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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팔레스틴의 새주인들

영국신사77 2007. 2. 3. 23:25
                       6. 팔레스틴의 새주인들
2006/10/26 오전 12:07 

5. 팔레스틴의 새주인들
(1) 비잔틴(325-640 C.E.)
  서방 세계가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I,306-337년 C.E.)의 통치를 시작으로 점차 기독교화 해 나가는 동안 유대인들의 지위는 제한되기 시작하였다. 곳곳에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장소를 '성지'(Terra Sancta)로 규정해 나가면서 골고다의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huchre)를 비롯하여 베들레헴의 [구주탄생교회](Church  of  Nativity), 그리고  감람산  위의  [승천교회](Church of Ascension)등 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비잔틴 세계에서 몰려오는 많은 성지 순례자들을 맞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많은  중요한 신학적 교리가 확정되기에 이른다.
  339년 콘스탄틴 2세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결혼을 금하였으며, 유대인의 경제 활동,  특히 농업 생산에 많은  제약을 가하였다. 유대인의 법적 지위는 점차 제약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반유대적 신학을 설교하고, 그 교리를 정립시켜가는 과정에서 얻게된 하나의 결과였다.
  5세기 초엽 데오도시우스 2세가  통치하는 동안 교회는 빠른 속도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으며, 각종 법령과 행정력으로 교회의 영향력은 커갔다. 특히 팔레스틴에 기독교인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 하면서 열광적인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5세기 후엽에서부터 유스틴 황제(527-565년 C.E.)가 즉위하기까지 기독교는 교회내의 각기 다른 종파간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문제의 신학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팔레스틴 내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지위가 어느정도 증진되면서 곳곳에 많은 회당을 짓고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비잔틴의 군사력이 부활되면서 유대인은 보다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유스틴 황제가 즉위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즉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인의 권리와 재산 보호의  법적 근거를 제거해 버렸으며, 유대교에 대한 지위를 하락시켜 나갔다. 이 시기에 일어난 많은 신학적 논쟁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팔레스틴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의 반란(529 C.E.)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가장 중요한 혁신 조처  가운데 하나는 유대법을 국가법과 동등한 규정으로 적용시켜 나갔으며, 기독교 내의  각종 제도를 유대교의 그것들로부터 분리시켜 나갔다. 나아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유대교적인 전통과 관점으로부터 떠나 기독교적인 성경해석 방식에  의해 해석해 나갔다. 이를  위해 유대인의 성경 해석서인 미쉬나를 금서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미쉬나는 하늘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지상의 인간의 작품이며, 유대 랍비들의 해석은 성경의 가치를 모두 부인하고 있는 까닭이다.
  교황 그레고리 1세(Pope Gregory I,590-604)는 유대인을 기독교인과 맞서 하나님의 선택권을 놓고 싸우는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욥기를 해석하면서 유대인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비판하였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일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이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유대인은  에서요, 이방인였던 기독교인은 야곱이었다. 동시대의 교부들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궁극적인 차이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서 유대인들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유대인의 회당을 새로  짓는 일을 금하였으며, 법으로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유대인들을 차별하였다.
  이러한 비잔틴  시대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떤  제국의 통치 기간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614년 페르시아가 팔레스틴의 변방에까지 이르자, 과거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로부터 얻은 유대인의 구원과 같은 갑작스러운 구원을 기대하며  강력한 메시아적 흥분을 가라앉치지 못하였다. "페르시아가 팔레스틴에 이르렀을 때, 유다의 남은 자들은 페르시아와 연합하여 기독교인들과 맞서 싸웠다"(Sebeos,ch.24).  유대인들은 갈릴리로부터  가이사랴, 룻다를 거쳐 614년 5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을 정복하였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페르시아는 기독교인을 추방하고 교회를 파괴하였다. 이 시기에 마르 사바(Mar Saba) 같은 수도원이 불타고 수 천명의 수도사들이 화형되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에 새로 시작된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는 느헤미아 벤 후시엘(Nehemiah ben Hushiel)과  에브라임 벤 요셉(Ephraim ben Yosep)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페르시아의 친유대  정책은 3년이 채 못되어 617년 역전되어 친기독교, 반유대인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처형되고 유대인의 지위는 예전처럼 돌아갔다.
