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강희제(康熙帝) (2)

영국신사77 2007. 1. 15. 15:17
              82.청의 성립과 발전(5)-성조 강희제

 

    82. 청(淸)의 발전(發展)(1) - 성조(聖祖) 강희제(康熙帝)

 

가. 삼번(三藩) 의 난(亂)                                                                                  이길상

 

(1) 이한제한과 3번의 설치

 

  삼번의 난으로 길게 이어진 전선 1661년 정월, 젊은 순치제가 죽고(崩御), 그의 둘째 아들 현엽(玄燁/玄曄 / 1654. 5 .4 ~ 1722.12. 20))이 즉위하여 연호를 강희(康熙)로 개원하였다.

 

 여덟 살에 청나라 제 4대 황제가 된 강희제(康熙帝/ 廟號. 聖祖 / 1661 ~ 1722)는, 아버지의 유조(遺詔)에 따라 섭정(攝政)을 두지 않고, 만주시절부터 중신자리를 지켜온 4명의 기인(旗人)들이 정치를 보좌하였다.

 

  그러다가 강희 8년(1669) 5월, 그의 나이 열 여섯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친정을 선언하고 과감하게 보좌정치를 폐지하여, 젊은 황제가 모든 정사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자신 만만한 이런 젊은 황제에게 어쩌면 만주족 전체의 운명까지 가늠할 중대한 시련이 찾아 들게 되었다. 이것을 3번(藩)의 난(亂)이라고 한다.

 

  거의 공짜로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 와 자금성의 인이 될 수 있었던 만주족들에게, 어김없이 역사는 공짜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30 여 년 세월을 보낸 후 그 대가를 엄청나게 요구한 셈이다.

 

  번(藩/fun)이란 변방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청나라의 특이한 행정구역으로, 정복왕조로 들어온 청나라가 처음에는 중국의 남쪽, 즉 화남지방을 다스리기 위해서 설치했고, 이후 북서쪽의 신강(新疆/신쟝), 청해(靑海/칭하이), 서장(西臟/티베트)을 정복한 후, 이곳에도 번을 설치하여 직할령과 구분하였다.

 

  다시 말하면, 청나라는 중국과 만주, 그리고 몽골은 직할령으로 하여 직접통치하고, 멀리 떨어진 변경에는 그 지역에 밝은 유력한 인사나 현지인에게 어느 정도 실권을 주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를 번(藩)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번을 관장하기 위해서 통상적인 통치기구와는 별도로 이번원을 설치하여, 번(藩)에 관한 일을 맡도록 하는 2원적 통치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화남지방에 3번을 설치하게 된 것은, 청으로서는 이한제한(以漢制漢)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명나라 때부터 이곳 바다에서는 해적들이 우글거리고, 육지로 올라서면 정부에 반항하는 세력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남쪽 운남(雲南/윈난)에는 사나운 묘족(苗族/마오족)들이, 빈틈을 노리고 한 몫 챙길 기회 포착에 언제나 여념이 없었다. 실제로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섰을 때, 명의 부흥을 빌미로 곳곳에 정권을 세우고 공공연히 청조에 반기를 든 곳도 이 지방이었다.

 

  그러나 한줌밖에 안 되는 만주 8기만으로는 북변을 지키기에도 힘에 겨웠고, 그 넓은 남쪽에 까지 주둔시킬 군대도 없었으며, 남쪽의 더위와 풍토에 만주 인들이 적응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이곳에 번을 세워 한인(漢人)들로 하여금 한인(漢人)들을 다스리게 하는 이른바 이한제한(以漢制漢)의 묘책을 강구한 것이다.

 

  그래서 명의 부흥 세력들인 남명(南明)이 어느 정도 평정된 순치 16년(1659), 이 화남지방을 크게 세 개의 군관구로 나누고, 번을 설치하여 한인(漢人)으로서 청에 귀부(歸附)하여 공을 세운 유력한 군벌들에게 왕의 봉작(封爵)을 주어 각각 다스리게 했다.

