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청조(淸朝)의 성립과 태종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
(1)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丁卯胡亂)
누르하치에게는 모두 열 다섯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여덟째 아들인 홍타이지(皇太極)가 칸(Khan)을 계승하였다.
그들 사회에서는 적서(嫡庶)니 장유(長幼)니 하는 유교적인 규범이나, 태자니 세자니 하여 미리 후계자를 정하는 법은 없다.
많은 형제들 중에서 스스로 강자가 되어 구성원들로 부터 인정을 받는 자가, 칸이든 추장이든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칸으로 선출된 홍타이지에게는 당장 풀어야 할 두 가지의 과제가 있었다.
첫째는 아직도 초원지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목민들을 그의 휘하에 통합 복속시켜 명나라를 정복해야 하며, 둘째로는 식량을 비롯해서 당장 부족한 생필품을 어떻게든 구하여 생민(生民)들의 현실적인 생활 욕구를 충족 시켜주어야만 했다.
이것은 만주족이 이동생활에서 점진적으로 정착단계에 들어 서고 있음을 의미하고, 정착하기 위해서는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각종 생산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의 여진족들은 중국과 조선을 통해서 얼마간의 농경기술은 익히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생활 수준의 향상과 함께 늘어나는 생필품의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부족한 것은 주로 명나라에서 공급 받았는데, 그 통로가 막혀 버리자 이들이 받는 고통이 커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인삼과 모피를 팔아 그 대금으로 식량에서부터 소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생필품을 사와야 하는 그들에게, 1616년 누르하치가 나라를 세워 금(金/後金)이라 하고 명나라와 결별하자, 동시에 교역도 단절되었기 때문에 생필품의 심한 품귀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홍타이지는 이런 생필품을 우선 조선에서 충당코자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왜란을 치른지 얼마되지 않았고, 현실적으로 이들에게 줄만큼 사정이 넉넉하지를 못했다. 거기에 인조반정 후 이들을 대하는 태도마저 노골적으로 친명배금(親明背金)으로 돌아섰다.
그렇다면 힘으로 중국을 삽시간에 정복해서 그들로부터 얻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겠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의 군사력도 문제였지만 그배후 즉 조선이 더 큰 문제였다.
조선에서는 아직도 명나라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다하고 있었고, 평안도 철산 앞 바다의 가도(? 島)에는 요동에서 밀려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 1576 ~ 1629)이란 자가 진을 치고 있어서 금 나라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뒤가 말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도에 진을 치고 있는 모문룡을 잡아야 하고 조선이 명나라와 연결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 두는 동시에 우선은 생필품을 조선에서 조달해야만 되었다. 그러나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런 생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누르하치가 사망(1626. 9)했을 때, 적국으로 전쟁 중인 명나라도 조문사(弔問使)를 보내어 진심으로 애도(哀悼) 했는데, 조선에서는 조문은 커녕 한마디의 기별조차 없었다. 이것은, 못된 신하들이 어진 임금 광해를 잡아가두고 제멋대로 새로운 임금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두 나라가 영구히 평화롭게 지내려면 우선 적장 모문룡을 잡아 보내고 그 다음 형제의 맹약을 맺고, 조선은 동생으로서 형인 금 나라에 의지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명나라가 무슨 소리를 한들 조선은 겁날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광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조선으로 출병할 수밖에 없다...........
이런 금 나라의 생트집에 대해서 조선으로서는 어느 하나도 수용할 수 없었다. 강화도에 유배시킨 광해를 모셔와서 다시 왕으로 세운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되고,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내는 일이나, 명을 배반하고 금 나라의 동생이 된다는 것은 명나라를 섬기는(事大) 입장에서 동생이 형을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 나라의 현실적인 욕구인 생필품을 보내 주기에는 당시의 조선 재정이 너무나 열악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금 나라가 조선을 얕잡아 보게 된 원인 중에는, 소위 "이괄(李适)의 난"이란 것도 한 몫을 챙기고 있었다. 이보다 3년전인 인조 2년 1624년 1월,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영변(寧邊)에 머물고 있던 이괄(李适)이 난(亂)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는데, 이 이야기를 잠시 따라가 보자.
