고 있다.

힌놈 골짜기

제1성전 시대 말경 예루살렘의 남쪽과 서쪽의 묘지는 힌놈 골짜기를 따라 확장되었다. 힌놈 계곡은 예루살렘의 남서언덕을 둘러싸고 있다. 1900년에 R. A. S. Macalister가 계곡 남쪽 높은 비탈에 상당수 무덤을 조사하고 기록하였다.

시온산 서쪽 비탈

1975년 이 근처에서 조사된 한 무덤은 벽을 따라 있는 돌의자들과 2개의 방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수십개의 해골과 제1성전 시대 말의 도기류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물고기 형상이 새겨진 뼈도장과 므나헴의 딸 하미아헬이라는 주인의 이름도 있었다. 1976년에는 서쪽 성벽 바깥, 자파문과 요새의 남쪽에서 서로 붙어 있는 두 개의 무덤을 발견했다. 각각의 무덤은 앞뜰과 하나의 매장실로 이끄는 작은 입구를 갖고 있었다. 한 무덤은 두 개의 입구가 있었다. 매장실 중앙에는 머리 받침이 있는 돌로 깎은 석관이 있었다; 매장실 후미에는 똑같은 석관이 있었다. 두 번째 무덤의 잘 깎은 정면은 한 쌍의 부드러운 벽기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매장실 양쪽 면에 조각된 벽은 똑같은 벽감이 각각 있는 긴의자(벤치)들이었다. 2명의 몸이 누울 수 잇는 2개의 머리 받침과 함께 이중으로 약간 함몰된 넓은 벤치도 만들어져 있다.

Ketef Hinnom

1979년과 1988년에 바클레이는 힌놈 계곡 남서언덕 기슭에서 제1성전 시대 말의 9기의 무덤을 발굴했다. 이 무덤들은 후대의 전쟁 행위로 어지럽고 파괴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무덤 5개는 똑같은 설계였다; 하나의 매장실에 벽을 따라 3개의 매장용 벤치가 있었다. 무덤 동굴20은 앞 뜰과 입구 홀, 벽과 천정이 만나는 곳에 장식되어 있는 처마돌림띠를 갖고 있다. 아주 길고 넓은 몇사람이 누울 수 있는 벤치가 홀의 한쪽 벽에 깎여져 있었다. 바로 밑에는 이층으로 매장할 수 있도록 매장실의 벤치가 있었다. 입구 홀의 벽을 깎은 것은 매장실과 저장실로 가는 입구였다.
무덤24는 앞 뜰과 커다란 중앙 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홀은 다양한 방법으로 배열되어 있는 머리 받침과 돌로 된 벤치가 있는 5개의 매장실로 안내한다. 홀 오른쪽에 있는 방은 다른 것과 다르다. 하나의 방은 각각의 중앙쪽에 길고 깊은 홈이 있는 두 개의 벤치를 갖고 있다. 오른쪽 다른 방에는 머리 받침으로 사용된 6개의 함몰 부분을 가진 돌출된 베게가 조각되어 있는 아주 넓은 벤치가 있다. 이 벤치 밑에는 제1성전 시대 말의 도기, 보석, 다양한 공예품 등. 수백점의 발견물이 있는 저장소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발견물은 두 개의 싸여진 은액자이다. 거기에는 성서의 제사장적 축복 부분을 포함하는 고대 히브리 필체의 축복 정식이 새겨져 있다.(Num6:24-26)

Mamilla부근

1990년에 R.Reich는 Mamilla지역에서 수십기의 무덤이 있는 묘지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무덤은 후대의 전쟁으로 어지럽게 파괴되어 있었다. 이들 중 둘은 파괴되지 않았고 같은 설계였다: 앞 뜰, 작은 입구, 벽에 벤치와 저장실이 있는 매장실. 이들 무덤에서는 제1성전 시대 말의 도기 그릇가 다른 공예품들이 발견되었다.

요약
제1성전 시대 말 예루살렘 주변 묘지의 분포는 당시 건설 지역에 대한 중요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그것은 도시 안에서의 발견으로 알려진 것을 보충하는 증거이다. 그것은 B.C 8C 어느 때, 예루살렘 인구가 다윗성에서 남서 언덕 쪽으로 확장되었는지와, 힌놈 계곡이 주로 하층민을 위한 도시의 기본적인 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를 가르쳐준다. 동시에 고위 관리와 이스라엘의 귀족층들은 전통적인 매장지에 계속 매장되었는지, 실완 마을처럼 이제 정착된 지역에서 배장되었는지 가르쳐 준다. 성 Etienn수도원의 평지에서 발견된 무덤이 유다의 마지막 왕들의 무덤인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의 무덤은 아마도 같은 계통으로 디자인되어졌을 것이다. 다메섹 문 북쪽의 묘지는 제1성전 시대 말 북쪽 성벽 바깥의 거주 지역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다른 흥미있는 점은 힌놈계곡 무덤들의 몇몇 발견물들은 제2성전시대(B.C 6-1C)에 매장을 위해 사용되었음을 나타낸다.