 

  (2) 삼번(三藩)의 난(1673 ~ 81)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으로 들어서는 귀주의 소수민족 대표들광동(廣東/광둥)에는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가, 복건(福建/푸젠)에는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1649)의 아들 경계무(耿繼茂)가 자리잡았다.

 

  그리고 운남(雲南/윈난)에는 평서왕(平西王) 오삼계가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이를 3번이라 하며, 이 가운데 오삼계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상가희와 경중명은 요양(遼陽/랴오양) 출신의 한인(漢人)들로서 명에 입사(入仕)하여 요동지방을 지키다가 1633년 태종 홍타이지에게 패하고, 그 휘하에 들어갔던 사람들로서, 병자호란 때는 조선에도 들어 왔었고, 명과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워 한인(漢人) 8기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들이다. 명나라에서 보면 매국노(한간)다. 하지만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어느 누구 보다도 강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다시 중국에 들어가서는 화남지방을 정복한 공으로 순치 6년(1649) 각각 평남왕과 정남왕으로 봉해 졌고, 정남왕 경중명은 부하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겨 자결하자 왕작(王爵)을 그 아들 계무가 잇게 되었다.

 

  오삼계 역시 요동출신의 한인으로서 산해관을 수비하다가 청으로 돌아서서 이자성과 장헌충의 잔적(殘賊) 소탕에 앞장섰고, 1662년 지금의 미얀마까지 피해간 명의 마지막 세력인 계왕(桂王)을 끝까지 추격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미얀마에서 계왕을 잡아 보내자 이를 살해하여 명나라 최후의 숨통을 끊어 버리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그에게 아부 하듯 그 해 청 태종의 딸을 며느리로 보내고 평서친왕(平西親王)의 봉작을 내렸다.

 

  원래 명나라 최강의 정예를 이끌고 있었던 그에게, 청나라 조정에서는 운남(雲南/윈난)과 귀주(貴州/구이저우)의 병권과 문무관료의 임명권 등 방대한 권한을 주어 이곳을 지키게 하였는데, 장헌충의 유적 및 이곳 묘족(苗族/마오족)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그 무리들까지 합세하여 속칭 10만의 군대를 거느리는 최대의 군벌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군벌로 성장한 오삼계가 조정으로부터는 거액의 군사비를 받고, 티베트와 무역을 하고, 토착민에게는 세금을 걷고, 남해 무역까지 관장하여 큰 돈을 모았다.

 

  막대한 부(富)까지 축적하자, 계왕이 있었던 오화산 궁전을 개축하여 자금성을 흉내 내고, 경국의 미색 진원원(陳圓圓)을 위시하여 4면관음, 8면 관음 등 야릇한 이름을 붙인 천 여명의 처첩을 거느리면서 호강에 받혀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여기에 반청적(反淸的)인 중국의 인사들이 공공연히 모여 들였다. 청나라 조정에서 그를 당할 실력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오삼계는, 엉뚱한 꿈까지 키워가고 있었다. 이런 오삼계에 대해서 멀리 떨어져 있던 베이징의 조정으로서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강희 12년(1873) 3월, 광동(廣東/광둥)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1604 ~ 76)가 70 고령에 접어들자 그 자리를 맏아들 지신(之信)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요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청원을 올리자, 이 기회에 3번 자체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조심스럽게 대두되었다.

 

  이미 명의 부흥세력과 잔적들이 사라진 마당에, 구태여 조정 예산에 절반이나 되는 매년 3천만 냥의 거금을 들이면서까지 이를 두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폐지론 자들의 주장이고, 섣불리 이를 폐지한다는 것은 아직도 불순세력이 남아 있고, 낮잠을 신나게 즐기는 맹수와 같은 번(藩)왕들에게 콧 침을 잘못 주는 결과를 만들어 더 큰 환란(患亂)을 불러 올 수도 있다는 것이 신중론 자들의 주장이었다.

