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곤[Dorgon:다이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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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초기의 황족. 베이징에 천도하였으며 중국 전토를 무력으로 평정하였다.
태조 누르하치[奴兒哈赤]의 14번째 아들. 태조에게 사랑받고, 태종 밑에서 중용되어 예친왕(睿親王)으로 봉해졌다.
태종이 죽고 순치제(順治帝)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친왕(鄭親王)과 함께 보정왕(輔政王)으로서 섭정하였으나, 드디어는 정친왕을 누르고 실력자가 되어 정국(政局)을 담당하였다.
1644년 32세 때에는, 명장(明將) 오삼계(吳三桂)를 선도(先導)로 하여 베이징[北京]에 천도하였으며, 이어 중국 전토를 무력으로 평정하였다. 한편으로는, 한인관료(漢人官僚)와의 타협 아래 청의 중국 지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으로 봉해졌으며, 죽은 뒤에는 의황제성종(義皇帝成宗)으로 추존(追尊)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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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곤 [Dorgon]
1612. 11. 17 만주~1650. 12. 31 카라호툰.
중국에 청(淸)나라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만주족의 황족.
호는 성종(成宗), 시호는 황제(皇帝). 청조 제3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를 보정(輔政)했던 최초의 섭정이었다.
도르곤은 청나라를 세운 태조(太祖) 누르하치의 16명의 아들 가운데 14번째 아들이다. 누르하치는 1616년 자신을 중국의 황제로 선포했으나,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지 못하고 1626년에 죽었다. 그의 후계자인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아바하이, 8번째 아들] 치하에서 도르곤은 황자(皇子)의 칭호인 호소이 베일레를 수여받았다. 그는 1628년에 시작된 차하르 몽골족과의 전쟁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황자들 가운데 최고의 지위인 예친왕(睿親王)에 봉해졌다.
1638~39년 명(明) 정복을 위한 홍타이지의 출정기간에 만리장성을 돌파하고, 허베이 성[河北省]과 산둥 성[山東省]의 40개 도시들을 점령한 팔기군(八旗軍)의 두 부대 중 한쪽을 지휘했다. 쑹산[嵩山]과 진저우[錦州]를 점령하는 데도 참여하여, 몽골족의 세력을 넓히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643년 홍타이지가 죽었을 때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도르곤은 이를 거절했다.
1644년 4월 32세 때,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도르곤은 한족 고문관의 충고에 따라, 원정군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쳐들어갔다. 이전에 그의 가장 큰 적이었던 명나라 장군 오삼계(吳三桂)는, 이자성에게 나라를 세우게 하기보다는 도르곤과 힘을 합치는 쪽을 택했고, 이 연합군은 이자성의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1644년 6월 도르곤이 베이징으로 입성했을 때,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는 이미 목을 매달아 죽은 뒤였다. 이자성의 패잔병들을 몰아낸 후, 도르곤은 신중하게 저명한 한족 전문가들의 협조를 받아가면서, 정치적·행정적인 여러 제도들을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고, 많은 한족 관습들을 받아들여,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도르곤은 명조의 매우 발달한 통치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한족 관료들을 재등용하고, 관리 선발을 위한 시험으로 이미 그 효용성이 증명된 과거제도를 통해 새로운 관리들을 등용했다.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였던 아담 샬 폰 벨이 수학자로서, 흠천감(欽天監:국립천문기상대)의 감정(監正)과 대포제조 고문으로서 그를 도왔다. 토지몰수와 변발과 같은 만주풍습의 강압적인 도입도 있었지만, 다른 모든 조치들이 전반적으로 새 왕조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다.
1650년 12월 31일, 만리장성 근처에 있는 카라호툰에서 사냥을 하던 중 갑자기 죽고 말았다. 죽은 뒤에 의황제 성종(義皇帝成宗)으로 추존되었다.
도르곤이 갑자기 죽자, 제국 내에는 혼란과 무질서가 일어났다. 그에게는 후계자가 될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특히 그가 지휘하던 백기단(白旗團:팔기군의 일부) 내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그후 정치권의 내부 변화로, 이전에 도르곤의 정적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순치제는 1651년 3월 도르곤을 제위 찬탈의 뜻을 품었던 반역자로 선언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1733년 건륭제(乾隆帝) 때에, 비로소 새 제국 수립에 기여한 도르곤의 공로가 추인되어, 방치되었던 그의 무덤이 다시 복원되고, 마침내 완전하게 복권되었다.
M. Gimm 글 | 趙允卿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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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을 넘은 도르곤(多爾袞)
집필자 : shyisna (2004-11-08 18:27) |
근래에 흔히 보는 화려한 청(淸)나라의 의상들이 활보하는 중국 근대 사극을 보다보면, 참 중국이 저런 1/10도 안되는 이민족(異民族)에게 300여년 통치 당하는 거 보면 오늘날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우습다. 변발(辮髮)한다고 머리까지 슥 밀어버리고 긴 호복(胡服)을 입으면서 연기하는 중국 한족(漢族)의 배우들은, 저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 1612~1678.10.2)를 씹어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즉, 공이 있는 자는 차남과 12남, 14남, 15남 만이 친왕의 대우를 받았을 뿐, 나머지는 일반 신하와 마찬가지였다는 셈이다.