최근 성 안에서의 발견
오펠
1986-1987년 B. Mazar와 E. Mazar는 Ophel의 남동부에 있는 복합적인 철기Ⅱ시기 공공 건물을 계속 발굴했다. 이 건물들은 B. Mazar의 1970년대 발굴 때에 부분적으로 묻혀 있었다: 그는 이것들을 성서적으로 ‘밀로의 집’의 흔적이라고 정의했다. 새로운 발굴물들은 상당히 상호 연관된 복합체로 맞아떨어지지만 잘 한정된 건축 단위는 아닌 부가적인 많은 유적들을 밝혀 내었다. 건축물의 질은 인상적이다. 4m 높이로 보존되어 있는 기반암 위에 세워진 두꺼운 벽의 형태, 이들 빌딩들의 처음 단계는 가장 초기의 것이 B.C 586 예루살렘의 나머지 부분과 함께 파괴되었다. 빌딩 C의 흔적은 방 2개의 벽과 다른 방 벽의 토대와 마루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은 철기 Ⅱ 시기의 방 4개 짜리 문지기 집의 전형적인 유형에 속한 것으로 확인되어졌다. 초기 발굴은 문의 남서쪽 방에서 많은 저장용 항아리(storage jars)들을 포함해서 수십 개의 그릇들을 밝혀내었다. 동쪽의 빌딩 C와 접해 있는 빌딩 D는 Pithoi가 발견되어진 몇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마도 창고로 쓰였던 것 같다.
다양한 건축 단위들은 기드온 계곡 넘어 오펠의 동쪽 면을 따라 계속되는 방어선을 형성하는 외벽이라는 두터운 복합체 형식으로 결합되었다. 그 문은 1867-70에 오펠 벽에서 Warren이 발견한 남쪽의 큰 망대와 1967년 Kenyon이 S Ⅱ 현장에서 발굴한 작은 망대와 연결되어 있다. 그 문은 왕의 윗 집으로 알려진 복합 건물의 한 부분인 성서의 수문(water gate)(느헤미야 3:26)으로 확인되었다. 발굴자는 그 문이 제1성전시기 말까지 오펠이 서 있던 분리된 왕의 구역에 접근하게 해 주는, 예루살렘 성벽 서쪽 구역의 문이었다고 믿고 있다.

요새(다윗의 망대)

Solar와 Silvan은 요새의 동쪽 호에서 1984-1988동안 발굴 작업을 했는데, 기반암에서 채석장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그것들을 덮고 있는 것은 성벽의 토대와 철기 Ⅱ시대부터 땅에 채워진 것들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그것의 석조물의 특징은 커다란 야석(field stones)으로 지어진 넓은 벽(broaden wall)의 파편들이었다. 또 제1성전 시기 말경 예루살렘 남서쪽 언덕을 둘러싸고 있는 서쪽 구역의 성벽도 인상적이다.

시온산

1988년 Chen과 Margalit은 시온산 남서쪽 구역에 있는 제2성전시대 첫 번째 성벽의 토대에서 커다란 야석으로 만들어진 철기 Ⅱ시대 요새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이것은 제1성전 시기 말경, 예루살렘 남서 언덕을 둘러싸고 있던 성벽의 일부분이었다.

요약

예루살렘 성벽이 제1성전 시기 말에는 남서 언덕 전부를 들러싸고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학자들이 수용하고 있고 최근의 발견들이 그것에 새로운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당시 성벽은 횡단 계곡(중앙 계곡) 너머 언덕의 북쪽 부분으로 뻗고 있었다. 그리고 요새(다윗의 망대)와 현대의 자파 문(Jaffa gate)을 향해 계속되었다. 그 지점에서 성벽은 남쪽으로 전환했고, 오늘날 구 도시 성벽의 코스를 따라 시온산을 향해 힌놈계곡을 넘어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성벽은 두로인 계곡 어귀 쪽으로 언덕 남쪽 경사의 내리받이가 되었고 다윗 성을 향해 남쪽으로 계속 뻗어 나갔다.
초기의 시기들과 제1성전 시대 완역

이름

B.C. 20, 19C에 이집트인의 저주(execration) 문헌 속에 루살리뭄(Rushalimum)으로 읽혀지는 형태로 자주 나온다. B.C. 40C 엘 아마르나 문서에서는 우르살림(urusalim)으로 나오고, sennacherib비문에는 우르살리무(urusalimu)로 나타난다. 초기 히브리 발음은 예루살렘(Yerushalem)이다. 이름의 뜻은 ‘살렘(shalem)의 토대’로 해석될 수 있다. 살렘이란 우가릿의 신화텍스트에 나오는 ‘아름답고 은혜로운 신’ 샤하르와 샬림, 둘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창14:18, 시편76:2에 나오는 짧은 형태의 살렘이란 이름은 꽤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그 도시는 다윗이 정복하고 이스라엘인이 정착하던 그 시기에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민족적 명칭인 ‘여부스’로 알려져 왔다.
이스라엘이 지배하기 전 그 도시의 마지막 지배자인 Araunah는 ‘여부스족의 Araunah’로 나타난다. 다윗의 정복 설화에서 ‘왕과 그의 부하들은 여부스 족에 대항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다윗은 시온 즉 다윗의 성을 정복했다(삼하5:6-7)라는 구절과 그것은 관련이 있다.
시온이라는 초기 이름은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을 지은 ‘주의 집이 있는 산’, 성전 언덕으로 알려진 북쪽 꼭대기(사온산)과 함께 도시의 동쪽 언덕을 지칭한다. 몇 세대가 지난 후 시온이란 이름은 완전한 도시의 지명으로써 시적 함축을 가지게 되었고 성전 언덕은 역시 모리아산(대하3:1)과 모리아땅의 거룩한 산(창22:2)으로 지칭된다. 예루살렘의 다른 초기 이름은 유다 왕국의 수도임을 나타내는 ‘유다의 도시’와 ‘그 도시(the city)'가 있다.