 

  이런 조정의 양론에 대해서, 젊은 강희제는 자신의 용단으로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급보가 오삼계의 귀에 들어가자, 청나라 조정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그로서도 미쳐 몰랐고, 설마 하다가 이것이 기정사실로 굳어지자 곧 반란을 결심했다.

 

  그러나 반란이 성공을 거두려면, 각처에 산재해 있는군벌들과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합세할 수 있는 그럴 듯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미 계왕을 자신이 살해한 뒤라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도 없었던 그는, 결국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배만복명(排滿復明)"이라는 격문을 각처에 띄우고 행동을 개시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물리치고 그가 망치는데 한 몫을 단단히 했던 명나라는 되찾자는 것이다.

 

  비록 합당한 명분은 얻지 못했지만, 그는 노련한 장군답게 우선 운남과 귀주를 장악하고 군세를 곧 바로 호남(湖南/후난)으로 향했다.

 

  이에 호응해서 사천(四川/쓰촨)과 광서(廣西/꽝시)에 있던 녹영(綠營)의 장군들이 가세하고, 이듬해 3월에는 복건(福建/푸젠)의 경정충의 군사들이, 12월에는 광동(廣東/광둥)의 상지신의 군사들까지 가담해, 마침내 3번의 군사를 합한 오삼계는 크게 위력을 떨쳤다.

 

  이에 맞서 자금성의 강희제는, 티베트의 중재 요청과 몽골의 지원을 정중히 거절한 후, 8기군과 그 지배하에 있었던 녹영의 군사들을 동원하고, 예수회 선교사로서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베르비스트(Ferdinand Veriest / 南懷仁/ 1623 ~ 1688)에게 명령하여 경량(輕量)의 대포를 만들어 각 전선에 보내고, 특별 통신망을 조직하여 친히 작전을 지휘했다.

 

  이렇게 해서 동쪽으로는 복건(福建/푸젠)의 해안으로부터 중국대륙을 가로질러 서쪽의 감숙(甘肅/간슈)에 이르기까지 장장 수천 킬로미터의 전선이 형성되고,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긴박한 정황으로 중국대륙이 다시 술렁이게 되었다.

 

  청나라로서는 최대의 위기였다. 녹영의 군사들이란 그 뿌리가 명나라다. 따라서 이들이 언제 돌아설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이미 귀족 화한 만주 2세들로 구성된 8기군은 더위와 낯선 풍토에 지레 겁을먹고,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는 것을 몹시 두려워 했다.

 

  이에 젊은 황제는 하루에도 3, 4백 통씩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전황을 일일이 분석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잘못이 있으면 만주의 왕족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어 벌을 주고, 녹영의 장군들을 교묘히 추켜 세우거나 경쟁심을 유발하여 반란군의 돌파구를 막는데 일단 성공하고, 버티기 작전인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오삼계(1612 ~ 78)는 이미 70 고령을 바라보는 나이가 약점이었다. 수하 장졸들이 베이징으로의 진격이나 강남 점령을 권해도, 양쯔강 이남의 확보에만 급급할 뿐 한 발도 더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명분이 약한 반군 연합세력으로서는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76년 광동에서는 상가희가 그 아들 상지신이 반란에 가담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살하자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복건에서는 1671년 경계무가 죽고, 그의 아들 경정충(耿精忠 / ? ~ 1682)이 뒤를 이어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청군의 공격을 받고 항복한 후, 이번에는 청군에 가세하여 반군 토벌에 앞장을 서 버렸다.

 

  고립된 오삼계(吳三桂)는 1678년 5월 호남(湖南/후난)의 헝양(衡陽)에서 황제에 올라 국호를 주(周)라 하고, 소무(昭武)라 건원(建元) 했으나, 그 해 8월 병이 들어 황망(慌忙)히 저승 길로 들어갔다.