태종도 황제가 되면서 형제들 중에 가장 능력 있는 14자인 예친왕을 어린 아들의 섭정으로 지명한 걸 보면, 이 만주족의 황제들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공로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도 얻게 되지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7년간의 섭정시간을 마무리 하지만, 이 짧은 7년이 청나라가 중국을 300여 년간 통치하는 기반이 된다.
그리고 복권후 30여년이 지나서 은전을 베푸는데, 예친왕이 자식 없이 죽었기에 형인 다댁(多澤)의 5자 다이박(多爾博)을 양자(養子)로 삼아 ,그 자손들이 예친왕의 봉작을 세습하도록 조치해 주는데, 그 첫 사례로 다이박의 차남 소이발(蘇爾發)이 세습 예친왕이 되었다.
청나라도 초기 이런 예친왕 도르곤처럼 고대 주공과 같은 인물이 나와, 결국 중국 역사상 초강대국인 대청제국을 이루어 주었고, 이 나라를 통치한 만주족 출신의 황제들은 다른 수 백명의 한족 출신황제보다도 더 뛰어난 위대성을 보여주었다고, 한족출신인 중국인들조차도 솔직히 평가내리곤 한단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중국무협소설의 대가 김용(金庸)도 역사를 참조하여 작품을 쓰는데, '만주족 출신 황제가 자신과 같은 한족 출신의 황제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것에 대해 항상 느끼고 있다’라고 인터뷰한 글을 보면서, 중국 무협소설만 읽을게 아니라, 만주족의 천하경영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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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장(孝庄)은 도르곤(多爾袞, 뚜얼군)에게 개가하였는지?
블로그 > 하늘지기의 解腸記!!
http://blog.naver.com/hanlzgi/40033188849
효장은 몽고족인 보얼지지터씨로서 청태종의 비(妃)이고, 순치제의 모친이며, 강희제의 조모가 된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황제위에 오른 순치제와 강희제를 도와, 청나라의 중원진출초기에 나라의 틀을 다지는데 큰 공헌을 세운다.
청나라때 권력을 움켜줬던 태후로는 청초의 효장과 청말의 자희(서태후)를 꼽는데, 효장은 자희와는 달리, 직접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행사하거나 수렴첨정을 하지 않았었다. 그녀와 관련하여 해결되지 않는 하나의 의문은, 그녀가 청태종의 동생이자 순치제가 어릴 때 섭정왕을 지낸 도르곤에게 재가(소위 太后下嫁)하였느냐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효장이 도르곤에게 재가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몇가지 근거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황위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정치적인 혼인이 필요했다. 청태종이 죽을 때 효장은 32세였고, 6세에 불과한 아들 복림(순치제)이 등극하였다. 하나는 30여세의 과부이고, 하나는 6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였다. 당시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던 사람은 예친왕 도르곤이었다. 그는 병사를 장악하고 있었고, 심지어 황제의 옥새까지도 도르곤의 예왕부로 가져가서 사용하고 있었다. 어린 황제는 언제든지 폐위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효장이 순치제의 황제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청태종의 동생인 도르곤에게 시집갔을 것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둘째,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것은 만주족의 관습이었다. 옛날 만주족은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그 서모를 취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했다. 청나라 초기에는 형제지간, 숙질지간에 처첩을 서로 취하는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하에서 생각한다면, 젊어서 과부가 된 효장이 젊고 뛰어난 도르곤과 결합한 것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셋째, 도르곤의 "황부(皇父)"라는 호칭. 태후하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근거중에 하나는 순치황제때 도르곤은 공개적으로 황제의 부친으로 자처하였다는 것이다. 도르곤의 칭호는 기록상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에서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으로, 다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으로 변화했다. 황제의 모친이 시집오지 않고서는, 도르곤이 황제의 부친을 자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도르곤의 명칭이 변경되는 과정이, 바로 태후와 도르곤의 혼인을 숨기다가 공개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넷째, 황제유지에 나와 있는 글에서 나타나는 사실. 순치17년(1660년) 12월 24일 유모 이씨가 병으로 죽자 순치는 예부에 유지를 내리는데, 그 안에 이런 말이 있다. "예친왕의 섭정때, 황태후와 짐은 궁을 나누어 거주했다. 매번 몇달이 되어서야 겨우 한번 얼굴을 보았다."는 문구가 있다. 어릴 때 순치제는 모친인 효장과 다른 궁에 살수밖에 없었고, 몇달에 한번 얼굴을 보았으며, 효장도 마음대로 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도르곤을 뺀다면, 그 이유를 생각하기 힘들 것같다.
