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청(淸)의 발전(發展)(7)
- 옹정제(雍正帝/1722 ~ 35)와 군주독재권(君主獨裁權)
가. 팔기(八旗)와 파벌(派閥)
가난했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큰 부자가 되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으로 생각 되지만, 실제로는 바라는것이 더 많아지는게 세상 인심이다.
만주족 역시 보잘 것 없는 사냥꾼에서 일약 중원의 주인자리를 차지하였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잘 살고 보니 필요한 것은 더 많아졌고, 가질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런 경쟁은 관직과 황태자 자리를 둘러싸고 강희제 말년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강희 14년(1675), 22세의 혈기 방장한 젊은 강희제는, 만주 전래의 전통을 깨고 정(正) 황후(皇后) 몸에서 태어난 둘째 아고(황자) 윤잉(胤?)을 황태자로 새우고, 자금성의 동각(동궁)에서 황제 수업을 받도록 하였다. 이때 황태자로 책립된 윤잉의 나이는 겨우 두 살 이었다.
그러다가 황태자의 나이가 36살이 되었던 강희 47년(1708)9월, 이 황태자를 폐위(廢位)했다가 이듬해 3월에는 복위(復位)하고, 황태자의 나이가 40세에 들어섰던 강희 51년(1712) 폐위한 후에는 아예 함안궁에 감금하고, 누구든지 황태자에 관한 이야기는 거론조차 할 수 없도록 엄한 명령을 내렸다. 강희제라는 참다운 명군 아래서 왜 이런 숨바꼭질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물론 그 이유는, 강희제가 조상 전래의 전통을 무시하고, 너무 서둘러 강보에 쌓인 어린 아들을 황태자를 세웠던 것이 잘못이다. 만약 일찍 강희제가 죽기라도 했다면, 이 황태자가 무난히 뒤를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희제는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오랫 동안 황제자리에 있었고, 덩달아 황태자의 나이도 30을 훌쩍 넘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황제나 황태자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권력을 둘러싼 편가르기가 나타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설령 강희제가 일찍 죽었다 해도, 여기에는 또 다른 복잡한 문제들이 숨어 있었다.
이는 각 민족마다 상속제도가 달랐는데, 적장자(嫡長子) 원칙을 고수한 중국의 명나라나 조선의 경우, 적장자가 없으면 적장손(嫡長孫)이 가계(家系)를 이었다. 정실부인 소생의 큰 아들(嫡長子)이 죽으면 그 둘째 아들이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큰 아들의 아들 즉, 장손(長孫)이 대를 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씨족사회의 유풍을 가졌던 만주족은, 가장 실력있는 자를 가려서 추대하는 선거(選擧)제도가 전래의 풍속이었다. 다시 말하면 적자(嫡子)나 장자(長子)라고 해서 특별한 혜택도 없고, 황제라 할지라도 다음 황제가 되는 황태자를 미리 지명할 권리도 없었다. 자격을 갖춘 자가 ,오직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칸(Khan/干,汗, 可汗, 可干)이든 황제든 차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누르하치가 만든 법이다.
태조 누리하치로부터 태종 홍타이지를 거쳐 세조 순치제까지는, 이 제도에 따라 황제자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성천자(聖天子)의 이상에 불탔던 강희제는, 이런 전통에 도전하고 감연히 중국식으로 황태자를 지명했던 것이다. 만주족이 분열되고 조정 관료들의 파당(派黨)을 막기 위한 조치로서 황태자를 지명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나, 결과는 정 반대의 현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런 문제는 너무나 자식들이 많았던 것도 원인 중에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희제는 명의 수녀제(秀女制)를 채택하여 많은 후궁을 둔 결과 35명의 황자(皇子:아고)를 두게 되었고, 만주식 대로 하면 이들 35명 모두가 황제 계승권이 있고, 그 중 누구든지 추대 받는 자가 황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강희제는 그의 사후 황제계승을 둘러 싼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 미리 후계자를 지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만주인들이 볼 때는 확실한 위법(?)이다. 그렇지만 황제의 이런 일방적인 조치에 대해, 처음에는 모두들 입을 다물고 얌전하게 있었다.
