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청(淸) 옹정제(雍正帝 ) (1)

영국신사77 2007. 1. 20. 23:56
 
           청(淸) 옹정제(雍正帝 ) (1)
 
 
     84. 청(淸)의 발전(發展)(7)

 

           - 옹정제(雍正帝/1722 ~ 35)와 군주독재권(君主獨裁權)


 

                                          가. 팔기(八旗)와 파벌(派閥)

 

베이징의 이궁 이화원  가난했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큰 부자가 되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으로 생각 되지만, 실제로는 바라는것이 더 많아지는게 세상 인심이다.

 

  만주족 역시 보잘 것 없는 사냥꾼에서 일약 중원의 주인자리를 차지하였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잘 살고 보니 필요한 것은 더 많아졌고, 가질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런 경쟁은 관직과 황태자 자리를 둘러싸고 강희제 말년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강희 14년(1675), 22세의 혈기 방장한 젊은 강희제는, 만주 전래의 전통을 깨고 정(正) 황후(皇后) 몸에서 태어난 둘째 아고(황자) 윤잉(胤?)을 황태자로 새우고, 자금성의 동각(동궁)에서 황제 수업을 받도록 하였다. 이때 황태자로 책립된 윤잉의 나이는 겨우 두 살 이었다.

 

  그러다가 황태자의 나이가 36살이 되었던 강희 47년(1708)9월, 이 황태자를 폐위(廢位)했다가 이듬해 3월에는 복위(復位)하고, 황태자의 나이가 40세에 들어섰던 강희 51년(1712) 폐위한 후에는 아예 함안궁에 감금하고, 누구든지 황태자에 관한 이야기는 거론조차 할 수 없도록 엄한 명령을 내렸다. 강희제라는  참다운 명군 아래서 왜 이런 숨바꼭질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물론 그 이유는, 강희제가 조상 전래의 전통을 무시하고, 너무 서둘러 강보에 쌓인 어린 아들을 황태자를 세웠던 것이 잘못이다. 만약 일찍 강희제가 죽기라도 했다면, 이 황태자가 무난히 뒤를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희제는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오랫 동안 황제자리에 있었고, 덩달아 황태자의 나이도 30을 훌쩍 넘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황제나 황태자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권력을 둘러싼 편가르기가 나타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설령 강희제가 일찍 죽었다 해도, 여기에는 또 다른 복잡한 문제들이 숨어 있었다.

 

  이는 각 민족마다 상속제도가 달랐는데, 적장자(嫡長子) 원칙을 고수한 중국의 명나라나 조선의 경우, 적장자가 없으면 적장손(嫡長孫)이 가계(家系)를 이었다. 정실부인 소생의 큰 아들(嫡長子)이 죽으면 그 둘째 아들이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큰 아들의 아들 즉, 장손(長孫)이 대를 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씨족사회의 유풍을 가졌던 만주족은, 가장 실력있는 자를 가려서 추대하는 선거(選擧)제도가 전래의 풍속이었다. 다시 말하면 적자(嫡子)나 장자(長子)라고 해서 특별한 혜택도 없고, 황제라 할지라도 다음 황제가 되는 황태자를 미리 지명할 권리도 없었다. 자격을 갖춘 자가 ,오직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칸(Khan/干,汗, 可汗, 可干)이든 황제든 차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누르하치가 만든 법이다.

 

  태조 누리하치로부터 태종 홍타이지를 거쳐 세조 순치제까지는, 이 제도에 따라 황제자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성천자(聖天子)의 이상에 불탔던 강희제는, 이런 전통에 도전하고 감연히 중국식으로 황태자를 지명했던 것이다. 만주족이 분열되고 조정 관료들의 파당(派黨)을 막기 위한 조치로서 황태자를 지명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나, 결과는 정 반대의 현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런 문제는 너무나 자식들이 많았던 것도 원인 중에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희제는 명의 수녀제(秀女制)를 채택하여 많은 후궁을 둔 결과 35명의 황자(皇子:아고)를 두게 되었고, 만주식 대로 하면 이들 35명 모두가 황제 계승권이 있고, 그 중 누구든지 추대 받는 자가 황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강희제는 그의 사후 황제계승을 둘러 싼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 미리 후계자를 지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만주인들이 볼 때는 확실한 위법(?)이다. 그렇지만 황제의 이런 일방적인 조치에 대해, 처음에는 모두들 입을 다물고 얌전하게 있었다.

 

  그러다가 강희 37년(1698), 다른 여섯 명의 황자들이 작위를 받고 각각 만주족의 기(旗)와 영민(領民)을 거느리게 되자, 잠복했던 여러가지 문제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자를 우두머리로 모신 각 기(旗)의 기인(旗人)들은, 제마다 자기들이 모시고 있는 황자가 훗일 황제가 되기를 바랐으나, 이미 황태자라는 후계자가 지명된 마당에서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황태자를 우선 그 자리에서 끌어 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음모와 비방, 그리고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원래 만주족들은 주종(主從)관계가 명확해서, 아랫사람의 집안 사람은 몇 대를 지나도 그 자손은 주인 집에 충성을 다한다. 비록 주인 집이 쇠락하고 아랫사람의 집안이 흥성(興盛)해도 이 관계만은 변하지 않았고, 기(旗)와 기(旗) 사이를 넘나들지는 못했다. 쉽게 말하면 옛 주인이 비록 곤궁하다 할지라도 이를 배신하지 않고 계속 충성을 바쳤다는 것이며, 옛 주인을 배신하고 새 주인을 찾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라 할지라도 그의 명령이 통하는 것은 자신이 거느린 영민(領民)에 불과하고, 다른 기인(旗人)들은 각기 자신들이 속해 있는 기(旗)의 우두머리에게만 충성하면 그만이었고, 전체적인 단결은 8기의 우두머리인 여러 왕과 황제 사이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서양 중세의 봉건제도하에서,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명령이 통하는 곳은 자기 소유의 장원(莊園)에 불과 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주식 사회에서 정치라는 것도 칸(Khan)을 중심으로 형제, 삼촌, 조카, 그리고 누대의 중신들이 모여서 행하는 합의제였다. 황제라는 것도 이들이 생각하기에는 칸에서 한 단계 위로 올라섰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 이런 만주 귀족들의 생각이 베이징 입성 후 반세기가 지났을 때도 요지부동인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고, 오직 바뀌지 않는것은 이들의 낡은 사고뿐이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 후유증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전통이 이제 와서는 만주족의 핵심 요체인 팔기(八旗)의 내부문제로만 그치지 않고, 관료 층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심각한 정치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즉, 각 기(旗)의 유력자들은 제각기 자기에게 소속된 기(旗)의 출신들을 요직에 앉히기 위해 혈안이 되고, 여기에 중국출신 한인(漢人) 관료들도 끼여 들어, 필사적으로 감투와 권력 쟁탈전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면서, 불꽃 튀기는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 전부가 노리는 것은 중앙의 요직만은 아니다. 오히려 유력한 지방 관직은 이들에게 절대 필요한 돈줄이었다. 명(明)·청(淸) 대의 관료사회에서 정부로부터 받는 녹봉(祿俸)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박봉이었다. 그런데도 관료로 몇 해만 지나면 평생 놀고 먹고도 남을 만큼 큰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권력과 부를 동시에 움켜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것이 전제군주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이다.