다섯째, 풍수장에 관한 사실. 청나라의 장례제도에 따르면, 황후와 비빈은 모두 황제와 합장하였다. 그런데, 효장은 심양에 묻혀있는 청태종과 합장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존화에 있는 청동릉에서도 풍수장(담장) 바깥에 묘가 위치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이유를 그녀가 도르곤에게 개가하였기 때문에, 청태종과 합장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강희제 때 죽었는데, 그녀는 청태종과 합장하지 말고, 청동릉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강희제는 선례가 없어 이를 처리하지 않고, 효장의 시신을 38년간 동릉의 잠안전에 모셔두게 된다. 결국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가 처리하는데, 풍수장의 바깥에 그녀를 묻고 만다. 청동릉에 잠든 5명의 황제, 14명의 황후, 136명의 비빈은 모두 풍수장(담장) 안에 묻혀 있는데, 효장황태후만 유일하게 풍수장의 바깥에 묻혀 있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여섯째, 어떤 사람은 "태후하가조서"를 보았다고 한다. 1946년 10월 유문흥이 쓴 <<청초황부섭정왕도르곤기거주발>>에 보면, 선통원년(1909년), 그의 부친인 유계서는 내각시독학사를 겸하고 있었는데, 명을 받아 내각창고의 기록을 정리하다가 "순치때의 태후하가황부섭정왕조서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일곱째, 장황언의 시. 남명정권의 관리를 지낸 장황언이 건이궁사(建夷宮詞) 10수를 지었는데, 그 중의 두 수에 태후의 결혼에 관련된 내용을 쓰고 있다.
효장문(孝庄文) 태후
순치 황제가 건릉하기 시작한 北京 근교 淸 東陵은, 그 자신과 그의 아들 강희, 손자 건륭의 황릉이 있다. 청말의 함풍황제와 그의 두 부인 동태후와 서태후, 그리고 그의 아들 동치황제의 능도 청 동릉에 있다. 모두 5명의 황제와 15명의 황후가 안치되어있다.
중국의 역사 속에 여걸 황후, 황태후가 많은데, 淸朝의 경우 효장문 태후와 서태후 두 사람이 여걸 황태후로 손꼽힌다.
효장문 태후의 능은 청 동릉에 있는 昭西陵이다. 그의 남편은 청의 2대 황제 황타이지(皇太極)이므로, 원칙대로라면 그의 남편 황타이지 陵(심양에 있는 北陵으로 정식 명칭은 昭陵)에 같이 합장되어야 한다. 昭西陵은 昭陵의 서쪽 즉 심양에서 서쪽 分陵의 의미가 있다.
청초의 효장문 태후는 청말의 서태후와 달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적 센스와 용기가,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 淸의 초기 기운을 다졌다고 볼 수 있다.
황타이지의 총애를 받은 몽고귀족 출신인 효장문 태후에게는, 복림(福臨)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황타이지가 오래 살았다면, 총비의 아들 복림이 자연스럽게 황태자가 되고, 황위를 이어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황타이지가 이러한 준비도 없이 갑자기 죽는다.
황타이지가 죽자, 황타이지의 큰아들 호격과 황타이지의 동생 다얼콘 사이에 황위 쟁탈이 시작된다. 두 세력이 우열을 가릴수 없어, 국가가 분단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때 효장문 태후가 정치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아들 복림을 황위를 계승토록하는 절충안을 낸다.
복림이라는 대안에 양 세력이 설득되어, 결굴 6살의 어린아이 복림이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이 어린 황제가 순치 황제이다.
숙부와 형님의 양보로 어부지리를 얻은 복림이 황제가 되었지만, 숙부 다얼콘은 야심가였다. 효장문 태후는 아들 복림의 황위를 다시 뺏을지도 모르는 다얼콘과 결혼, 그를 섭정왕이 되게 하여 아들을 지킨다.
父奪子位
섭정왕 다얼콘은 오삼계의 항복을 받아 北京으로 진격(1644.4), 北京을 청의 수도로 정한다.(1644.10) 北京으로 들어온 다얼콘의 본심이 들어난다. 복림을 없애고, 자신 스스로가 황제가 되고자 한 것이다.
효장문 태후는 다얼콘의 야심을 꺾기 위해, 복림이 이미 다얼콘의 아들이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아들의 황위를 아버지가 빼앗았다(父奪子位)는 오명보다는, 황제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순리라면서 복림의 황위를 끝까지 지켜줄 것을 호소한다.
그후 섭정왕 다얼콘이 사냥터에서 사고로 죽게 된다. 당시 14세의 순치황제는 어머니 효장문 태후의 도움으로 재빠르게 친정체제로 전환, 황실의 기반을 구축한다.
효장문 태후는 자신이 죽어 묻힐 盛京(심양)의 昭陵을 생각했다.
이미 시동생 다얼콘과 결혼하여 몸을 더럽힌 자신이, 옛날 남편 皇太極 옆에 묻힐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아꼈던 아들(순치) 옆에 묻히고자, 심양의 陵보다 淸 동릉을 택하였다.
그후 효장문 태후는 아들(순치)을 도와, 明의 잔존세력을 제거하는데 힘쓴다. 아들 순치황제가 일찍 죽자, 8살 손자(강희)를 제위에 오르게 하고, 생모가 없는 손자 강희의 교육도 맡는다.
강희 황제가 청조 가장 위대한 황제가 된 것도, 할머니 효장문 태후의 숨은 지도가 있었다고 한다.
효장문 태후가 청 東陵에 들어간 것은, 아들 순치보다 27년이나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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