  622년 비잔틴의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는 군대를 강화하여 페르시아 정벌에 나서  엑바타나 전투에서  승기를 잡고 페르시아의  영토를 되돌려 받았다.
  629년 비잔틴의  황제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기독교의 예루살렘을 복원시켰다. 그는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에게  어느정도의 관대한 조치를 취하였으나 얼마후 성직자들의 강요로 깨어지고 말았다.  성직자들은 황제의 위증죄에 대한 책임을 강요하게 되면서 결국  유대인을 예루살렘과 그 주변으로부터 추방하도록 명령하고 말았다.
  교회는 유대인을  이집트와 주변 사막으로  추방하였으며, 이에 반대하고 나선 유대인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해와 더불어 유대인을 강제로 개종시키는 공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적어도 기독교 제국 내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신앙을 거부한 구약의 수호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이러한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갈등은 640년 팔레스틴의 새주인으로 떠오른 아랍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유대인들은 이제 수 세기 동안 새로운 "악한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아랍의 등장과 함께 모슬렘과 기독교의 갈등이 시작되었으며, 같은 뿌리를 가진 세 종교와 민족의 갈등은 팔레스틴을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하였다.  가장 확실한 변화는 이제  더이상 팔레스틴이 유대인의 삶의 중심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2) 모슬렘(640-1091 C.E.)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무함마드(Muhammad,570-632 C.E.)에 의해 창시된 모슬렘교는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을 차례로 정복하고, 바빌로니아로부터 스페인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1099년  십자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움마야드(Umayyad,  661-750), 아바시드(Abbasid,  750-974),  그리고 파티미드(Fatimid, 975-1171)로 이어지는 통치를 계속하였다.
  모슬렘의 등장은 유대인의  기독교와의 갈등이나 증오심과는 다른 성격을 나타낸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이 유대교의  율법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독교의 교리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 비하여, 유대교와 모슬렘의 만남과 갈등은 유일신 사상을 지지하는 두 법전-유대교의 모세법과 이슬람의 코란경-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아라비아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살면서 이 지역의 이웃 문화와 상당한 접촉이 있어왔다. 특히 아랍인들과는 인종적, 언어적으로 친족이었다. 그런 점에서 모슬렘의 경전인 코란(Koran)은 유대교의 많은 전통과 관습을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로 이해되면서, 그리고 그들의 신이 "유일신 알라"(Allah)로 신봉되면서, 이러한 신앙을 인정할 수 없는 유대인들은 "이단"일뿐만 아니라 이교도였다. "움마"(Umma,"믿는 자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자에게는 칼과 순교를, '움마'에 속한 자에게는 완전한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
  638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모슬렘은 예루살렘의 솔로몬의 성전터에 691년 C.E.에 오마르(Omar  ibn al-Khattab,634-644,무함마드의 후계자)  사원(Dome of the Rock)과 710년 C.E.에 엘 악사 사원(El Aqsa Mosque)을 각각 세우면서, 예루살렘은 메카(Mecca)와 메디나(Medina)와 더불어 모슬렘의 3대 성도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많은 교회가 이 시대에 대부분 파괴되며, 이로 인하여 유럽의 열정적인 기독교도들을 자극하여 성지탈환을 목표로 한 십자군 형성의 동기가 된다.