 

  어렵게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하고, 일단 진사가 되었다가, 다시 어렵게 지방관에 임명되어 임지에 도착하면, 이들이 하는 중요한 일은 세금을 징수하여 중앙정부에 보내는 일이다. 그런데 정해진 세금을 국고에 보내고 나면, 그 나머지는 어디에 쓰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결국 지방관이란 일종의 세금 청부업자였고, 따라서 토박이로 대대로 그 지방에서 살고 있는 아전들과 짜고 마음껏 백성들의 돈을 뜯어 낸다.

 

  이렇게 돈을 모은 지방관들은 자기가 얻은 상당 부분을 떼어 중앙에 있는 우두머리에게 상납하고, 그 우두머리는 이런 돈으로 다시 그 부하들에게 뿌린다. 베이징에 들어 온 후, 만주 8기병들은 전투에 참가할 기회가 줄어들어서 전쟁 때의 전리품이나 은상(恩賞)을 받을 길이 막히자, 몇 배로 늘어난 씀씀이에 비해서 돈이 늘 부족하였고, 우두머리의 든든한 돈줄만이 이들의 8기인들의 희망이었다.

 

  이런 사정은 우두머리 중의 우두머리인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강희제 자신도 좋은 지방관의 자리는 직계 부하에게 맡겨서 부지런히 돈을 모아 오게했다. 그 중에서도 당시 가장 든든한 돈줄은 강녕직조(江寧織造)라는 자리로서, 그책임자 조인(曹寅)은 부지런히 돈을 모아서 황제에게 많은 돈을 바쳤다.

 

  강녕이란 남경(南京/난징)을 말하며, 직조란 궁중에 조달하기 위해서 명주실로 짠 옷감 일체를 조달하는 관직이다. 강희제가 여섯 번이나 남쪽지방을 순회했을 때, 남경에서는 대부분 조인의 집에서 묵었다고 하는데, 황제 일행을 부담없이 맞이할 정도로 그 자신도 부유했다.

 

  조인의 손자 조점(曹霑/曹雪芹)은 청대에 쓰여진 세계적인 소설 홍루몽(紅樓夢)의 작가로서, 주인공 가보옥(賈寶玉)은 자신을 소설 속에 등장시킨 것이며, 이런 사실은 석두기(石頭記) 금옥연(金玉緣)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라고도 하는 이 소설에 대해서 근대 이후, 호적(胡適/후스)·유평백(兪平伯위핑보) 등이 이 작품은 조설근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결론을 내려 더욱 분명해 졌다. 소설의 내용만큼이나 이들의 생활이 호화 찬란했던 것이다.

 

  어쩻든 황태자로 지명된 제 2 아고 윤잉은 ,자라면서 훌륭한 기량을 닦아 강희제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렇듯 권력 쟁탈전에 혈안이 되어 있는 마당에, 앞에서 말한 대로 강희제는 다시 6명의 황자에게 작위를 주고, 기(旗)의 우두머리인 패륵(貝勒/베이레)으로 삼아, 영민들은 다스리게 했고, 새로이 황자를 업은 기인들이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황태자가 설 땅은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이런 소용돌이는 결국 청나라 조정 자체를 황태자파와 반황태자파로 갈라지게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물론 황태자 자신이었고, 그에게 조그마한 허물만 있어도 우선 형제들부터 물고 늘어졌다.

 

  강희 42년(1703년)에는 황태자 지지파들이 실각하게 되고, 반황태자파에 가담하고 있던 남서방 학자들까지 가세하여 모략과 중상을 일삼게 되자, 설 땅을 잃은 황태자는 이상한 행동까지 보이기 시작했고, 이런 황태자의 행동에 강희제 자신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자신을 해칠 뜻이 있다고 부쩍 의심을 품게 된 것이다.

 

  강희 47년(1708년) 내몽고 순회 중, 강희제는 느닷없이 여러 왕과 각료 등 문무백관을 천막 앞에 소집하고, 황태자를 어전에 꿇어 앉힌 다음 조목조목 힐책(詰責)하기 시작했는데, 황태자가 자기를 해치기 위해 밤마다 천막안을 기웃거린다는 것이며, 이런 불충 불효한 자식에게 조상의 유산을 물려 줄 수없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그리고는 분을 참지 못한 강희제가, 통곡하며 땅바닥에 떼굴떼굴 굴렀다고 한다.

 

  그래서 그 해 9월 황태자를 폐위하자, 제 1아고 윤시(胤? )는 이를 기다렸다는 듯, 즉각 제 8 아고를 황태자 후보로 추천했고, 조정 중신들도 일제히 이에 따랐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강희제도 반황태자파의 모략과 음모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알았고, 이런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즉시 제 1 아고와 제 8 아고의 작위와 기를 빼앗고, 이듬해 3월 황태자를 복위시켰다. 여러 자식들에게 기(旗)를 세분하여 세력균형을 유지코자 했으나, 이것이 반황태자파라는 연합세력을 형성하는 결과만 초래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복위된 황태자를 두고 다시 음해가 꼬리를 이었다.

