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제1차 유대전쟁 (4)

영국신사77 2007. 1. 31. 20:43


티투스의 개선문에서.




  마사다


  73년 시카리파의 엘르아살이 헤롯대왕이 건설한 사해 부근의 높은 절벽으로 된 분지에 군사 요새겸 궁전을 점령합니다.  그 요새의 이름은 마사다였습니다.

 요세푸스는 이요새에 대해 7권8장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잇습니다. 그는 분명 이곳을 방문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록과 실제 이곳의 고고학적 발굴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1.목욕탕, 2.누각 3.거실, 4.건물, 5.뱀의 길입구 6.성벽 7열심당 주거지
8남쪽문 9 지하저수지 10 서쪽궁 11알현실 12서쪽문 13회당 14 대형목욕탕


헤롯대왕은 정상에 50규빗의 망대 37개를 건설했으며

정상의 비옥한 토지를 이용, 경작지를 만들었고 서쪽 경사지에 왕궁과 그 귀퉁이에  60규빗의 4개 망대를, 회랑과 화려한 목욕탕,



돌로된 석주들이 건물을 지탱하며
건물벽과 바닥에는 갖가지 색상의 돌들이 놓여있었다…….

  정상에는  큰 저수지를 만들었습니다. 통로는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 있는데, 동쪽의 통로는 매우 가파르고 구불구불하며, 곳곳에 균열이 있어서 거의 오르기 힘들고, 서쪽의 통로도 거의 노출되어있으며, 망대까지 건설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충분한 생필품이 저장되어있었으며, 만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가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헤롯이 이 요새를 만든 이유는 클레오파트라 7세 때문으로, 항상 그녀가 헤롯대왕을 죽이도록 안토니우스를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로마는 플라비우스 실바가 전임자 바수스의 죽음으로 유대총독으로 부임하고, 마사다의 점령 소식을 듣고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옵니다.  유명한 마사다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실제 요세푸스의 마사다 포위에 대한 기록은 적은 편입니다. 그저 포위방벽을 건설하고,  파성추가 움직일 통로를 만들었다는 것으로 불과 1장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엘르아살의 집단자살에 대한 연설은 조금 길게 기록되어있는데, 몰래 살아남은 두 명의 여인들이 알려줬다고 하지만, 요세푸스의 픽션의 결과물이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림) 윗그림의 A는 포위방벽(또는 토성)으로 6피트정도에 2마일이 넘으며 각 60~80야드마다 탑이 설치되었다.
B는 북서쪽의 사령부이고 C,D,E,F는 각각 감시소와 진지 등이다.


 로마군은 서쪽 통로쪽으로 방벽(기록에는 방벽이나 토성으로 번역될 단어나 쓰여있으나 일종의 도로입니다. ) 만들어 올라갑니다. 이것을 만드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사진을 보시면 대단한 작업이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주변에 아직도 로마군의 진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당시 사용하던 투석용 돌이 그대로 널려있습니다.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이 보통이라 주변의 사암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로마군 진지

  영화에서 처럼 로마군이 유대인들을 노포로 마사다에 쏘아 보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서쪽에 만들어진 파성추 통로

 파성추를 어떻게 그 위까지 밀고 올라갔는지, 대단하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케이블카가 다니거든요.

 


  정상 바로 맡까지 파성추를 밀고 올라간 로마군은, 파성추로 외부성벽을 깨뜨려버립니다.  이때 시카리들은 안에서 목재로 골격을 세우고, 흙으로 속을 메꾸어 충격을 흡수하는 벽을 만들어버림으로써 이에 대처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요타파타에서 즐겨 사용하던 방어법인, 로마군의 공성무기에 불을 질러버립니다.

  그 경사로에서 갑자기 불이 나고 바람까지 로마군 쪽으로 불어버리자, 로마군들은 아주 당황해 합니다. 그런데 이때 유대인의 운명을 결정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그때 갑자기 신의 섭리인양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남쪽으로 불면서 반대방향으로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성벽이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그리하여 성벽은 모두다 철저히 불에 타버렸다.  이리하여 로마군은 신의 도움을 받은 후, 그 다음날 적군을 공격을 하기로 마음먹고 즐겁게 다시 진지로 되돌아갔다. 유대전쟁사 7권8장 5>

  엘르아살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 했다고 합니다.
<신이 분노를 나타내신 것이오………처벌을 적인 로마군에게 심판하게 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 심판하도록 합시다.  유대전쟁사 7권8장6>


  적에게 죽느니, 그리고 살아서 적에게 즐거움을 주느니 죽음을 택하자,  
처음부터 시카리들이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곧 설득되어, 그 일을 그 날밤 실행에 옮깁니다. 먼저 남자들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10명을 제비뽑아, 이들이 나머지 10명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한명이 이들을 죽이고,
모두가 죽은 것을 확인한 후에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몸을 찔러 가족 옆으로 쓰려졌습니다.  그러나 식량은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굶주림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제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도편

  이일을 알려준 사람은 엘르아살의 친척인 여인 하나와 ,나이가 많은 여인 하나, 및 그들의 아이 5명이 지하동굴에 몰래 숨어있어서 죽음을 면했기 떄문이었습니다.

  다음날 로마군들은 요새 안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이들은 분명 10군단 병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처절한 예루살렘 전투를 경험한 이들은, 안으로 들어오면서, 전에 유대인들이 보여준 광기를 알고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함정을 만드는데 유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큰함성을 지르고 여기저기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고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이때 두 여인과 아이5명이 나타나 ,지난밤의 사건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처음부터 믿은 로마군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들은 유대인들의 시체를 보았습니다. 모두 960명이었습니다.
이날은 73년 5월2일이었습니다.

  마사다가 유명하게 된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유대인조차도 마사다의 사건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택한 죽음의 방법이 율법에 극히 위배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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