 

  그의 손자 세번(世?)이 홍화(洪化)라 개원하고 뒤를 이었으나, 1681년 10월 곤명(昆明/쿤밍)에서 청군에 포위되어 자살함으로써, 8년간에 걸친 3번의 난은 막을 내렸는데, 강희제가 성급한 기마 민족답지 않게 지구전을 펼친것이 승리의 요인이라고 한다.

 

나. 청의 대만(臺灣 / 타이완) 정복

 

(1) 열강의 대만 진출

 

타이완 전경도  중국 복건성(福建/푸젠)에서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약 150 km 해상에 큰 고구마 모양을 하고 남북으로 뻗어 있는 섬 대만(臺灣)이, 중국의 사서(史書)에 등장한 것은 기원 전 후 동한(후한)시대부터시작 된다.

 

  한서(漢書)에 동곤(東鯤/둥쿤)으로 삼국지에 이주(夷州/이저우)라고 한 것이 지금의 타이완이라고 하는데, 명 대까지만 해도 말레이 - 폴리네시아 계 원주민들이 산간에 거주하였을 뿐 중국의 직접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16세기 이래 동지나 해상에는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의 무역선들이 무수히 내왕하였고, 여기에 곁들여 중국의 밀수업자나 해적들이 바다를 누비면서 이곳에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드나들게 되었다.

 

  1590년 일찍 이곳을 찾은 포르투갈인 들은 이 섬을 일라 포모사(Ilha Formosa)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들의 말 뜻으로는 "아름다운 섬"이라고 한다.

 

  이후 네덜란드가 1622년 자바로부터 북상하여 펑후제도(澎湖諸島)를 점령했다가 푸젠군(福建軍)에게 쫓기자 1624년 타이난(臺南)의 안핑(安平)에 들어와 이곳을 타이오완(Tayouan)이라 부른 것이 청대 이후 섬 전체를 타이완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타이난의 서쪽 약 4㎞ 지점의 외항 안핑을 점령하고 이곳에 유럽풍의 성채(城砦)를 쌓고, 그들의 본국 북부지방에 있는 주의 이름을 따서 제란디아 성(城)이라 하였다.

 

  에스파냐도 1626년 지룽(基隆) 지방의 서랴오섬(社寮島)에 산살바도르성을, 다시 3년 후에는 단수이항(淡水港)에 산토도밍고 성을 각각 축조하고 그들의 지명을 차용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으나, 1642년 네덜란드에게 쫓겨나고 네덜란드가 단독 식민지 경영에 나섰다.

 

            (2) 정성공(鄭成功)의 대만 진입과 청의 대만 정복

 

  한편 이 무렵 중국대륙에서는 푸젠(福建)을 중심으로 정성공(鄭成功 / 1624~1662)이란 자가 강대한 해상 세력을 이끌고 명나라의 부흥정권을 도우면서 청나라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정지룡(鄭芝龍)은 푸젠(福建) 출신으로 서양사람들을 따라 다니며 장사를 하다가 해적 겸 해상밀무역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냈는데, 밀무역에 골치를 앓던 명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불러 달래고, 총병관으로 임명하여 밀무역의 단속을 아예 그에게 맡겼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잡은 정지룡은 밀무역을 독점하고, 해상의 통행세도 징수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겨 재미를 톡톡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돈의 위력이 어떻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자, 푸젠(福建)에서는 주원장의 후손인 당왕(唐王 :隆武帝)을 옹립하여 부흥정권을 세웠는데, 정지룡은 그로부터 왕후의 첩지(牒紙)를 받았고 그의 아들 정성공은 당왕 곁에서 시중 들게 되었다.

 

  정성공은 당왕의 부흥정권으로부터 충효백(忠孝伯)에 봉해지고, 어영중군도독(御營中軍都督)·초토대장군(招討大將軍)이라는 어마어마한 관직도 받았다. 또한 명의 국성(國姓)인 주씨 성을 하사 받고 이름을 정성공에서 주성공(朱成功)으로 고쳤다.