역사>

전(前)-다윗의 도시
고고학적 발견과 금석문학적, 성서학적 증거는, 그 도시가 성전 언덕 아래 남동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을 정도지만,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의 역사와 발전을 재구성하는데는 미흡하다. 그 도시의 역사가 겪은 많은 변화와 계속되는 건설, 파괴는, 청동석기 시대(Chalcolitic)부터 계속되어 온 정착의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초기 정착의 흔적들을 거의 지워버렸다. 초기 청동1기의 색깔도기 여기서 발견되었고, 초중후기 청동기의 유물이 남동골짜기와 그 비탈에서 이루어진 많은 발굴에서 발견되었다.
초기 정착의 흔적은 동쪽 언덕 맞은 편의 올리브 산과 기드론 골짜기의 중후기 청동기의 무덤들이다. 프란시스코 신부에 의해 발굴된 Dominus Flevit로 알려진 일단의 무덤들에서 아주 풍부한 양의 도자기들이 발견되었다. 석고와 유약토기와 이집트 돌인장, 그것의 대부분이 중기 청동기ⅡC와 후기 청동기Ⅰ-ⅡA이고, 특히 B.C.14세기 전반(아마르나 시대)의 것인데 Rehavia 근처의 Nahalt Ahim의 무덤의 도자기들과 섬 남쪽의 초기 정부기관의 발굴장에서 나온 도자기들과 같은 형태의 것이다. 이런 발견들은 요새화 된 성의 바깥에 산재해 있는 정착을 제안한다. 거기엔 놀랄만큼 많은 수의 수입도자기와 다른 물건들이 있다. 시프러스, 에게, 이집트로부터의 수입품이.
B.C.14세기 이집트가 가나안을 지배하던 때에 예루살렘에 대한 정보는 엘-아마르나 문서에서 발견된다. 그 문서는 많은 가나안 도시의 왕들과 그들의 지배자 아멘호텝 3세, 4세 사이의 외교문서이다. 거기에는 예루살렘의 지배자가 예루살렘 땅의 동맹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이집트 왕에게 보낸 여섯가지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그 지배자, 후리족의 여신인 히파의 종, Arad-Hipa는 그 당시의 국제통용어인 아카디아어로 글을 썼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에서 사용되어지던 언어는 성서 히브리어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서셈족 방언(가나안어)이었다. 예루살렘의 통치자는 이집트의 적들-배신한 가나안의 통치자들과 그들의 동맹, 그리고 합비루-을 격퇴하기 위한 원조를 요구하면서 가나안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슈와르다타가 보낸 다른 편지는 합비루의 위험에 쩔쩔매고 있는 이집트의 군주에 대해 알려 준다. 모든 그의 동맹이 그를 배신했지만 오직 그와 Arad-Hipa만이 그들과 싸웠음을 알려 준다. 이 문서는 B.C.14세기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잘 보여 준다. 이 시기 예루살렘의 땅은 남쪽 언덕 지역에서 더 큰 지역으로 확장되어 간 것 같다. 초기 예루살렘 인구를 다루는 성서자료, 아모리어를 사용하는 예루살렘 남쪽의 이웃들; 그러나 여부스어는 이스라엘 정착의 마지막 시기와 군주제 초기 시기에 나타난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유다 지파가 정복할 때까지 여부스 족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여부스 족의 민족 합병에 대한 단서가 에스겔16:3에 주어져 있다. “주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대해 너의 기원과 출생은 가나안 땅에 있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였고 어머니는 히타이트였다.” 그 도시의 주민은 성전 언덕에 집을 갖고 있던 히타이트 족의 우리야였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와 동등한 관심은 다윗이 그곳을 정복할 때 그 도시의 지배자였던 성전 언덕 유적지의 소유주의 이름이다. Araunah(삼하24:16)은 개인 이름이기보다는 히타이트에서 발견되는 후리족 단어 ewrine(주님)인 것 같다. 그래서 여부스 족은 히타이트 족과 관련이 있고 그들은 B.C.14-17세기 이스라엘에 의해 둘러쳐진 외국 고립지로 남아 있는 예루살렘을 통치했다.