 

  지칠대로 지친 황제는, 강희 51년(1712) 다시 황태자를 폐위하고 함안궁에 감금했고, 이런 것이 전례가 되어 이후 청나라는 망할 때까지 한 번도 황태자를 세운 적이 없었다.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던 강희제도, 중국의 풍속으로 집안을 다스리는데는 쓰라린 가슴만 아픈 상처로 남겼을 뿐 결국 실패했다. 옥(玉)에도티가 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왕으로서의 아버지가 오래 살면, 그 아들인 태자는 어떤 형태로든 피해를 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조선의 21대 임금 영조는 84살까지 살았는데, 31살에 왕위에 올랐으니까 재위 기간이 53년이나 된다. 이유야 어쨌든 그의 아들 사도세자는 28살에 아버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기록상 가장 오래 살았던 왕은 고구려 6대 임금 태조왕(太祖王/高宮)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47년에 태어나서 165년에 죽었다고 하니까 119살을 살았고, 7살에 왕이 되었다가 101 살이 되어서야 76살의 같은 어머니 몸에서 태어난 동생(同母弟) 수성(遂成/次大王)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니까, 재위 기간만도 무려94년이 된다. 그러나 이 기록은 너무 오래전의 것이기에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역시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長壽王/巨連)은 그 시호가 말해주듯 98살을 살았고, 왕위를 차지한 햇수(在位期間) 만도 79년이나 된다. 아버지가 오래사는 바람에 그 아들 조다(助多)는 임금 노릇 한 번 못해보고 죽어서 쪼다 같은 사람이 되었고, 임금 자리는 그의 아들(文咨王)이 이었다. 이런 것은 오래전의 이야기고 대개의 임금들은 50 나이를 잘 못 넘긴다.

 

 

                       나. 옹정제의 독재 군주권 확립

 

                           (1) 의문 속의 황제 즉위

 

옹정제의 초상화  강희 61년(1722) 11월, 사냥 길에서 돌아오던 강희제가 베이징 서북 근교 장춘원 이궁에서 감기에 걸려 열이 심하게 나더니, 며칠후 보군통령(步軍統領) 융과다(隆科多/련고도) 한 사람만 지켜 보는 가운데 이 달 14일 죽음에 이르렀다.

 

  베이징과 이곳 이궁의 경찰권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융과다는, 강희제의 시신을 모시고 전속력으로 달려 베이징에 돌아 와서는, 지체없이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자금성의 문을 모조리 봉쇄한 후, 자기의 허락 없이는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 주지 말라는 엄명을 부하들에게 내렸다.

 

  이렇게 황자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입궐을 막은 융과다는, 그 이튿날인 15일, 즉시 제 4황자인 윤진(胤 ?)을 궁중으로 모셔와서 "제 4황자는 인격도 훌륭하고, 마땅히 황제 자리를 이을 만 하다"는 이른바 강희제의 유조(遺詔)라는 걸 발표하였다.

 

  20일에는 비상경계령이 풀리고, 21일에 제 4황자가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여 청나라 5대 황제가 탄생하였는데, 이가 곧 세종(世宗) 옹정제(雍正帝/1678 ~ 1735)로서, 때의 나이 45세의 장년이었다.

 

  말썽 많던 후계자 자리가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제4황자에게 돌아 갔을 때, 세간에서는 별의 별 소문이 나돌았다. 강희제의 유언이라면 누가 보더라도 당연히 제 14황자인 윤제(胤 ?)의 몫이라고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만큼 14황자가 강희제의 사랑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질과 기량 또한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문은 소문일 뿐, 융과다는 사천(四川)과 섬서(陝西)의 총독 연갱요(年羹堯)와 손을 잡고 자기들의 보스인 제 4황자를 황제로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막강한 군권(軍權)을 쥐고 있던 제 14황자는 연갱요의 감시하에 꿈적도 할 수 없었다.

 

  막상 황제 자리에 오른 옹정제로서는, 힘없는 아고에 불과할 뿐 실권은 이들 두 사람의 손아귀에서 놀고 있었다. 결국 옹정제도 만주의 풍속대로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을 잡지 않으면 안되었다.

 

 

 

                         (2) 냉혹한 황제 독재권의 확립

 

  옹정제가 아버지 강희제로부터 광대한 영토와 동시에, 이미 중국화가 진행되고 있는 청나라 조정의 나약함을 유산으로 물려 받았다. 당연히 주인 행세를 해야 될 만주인들은, 중국에 동화되고 자취조차 없이 묻혀버릴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강희제의 중국화 정책은 질박 강건한 만주인들에게, 향락과 사치에 물들게 만들었고, 모국어인 만주어보다는 베이징 관화(官話)를 중국인들보다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만주인들이 늘어났다. 다이곤에게 발탁되어 내각수보로 기용되었던 김지준이 뿌린 씨앗에 싹이 돋기 시작한 것이다.

 

  한줌밖에 안되는 만주인들이, 유학에 심취되고 중국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막는데 옹정제는 13년의 재위기간을 걸었다. 그러기 위해서 절대 독재권력이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 주변부터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우직하다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만주인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면 동시에 종족자체도 사라진다는 것을 옹정제는 가슴깊이 새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섣불리 중국사람을 흉내 내고 멋이라도 잘못 부렸다가는, 문화적으로 취약한 그들 전체가 뿌리 채 뽑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옹정제는 독재권을 확립하기 위해 칼을 뽑아 들었다. 우선 강희 말년 이래 누적된 당파를 일신하기 위해 붕당론(朋黨論)을 발표하고,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말썽을 부렸던 34명의 형제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숙청이라는 칼날을 형제들부터 겨누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 물망에 올랐던 제 14황자를 전선에서 소환하여 조상의 묘지기로 격하시키고, 제 8왕자와 그 아우는 옥에 가두고 개와 돼지라는 뜻의 만주이름을 하사하고 서민으로 강등시켰다. 계속해서 그는 오직 자기에게 충실했던 동생 하나만을 남기고, 다른 형제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왕족들의 8기의 영유권도 몰수해 버렸다.