712년 이슬람  제국이 동쪽 인도의  국경으로부터 피레네의 전지역을 통치하게 되면서, 흩어진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모슬렘의 통지권안에 들어오게 된다. 9세기에  들어 서면서부터 유대인의  지위는 특별히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의 거주,  이전의 자유가 조금씩 제한  받기 시작하였으며, 상업활동 역시 크게 제약을 받았다.  나아가 새로운 아랍 문화의  영향은 유대인들의 언어 생활 및 종교 생활에까지 미쳤다.  아랍어가 유대인의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완전히 대체시키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10세기의  유대 종교 사상은 대부분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의 유대교는 이성주의적 종교 문화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플라톤적, 신플리톤적 이성주의가 다양한 유대교의 사상을 설명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종교 해석의 경향을 띄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팔레스틴으로  건너와 종교학교(Yeshivot)를 세우고  가르친 사디아 가온(R.Saadiah Gaon,882-942)은 합리주의 종교 사상을 세워 나갔다. 그리스 철학과 아랍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는 [신앙과  견해에 관하여](Book  of Beliefs and Opinions)라는 책을 아랍어로 출판하면서, 이 시대의 이러한 사상적 경향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지성을 모세의 법과 동등한 가치와 지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면서 지성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가치없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모세 법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전통'으로, 이 전통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의 경험이나 행동에 근거하여 선택된 것이므로 이성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랍의  지배 하에  있던  유대교의  또  다른  하나의  종교 사상은  카라이트(Karaites,"소명자","선전가")라 불리우는  사람들로써, 유대 지도력에 반발하면서 탈무드의  전통을 거부하고  나선 베냐민 벤  모세 알-나하벤디(Benjamin ben Moses al-Nahawendi, c.830-860)로부터  부흥되었다. 이들은 유대인과 토라 사이의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접촉을 무시하는 전통을 비난하면서, "스스로 토라에서 샘을 찾으라.  그리고 선생들의 의견에  의존하지 말아라"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10세기의 합리적인  개인주의의 발달로 개인의 이성적 책임이 강조되면서 다른 어떠한 권위도 부인하는 사상에 기인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모든 이슬람 제국에  펴저 나갔으며, 특히 10세기의 예루살렘은 금욕적이며 개인적이고 합리적인 종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아벨레이 찌온]("시온의  통곡자들"), 또는  [쇼산임]("장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면서도 성전의 회복을 위해 갈망하던 집단임을 잘 나타내 보이는 칭호라 하겠다.

 

(3) 십자군(1091-1291 C.E.)
  '성지'가 모슬렘에 의해 지배되던  때, 중세 유럽에서는 세속 군주와 성직자 사이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가고 있었다. 세속 군주들은 지배권을 강화함으로써 봉건적인 정치 구도를  깨뜨려 중앙 집권적인 정치체제로 나아가려 하였으며, 성직 매매등 교회안의  부패를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성직자의 임명권까지 차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교황권을 강화하고, 교회의 일에 대한 세속 군주의 개입을 일체 금지시키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확립된 교황의  권위는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Pope Urban II)에 의해 소집된 십자군(십자군,crois s) 운동의 시작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성지 탈환과 기독교 왕국의 재건을 목표로 한 십자군은 여러차례의 실패를 거듭하면서 급기야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탈환한다. 또 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의 메카로 향하는 모슬렘 '순례자의  길'을 점령하였다. 이 때 많은 유대인들은 학살 당하였거나 노예로  잡혀 이탈리야등지로 팔려갔다.  예루살렘의 유대 공동체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으나, 갈릴리의 유대인 지역은 다치지 않았다. 당시 가장 큰 유대인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람레(Ramleh)는 분산되고 말았다.
  첫번째 왕으로 등극한  발드윈 1세(Baldwin I,1100-1118)는 팔레스틴에 머물던 대부분의 유대인과 모슬렘교도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회당과 사원을 파괴했으며, 곳곳에 기념 교회와 요새등  많은 건축물들을 남겼다. 이 때 남긴 건축물의 주요 장소들로는  아부고쉬(Abu Ghosh),  아쉬켈론(Ashkelon),  악고(Acco), 가이사랴(Caesarea), 티베리야(Tiberias),  헤브론(Hebron), 예루살렘, 님루드(Nimrud)등이 있다. 십자군의 진출은 유럽으로부터의 많은 기독교 순례자들을 이 곳 성지에 보내어 방문하게 하였다.