다윗의 성과 성전 언덕

시온 정복과 그것이 다윗 성이 되는 것은 삼하5:6-9에 왕의 용감한 업적으로 묘사되지만 대상11:4-7에는 다윗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요압의 업적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다음을 추측하게 한다. 다윗은 기브온의 샘을 둘러 싼 사건(삼하2:12-32)과 Abner의 죽음 이전에(삼하3:20-27) 초기에 그의 영역에 예루살렘을 넣었다. 요압은 이미 유대군대의 사령관이었고 유다와 베냐민 사이의 외국 고립지는 이미 제거되었다. 여부스 족은 말살되지 않고 오히려 그 날에 예루살렘에서 베냐민 백성과 함께 계속 살았다(삿1:21).
다윗은 그의 자리를 헤브론에서 새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했다. 그가 시온을 정복한 지 몇 년 후에 말이다. 이 기간 동안 다윗 왕국을 강화시키는 몇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새 수도의 왕의 땅이 되었고, 다윗 성과 다윗 왕조 사이의 결속이 새겼다. 이 결속은 오랜 세대 동안 왕국 역사에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성경에는 다윗의 건축 활동에 대한 얼마간의 언급이 있다. 그의 근본적인 노력-밀로로부터 완전하게 둘러쳐진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그의 초기 시절에 속하는 것이다. 띠로의 왕 히람이 보낸 기술자가 지은 백향목 집은 명백히 후기에 속한다(삼하5:11). 이것으로 다윗이 성전 언덕을 향해 북쪽으로 요새화 된 성을 확장시켰음을 가정할 수 있다.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을 보수할 때까지(왕상11:27), 또 밀로를 강화시키고 성전 언덕에 엄청난 구조를 포함해서 그의 새로운 성채를 건설할 때까지, 이것은 어래된 시온 성의 북쪽 성벽이 파손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계곡문(valley Gate)는 서쪽 계곡에 세워졌다. 밀로란 용어는 남동 계곡의 동쪽 경사면의 계단식 지대(terrace)를 지시하는 것이다. 여기에 호화로운 건축들, 전능자의 집, 백향목 집, 다윗의 성이 지어진 것 같다.
사람과 자연이 이들 건축물을 없애 버리는 데 함께 작용했다. 군주제 시대 조차 계속 밀로를 수리해야 했다. 군주제의 전성기 때 발견물은 K. M. Kenyon과 Y. Shiloh가 다윗성에서 발굴해 낸 것이다. 다윗은 지파 통합의 상징이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계약의 상징인 법궤를 옮겨 왔고 고위 관리와 항구적인 수비대를 예루살렘에 주둔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전 백성의 수도요 이스라엘 하나님의 예배 장소로 예루살렘을 설립했다. 그의 통치 말년에 다윗은 성전 언덕에 제단을 건설했다 (성서의 전승에 따르면 다윗은 제단을 건설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여부스 족의 Araunah의 탈곡장을 건설했다). 지역 제사 장소로 쓰이기 위해 도시에 접근하는 고상하고 개방되어진 장소로써 다윗 이전에도 그 유적 장소가 신성시 되었음은 분명하다. 성전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예루살렘의 신성성은 비록 연대가 틀리더라도, 창세기에(모리아산) 이미 언급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살렘왕이요, 족장을 축복하고 승리를 확신시키고 십일조를 받는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멜기세덱과 관련된 이야기는 두드러진 예이다. 시편 110편은 초기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멜기세덱을 중요한 전승으로 취급한다. 그 도시와 그 도시에서 다윗의 후계자의 합법성을 강조해 그의 위신을 높이는데 그것들을 사용한다.
이삭을 신성화하는 이야기(창22장)는 이미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만들었던 모리아 땅의 산 중 하나는 다윗이 아주 후대에 제단을 건설했던 장소로, 주님이 제공했다고 이야기 되었다. 그래서 다윗은 이 거룩한 장소에 아브라함의 제단을 재건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왕의 성전과 왕궁

성전과 왕궁을 포함하는 예루살렘 성은 나단 선지자의 영감있는 지도 아래 다윗과 솔로몬 통치 기간 중에 이미 계획된 것임이 분명하다(삼하2:7). 그러나 실제적인 건설은 다윗이 죽고 솔로몬 치하 4년만에 시작되었다. 티로에서 온 기술자들이 20년간 일했고, 그 건물은 신-히타이트 양식과 당시 아람인의 왕궁 유적의 양식에 따라 지어졌다. 솔로몬이 첫 성전을 지었지만 그의 의도는 단순히 하나님의 집을 짓고, 법궤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윗 왕조의 후원 아래 이스라엘 중앙 성소를 확립하고, 왕조와 성전 사이의 영원한 결속, 제1성전 시대에 계속 지속된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 그 도시는 성채 뿐 아니라 국제 교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시장까지도 그 안에 포함했었다. 그때 그 도시는 그 성벽을 넘어 서쪽과 북쪽으로 확장ㅎ기 시작했다.

유다의 성

솔로몬의 즉위에 이어(B.C.930) 군주제의 분열 시기에서부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솔로몬 치하의 끝에 왕족과 사제 계급 사이에서 세속권력과 종교적 권력 사이의 권위의 분점을 놓고 당파적인 차이가 발생했다. 이들 차이는 다양한 외국 영향력-페니키아, 아라메아, 아시리아-와 함께 분열된 군주제 기간동안 계속 재발했다. 이것은 순수한 당파의 강화와 종교적 개혁의 강화를 유발시켰다. 계속해서 성전은 국민의 국가적-종교적 정서의 초점 역할을 수행했다.
성서의 역사적 자료는 유다의 왕들이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강화하고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함을 보여 준다. 예루살렘 역사의 새로운 국면은 이스라엘과 그 수도가 파괴되고 사마리아가 유다와 북쪽 왕국의 나머지 백성을 새롭게 결속할 때 헤제키아 아래서 시작되었다. 앗시리아 사르곤 2세 때의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조건들은 다시 예루살렘을 전 백성의 국가적, 종교적, 경제적 중심으로 떠오르게 했다. 이것은 헤제키아가 앗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의 이스라엘이 강한 지위를 얻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네겝과 필리스티아의 유다의 정치적 국경을 가자까지 확장시킬 수 있게 하고, 이집트와 앗시라이와의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했고, 종교적 개혁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서쪽 땅에 대한 헤게모니를 놓고 앗시라아 제국과의 투쟁, 그리고 이집트와의 갈등은 유다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 넣었다. 산헤립의 공격전 히스기야의 계획들은 밀로를 견고히 하고 성벽과 망대를 강화하고 새 성벽을 건설하고 도시 밖으로 나가는 물의 근원을 막았다. 이것은 실로암 터널을 지나는 기혼 샘물의 역류도 포함한다. 그 도시 역사의 다른 국면은 앗시리아의 후견 아래 유다의 자치를 허용받은 왕, 므낫세 치하 말년에 시작되었다. 므낫세는 예루살렘을 재강화하고 요새를 견고히 하고 새 외벽을 건설했다(대하33:14). 그러나 유다가 앗시리아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유다의 국경과 영향력을 확장시키고 경제적 부흥을 겪던 요시아 왕 치하의 예루살렘은 새로운 높이에 도달했다. 요시아 치하에 수축된 예루살렘 성은 두로인의 계곡인, Makhtesh와 새로운 주거, 상업 중심지인 Mishneh(서쪽 언덕)와 함께, 현재의 구 도시(old city)의 많은 영역을 이미 포함했다. 서쪽으로의 도시 확장은 남서쪽 언덕의 발굴과 특히 연속되는 도시 성벽의 발견으로 명백히 나타난다. 요시아의 노력은 성전을 수리할 때 발견한 신명기서의 핵심인 율법 두루마리에 기반해서, 성전제의에 집중하는 것으로 절정에 도달했다. 다윗 왕조의 영광의 회복과 함께 솔로몬 때부터 성전에서 일해 온 사독 가문의 영예도 회복되었다. 이 제사장 가문은 제2성전 시대에도 역시 종교적 정치적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이후에도 그 도시는 포로되었던 자나 남아있던 자 모두의 국가적 열망의 초점으로 계속 남아있었다. 성전 언덕의 순례자는 유다 뿐 아니라 사마리아에서도 계속되었다(렘41:5). B.C.538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칙령은 포로 유수를 각성시키는 표현이 되었다. 귀환 운동과 함께 제단을 세우고 새 성전을 짓기 시작하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정착이 새로 이루어졌다.