그러다가 강희 37년(1698), 다른 여섯 명의 황자들이 작위를 받고 각각 만주족의 기(旗)와 영민(領民)을 거느리게 되자, 잠복했던 여러가지 문제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자를 우두머리로 모신 각 기(旗)의 기인(旗人)들은, 제마다 자기들이 모시고 있는 황자가 훗일 황제가 되기를 바랐으나, 이미 황태자라는 후계자가 지명된 마당에서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황태자를 우선 그 자리에서 끌어 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음모와 비방, 그리고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원래 만주족들은 주종(主從)관계가 명확해서, 아랫사람의 집안 사람은 몇 대를 지나도 그 자손은 주인 집에 충성을 다한다. 비록 주인 집이 쇠락하고 아랫사람의 집안이 흥성(興盛)해도 이 관계만은 변하지 않았고, 기(旗)와 기(旗) 사이를 넘나들지는 못했다. 쉽게 말하면 옛 주인이 비록 곤궁하다 할지라도 이를 배신하지 않고 계속 충성을 바쳤다는 것이며, 옛 주인을 배신하고 새 주인을 찾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라 할지라도 그의 명령이 통하는 것은 자신이 거느린 영민(領民)에 불과하고, 다른 기인(旗人)들은 각기 자신들이 속해 있는 기(旗)의 우두머리에게만 충성하면 그만이었고, 전체적인 단결은 8기의 우두머리인 여러 왕과 황제 사이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서양 중세의 봉건제도하에서,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명령이 통하는 곳은 자기 소유의 장원(莊園)에 불과 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주식 사회에서 정치라는 것도 칸(Khan)을 중심으로 형제, 삼촌, 조카, 그리고 누대의 중신들이 모여서 행하는 합의제였다. 황제라는 것도 이들이 생각하기에는 칸에서 한 단계 위로 올라섰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 이런 만주 귀족들의 생각이 베이징 입성 후 반세기가 지났을 때도 요지부동인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고, 오직 바뀌지 않는것은 이들의 낡은 사고뿐이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 후유증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전통이 이제 와서는 만주족의 핵심 요체인 팔기(八旗)의 내부문제로만 그치지 않고, 관료 층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심각한 정치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즉, 각 기(旗)의 유력자들은 제각기 자기에게 소속된 기(旗)의 출신들을 요직에 앉히기 위해 혈안이 되고, 여기에 중국출신 한인(漢人) 관료들도 끼여 들어, 필사적으로 감투와 권력 쟁탈전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면서, 불꽃 튀기는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 전부가 노리는 것은 중앙의 요직만은 아니다. 오히려 유력한 지방 관직은 이들에게 절대 필요한 돈줄이었다. 명(明)·청(淸) 대의 관료사회에서 정부로부터 받는 녹봉(祿俸)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박봉이었다. 그런데도 관료로 몇 해만 지나면 평생 놀고 먹고도 남을 만큼 큰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권력과 부를 동시에 움켜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것이 전제군주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이다.
어렵게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하고, 일단 진사가 되었다가, 다시 어렵게 지방관에 임명되어 임지에 도착하면, 이들이 하는 중요한 일은 세금을 징수하여 중앙정부에 보내는 일이다. 그런데 정해진 세금을 국고에 보내고 나면, 그 나머지는 어디에 쓰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결국 지방관이란 일종의 세금 청부업자였고, 따라서 토박이로 대대로 그 지방에서 살고 있는 아전들과 짜고 마음껏 백성들의 돈을 뜯어 낸다.
이렇게 돈을 모은 지방관들은 자기가 얻은 상당 부분을 떼어 중앙에 있는 우두머리에게 상납하고, 그 우두머리는 이런 돈으로 다시 그 부하들에게 뿌린다. 베이징에 들어 온 후, 만주 8기병들은 전투에 참가할 기회가 줄어들어서 전쟁 때의 전리품이나 은상(恩賞)을 받을 길이 막히자, 몇 배로 늘어난 씀씀이에 비해서 돈이 늘 부족하였고, 우두머리의 든든한 돈줄만이 이들의 8기인들의 희망이었다.