1096년 여름,  유럽에서는 십자군에 의한  유대인들의 대량학살이 이루어졌다. 십자군은 유대인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고집을 가지고 죽임을 당하던가?를 선택하도록  강요하였으며, 많은 유대인은 강요된 개종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살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순교자'들에 대한 경외심을 낳게하여, 외적인 정치적 압력을 내적인 신앙심으로 더욱 견고히 해 나가는 기회로 삼게 하였다.
  황제 헨리 4세는 유대인의  종교적 지위를 보장해 주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교황과 기독교인들의  반대로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적어도 십자군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는  유대교도든 모슬렘교도이든 간에 자신들의 종교적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살아 남기 위해서는 오직 개종만이 있을 뿐이었다. 결국 일부 유럽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도성을 만들고 외부로부터  방어하려 했으나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점차 유대인의 정치적, 법적 지위는 쇠퇴해 가기 시작하였다.
  십자군의 종교적 위세 속에서 유대인만이 국교를 신봉하지 않는 자들의 대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교황과 황제와의 갈등 속에서 유대인은 언제나 교회 지도자들의 악선전의  도구로 이용되어 기독교  대중들의 폭력과 박해를 정당화하였다.
  적어도 십자군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반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다. 동시에 기독교에 있어서 유대교는 화해할 수 없는 신앙의 적이었다. 이러한 적개심으로 희생된 많은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없는 희생양'이었으며, 십자군들에게 있어서 '정당한 댓가'였다.
  그러나 십자군은 1187년 살라아딘(Saladin)장군으로부터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을 내어 주고,  1250년 카이로의 마멜룩(Bahri Mamelukes)으로부터의 참패로 말미암아  팔레스틴의 대부분의 해안 평야를  모슬렘에게 다시 빼앗기게 되며,  1291년 십자군의 최후의 보루였던 악고(Acco)가 무너짐으로써 팔레스틴에서의 약 200년동안의 십자군 시대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4) 마멜룩(1291-1517 C.E.)
  팔레스틴이 또 한차례 모슬렘의 손에게 넘어간 것은 터어키 지역에서 이집트로 온 '종들'(Mamluks)의 후예인  마멜룩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13세기 초의 일이었다. 본래 마멜룩은 이집트의 군대에서 종사하던 노예들로서 알-말릭 나시르(Al-Malik al-Nasir  Muhammad)가 이끄는 그들이  지배자들을 전복시키고 남부 러시아 및 발칸 반도 주변의 새로운 노예들을 규합하여 이룩한 강력한 군사 봉건제도의 정권이었다.
  이들은 이집트와 팔레스틴,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정복하고 통치하였다.  이들은 처음부터 기독교와  대항하여 싸우는 '성전'(Holy War)을 일으켜 이집트의 기독교인 콥틱(Coptic)교를 박해하였으며, 이는 점차 모슬렘과 비모슬렘  간의 적대  의식으로 발전하였다.  마멜룩 제1왕조인 바흐리스(Bahris,1250-1381)와 제2왕조인  시르카시안(Circassians, 1381-1517)의 통치하에서 이집트 내의 유대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마멜룩이 이집트에서의  권력 다툼과 몽고로부터의  시리아 방어 등 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팔레스틴에는  침체기를 맞게 되며, 이로 인하여 팔레스틴은 종교적으로 가장 심한 쇠퇴기를 겪게 된다. 특히 십자군이 세운 많은 건축물과 교회들은 무참히 파괴되었다.
  1260년 다마스커스가  정복되면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에  대한 폭동이 일어났으며, 팔레스틴의 나사렛  교회가 파괴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생매장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박해는  아샤라프  칼릴(al-Malik al-Ashraf Khalil,1290-93)이 통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301년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중되어 카이로에 있는 모든 교회와 회당이 문을 닫게 되었다. 정부는 기독교인에게 파란 터어반(회교도가 머리에 감는  두건)을, 유대인에게는 노란  터어반을, 그리고 사마리아인에게는 붉은 터어반을 각각 쓰게 하였다. 1354년에 이르러 강제로 개종을 명령하였으며, 비모슬렘 교도는 모든 공직으로부터 추방하였다. 그 외에도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말을 타거나 공중 목욕탕에 출입하는 일등이 금지되었다.