지형학

고대 예루살렘은 몇몇 언덕이나 계곡을 넘어 확장되었다. 동쪽 경계는 기드론 계곡이고, 서쪽 경계는 힌놈 계곡, 남쪽은 엔, 로겔 샘 근처 기드론 계곡과 합류하는 시온산이고, 북쪽 경계는 대체로 고대 예루살렘이 세워졌던 북쪽 언덕이다.
이 도시는 다마스커스 문 북쪽, 현재의 모라샤 근처, 북쪽에서 시작되는 중앙계곡(두로인의 계곡)에 의해 나누어진다. 그 계곡은 다메섹 문을 지나 오늘날 유대인 거리에서 성전 언덕까지와 시온산부터 다윗성의 계곡까지를 나누고 있는 현재 구 도시의 하-가이 거리를 따라 남쪽으로 뻗어 있다. 이 중앙계곡은 이제 아람인이 차지하고 있는 소위 서쪽 언덕과 유대인 구역과 제2성전시대에 윗 도시로 불리어진 남쪽의 시온산을 나눈다; 그리고 동쪽 계곡의 주요 부분 다위성과 성전 언덕 꼭대기도 나눈다. 성전 언덕의 남쪽은 제2성전 시대의 아랫 도시를 포함한다. 요세푸스는 두로인의 중앙계곡-즉 치즈쟁이의 언덕-과 동쪽 산등성이 오펠을 이름지었다. 도시의 전 역사 동안 주요 水源이었던 기혼샘은 다윗성의 동쪽 비탈 끝에서 분출되었고 아직도 과수원과 기드론 계곡의 경작지에 물을 대고 있다. 근처에 샘과 경작지가 있다는 사실은 B.C.네번째 천년의 끝에 예루살렘의 영구적인 정착을 가능하게 했고 다윗성 산마루의 정착도 가능하게 했다.

발굴 결과

성전 언덕을 제외한 다윗성의 영역은 작다. 산등성이 근처의 폭이 60-100미터 정도이고 12a구역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이다. 그래서 거주자들은 부가적으로 건물을 짓기 위해 동쪽 사면을 이용해야 했다. 실로의 발굴은 초기 청동기 전부터 이 사면에 건물이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B.C.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가나안인과 이스라엘인 도시의 부분이 되어왔음도 보여 준다. 언덕의 지형은 중기 청동기ⅡB이후부터 부지런한 도시계획가들이 가파른 동쪽 비탈을 이용하게 했고 경사면에 도시방어를 위한 건물을 필요로 하게 했고, 동쪽 요새의 위치를 결정하게 했다. 이 방어선은 1200년간 그 도시에서 사용되었다.
철기 시대 끝무렵 몇세기 동안 자연석들은 다윗성 언덕 여러 곳에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동쪽 경사면의 급격한 경사 때문에 모든 시기의 건축가들은 토대로서 바위를 사용하려 했고, 초기 시기부터 생존을 위한 성벽을 만들었다. 이들 습관들은 주로 언덕의 조건에 자신들의 기술을 적용하지 못하던 초기 발굴들에서 층위학적, 연대기적 해석을 복잡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1960년대 고고학적 탐험은 연속적인 심각한 실수들을 포함하고 있다.