 

  이때 8기군은 상삼기(上三旗)와 하오기(下五旗)로 가르고, 상삼기(上三旗)는 황제의 직속 친위부대가 되어 있었으며, 하오기(下五旗)는 왕족의 영유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오기(下五旗)를 거느린 왕족은 자기 지배하의 기인들을 사병처럼 부리고, 그들 또한 왕을 그들의 주인으로 모시며 충성을 다 바쳤는데, 이런 제도를 개혁함으로서 모든 8기의 군인들을 비로소 황제가 직접 장악하고, 동시에 개개의 만주인까지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때부터 만주인들은 황제를 자기들의 지배자, 즉 절대군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융과다와 연갱요 두 사람은 옹정제를 세우는데 절대적 역할을 맡았던 일등 공신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있는 한 소신껏 개혁을 마무리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옹정제는 이들을 제거할 계획을 수립하고, 파격적으로 그들을 대우해 주어 스스로 부정의 길에 빠져들도록 유도하였다.

 

  황제가 이들을 제거할 명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때, 연갱요에게는 92가지의 죄목을 덮어 씌우고, 연갱요와 그의 아들, 손자, 형제,사촌, 조카 중 16세 이상은 모조리 사형에 처하고, 15세 이하의 남자와 며느리를 포함한 모든 여자들은 노예로 삼아 버렸다. 융과다 역시 같은 신세가 되어, 옥에 갇혀 평생을 보내야만 했다.

 

                                   (3) 만주 8기 씨족 통보

 

  성리학에 심취했던 강희제는 일찍부터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했고, 그 효도의 귀결점은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조상과 가문을 빛내는데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가문의 내력을 밝히는 족보(族譜)가 필요하다.

 

  족보를 만드는 일은 박식한 중국인 학자들이 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돈만 주면 그 취향에 따라 요(堯)나 순(舜), 공자의 자손 등으로 둔갑시키고 빈틈없이 만들어 준다. 이런 가짜 투성이의 족보를, 만주 출신 귀족들도 다투어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놀란 것은 옹정제였다. 만주인들이 일치 단결하여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씨족사회의 밑바탕이 이를 지탱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씩씩한 기마무예와 단순 질박한 씨족을 바탕으로, 각각의 족장들은 그들 위에 있는 대족장, 즉 칸에게 충성을 바침으로서 국가라는 큰 틀을 유지할 수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족보를 만들어 씨족이 작은 단위로 세분하여 가족 단위로 나아가면, 독립된 가족단위는 자기들만이 안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마련이고, 이는 결국 씨족 전체의 단결을 와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문안 인사나 들이고, 장유유서라는 자질구레한 의례에 묶이다 보면, 어느새 강건한 기상은 사라지고 나약해 지게 된다. 만주족의 단결과 국민성이 나약해 지는 효도가 옹정제는 싫었다.

 

  그러나 이미 조법(祖法)에 묶인 효도를 금지할 순 없었다. 그래서 친히 만주 전원의 씨족 계보를 만들어 이것을 구성원들에게 배포하였는데, 이것이 만주팔기 씨족통보(滿洲八旗氏族通譜)라는 것이다.

 

  옹정제 자신 그 서문에서 밝히기를 "가보(家譜)란 허영에서 나온 타락한 중국 사상의 산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며,....이 책으로 만주족 본래의 씨족제를 확인하라"고 타이르는 한편, 강희제가 동경하던 중국 가족제도의 모방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국가안보의 핵심을 팔기의 충성심과 우직한 힘에서 찾고자 했다.

 

  한편으로는 방치된 만주전래의 토속신앙을 부활시켜, 각각의 가정에는 제단(祭壇)을 만들게 하고, 씨족공동의 솟대(神杆)를 세워 제사에 참여케 하므로써 전 만주족을 단결시키고자 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청나라 황실의 성씨인 애신각라(愛新覺羅)를 풀이하면, 애신(愛新)은 김(金)을 뜻하고 각라(覺羅)는 족(族)을 의미하는 것이라고하는데, 이는 곧 신라 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조상은 조선에서 건너간 사람이 된다. 실제로 청나라 멸망 후, 많은 황족들은 성을 김(金)씨로 하였고, 지금 중국인들의 성씨 중 김(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이들의 후예가 많다고 한다.

 

  족보(族譜)란 부계(父系) 중심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도식(圖式)으로 나타낸 한 종족의 계보(系譜)를 말하는데, 족보의 원조는 물론 중국이고, 중국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 후 1세기 경인 후한(後漢) 때부터라고 한다.

 

  이것이 6조 시대(220 ~ 589)의 귀족사회 형성과 맞물려, 보학(譜學)이라는 족보학문이 새로이 나타났는데, 족보라면 단연 조선왕조의 사대부들이 기를 쓰고 만들고 지킨 것으로, 그 명성은 세계에서 으뜸이었다.

 

  양반은 군포를 면제받고 많은 특전이 부여된 조선사회에서, 양반신분임을 밝히는 유일한 증명서가 족보였다. 그래서 난리라도 나면 족보를 신주(神主) 이상으로 모시고 다녀야만 했지만, 상민이 양반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족보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유로 가짜도 대단히 많았다.

 

  이런 족보가 고려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없다. 오늘날까지 전해진 족보를 기준으로 본다면,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 진 것은 두 서너 개에 불과하고, 그 외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중심으로 사회가 재통합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보첩(譜牒)·세보(世譜)·세계(世系)·가승(家乘)·가첩(家牒)·가보(家譜)·성보(姓譜)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족보는, 존비(尊卑)·항렬(行列)·적서(嫡庶)의 구별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족보라고 하면 이른바 종보(宗譜)인 대동보(大同譜)를 말하고, 여기에서 분파된 일단(一團)의 세계(世系)에 대해서 기록한 것을 지보(支譜) 혹은 파보(派譜)라고 부른다.

 

  지금도 우리사회에서는 과거의 양반중심 사회가 잘못 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은 상놈이라 불렀던 상민의 후예가 아니라 그 잘못된 양반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중적 풍조가 강하게 남아 있고, 족보 또한 각 문중마다 열심히 펴내고 있다.