 

  이렇게 되면 산전 수전 다 겪고, 노회(老獪)의 본보기나 다름없는 아버지와, 그 그늘에서 고생 없이 자란 아들 간에는, 현실과 명분이라는 두갈래 길에서 다투게 되고, 다시 고뇌하지 않을 수 없기 마련이다.

 

  아버지 정지룡이 당왕을 도운 것은, 무슨 대의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해상 독점 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방패였다. 새로운 정권에 빌 붙어서 최소한 본전이 나마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푸젠(福建)에 홍승주가 들이 닥쳐 하나하나 토벌하자, 이번에는 재빠르게 홍승주에게 붙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정성공은, 일찍 난징의 태학에서 성리학을 배우면서 대의명분을 몸에 익혔고, 당왕으로부터 받은 분에 넘친 호의를 배반할 수가 없었다.

 

  포모사(대만)의 징크선 그림자료그래서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로 청나라에 완강히 저항하고 공공연히 도전했기 때문에, 아버지 정지룡은 1650년 청군에게 인질로 잡히고 말았다.

 

  청(淸)나라는 그의 아버지를 통하여 회유하였으나 그는 이를 물리치고, 오히려 아버지의 해상권을 이어 받아 진먼섬(金門島)과 샤먼(廈門:아모이)을 근거지로 무역을 하여 군비에 충당하는 한편, 자주 본토의 연안을 공략하고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당왕이 죽은 뒤에는 계왕(桂王 : 永明王 : 永曆帝)을 도와 명의 부흥운동을 계속하였으며, 계왕으로부터 위원후(威遠侯)에 봉해졌다가 다시 장국공(?國公)으로 오르고, 이어서 연평군왕(延平郡王)이 되었다가 마침내 조왕(潮王)이라는 왕작(王爵)을 받았다.

 

  1658 ∼ 59년 그가 벌였던 난징 공략은 기사회생의 일대 결전이었으나 패하여 아모이로 철수하였다.

 

  순치 18년(1661년), 청나라가 연안 백성을 내지(內地)로 옮겨 그와의 관계를 두절시키는 이른바 천계령(遷界令)을 펼치자, 그는 타이완(臺灣)을 눈여겨 보게 되었고, 이를 공략하여 새로운 기지를 확보하고 항청복명(抗淸復明)과 대륙 반격의 근거지로 삼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해 4월, 2만 5천의 병력과 5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타이완으로 들어가, 네덜란드인들이 세운 프로빈시아 성을 우선 점령하고, 그 이듬해 제란디아성을 함락하여 네덜란드인 들을 섬에서 추방하고 타이완에 독자정권을 수립하고 개발에 착수했다.

 

  한편 그의 아들 정경(鄭經)을 진먼섬(金門島)과 샤먼(廈門: 아모이)에 주재시켜 대륙진출의 시기를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9세에 요절했다.

 

  일설에 그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히라도(平戶)출생으로서, 어머니는 일본 여자였다고 한다. 당시 중국의 남해안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중국 해적에 고용되어 수시로 양국 사이를 왕래하였고, 정지룡이라는 거물이 일본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현지처(?)를 두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 진위는 확실하지않다고 한다.

 

  다만 그가 7세 때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일본으로부터 혼자 명나라에 건너가 난징의 태학에 들어갔고, 거기서 전겸익(錢謙益 / 1582 ~ 1664)이라는 당대의 대학자에게 사사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후 정성공의 후계자들은 3번의 난 때, 일시 본토에 출격했으나, 난이 평정되자 타이완 섬에 들여 박혀 상속싸움이나 벌이고 있었다.