이괄은 1623년 3월, 인조반정 당시 북병사(北兵使)를 제수(除授) 받았으나 현지에 부임하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반정군에 가담하여 대장이 되었다. 거사계획에는 대장은 김류(金 ?)가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김류가 다른 사정으로 약속했던 장소에 제시간에 이르지 못하자, 사세가 급한 반정군의 총수 이귀(李貴)는 임기응변으로 이괄을 대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졸지에 대장이 된 이괄은 거사(擧事)에 가담한 능양군(인조)을 모시고, 이귀 이하 장사(將士) 200 여명과 장단방어사 이서(李曙)의 군사 700 여명을 비롯해서, 각처에서 올라온 1천여명의 군사를 지휘해서 창의문(자하문)을 돌파하고 왕궁으로 들어가 반정을 성공 시켰다.
반정 후 그는 좌포도대장이 되어 왕실 경호와 수도치안을 책임 맡았고, 새 임금 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여기서부터 일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반정 주체들이 볼 때, 이괄은 거사 도중에 무임승차한 손님에 불과했다. 이런 이괄에게 막중한 권력이 주어지고, 국왕의 신임까지 더해 지는 것을 그냥 보고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괄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도 구세력들이 도처에 있을 수 있고 이들을 찾아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하들을 풀어서 기찰(譏察)을 강화해야 하고, 의심 나는 사람이 있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감옥으로 보낸 후 철저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많은 적을 만들었고, 반정실세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과 수하들의 행위가 지나치고 비행이 많다고 하여 탄핵을 받았다. 반정공신들은 그를 눈에 가시처럼 보았던 것이다. 동일집단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외톨백이가 된 사람을 요즘 말로 왕따라고 한다. 당시의 이괄은 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금 인조는 그를 두텁게 신임하여, 그 휘하에 1만 5천명의 병력을 거느릴 수 있는 부원수 겸 평안도 병마사를 제수하여,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북변을 지키게 했다. 그래서 그는 임금의 은혜(聖恩)에 감읍하고, 8월에는 기꺼이 현지에 부임하여 국토방위에 진력했다.
그 해 윤 10월 인조반정에 공이 많았던 장사(將士) 53명을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녹선(錄選)하면서 그 1등에 김류, 이귀 등 7명이 선정되었으나, 이괄은 반정에 늦게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2등공신이 되었다. 자기보다 공이 못한 사람도 1등으로 올라 있었으나, 그렇다고 이괄이 들어 내놓고 불평하지는 않았다.
해가 바뀌어 인조 2년 1624년 1월 17일, 전교수(前敎授) 문회(文晦) 등은 정찬의 무리들이 선조의 제 7왕자 인성군(仁成君)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느닷없이 고변(告變)을 했다.
이런 고변이 들어오자 정찬 등이 붙들려서 문초를 받게 되고, 심한 매질을 감당하지 못한 그들이 거사할 때 총대장으로는 이괄을 세우고자 했다고 말하자, 조정의 공론은 이괄을 잡아다가 문초를 해봐야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인조는 이괄이 절대 배신할 사람이 아니며, 이들이 다만 대장으로 삼고자 했을 뿐 이괄과 연결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국방의 요지를 잘 지키고 있는 공신을 잡아다가 문초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묵살해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괄의 아들 이전(李 ?)이 그 친구들과 함께 천하를 주유하면서 장사들을 모은 흔적이 있으니, 그를 잡아다가 문초를 해 봐야한다고 물고 늘어졌다. 이런 소식을 듣고 이전은 겁이 나서 그의 아버지가 있는 영변으로 내려가 몸을 의탁하였다.
인조로서도 그 아들의 혐의를 알아보겠다는 공신들의 드센 입김을 더 이상 막을 수가 없었다. 이래서 1월 24일 왕명을 받은 금부도사 고덕률(高德律)·심대림(沈大臨) 등이 이전을 잡기 위해서(拿來) 그가 있는 영변에 도착하였다.