 

 

 

                                                출처: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  |  글쓴이 : 이길상 원글보기

 

 

 

 

 

 

 

 

    85. 청(淸)의 발전(發展)(4) - 문자(文字)의 옥(獄)

 

 

                        가. 문자(文字)의 옥(獄)                          이길상

 

강남의 운하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漢族)지배를 위해 청나라가 짜낸 아이디어 중 단연 백미(白眉)라면 외형상으로는 호복변발이었고,

내면적으로는 심한 사상통제를 들 수 있다.

 

  오랑캐를 보고 오랑캐라 불렀다고 해서 죄가 될 것은 없다. 다만 이것은 힘없는 오랑캐에게나 통하는 것이고, 그 오랑캐가 주인이 되었어도 계속 오랑캐라 한다면 어느 주인인들 계속 듣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옹정제는 이 말이 무척 싫었고, 중국적인 화이(華夷)사상에는 심한 거부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채택한 강(强)·온(溫)양대 정책은 그런데로 잘 먹혀 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강남(江南)이라 부르는 양쯔강 남쪽 지방인 안휘(安徽/안후이), 강소(江蘇/장수), 그리고 절강(折江/저장)과 복건(福建/푸젠)성(省)은, 예로부터 중화의 자존심이 어느 곳보다 높은 곳이다.

 

  특히 평야와 산지와 해안선이 동시에 발달한 절강성은, 명나라 초기 영락제에게 끝까지 항거한 방효유와, 명나라의 멸망 후 스스로 굶어서 순국(殉國)한 유종주(劉宗周)를 비롯해서 지조(志操)있는 선비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며, 호복변발에 대해서도 완강하게 저항하고 1년 이상 머리를 깎지 않고 버티기도 했던 외곬스러운 고장으로, 문자(文字) 옥(獄)이라는 사단(事端) 역시 여기에서 시작된다.

 

  옹정 7년(1729년), 남송시대의 충신 악비(岳飛/1103~ 1141)의 21세 후손인 악종기(岳鍾琪)라는 자가, 당시 청나라의 천·섬(四川성과 陝西성)총독으로 있었는데, 시골 선비인 증정(曾靜)이란 자가 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고 그를 힐난(詰難)하였다.

 

  "...악비의 자손이라면 마땅히 선조를 본받아서 오랑캐인 청나라 조정을 타도해야 될 것이 아닌가....." 이런 편지를 받고 혼비백산한 악비는 증정을 잡아 두고, 베이징에 이를 고발했다. 조사 결과 이런 증정의 사상은 절강 출신의 성리학자 여유량(呂留良 / 1629~ 1683)의 저서에서 배운 것이 판명되었다.

 

  옹정제는 이 증정이라는 시골 선비를 불려 들여 청나라 조정을 비난하는 27가지를 진술케 하고, 이적(夷狄)과 중화(中華)를 구분하는 중국적 민족주의를 신랄(辛辣)하게 비판하였는데, 이름 없는 한 시골 선비가 머리가 뛰어나고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옹정제의 해박한 지식과 조리 정연한 논리에 당할 재간이 없었다.

 

  결국 그는 옹정제에게 인간적·학문적으로 설복당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반성했다. 이런 과정을 옹정제는 책으로 엮어 편찬하고 관료나 독서인들에게 반드시 읽도록 하였는데, 이 책이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라는 것이다.

 

  옹정제는 천하를 떠들썩하게 했던 장본인 증정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죄 방면했다. 그러나 여유량 일족에게는 엄벌을 내려, 이미 죽은 그의 묘를 파헤치고, 시신(屍身)의 목을 자르고, 아들을 참형에 처했다.

 

  여유량의 처형은 글줄이나 읽었다는 선비들 중, 청조(淸朝)를 희롱(戱弄)하거나 고고한 양 비웃음을 일삼는 무리들에게는 가혹하게 처벌 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며, 그후 실제로 많은 선비들이 처벌을 받았는데, 이를 "문자(文字)의옥(獄)"이라 한다.

 

  이런 청조의 사상 탄압은 이후에도 계속 조절  수위를 높여, 변경이나 군사문제를 연구하는 서적, 또는 이적(夷狄)을 비난하고 명나라를 칭송하는 일체의 비평서를 금서(禁書)로 확대 지정하고, 이를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읽거나 소지한 것만으로도 참형에 처하는 탄압을 가중했다.

 

  건륭(乾隆)·가경(嘉慶) 연간에는 금서목록이 무려2,320 종이나 지정되고, 붓 끝 하나 까딱 잘못 놀렸다가는 자신은 물론, 그 화(禍)가 일가친척, 스승이나 친구에게까지 미치게 되자, 사람들은 아주 먼 옛날의 고사(古史)를 섭렵(涉獵)하고 그것도 확실한 논거(論據)에 의해서만 붓을 들었다.

 

  이런 사정으로 청대에 발달했다는 고증학(考證學)도, 처음에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용적인 학문으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훈고학(訓古學)적인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게 되고, 청 말에 이르러 더욱 발달한 공양학에 만족해야 했을 뿐, 더 이상의 사상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나. 관(官)·리(吏)와 과거제도(科擧制度)

 

                          (1) 과거제도(科擧制度)

 

  전제군주 독재하에서 관리(官吏)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모든 것을 곧이 곳대로 하면(법대로 하면), 되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융통성과 인정머리 없다는 인격적인 비난까지 덮어쓴다. 그렇다고 적당히 하면, 뇌물(賂物)이라는 함정에 빠져 헤어나기가 힘들어 진다.

 

  법이라는 그물(網)로 겹겹이 둘러싸여 빠져나갈 구멍이 좁은 사회일수록, 청렴한 관리보다는 대충 얼렁뚱땅 일을 처리하고, 일의 경중(輕重)에 따라 적당한 사례도 챙기는 편이, 인정도 있어 보이고 인간미도 풍부한 것처럼 일반인들은 느끼게 된다.