이런 사정은 우두머리 중의 우두머리인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강희제 자신도 좋은 지방관의 자리는 직계 부하에게 맡겨서 부지런히 돈을 모아 오게했다. 그 중에서도 당시 가장 든든한 돈줄은 강녕직조(江寧織造)라는 자리로서, 그책임자 조인(曹寅)은 부지런히 돈을 모아서 황제에게 많은 돈을 바쳤다.
강녕이란 남경(南京/난징)을 말하며, 직조란 궁중에 조달하기 위해서 명주실로 짠 옷감 일체를 조달하는 관직이다. 강희제가 여섯 번이나 남쪽지방을 순회했을 때, 남경에서는 대부분 조인의 집에서 묵었다고 하는데, 황제 일행을 부담없이 맞이할 정도로 그 자신도 부유했다.
조인의 손자 조점(曹霑/曹雪芹)은 청대에 쓰여진 세계적인 소설 홍루몽(紅樓夢)의 작가로서, 주인공 가보옥(賈寶玉)은 자신을 소설 속에 등장시킨 것이며, 이런 사실은 석두기(石頭記) 금옥연(金玉緣)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라고도 하는 이 소설에 대해서 근대 이후, 호적(胡適/후스)·유평백(兪平伯위핑보) 등이 이 작품은 조설근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결론을 내려 더욱 분명해 졌다. 소설의 내용만큼이나 이들의 생활이 호화 찬란했던 것이다.
어쩻든 황태자로 지명된 제 2 아고 윤잉은 ,자라면서 훌륭한 기량을 닦아 강희제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렇듯 권력 쟁탈전에 혈안이 되어 있는 마당에, 앞에서 말한 대로 강희제는 다시 6명의 황자에게 작위를 주고, 기(旗)의 우두머리인 패륵(貝勒/베이레)으로 삼아, 영민들은 다스리게 했고, 새로이 황자를 업은 기인들이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황태자가 설 땅은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이런 소용돌이는 결국 청나라 조정 자체를 황태자파와 반황태자파로 갈라지게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물론 황태자 자신이었고, 그에게 조그마한 허물만 있어도 우선 형제들부터 물고 늘어졌다.
강희 42년(1703년)에는 황태자 지지파들이 실각하게 되고, 반황태자파에 가담하고 있던 남서방 학자들까지 가세하여 모략과 중상을 일삼게 되자, 설 땅을 잃은 황태자는 이상한 행동까지 보이기 시작했고, 이런 황태자의 행동에 강희제 자신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자신을 해칠 뜻이 있다고 부쩍 의심을 품게 된 것이다.
강희 47년(1708년) 내몽고 순회 중, 강희제는 느닷없이 여러 왕과 각료 등 문무백관을 천막 앞에 소집하고, 황태자를 어전에 꿇어 앉힌 다음 조목조목 힐책(詰責)하기 시작했는데, 황태자가 자기를 해치기 위해 밤마다 천막안을 기웃거린다는 것이며, 이런 불충 불효한 자식에게 조상의 유산을 물려 줄 수없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그리고는 분을 참지 못한 강희제가, 통곡하며 땅바닥에 떼굴떼굴 굴렀다고 한다.
그래서 그 해 9월 황태자를 폐위하자, 제 1아고 윤시(胤? )는 이를 기다렸다는 듯, 즉각 제 8 아고를 황태자 후보로 추천했고, 조정 중신들도 일제히 이에 따랐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강희제도 반황태자파의 모략과 음모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알았고, 이런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즉시 제 1 아고와 제 8 아고의 작위와 기를 빼앗고, 이듬해 3월 황태자를 복위시켰다. 여러 자식들에게 기(旗)를 세분하여 세력균형을 유지코자 했으나, 이것이 반황태자파라는 연합세력을 형성하는 결과만 초래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복위된 황태자를 두고 다시 음해가 꼬리를 이었다.