  이 시기의 팔레스틴 유대인  공동체는 그 힘이 쇠잔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한 악고, 욥바등의 경우 거의 이름조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의 수도에는 아직까지 대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남아 있었으나 주변 지역은 쇠퇴하였다. 가자와 람레 및 나블러스(세겜)등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 활동이 계속되었으나 이러한 상태에서 중산층의 유대인은  몰락하여 갔으며, 유대인의 경제적 수준은 형편 없이 가난하여 갔다.
  아랍 문화 세계에서 팔레스틴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슬렘의 교육이나 종교 활동은 지속되었다. 모슬렘의 학교인 마드라샤(Madrasas)가 많이 세워졌으며, 많은  사원들이 건설되었다. 람레의 백사원과 예루살렘의 콰이트 바이 사빌(Qait bay Sabil) 사원, 그리고 룻다의 교량 건축은 유명하였다.

 

(5) 터어키(1517-1917 C.E.)
  터어키의  오토만 제국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셀림 1세(Selim I,1512-20)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1517년에는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아랍 세계를 통합하고 팔레스틴에 들어와 약 400년 동안 새주인으로 등장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그의  아들 슐레만 1세(SuleimanI,1520-1566)는 아시아와  팔레스틴을 다스리는 오토만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그가 점령한 지역을 봉건국으로 삼고 그 땅을 나누어 봉건 군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때 팔레스틴은 모두 4개의 지역(sanjak bey, 터어키어로 '표준 단위'를 일컫는 말이다)-예루살렘, 가자, 나블러스,  그리고 사페드-으로 나뉘어 졌다. 각 지역은 군사, 경제, 법률 기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였으며, 이 때 재건된 예루살렘 성벽은 오늘날 구도시(Old City)로  남아있다. 대부분의 지역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였다. 특히 유목민인 베두인(Bedouin)을  농업 활동에 활용하여 많은 약초, 밀, 보리, 콩등의 작물을 생산토록 하였다.
  이 시대의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올리브,  꿀, 과일, 목화등의 생산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주로  아랍인들의 경제 활동이 돋보였다. 1492년과 1497년 스페인의 유대인들이 대량 학살과 대추방을  맞으면서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이주해 들어온 것도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한 때였다. 이들은 주로 나블러스, 헤브론, 가자, 사페드 등지에 정착하였다.  갈릴리 지방의 여러 도시에도 흩어져 정착하였다. 오토만 제국의 초기에 팔레스틴에는 약 1000여 가구의 약 5000여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다시금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며 희망을 불태웠다. 이러한 희망은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자극하여  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귀향을 서두르게 하였다.  스페인으로부터 1526년에 약  200여 가구가, 1554년에는 다시 338가구가 이주해  들어왔다. 이  시기에 예루살렘에는  다빗 아비 짐라(R.Davidibn Abi Zimra, c.1485-c.1575)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다.
사페드(Safed)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농업과 각종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터어키 정부로 부터 인정을 받아 '왕국의 수입을 증가시켜주는 유대인'이라는 명성을 얻어 나갔다.  16세기 중엽 사페드의 유대인의 숫자는 10,000여명으로 늘어났으며, 팔레스틴의 새로운 도시로 부각되었다.
  사페드는 토라 연구의 중심지로 부상하였으며, 유대 신비주의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요셉  카로(R.Joseph Caro)에  의해 쓰여진  카발라(Kabbalah)와 조하르(Zohar)라 일컬어 지는 유대  신비주의의 책은 토라의 신비주의적 연구의 대표적인 책으로 내려오고 있다.