 

  어차피 관리란 악인(惡人)들이고, 이런 악인들에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선에서 뇌물을 바치는 것이 득(得)이 된다는것을 중국인들은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꼬치꼬치 캐묻고 되는 일도 안되게 만들며, 법과 규정을 앞세워 생사람 잡는 정직한 관리보다는, 뇌물을 받고 눈감아 주는 부정한 관리가 그래도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관리(官吏)라고 하지만, 관(官)과 리(吏)의 세계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서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쉽게 말하면 관(官)은 황제가 임명하고, 수도와 지방, 지방과 지방사이를 옮겨 다녀야 하기 때문에 유관(流官)이라고도 하고, 리(吏)는 임명권자가 없으며 대대로 한 곳에 머물러 살면서 세습으로 실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관료(官僚)라고 통칭되는 관(官)은 국가의 정책결정이나, 그 수행에 참여하며, 이들이 봉사(奉仕)의 반대급부로 국가로부터 받는 대가를 녹(祿)이라 했고, 그래서 이름도 녹봉(祿俸) 혹은 봉급(俸給)이라 한다.

 

  반면 리(吏)는 서리(胥吏), 이속(吏屬), 아전(衙前)이라 하여 관료 밑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관원(館員)을 총칭하는 말로서, 이들에게 정책의 결정이나 집행권은 없고, 실무처리를 위한 단순 사무에 종사하며, 이들이 받는 것을 료(料)라 하여 록(祿)과 구분하였으며, 그 이름도 방료(放料) 혹은 급료(給料)라고 하나 통상적으로는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는 일종의 무보수(無報酬) 직(職)이다.

 

  관(官)이 되기 위한 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정식 과정으로는 그 어려운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어 먼저 자격을 얻고, 다시 보직(補職)을 받고 임명(任命)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래서 과거급제 후에도 온갖 연줄을 찾아 뇌물과 청탁이라는 높고도 험한 고개를 다시 넘어야 한다.

 

  과거제도가 수·당에서 시작하여 누대를 거치면서 많이 변화되었는데, 명, 청 시대에 그 경쟁이 더욱 치열하고, 지원자가 너무 많아지자 아예 응시자격을 제한하여 중앙과 지방 학교의 학생인 감생(監生)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때문에 학교에서는 정원보다 훨씬 많은 지원자가 몰려들고, 이를 가리기 위해 동시(童試)라는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여기서부터 경쟁이 치열하여 요즘 말로하면 재수(再修) 삼수(三修)는 기본이고, 고액과외(高額課外)까지 등장하였다.

 

  이들 예비학생 전부를 나이에 관계없이 동생(童生)이라고 불렀고, 입시(入試)에 통과하여 감생(학생)이 되어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면 과거시험의 자격을 주었다. 입시를 위한 과외의 원조(元祖)는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나그네로 중국에 들어왔던 청(淸)나라는, 말 많은 선비들을 과거라는 굴레에 얽어매기 위해서, 이들 감생(監生) 에게 현시(縣試), 부시(府試), 원시(院試) 등의 단계를 두고 더욱 복잡하게 제도를 만들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면, 다시 본 시험을 치러야 했다.

 

  과거의 본시험에도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복잡한 3단계를 거쳐, 최종 통과 자에게 진사(進士)라는 칭호를 수여하였고, 그들은 고급관리에 임용되는 자격을 얻게 된다. 그렇다고 합격자  전부가 관료로 임용되는것은 아니다.

 

  청대에 전체 과거 합격자 수는 110만 명 정도나 되었고, 그 중에서 관료로 임용된 사람은 2만 7천명 정도라고 한다.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옹정제는 이런 과거제도 역시 몹시 싫어했다. 만주인들이 아무리 잘 해도 3등 이내에 들어가는 갑과에는 아예 넣어 주질 않았다. 학문이라는 건 젊잔만 빼는 중국인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고, 말이나 타고 사냥이나 하는 만주인들에게는 개발에 편자 같이 격에 맞지 않는 다는 것이 옹정제의 생각이었다.

 

  과거에 관한 조선왕조의 제도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 그 많은 내용을 여기서다 설명할 수는 없고, 다만 우리들이 간과하기 쉬운 한 두 가지만 소개코자 한다.

 

물론 과거의 으뜸은 문과가 되고, 여러 형태로 치렀던 대과(大科)에서 최종 합격자를 갑과(甲科) 3명, 을과(乙科) 7명, 병과(丙科) 23명등 모두 33명을 뽑았는데, 여기에서 갑과, 을과, 병과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종류가 아니고 합격자를 성적순으로 매긴 것이다.

 

  갑과의 1등을 장원(壯元)이라 하고, 2등을 방안(榜眼), 3등을 탐화(探花)라 했는데, 장원은 종6품에, 방안과 탐화는 정7품의 품계를 받고 해당 직에 임명될 자격을 얻었으며, 을과는 정 8품 이하, 병과의 합격자는 정9품에 서임될 수 있는 자격은 있으나, 실제로 임용되기는 몹시 어려웠다.

 

  그런가 하면, 국왕이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왕명으로 바로 임명하는 제수(除授)라는 것도 있었고, 전곡(錢穀)을 바치고 보직없이 명예 관직만을 얻는 공명첩(空名帖)이라는 것도 있었으며, 조상의 덕으로 벼슬 길에 오르는 음직(蔭職)도있었다. 品(정1품), 階(숭록대부), 司(의정부), 職(영의정), 名(아무개)의 순으로 기재된 사령장에는 4품 이상은 국왕의 옥쇄를 찍고 교지(敎旨)라 하였으며, 5품 이하는이조(吏曹)의 관인을 찍고 첩지(牒紙)라 하였다.

 

  임진란 전후 이름을 떨쳤고,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사람들 중, 이이(율곡)는 아홉 번이나 대과에서 장원을 했고, 정철(송강)도 장원으로 대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이황(퇴계)과 이덕형(한음)은 을과로 유성룡(서애)과 이항복(백사), 권율(만취당)은 병과로 합격하였고, 유명한 이순신은 문과 아닌 식년무과에서, 그것도 나이 32세가 되어서야 병과로 합격하였다.