청동석기에서 철기1 시대까지(층21-15)

유적의 가장 초기 거주층에서 청동석기 시대의 도자기들이 나왔다. 동쪽 경사 끝부분인 실로 발굴의 b지역에서는 이 층에서만 도자기가 있었다. 다른 지역의 경사지에서는 이 층위(청동석기시대)의 도자기와 초기청동기Ⅰ(층20)의 도자기가 섞여 있다. E1지역, 경사면 중간에는 초기청동기Ⅰ-Ⅱ건물이 발굴되어졌다. 그것들은 기반암 위에 세워졌고, 벽 안쪽을 따라 벤취가 있었다. 이 빌딩과 층20의 도자기와 다른 매장물은 도시 이전 시기에 다윗성의 영구적인 정착을 드러내는 첫 번째 증거이다.
그 도시는 중기청동기ⅡB(층18-17)초에 처음으로 성벽으로 둘러쳐졌다. Kenyon은 이 벽의 일부를 발굴 현장 A의 아래쪽에서 드러내었다. 실로의 발굴은 E지역에서 이 벽의 30m를 발견했다. 그것은 철기시대Ⅱ벽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그 벽은 경사 아래쪽보다 25m 높은 가파른 바위 위에 지어졌다. 다음층(18A층)에서 그 벽은 좁은 버팀벽을 세워 다시 강화되었다. 그것은 층20이나 기반암에 남아 있다. Kenyon은 그녀의 발굴에서 발견된 것을 기혼 샘 위 수문 근처에 있는 동쪽 망대로 해석했다. 실로는 성벽의 3단계를 밝혀내었다; 그것들은 벽의 건설과 B.C.18C에 대한 초기 자료를 가르킨다. 실로는 E지역에 있는 동쪽 경사에서 시작되는 이 시기에 남아 있는 부서진 건축물을 발굴했기 때문에 중기청동기시대ⅡB 이전부터 다윗성의 특징이 되어 온 이 특정한 방어선과 계단식 건물에 이 동쪽 경사면이 사용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B.C.14C의 6개의 엘-아마르나 문서는 예루살렘에서 이집트 파라오에게로 예루살렘 왕 Arad-Hipa가 보낸 것이다. 그러나 Kenyon의 발굴 이전 후기청동기시대 예루살렘 정착의 유일한 증거는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B.C.13C, 14C의 수입도자기와 그 지방도자기가 다량 발견되었다. 이들 무덤은 다윗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어졌다. 이 시기 그 도시에서의 실제적인 정착의 첫 증거는 Kenyon의 발굴 현장A 맨 위에서 나왔다. 그녀는 계단지의 부분으로써 유지되어 온 벽이 거주건축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해석했다. G지역에서의 실로의 발굴 작업은 B.C.13C, 14C가 포괄적인 건축행위가 있던 시기였음을 밝혀내었다.

군주제 시기(층14-10)

성서는 어떻게 여부스가 B.C.10C에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가 되었는지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곳은 정치적 중심이 되었다. ‘솔로몬이 역군을 일으켜 여호와의 집과 자기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의 성을 건축했다’(왕상9:15) 이것과 다른 성서 구절은 다윗과 솔로몬이 지은 건축물을 상술하고 있다; 성전, 왕궁, 부속 건물, 예루살렘 성(the city wall), 오펠, 밀로.

B.C. 10C(층14)