  오토만 제국의 쇠퇴기는  무라드 3세(Murad III,1574-95), 그의 아들 무함마드3세(Muhammad  III,1595-1603),  그리고  아흐메드(Ahmed  I,1603-17), 무스타파(Mustafa I,1617-18, 1622-23),  무라드 4세(Murad IV,1623-40)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맞이하게 된다. 레바논 지역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두르즈(Druze)의 마안(Ma'an)족 추장 파크르  알-딘(Fakhr al-Din II,1590-1635)은 사페드와 아이윤(Ajlun)등 오토만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시리아와 사이프러스등지에서 역시 독립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던 십자군들과의 연합의 결과였다. 16-17세기 오토만 제국은  그 외에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세력들로 인하여 쇠퇴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무스타파 2세(Mustafa II,1695-1703)가  통치하는 동안 오토만 제국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러시아의 남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의 중요한 성지가 이들에게 점령당했으며, 세금 징수권과  모슬렘의 사법권을 박탈당했다. 18세기 초에는 갈릴리 지역의 대부분의 영토를  자히르(Zahir al Omar)가 받아 통치하면서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십자군 함대의 지지를 얻어 가자, 욥바등을 점령하였다.
  한편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은  콘스탄티노플을 매우 놀라게 하였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다음  해 팔레스틴의 오토만 제국의  영토에 들어와 가자, 람레, 룻다 및 욥바등을  어렵지 않게 점령하였다. 해안길을 따라 팔레스틴을 점령해 올라간 나폴레옹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지는 않았다. 그의 목표는 북쪽으로 가는 정복의 길을 열어놓은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하이파를 정복하고 악고를 포위하였다. 그런데 이 때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큰 재앙이 내렸다. 전염병으로 많은 군인이 죽자 그의 군대는 이집트로 퇴각하고 말았다.
  17세기 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서 메시아 운동이 발효하면서 팔레스틴으로 이민이 시작된다. 유다 하시드(Judah Hasid)와 하임 말라크(Haim Malakh)가 이끄는 메시아  운동가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팔레스틴으로 이주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끌고 이주해 왔다. 오는 길에 많은 이들이 죽는 어려움을 당하나 그들의 이주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예루살렘에 약 1,200여명의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이룰 정도였다.
  유럽에서 온 이들을  아쉬케나짐(Ashkenazim)이라 부르는데, 이들에 대한 아랍 정착자들은 심각한 배타심으로 경계하였다. 이들의 모습이나 복장이 유럽풍의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띄었다. 아랍인들은 안식일에 이들의 회당을 공격하고, 방화하는 등 많은 충돌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루살렘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은 갈릴리  북쪽 지역-사페드,티베리아 등으로 이주해 갔다. 이 곳은 당시 가장 큰 유대 공동체를 이루고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팔레스틴의 경제 상태는 매우 악화되었다. 경작지 마다 폐허처럼 변해 있었으며, 마을들  마다 가난하였다. 유럽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터어키 제국과 협상을  통하여 경작지를 사들이며 농사를 시작하였고, 또 유럽과의 기초적인 무역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들이 생산한 면과 설탕, 커피 등이 주요  상품들이었다. 인구도 급증하면서 18세기 말엽 팔레스틴에는 약 30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터어키의 통치기간  중에 팔레스틴과  시리아에 대한 9년  동안의 이집트 통치(1832-40)는 유대인들의 정착을  유리하게 해 주었다. 터어키와 이집트와의 갈등이 고조되는 동안 보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 들어왔으며, 양측으로부터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지원을  동시에 받을 수 있었다. 유럽에서 계몽된 유대인들-아브라함 베니쉬(Abraham Benisch)나 몽테피오르(Montefiore), 알버트 코헨(Albert Cohen)등-이 들어온 시기도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해서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점차 터어키의 이집트와의 갈등과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의  건설(1859-1869년)등의 영향으로  팔레스틴은 전체적으로 황폐해 갔으며, 인구도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기간을 틈타 유럽과 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헬쩨(Teodor Herzl)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시온주의(Zionism)  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새로운 이스라엘 건립을 위한 준비를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아가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터어키는 1917년 팔레스틴을 새로운 주인인 영국에게 내어주었으며, 급기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한 활발한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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