지칠대로 지친 황제는, 강희 51년(1712) 다시 황태자를 폐위하고 함안궁에 감금했고, 이런 것이 전례가 되어 이후 청나라는 망할 때까지 한 번도 황태자를 세운 적이 없었다.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던 강희제도, 중국의 풍속으로 집안을 다스리는데는 쓰라린 가슴만 아픈 상처로 남겼을 뿐 결국 실패했다. 옥(玉)에도티가 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왕으로서의 아버지가 오래 살면, 그 아들인 태자는 어떤 형태로든 피해를 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조선의 21대 임금 영조는 84살까지 살았는데, 31살에 왕위에 올랐으니까 재위 기간이 53년이나 된다. 이유야 어쨌든 그의 아들 사도세자는 28살에 아버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기록상 가장 오래 살았던 왕은 고구려 6대 임금 태조왕(太祖王/高宮)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47년에 태어나서 165년에 죽었다고 하니까 119살을 살았고, 7살에 왕이 되었다가 101 살이 되어서야 76살의 같은 어머니 몸에서 태어난 동생(同母弟) 수성(遂成/次大王)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니까, 재위 기간만도 무려94년이 된다. 그러나 이 기록은 너무 오래전의 것이기에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역시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長壽王/巨連)은 그 시호가 말해주듯 98살을 살았고, 왕위를 차지한 햇수(在位期間) 만도 79년이나 된다. 아버지가 오래사는 바람에 그 아들 조다(助多)는 임금 노릇 한 번 못해보고 죽어서 쪼다 같은 사람이 되었고, 임금 자리는 그의 아들(文咨王)이 이었다. 이런 것은 오래전의 이야기고 대개의 임금들은 50 나이를 잘 못 넘긴다.
나. 옹정제의 독재 군주권 확립
(1) 의문 속의 황제 즉위
강희 61년(1722) 11월, 사냥 길에서 돌아오던 강희제가 베이징 서북 근교 장춘원 이궁에서 감기에 걸려 열이 심하게 나더니, 며칠후 보군통령(步軍統領) 융과다(隆科多/련고도) 한 사람만 지켜 보는 가운데 이 달 14일 죽음에 이르렀다.
베이징과 이곳 이궁의 경찰권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융과다는, 강희제의 시신을 모시고 전속력으로 달려 베이징에 돌아 와서는, 지체없이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자금성의 문을 모조리 봉쇄한 후, 자기의 허락 없이는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 주지 말라는 엄명을 부하들에게 내렸다.
이렇게 황자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입궐을 막은 융과다는, 그 이튿날인 15일, 즉시 제 4황자인 윤진(胤 ?)을 궁중으로 모셔와서 "제 4황자는 인격도 훌륭하고, 마땅히 황제 자리를 이을 만 하다"는 이른바 강희제의 유조(遺詔)라는 걸 발표하였다.
20일에는 비상경계령이 풀리고, 21일에 제 4황자가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여 청나라 5대 황제가 탄생하였는데, 이가 곧 세종(世宗) 옹정제(雍正帝/1678 ~ 1735)로서, 때의 나이 45세의 장년이었다.
말썽 많던 후계자 자리가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제4황자에게 돌아 갔을 때, 세간에서는 별의 별 소문이 나돌았다. 강희제의 유언이라면 누가 보더라도 당연히 제 14황자인 윤제(胤 ?)의 몫이라고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만큼 14황자가 강희제의 사랑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질과 기량 또한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문은 소문일 뿐, 융과다는 사천(四川)과 섬서(陝西)의 총독 연갱요(年羹堯)와 손을 잡고 자기들의 보스인 제 4황자를 황제로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막강한 군권(軍權)을 쥐고 있던 제 14황자는 연갱요의 감시하에 꿈적도 할 수 없었다.
막상 황제 자리에 오른 옹정제로서는, 힘없는 아고에 불과할 뿐 실권은 이들 두 사람의 손아귀에서 놀고 있었다. 결국 옹정제도 만주의 풍속대로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을 잡지 않으면 안되었다.