이에 화가 난 이괄은 금부도사 등을 죽이고, 임금의 총명(聖聰)을 흐리게 하는 역신(逆臣)들을 제거한다는 구호를 내 걸고, 구성부사 한명련 등과 함께 휘하의 군대를 인솔하여 서울로 향했다.
사태가 급하게 되자 문무 관료들은 인조를 모시고 공주로 파천하였고, 서울에 입성한 이괄은 선조의 제 10왕자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추대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다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틀 후 도원수 장만에게 패하여 이천으로 도망 갔다가 그 부하에게 피살됨으로써 난은 쉽게 평정되었는데 이것을 이괄의 난이라고한다.
변란(變亂)이란 그 자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후유증이다. 적지(敵地)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역(附逆)이라는 혐의를 쓰게 되고, 어쩔수 없어서 시키는대로 했던 행위가 반역이라는 엄청난 결과로 귀착된다. 충신과 역적이란 한 장의 종이 뚜께 보다 더 엷다.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도원수 장만 등 32 명은 진무공신(振武功臣)이란 이름으로 선정되고, 두터운 후대와 영광을 더 안게 되었지만, 직·간접으로 이괄의 편에 섰거나 마지 못해 도움을 주었던 많은 사람들은 무서운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일부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금(후금)나라로 들어 갔고, 이들은 조선의 실상을 알리고 아울러 조선을 쳐 광해를 다시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고 금 나라를 부추겼다.
금 나라로서는 광해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하나 더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앞세움으로서 지리에 어두운 북변의 험로에 좋은 길잡이를 공짜로 얻게 된 것이다.
해가 바뀌자 홍타이지는 연호를 천총(天總)으로 고치고, 압록강이 완전히 얼기를 기다렸다가 1627년 1월 13일 아민(二王 / 阿敏)에게 3만의 군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아민은 사르후전투에서 항복했던 강홍립과 박난영(朴蘭英), 그리고 이괄의 잔당들을 향도로 삼아, 삽시간에 의주를 휩쓸고 평양을 거쳐 황해도 황주와 평산에 진을 치고 약탈과 동시에 조선을 협박하기 시작하자, 조선에서는 이들의 침략을 항의하는 글월을 보내는 한편,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고 힘겨운 협상에 들어갔다. 이것이 이른바 정묘호란(丁卯胡亂)의 시작이다.
(2) 형제지국(兄弟之國)의 맹약
이들의 침략 목적이 처음부터 조선에 대한 영토적인 야심이라기보다는, 산적한 국내문제의 해결과 명과 조선의 관계를 끊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황해도에 이르러서는 더 남하하지 않고 협상을 서둘렀다. 광해의 원수를 갚는 다는 것도 명분에 불과했다.
1627년 2월 2일부터 3월 3일까지, 약 한 달 간 협상을 위한 양국의 사절이 수 없이 오갔는데, 금 나라측의 교섭상대는 유해(劉海)라는 요동출신의 중국인(漢人)이었고, 조선측에서는 후금의 군대와 함께 들어온 강홍립과 박난영을 불러 직접 그 의견을 묻기도 하였고, 이들의 아들을 적진에 보내어 진실을 알아보기도 하였다.
유해를 통해서 후금이 구체적으로 조선에 요구한 것은 천계(天啓/명 희종의 연호)라는 연호를 사용하지 말 것, 왕족을 인질로 보낼 것, 소와 말 그리고 목면 등 생활필수품을 보낼 것 등이었다.
이런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조선측에서는 이들이 먼저 철수할 것, 철수 후 다시는 압록강을 넘지 말 것, 금 나라와 형제지국이 되어도 명나라와는 그 의리상 사대의 예를 버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왜란을 치른 후 민생이 피폐하여 요구 품목 전부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 등이었다.
여기에 모문룡이 끼여 들어 일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고, 명분을 앞세운 일부 관료들은 화친 자체를 맹렬히 비난하였으며, 인질로 갈 왕족을 누구로 하느냐는 것도 큰 문제였다.