이제 유용한 자료는 B.C. 10C 도시의 윤곽을 재구성하게 한다. 이들 자료는 B.C. 10C에서 6C 바벨론에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의 공급체계 같은 것과 관련이 있다.
14번층(B.C.10C)의 유물은 D1과 E동쪽 경사면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서 발굴자들은 이 시기의 건물과 도자기 등을 발굴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새 건축행위가 다윗성 계곡 북쪽에서 제1성전시대에 성채가 되었던 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문학적 자료로 알려져 왔다. Macalister는 여부스 성과 다윗, 솔로몬 시대에 속한 첫 유물을 발견했다. 그는 성벽과 구조를 해석했다. 샘 위 동쪽 비탈 꼭대기의 인상적인 유적은 특히 유명하다; 돌비탈 같은 계단화 된 돌 구조를 그는 여부스성의 요새의 일부로 해석했다; 그리고 커다란 사각 망루를 다윗의 부대적인 요새로 설명했다. 그러나 Avigard는 산등성이 정상의 성벽과 구조가 제2성전 시대보다 초기일수 없다고 논박했다. 이것은 Kenyon의 H, M, R 현장의 발굴로 증명되었다. 그녀는 사각 망루가 B.C. 7C,6C에 파괴된 건물의 돌덩이 위에 부분적으로 건축되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것은 제2성전 시대 이전에 건축될 수 없었다. 동시에 그 망루는 예루살렘 제1벽으로 불리는 요새의 부분이었다. Kenyon은 그 계단식 돌 구조도 이 요새의 후기 체계에 속한다고 가정했다. 그녀의 사각 망루에 대한 수정된 자료는 옳지만, 계단식 돌 구조는 아니라는 것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실로의 발굴은 계단식 돌 구조의 아랫 부분을 보여 준다. 그 구조는 18m 높이로 유지되어 왔다. 아랫 부분이 좀 더 발굴되자 그것은 잘 정의된 층위학적 결과에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의 기초적인 부분은 가나안 성 요새의 돌로 채워진 주춧돌에 유적에 남아있다. 계단식 돌 구조가 세워졌을 때, 가나안 성 요새의 주춧돌은 상당한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그 기초적인 부분은 B.C. 10C말, 9C경으로 추정되는 석조건물과 얇은 지층 아래 묻혀 있었다. B.C. 7C,6C경 중간 아래의 모든 것은 제1성전 시기 말에 파괴된 잘 지어진 건축물 아래에 묻혀 있었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실로는 B.C. 10C경의 인상적인 구조물을 측정했다. 그는 그것을 당시 예루살렘 성채의 방어를 위한 거대한 옹벽과 튼튼한 토대(플랫폼)으로 해석했다. 기반암에 짓지 않고 후기청동기Ⅱ에 무너진 새 요새를 튼튼히 하기 위해 그것의 건축자들은 계단식 구조 아래에 무너진 건물을 매장함으로써 지형을 숨겼다. 계단식 구조는 그것의 기능이 일차적으로 기술적임을 나타낸다. 그것은 요새의 일부라기보다는 건물을 지지하기 위한 토대로 구성되어진 것이다. 이 구조의 윗 부분은 Macalister가 이미 발굴했는데 그의 발굴분석은 제2성전 혹은 그 이후로 측정되는 건축물이 초기 건물의 어떠한 흔적도 거의 사라지게 했음을 보여 준다.
Kenyon은 계단식 돌 구조의 북서쪽 모서리와 안쪽에 있는 발굴현장 H에서 성벽의 일부가 서쪽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녀는 그것을 B.C. 10C 포곽(Casemate)의 일부로 해석했다. 계단식 돌 구조물 북서쪽 Kenyon의 A-ⅩⅤⅢ에는 커다란 양의 다듬은 돌 조각과 원-아이올리스인 수도가 있었다. 이 두 건축학적 요소들은 철기Ⅱ에 세워진 행정센터(사마리아, 므깃도, 하솔, 라마트라헬)같은 행정 빌딩이 세워졌을 것이라 가정하게 한다.
새 수도의 건축가들은 아랫 성과 요새 안에서 가나안인의 성의 일부를 다윗의 성으로 재건축했다. 성전 언덕이 윗 성과 합병되어졌을 때 도시 계획의 주요 개축은 북쪽에 놓여졌다.
예루살렘 서쪽 방어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1927-28년에 W. Crowfoot는 27m 길이에 8m의 두께와 7m의 높이를 가진 벽을 발굴했다. 다윗성의 서쪽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이 벽은 서쪽문, 계곡문으로 알려져 있다. 다윗성이 서쪽 언덕 쪽으로 확장하기 전 그것들은 B.C.10C-8C 다윗성 서쪽 요새의 일부였을 것이다.
제1성전이 멸망할 때까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남아있던 다윗의 요새는 건축학적으로 성서적으로 ‘요새’와 동등한 오펠이란 용어의 정의에 맞아 떨어진다. 그 용어는 가나안인의 성에 남아 있던 예루살렘에 건설된 이스라엘인 성의 요새를 가리킨다.
밀로의 위치와 성격은 의심스러운 주제이다. Kenyon은 이 용어를 집을 지탱하기 위해 철기2시대에 지어진 계단지(terrace)와 돌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들 계단지들은 중기 청동기 2b초부터 도시에서 다른 기능을 수행해 왔기 때문에 철기 시대 그들의 건축은 혁신되디 않았다. 밀로는 어떻게 성전 언덕과 다윗의 요새 사이에 위치했을까? 이들 지역 사이에는 Shallow saddle이 있었고 이 Saddle은 옛 요새와 북쪽 합병 지역 사이의 지형적 개념적 고리(link)를 형성하기 위해 B.C.10 C에 채워지고 평평하게 되었다. B. Mazar와 E. Mazer의 발굴 현장 남쪽 모서리에서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거대한 벽이 발견되었다. 1.4m의 두께를 가진 일부 벽은 철기 시대에 파괴된 기념 건축물의 일부일 것이다. B. Mazer는 이러한 것들이 “밀로의 전”(왕하 12:21)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이들 건축물의 유적은 성전 언덕 근처에서 발견된 철기2시대의 석조 건물 뿐이다: 예루살렘에서의 발굴에서는 성전 자체와 관련된 발견물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성전의 모든 재구성과 환경은 성서의 묘사에 의존하고 있다. 또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당시 행정 센터 같은 것으로부터 알려진 건축 기슬과 건축 구성에 대한 비교 연구에도 의존하고 있다.

B.C. 9 C (13층)

13층(B.C. 9 C)에 남아 있는 유적은 이층의 이전과 이후에 비교해 볼 때 빈약하다. 이 세기의 유물들은 B.C. 10 C의 거대한 건축 행위와 히스기야 시대 동안의 건축 붐 사이에서 파괴된 것이 틀림없다.