(2) 냉혹한 황제 독재권의 확립
옹정제가 아버지 강희제로부터 광대한 영토와 동시에, 이미 중국화가 진행되고 있는 청나라 조정의 나약함을 유산으로 물려 받았다. 당연히 주인 행세를 해야 될 만주인들은, 중국에 동화되고 자취조차 없이 묻혀버릴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강희제의 중국화 정책은 질박 강건한 만주인들에게, 향락과 사치에 물들게 만들었고, 모국어인 만주어보다는 베이징 관화(官話)를 중국인들보다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만주인들이 늘어났다. 다이곤에게 발탁되어 내각수보로 기용되었던 김지준이 뿌린 씨앗에 싹이 돋기 시작한 것이다.
한줌밖에 안되는 만주인들이, 유학에 심취되고 중국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막는데 옹정제는 13년의 재위기간을 걸었다. 그러기 위해서 절대 독재권력이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 주변부터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우직하다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만주인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면 동시에 종족자체도 사라진다는 것을 옹정제는 가슴깊이 새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섣불리 중국사람을 흉내 내고 멋이라도 잘못 부렸다가는, 문화적으로 취약한 그들 전체가 뿌리 채 뽑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옹정제는 독재권을 확립하기 위해 칼을 뽑아 들었다. 우선 강희 말년 이래 누적된 당파를 일신하기 위해 붕당론(朋黨論)을 발표하고,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말썽을 부렸던 34명의 형제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숙청이라는 칼날을 형제들부터 겨누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 물망에 올랐던 제 14황자를 전선에서 소환하여 조상의 묘지기로 격하시키고, 제 8왕자와 그 아우는 옥에 가두고 개와 돼지라는 뜻의 만주이름을 하사하고 서민으로 강등시켰다. 계속해서 그는 오직 자기에게 충실했던 동생 하나만을 남기고, 다른 형제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왕족들의 8기의 영유권도 몰수해 버렸다.
이때 8기군은 상삼기(上三旗)와 하오기(下五旗)로 가르고, 상삼기(上三旗)는 황제의 직속 친위부대가 되어 있었으며, 하오기(下五旗)는 왕족의 영유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오기(下五旗)를 거느린 왕족은 자기 지배하의 기인들을 사병처럼 부리고, 그들 또한 왕을 그들의 주인으로 모시며 충성을 다 바쳤는데, 이런 제도를 개혁함으로서 모든 8기의 군인들을 비로소 황제가 직접 장악하고, 동시에 개개의 만주인까지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때부터 만주인들은 황제를 자기들의 지배자, 즉 절대군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융과다와 연갱요 두 사람은 옹정제를 세우는데 절대적 역할을 맡았던 일등 공신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있는 한 소신껏 개혁을 마무리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옹정제는 이들을 제거할 계획을 수립하고, 파격적으로 그들을 대우해 주어 스스로 부정의 길에 빠져들도록 유도하였다.
황제가 이들을 제거할 명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때, 연갱요에게는 92가지의 죄목을 덮어 씌우고, 연갱요와 그의 아들, 손자, 형제,사촌, 조카 중 16세 이상은 모조리 사형에 처하고, 15세 이하의 남자와 며느리를 포함한 모든 여자들은 노예로 삼아 버렸다. 융과다 역시 같은 신세가 되어, 옥에 갇혀 평생을 보내야만 했다.
(3) 만주 8기 씨족 통보
성리학에 심취했던 강희제는 일찍부터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했고, 그 효도의 귀결점은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조상과 가문을 빛내는데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가문의 내력을 밝히는 족보(族譜)가 필요하다.