 

  근대 이전,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잘했다는 것만큼 자랑스러운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 공부가 출세(?)하는 것과 반드시 정비례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공부 잘했다고 교만하면, 임용에서부터 승진까지 행운은 점점 멀어지는 것이 세상 이치며, 이런 것은 지금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2) 청대의 관(官)·리(吏)

 

  대개의 초임관료는 지방관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이 지방으로 내려갈 때, 막빈(幕賓)이라는 실무 담당 비서를 채용한다. 과거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실무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기에 교양만 높을 뿐 그야말로 세상 일에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최소한 문서담당, 법률담당, 회계담당 등 전문가를 비서 겸 고문으로 채용하고 이들의 가족과 본인의 처첩(妻妾)을 포함, 수십명의 식솔(食率)을 거느리고 임지로 향하고 그 비용 또한 만만 치가 않다. 물론 비용은 한푼도 지급되는 것이 없고, 본인의 봉급이라는 것도 형편 없는 액수다.

 

  이재(理財)에는 귀신같은 중국인들이라, 이들에게 부임 비용을 빌려주는 직종이 생겨 성황을 이루었다. 즉 임지에 따라 등급을 정해 두었다가, 미리 정해진 돈을 빌려주고 후일 이자를 곱해서 받았다.

 

  그렇다면 이들 관료가 어떻게 그 많은 식솔과 개인비서 까지 고용하고도, 3년 임기만 채우면 평생 놀고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비밀은 무엇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른바 세금이라는 합법을 가장한 수탈이다.

 

  지방관은 상피제(相避制)라 하여, 본인의 출신지에는 원칙적으로 보내지 않는다. 따라서 생소한 임지에 도착하면, 그곳에는 터줏대감으로 아전으로 불리기도 했던 서리(胥吏)들이 진을 치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 서리들은 누대에 걸쳐 한 지방의 행정실무를 관장했기 때문에, 그 곳 사정은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 환하다. 그리고 이들의 조직은 철벽보다 더 두터워서, 왕조가 교체되어도 이들 사회가 동요되거나 직접적인 변화는 없다.

 

  일찍이 저 김지준이 만든 열 가지 조건 중에서도 "관료는 따르되 아전은 제외"라고 아예 못을 박아 두기도 했고, 또 황제가 임명한 황제의 신하가 아니기 때문에, 눈치코치 볼 것 없이 새로 부임해 온 관료와 짜고 세금 횡령을 밥 먹듯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인들이 청나라 정부에 부담하는 의무는 세금뿐이다. 베이징 정부에서 일 년 세액을 정하고 각 성으로 할당하면, 각성에서는 다시 부(府), 주(州), 현(縣)으로 할당한다.

 

  할당을 받은 이들 관서에서는 이 국세만은 꼬박꼬박 한푼 어림없이 챙겨서 중앙으로 보내고, 남으면 화모(火耗)라 하여 지방관아의 비용에 충당했다. 그것만으로 지방관아의 비용이 모자라면, 약간의 부가세를 징수하는 것을 묵인해 주었다. 여기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꼴은 이를 두고 생긴 말인지도 모를 정도로 이 부과세가 엄청나게 많았고 부정을 은폐하기 위해서 장부 하나는 기가막히게 빈틈 없이 꾸며두었다.

 

  이런 합법을 가장한 일종의 세금 횡령 도둑(?)들이 도사리고 있는 한, 자금성의 황제가 아무리 선정(善政)을 베풀어도 그 혜택이 일반백성들에게 까지 미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희제가 그의 치세기간 1억 냥의 감세조치를 취했으나, 백성들이 이를 피부로 느끼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이런 관리조직이 중간에 끼여 있는 한, 옹정제의 정치개혁도 성공을 거두기가 어렵다. 그래서 옹정제는 이 부과세를 양성화하고, 관료들에게는 양렴전(養廉錢/養廉銀)이라 하여, 일종의 청렴(淸廉)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했다. 먹고 살만큼 봉급을 주겠으니, 부정을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혁을 하려면, 정보(情報)가 있어야 한다. 명나라에서는 동창(東廠)이라는 걸 만들어 환관들에게 정보를 수집케 했으나, 청나라는 역시 저 김지준이 만든 법에 따라 환관은 궁성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옹정제는 전국 요소에 배치한 만주8기를 중요 정보 원(源)으로 활용했고, 이들의 정보에 따라 많은 관료들을 처벌했다. 적발한 이들 밀정에게는 어떤 책임도 없으며, 모든 책임은 황제에게 있었다. 부정으로 소문난 관료는 진위(眞僞)에 관계없이 소문만으로도 처벌했는데, 이는 소문을 낸 자체가 관료로서는 자질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서리들에게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들은 황제가 임명한 관료가 아니기 때문에 급료(給料)를 지급할 수도 없었으며, 김지준이 만든 조법(祖法) 또한 이를 허용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정복왕조인 청조의 한계였고, 결과적으로 화모라는 일종의 부과세를 없애지는 못하였다.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같지만, 봉사직으로 분류된 작금의 직업 공무원(公務員 / public servant) 가운데 자기의 직급이 옛날 같으면 어디에 해당되는 가를 묻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몇 대조가 무슨 벼슬을 했는데, 지금으로 가늠하면 어떤 직위에 해당되는 가를 물어 오기도 한다.

 

  행정직의 경우에는 9급에서 1급까지 직급이 분명해서 그래도 어느 정도 비교가 가능하지만, 교육공무원을 비롯하여 법관, 검찰, 경찰, 군인, 소방, 교정 등 수많은 직종은 비교 자체가 분명치 못하고 옛 방식의 관(官)·리(吏)의 구분도 매우 애매 모호하다.

 

  군대에서는 장교를 사관(士官)이라 하고, 졸병(卒兵)보다 높으나 장교보다 낮은 하사(下士)를 하사관으로 부르다가 하(下)자가 마음에 걸린다해서 부(副)자로 고치고 부사관이라고 정정했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옛날 같으면 자기 직급에 관(官)자가 붙는다면 대단한 지위라 할 수 있다.