회담이 지지부진하자 후금측에서는 "우리가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명나라 때문이다. 일이 완결되면 바로 떠나 가겠지만, 일이 완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왕경(王京/서울)으로 가 주둔하여 1년 동안 농사하면서 돌아가지 아니 할 것이다. 귀국이 그때에는 후회하여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애원인지 협박인지 분간조차 어려운 말들부터 시작해서 많은 말들이 수없이 오고 갔다,
그러다가 결국 조선에서는 원창 부령(原昌副令) 이구(李玖)를 원창군(原昌君)으로 삼아 왕제(王弟)라 속여 보내기로 하고, 목면 1만 5천 필, 면주 2백 필, 백저포(白苧布) 2백 50필, 호피(虎皮) 60장, 녹비(鹿皮) 40장, 왜도(倭刀)8병(柄), 안구마(鞍具馬) 1필을 오랑캐에게 보내어 화친을 성립시키고 이른 바 맹약이라는 의식을 치렀다.
1627년 3월 3일 밤, 강화도의 이궁에서 인조는 머리에는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몸에는 흑포(黑袍)를 입고 오대(烏帶)를 두른 차림으로 탁자 앞에 서서 향을 피우고, 좌부승지 이명한(李明漢)은 맹세 문을 읽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잗단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 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
여기까지가 임금 인조가 해야 할 일이고, 다음 의식, 즉 짐승을 잡아 그 피를 나누어 마시는 희생(犧牲)의 맹약은 신하들이 담당하였다. 그래서 호인(후금)들이 소와 말을 잡아 혈골(血骨)을 그릇에 담았다.
먼저 조선측에서 이행원(李行遠)이 맹세문을 낭독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국의 3국로(三國老)와 6상서(六尙書) 아무개 등은 지금 대금국의 8대신 남목태(南木太)...등과 함께 흰 말과 검은 소를 잡아서 맹약을 한다......기꺼이 이 술을 마시고 즐겁게 이 고기를 먹을지니, 하늘이 보호하여 많은 복을 받을 것이다.”
이어서 호인(胡人) 남목태 등도 맹세하기를,
"조선 국왕은 지금 대금국 이왕자(아민)와 맹약을 한다. 두 나라가 이미 아름다운 화친을 맺었으니, 이후로는 마음과 뜻을 함께 하여야 한다........만약 양국의 두왕이 마음을 같이 하고 덕을 같이 하여 공도로써 처신한다면 하늘의 보호를 받아 많은 복을 누릴 것이다.”
희생(犧牲)의 맹약을 치룬 후 금군은 철수하였으나, 이들이 남긴 피해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왜란으로 삼남이 황폐화되었는데, 다시 호란으로 관서와 해서 지방이 쑥대 밭이 되고 사람의 그림자는 찾기조차 어려웠다.
일찍이 선조의 예견대로 왜란이라는 옴[疥]에다가 호란이라는 치질[痔]까지 겸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황당할 노릇인가? 그 가운데는 이런 일도 있었다.
화약(和約)에 따라 호인(胡人)들에게 잡혀 갔던 많은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오랑캐들에게 상투를 잘리고 체두변발(剃頭髮)이라는 오랑캐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잡혀가서 머리를 깎이고 기이한 모습을 한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모문룡의 명나라 군사들이 이들을 오랑캐(胡人)로 잘못 알고 잡아가거나 죽이는 일도 큰 걱정거리였다.
모문룡의 군사들을 피해 이들을 남쪽으로 보내자니 이곳 사람들이 부족하게 되고, 산간으로 숨기자니 영원히 피해 버릴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모문룡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런 사실을 알리고 그 양해를 구하는데도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강홍립 등이 들어 오면서 한인(漢人) 남녀 231 명을 데리고 왔었는데 이의 처리문제도 두통거리였다. 모문룡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도 힐책하고 관여하였던 것이다. 결국 왜인(倭人)이건 호인(胡人)이건 모문룡이건 이들이 강토를 짓 밟은 것은 그들의 국내 사정 때문인데, 그 고통은 고스란히 어렵게 이 땅을 살아가는 불쌍한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개인이건 국가건 힘이 없다는 것은 이렇게 서러운 것이다.