족보를 만드는 일은 박식한 중국인 학자들이 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돈만 주면 그 취향에 따라 요(堯)나 순(舜), 공자의 자손 등으로 둔갑시키고 빈틈없이 만들어 준다. 이런 가짜 투성이의 족보를, 만주 출신 귀족들도 다투어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놀란 것은 옹정제였다. 만주인들이 일치 단결하여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씨족사회의 밑바탕이 이를 지탱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씩씩한 기마무예와 단순 질박한 씨족을 바탕으로, 각각의 족장들은 그들 위에 있는 대족장, 즉 칸에게 충성을 바침으로서 국가라는 큰 틀을 유지할 수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족보를 만들어 씨족이 작은 단위로 세분하여 가족 단위로 나아가면, 독립된 가족단위는 자기들만이 안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마련이고, 이는 결국 씨족 전체의 단결을 와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문안 인사나 들이고, 장유유서라는 자질구레한 의례에 묶이다 보면, 어느새 강건한 기상은 사라지고 나약해 지게 된다. 만주족의 단결과 국민성이 나약해 지는 효도가 옹정제는 싫었다.
그러나 이미 조법(祖法)에 묶인 효도를 금지할 순 없었다. 그래서 친히 만주 전원의 씨족 계보를 만들어 이것을 구성원들에게 배포하였는데, 이것이 만주팔기 씨족통보(滿洲八旗氏族通譜)라는 것이다.
옹정제 자신 그 서문에서 밝히기를 "가보(家譜)란 허영에서 나온 타락한 중국 사상의 산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며,....이 책으로 만주족 본래의 씨족제를 확인하라"고 타이르는 한편, 강희제가 동경하던 중국 가족제도의 모방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국가안보의 핵심을 팔기의 충성심과 우직한 힘에서 찾고자 했다.
한편으로는 방치된 만주전래의 토속신앙을 부활시켜, 각각의 가정에는 제단(祭壇)을 만들게 하고, 씨족공동의 솟대(神杆)를 세워 제사에 참여케 하므로써 전 만주족을 단결시키고자 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청나라 황실의 성씨인 애신각라(愛新覺羅)를 풀이하면, 애신(愛新)은 김(金)을 뜻하고 각라(覺羅)는 족(族)을 의미하는 것이라고하는데, 이는 곧 신라 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조상은 조선에서 건너간 사람이 된다. 실제로 청나라 멸망 후, 많은 황족들은 성을 김(金)씨로 하였고, 지금 중국인들의 성씨 중 김(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이들의 후예가 많다고 한다.
족보(族譜)란 부계(父系) 중심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도식(圖式)으로 나타낸 한 종족의 계보(系譜)를 말하는데, 족보의 원조는 물론 중국이고, 중국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 후 1세기 경인 후한(後漢) 때부터라고 한다.
이것이 6조 시대(220 ~ 589)의 귀족사회 형성과 맞물려, 보학(譜學)이라는 족보학문이 새로이 나타났는데, 족보라면 단연 조선왕조의 사대부들이 기를 쓰고 만들고 지킨 것으로, 그 명성은 세계에서 으뜸이었다.
양반은 군포를 면제받고 많은 특전이 부여된 조선사회에서, 양반신분임을 밝히는 유일한 증명서가 족보였다. 그래서 난리라도 나면 족보를 신주(神主) 이상으로 모시고 다녀야만 했지만, 상민이 양반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족보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유로 가짜도 대단히 많았다.
이런 족보가 고려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없다. 오늘날까지 전해진 족보를 기준으로 본다면,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 진 것은 두 서너 개에 불과하고, 그 외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중심으로 사회가 재통합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보첩(譜牒)·세보(世譜)·세계(世系)·가승(家乘)·가첩(家牒)·가보(家譜)·성보(姓譜)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족보는, 존비(尊卑)·항렬(行列)·적서(嫡庶)의 구별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족보라고 하면 이른바 종보(宗譜)인 대동보(大同譜)를 말하고, 여기에서 분파된 일단(一團)의 세계(世系)에 대해서 기록한 것을 지보(支譜) 혹은 파보(派譜)라고 부른다.
지금도 우리사회에서는 과거의 양반중심 사회가 잘못 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은 상놈이라 불렀던 상민의 후예가 아니라 그 잘못된 양반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중적 풍조가 강하게 남아 있고, 족보 또한 각 문중마다 열심히 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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