B.C. 8C-6C (12-10층) 그리고 서쪽으로의 도시 확장

B.C. 8 C 도시는 발전의 절정에 도달했다.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정복당한 주변 국가의 난민들이 사마리아와 주변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가 남쪽으로 유다를 침략할 것에 대비해 왕궁과 수도를 인구의 증가와 주변 지역의 증가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다: 주거 지역이 서쪽 언덕으로 확장되었고; 신, 구 정착지역을 둘러싼 요새는 큰 규모로 재건축되었고: 수도 공급 체계는 히스리댜가 터널을 뚫어 보장했다. -워렌의 통로(shaft)와 실로암 터널
실로가 D, E 지역에서 발굴한 12-10층에서는 B.C. 8-6 C의 풍부한 유물이 나왔다. 동쪽 비탈의 성벽은 120m길이가 새로 발굴되었다. El과 E3 지역의 일부에서는 중기 청동기 2B와 그 이후에 동쪽 경사의 마지막 단계의 요새였던 이전 성벽을 사용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다. 이 점에서 그 성벽은 도시를 방어하는 요소로써, 또 비탈 위의 4개의 계단지 체계를 위한 거대한 옹벽 지대로 쓰여 왔다. 가장 낮은 계단지와 그 구조물의 벽은 벽을 채우는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El지역의 상당히 큰 주거지 단위가 성벽에 접해 있는 ‘낮은 계단지 집’과 11층으로 측정된 ‘Ashlar의 전’을 포함해 확정되었다. 비슷한 집들이 E2 E3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들 집들 중에서 특히 낮은 계단지 집에서 겹쳐진 3층이 확인되었다. 이 층에서 발견된 유물은 12, 11, 10층에 자신을 표시했다. 그것들은 10층말에 파괴되었다. 12층의 독특한 모습은 B, D, E2 지역에서 실로의 발굴로 추적되었다. B.C. 8C 단순한 설계의 몇몇 구조물들이 성벽 바깥 경사면에 있는 암반 위에 세워졌다. 이 발견물들은 그들의 연대를 나타내 준다. 그들 중 대부분은 B.C. 7C이전에 폐기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B.C. 701년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Kenyon이 그녀의 현장Ⅰ에서 발견한 석조물과 매장지는 성벽 바깥 지역은 버려졌다.
초기 , 예루살렘의 고고학적 발굴 때부터 학자들은 예루살렘의 경계를 놓고 미니멀리스트(최소주의자)와 맥시멀리스트(최대주의자)로 나누어졌었다. 최대주의자들이 그 도시가 서쪽과 동쪽 언덕 양쪽을 그들에에 유용한 철기Ⅱ시기에 나온 고고학적 자료의 위치와 관련해서, 그 도시는 동쪽 산등성이- 다윗 성과 그 위의 다윗 성전으로 한정된다고 논쟁한다. Kenyon의 발굴 현장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이다. 오늘날 철기 Ⅱ시대에 대한 풍부한 정보로 인해, B.C10-6C, 명확한 예루살렘 도시 지역의 발전상이 드러났다. 다윗이 정복한 여부스 성은 산등성이에 있는 요새와 함께 다윗성 절벽의 경계 안에 세워졌다. B.C10C, 그 도시는 북쪽으로 확장했다; 초기 도시의 영역은 성전 언덕이 덧붙여짐으로써 거의 배가 되었다.
B.C10-8C 중반까지 그 도시는 여전히 이들 경계 안에 제한되어 있었다. 성전 언덕 맞은 편, 서쪽 언덕의 동쪽 경사 기슭에서 B. Mazarat가 발견한 바위를 자른 동굴이 그에 의해 무덤으로 해석되었다. 그것들은 이 지역이 실완 마을에서 발견된 묘지처럼 그 도시의 부유한 사람을 위한 묘지로 쓰였음을 증명해 준다. 서쪽 언덕, 여러 지점에서 발견된 채석장들은 철기 시대, 대형 건축 계획(주로 솔로몬의 빌딩일)을 위해 돌을 공급한 것이 분명하다.
예루살렘의 도시 지역은 B.C 8C에 확장되었다. 많은 단순한 건물들이 동쪽 경사면, 성벽 바깥 지역으로 올라갔다.
철기 Ⅱ때의 유대 구역의 벽가 마루만 남고 무너져 내린 건축물이 소멸된 것은 후기 건축물 탓이다. 작은 발견물은 그 시대의 풍요 다산 동물 입상이었다; lamelekh도장 흔적과 개인 도장 흔적이 있는 항아리 손잡이: 그리고 신적인 묘사(E1, 땅의 창조자)가 쓰여진 몇몇 도편(ostraca)들이었다. 종합해 보면, 이 발견물들은 B.C8C부터 제1성전 끝 시기까지, 서쪽 언덕(성서적으로 미쉬네)이 정착지였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도시가 중앙계곡을 넘어 서쪽으로 확장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B.C 8C, 서쪽 언덕 지형이 건축에 용이했기 때문에 서쪽 언덕 지형이 사용되었다.
Avigad가 발견한 소위 ‘넓은 벽’(broad wall)이란 게 있는데 이 성벽은 성의 새로운 방어망을 확장시킨 것으로 히스기야 치하에 건설되었다. 그 성벽은 7m의 두께이고, 65m정도가 발굴되었다. 이것으로 판단해 보건대, 그 벽은 남서쪽 언덕의 북서쪽 모서리를 향해, 성전 언걱에서 뻗어나가 자파(Jaffa)문 근처 (다윗의 망대)요새의 현재 위치에 도달한 것이 명백하다. B.C8C 그 벽의 건축 때, 그 길에 있던 개인 집들은 잘려나가고 파괴되었다. 넓은 벽은 이 지역의 요새의 설계를 이해할 수 있는 증거이다.
계곡을 횡단하는 지역에서 Avigad가 거대한 망루의 한 모서리를 포함하는 부숴진 요새를 발견한 ‘넓은 벽’의 가는 북쪽 선은 8m 정도의 높이로 발견되었고 Avigad는 그것은 문(gate)에 속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것들은 모두 확장된 예루살렘의 북쪽 방어선의 부분이다. 망대의 성벽은 4m의 깊이이다. Avigad는 그 문을 예레미야 39:3에 언급된 중간문(middle gate)라고 가정했다. 그러므로 하스몬 시기의 ‘첫번째 성벽’은 요새 부근 유대인 구역에 있는 히스기야 성벽의 부분과 코스를 재사용한 것 같다. 이런 가정은 요세푸스의 주장으로 더욱 들어맞는다:
“첫번째 성벽은 ‘가장 고대의 것’이다.-----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제1성전 시대 끝, 주로 B.C7,6C때 도시의 방어선 바깥에 건설되었던 무덤들이 오늘날의 다메섹 문의 북쪽, 북쪽 방어선에서 발견된 것은 명백하다. Kloner는 시온산 옆 힌놈계곡의 동쪽 기슭에서 이시기의 묘지를 발견했다. 남서쪽 계곡 스코트인 교회에서도 똑같은 무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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