이때 명나라는 역대 황제 중 가장 암울했다는 희종천계제(1620 ~ 27) 말년으로, 황제는 궁궐 깊숙한 곳에서 그의 취미였던 목수일에만 열중하고 있었고, 정치는 환관 위충현이 전단하여, 그에게는 9천세를 부르게 하고, 또한 자신을 살아 있는 신(神)으로 받들게 하는 등 갖은 악정을 다하여 멸망을 자초하고 있었는데, 조선은 사대의 예를 끝까지 지켜, 그 해 4월 주문사를 보내어 호란의 전말을 상세히 알리고 그 처분을 기다렸다. 명나라를 두고 일편단심 사랑의 손짓을 계속 보냈지만, 명나라는 이미 이를 받아 줄 만한 처지가 못되었다.
그리고 근 10년 동안 포로로 있다가 돌아온 강홍립과 박난영은 끝까지 변발을 거부하고 상투를 지켰다. 이런 것이 조선이 내세우는 동방예의지국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이 보다 훨씬 더 큰 재앙이 10년도 안되어서 병자년에 다시 일어났고, 이것을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3) 대청제국(大淸帝國)의 성립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길들여 놓은 홍타이지는 에너지를 축적하여 만주의 영동(嶺東) 지구를 잇달아 정복했다.
이렇게 되자, 지금까지 애매 모호한 태도로 눈치만 살피고 있던 오로도스 일대를 비롯해서 전 몽골의 부족들이 줄줄이 항복해 왔다.
1636년 4월, 홍타이지는 심양(瀋陽/선양)에서 황제의 즉위 식을 올리고 국호를 청(淸)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고치고 그가 황제가 되었음을사해(四海)에 널리 공표하였다. 이것이 공식적인 청나라의 출발이다.
이 즉위식에서 만주의 대표는 만주어로, 중국대표는중국어로, 그리고 몽골대표는 몽골어로 황제의 추대사를 읽게 하여 청나라가 만주에 국한된 만주족만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국가가 아니라 이들 세 민족이 협화하고 단결해서 이룩된 연합제국임을 은연중에 밝혔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금(金)이건 청(淸)이건 명나라 이외에는 황제 칭호를 쓸 수 없다는 고집을 세우고 이에 따르지 않자, 다시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 이해 12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친히 10만 병력을 이끌고 산을 넘고 길을 가로 질러 순식간에 서울에 들어 닥쳤다.
도성은 함락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시도했으나,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식량은 바닥을 보였으며 기대했던 근왕병도 지지부진 하였다.
결국 해가 바뀐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 수항단(受降檀)을 만들고 치욕스러운 항례(降禮)를 받고 청나라는 물러갔다. 이것을 우리들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고 하는데, 이에 관한 전후(前後) 사정 이야기는 앞 글 여러 곳에서 편린이 남아 틈틈이 적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청의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청 태종은 세 나라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採擇)하고, 역사 편찬을 서둘러 1635년에는 첫 역사서인 태조실록전도(太祖實錄戰圖 / 만주실록)8권을 만들게 하고, 이듬해에는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완성하였다.
문관 6부를 두고, 다시 내국사원(內國史院)과 내비서원(內秘書院) 그리고 내홍문원(內弘文院) 등 3원을 설립하여 문서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게 했다.
이로써 청나라는 만주벌판에서 사냥이나 하면서 연명하든 야만인들이 아니라 당당히 문무를 두루 갖춘 강력한 나라임을 천명코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도 이런 것은 청나라를 중앙집권 국가로 올라설 수 있는 기초를 확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도 중원 정복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체, 1643년 8월, 향년 52세를 일기로 선양에서 급사하고, 그의 아들 순치제가 뒤를 이어 황제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청나라는 그 험하다는 산해관을 쉽게 넘고 중원으로 들어갔다.
출처 : | 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 | 글쓴이 : 이길상 원글보기 |
'偉人*人物' 카테고리의 다른 글
淸 太祖 누루하치 (0) | 2007.01.16 |
---|---|
청 세조 순치제와 섭정 다이곤 (0) | 2007.01.16 |
78. 청(淸)의 성립과 발전(1) - 후금의 성립 (0) | 2007.01.16 |
강희제(康熙帝) (2) (0) | 2007.01.15 |
강희제 [康熙帝] (1) (0) | 2007.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