 

  같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관학교에서 4년을 이수하여 군의 소위가 되는 것을 임관(任官)이라 하고, 경찰학교를 나와 경위의 계급장을 다는 것을 임명(任命)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무 생각 없이 부르는 경찰관, 소방관, 교도관, 감독관 등에 포함된 관(官)의 의미는 무엇인가? 직급이라기 보다는 이들 직책이 고유명사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이(吏)가 되기는 싫어서 경찰리, 소방리, 교사리, 하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옛부터 청백리(淸白吏) 할 때는 관(官) 대신 리(吏)로 썼는데, 이것 또한 청관백리를 줄여서 그렇게 불렀을 뿐이고 리를 높인 것은 아니다.

 

 

                     다. 군기처(軍機處)의 설치와 활용

 

자금성의 용 부조물, 200톤의 대리석에 9 마리의 용을 조각.  소위 문자의 옥이라고 부르는 증정의 사건으로 한 창 시끄러울 때, 서북변경에서는 새로운 전운(戰雲)이 맴돌기 시작했다.

 

  강희제에게 패하여 무너졌던 중가르부에서, 갈단의 손자가 알타이와 쿤륜산맥을 넘고 티베트의 수도 라싸를 점령하는 일이 생겼다.

 

  이에 옹정제는 친히 이를 대처하기 위해서 최고 전략(戰略)통수부(統帥府)라고 할 수 있는 군기방(軍機房)을 설치하고 친히 작전을 수행했다.

 

  군기방에는 황제가 신임하는 만주인, 중국인, 몽골인 출신의 관료를 선발하여 군기대신이라 부르고 이들을 상주시켰는데, 중국에서 관료에게 대신(大臣)이라는 명칭을 쓰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소수 정예로 구성된 군기방은, 내각의 각료까지도 접근이나 내왕을 엄금해서 기밀의 누설을 철저하게 막았다. 군기대신들은 황제가 구술(口述)하는 내용을 문서로 작성해서 밀봉한 후, 전령기병인 기발(騎撥)을 시켜 전선으로 신속히 보냈다.

 

  자금성에 앉아서 황제가 직접 군의 통수권을 행사한것이다. 이를 통해서 옹정제가 새삼스럽게 느낀 것은 청나라는, 역시 정복왕조라는 것이고, 이런 정복왕조는 상시 비상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생겼다.

 

  그래서 티베트의 사정이 호전된 후에도 이를 해산하지 않고, 오히려 군기처로 격상시켜 황제의 새로운 손발로 만들었다. 청의 제도는 명의 제도를 복사한 것과 다름 없어서, 황제의 명령은 내각이 작성하여 이를 각처의 관아에 보내면, 관료는 다시 문서로 작성하여 역으로 내각을 거쳐 황제의 손에 들어온다. 이 과정에서 황제의 명령이 변질된 요소는 다분히 있었던 것이다.

 

  군기처에서 나간 명령은 곧 바로 지방관에게 전달되고 그 답신도 곧 바로 군기처에 접수되어 황제에게 직배되었다. 그 신속 정확 함이란 내각을 거치는 것 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에서도 뛰어났다.

 

  이 군기처에서 보내는 황제의 명령을 정기(廷寄)라 하여, 내각에서 보내는 상유(上諭)와는 달리 취급했다. 정기의 내용은 내각 대학사나 6부 상서도 모르고 있었고, 이런 명령계통의 일대 변혁으로 옹정제는 정복왕조를 이끌어 갔다. 강희제가 남서방 정치를 했다면, 옹정제는 군기처 정치를 한 셈이다.

 

  옹정제는 수렵민의 체질 답게 아침이면 4시에 기상해서 정무를 끝낸 후, 저녁에는 자신의 서재에서 각처의 지방관이 보낸 보고서를 일일이 점검하고, 붉은 글씨로 비평을 써서 발신인에게 지시와 훈계를 내린 후 자정이 지내서야 침소에 들었다고 한다.

 

  지방관이 황제에게 보낸 친전장(親展狀)을 주접(奏摺)이라 하고, 이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 보고 붉은 글씨(朱筆)로 일일이 평가와 비판을 가해 본인에게 돌려 보낸 것을 주비유지(朱批諭旨)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책으로 엮어 편찬한 것이 저 유명한 옹정주비유지(雍正?批諭旨)라는 것이다.

 

  옹정제는 과거출신의 관료들을 싫어하고, 주접으로 새로운 인물을 발탁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그리고 군함인지 해적인지 상선인지 분간하기 힘든 서양선박에 대해서는 시선이 곱지 않았으며, 카톨릭에 대해서도 매우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옹정 연간 괄목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면, 역시 지정은(地丁銀)제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토지에 부과한 지세(地稅)와 개개의 정남(丁男)에게 일종의 인두세로 부과했던 정세(丁稅)를 하나로 합쳐 은으로 바치게 했는데, 그 기준이 토지가 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토지가 없는 사람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것이 옹정 원년(1723),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도 일종의 인두세인 군포(軍布)의 부담을 이기지 못해 도망자가 속출하고 농민생활이 어렵게 되자 영조 26년(1750년)에는 균역법이 시행되어, 이른바 백골징포(白骨徵布), 황구첨정(黃口僉丁), 족징(族徵), 인징(隣徵) 등의 폐단이 일시 사라지긴 했으나 농민들의 부담 자체가 감소된 것은 없었다.

 

  옹정 13년(1735) 10월 7일, 원명원 이궁에 체재 중이던 옹정제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무를 보았다. 그런데 밤 8시경부터 갑자기 위독 상태에 빠졌다가, 4시간 후에는 홀연히 이승을 등지고 말았다. 때에 그의 나이 58세, 관료들은 이제야 살았다는 듯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고 한다. 너무도 빈틈없는 황제의 일상사가, 관료들에게는 감옥보다 더 지독한 고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런 죽음에 온갖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는, 여유량의 손녀 딸이 궁중에 숨어들어 황제를 척살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이제 청나라는 강희제가 터를 넓히고, 옹정제가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건륭제는 그의 아버지 옹정제가 만든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따라 황제가 된 후, 90세의 장수와 60년 재위기간 중 가진 호사를 다할 수 있었다.


출처 : 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  |  글쓴이 : 이길상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