 

  3번의 난이 평정된 후 청나라에서는 본격적으로 타이완섬을 공격하자, 강희 22년(1683) 7월, 정성공의 손자는 호복 변발 차림으로 청나라에 항복했다. 이래서 타이완이 비로소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남쪽의 거센 바람을 잠재운 강희제가, 이번에는 말머리를 서북쪽으로 돌리고, 남진해온 러시아를 막고, 텐산북로에 있었던 준가르부 정복에나섰다. 그리고 그가 추구한 것은 왕도정치(王道政治/ 聖王政治)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

 


 출처 :

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  |  글쓴이 : 이길상 원글보기

 

 

 

 

  83. 청(淸)의 발전(發展)(2) - 강희제와 성천자(聖天子)의 꿈

 

  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라싸의 포탈라궁  암석과 모래와 초원으로 형성된 넓은 유라시아 북쪽 몽골 고원 일대는 고비사막을 경계로 내몽고와 외몽고로 나눈다.

 

유목(遊牧)과 기마(騎馬), 이동을 전제로 살아가는 민족들에게 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는

힘에 의한 약탈과, 피가 피를 부르는무서운 보복과 살륙이 정당화 되는 풍조가, 한 시도 편하게 살기가 힘들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관행이 오랜 경험을 통해서 모두에게 손해라는 알게 되었다. 따라서 풍토에 알 맞는 신을 모시고, 인간이면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신의 법을 마련하여 그 계율을 지킴으로서 서로간의 행복을 보장 받기를 원했다.

 

샤머니즘을 숭배하던 몽고족에게도 불교가 전래되고, 윤회(輪廻)·전생(轉生)의 불교적 가치관 또한 큰 매력이었으나, 살생금지의 계율만은 도저히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이를 교묘히 변형 발전 시킨 것이 이른바 라마불교라는 것이다.

 

물론 라마교의 본산은 티베트이고 수도 라싸의 포탈라궁에는 달라이 라마가 정·교 양권을 쥐고 활불(活佛)로서 유목민들의 정신계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들의 언어에서 라마란 스승 중의 스승, 즉 사장(師長)과 상인(上人)을 의미하고 달라이는 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라마교가 본격적으로 몽골 사회에 퍼지게 된 것은16세기 중반으로서, 저 유명한 알탄칸으로부터 왕공 귀족들은 모두 그 후원자가 되었고, 넓은 초원 곳곳에는 흰색의 라마 사원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라마교의 관한 보다 상세한 이야기는 앞으로 많이 나올 것 같다.

 

17세기 청나라가 성립될 무렵, 내몽고 일대에는 차하르부족이, 외몽고 일대에는 할하 부족이 그 서쪽에는 중가르 부족이 비교적 큰 세력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강희제가 3번의 난을 진압하고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을 때, 중가르 부족에서는 갈단이란 자가 나타나 몽골과 티베트를 연결한 라마왕국의 꿈을 키우고자 했다.

 

강희제가 이를 토벌함으로써 전 몽골이 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몽골이 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과정이 우리들에게는 낯설고 따라서 조금은 지루하고 골치도 아프지만 늑대보다 더 사납던 몽골족이 어떻게 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그 일부가 중국에 동화 잠식되어 오늘에 이르렀는지 잠시만 따라 가 보기로 하자.

 

샤머니즘을 믿고 있던 만주족들은 불교를 받아 들인 후로는 그들의 칸을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생각하였고, 중국에 들어가서는 유교(유학)의 가르침에 따랐다. 그러다가 달라이 라마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믿는 라마교 역시 아무 부담 없이 받아 들였다. 이런 것이 동이계 인종의 신앙상 특징이다.

 

농경정착 생활을 했던 중국인들은 살아 있는 동안 행복(福)과 재화(祿)와 장수(壽)를 바랄 뿐 윤회 전생의 과거와 미래는 속임 수에 불과하다 하여 이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이런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국의 전통이다. 따라서 만주족들이 아무 신앙이나 받아 들이는 것은 종교를 이용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간계라고 비난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강희제의 북변 진출14세기 후반 원나라가 붕괴된후, 황금씨족이라고 불렀던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타타르라는 이름으로 주로 내몽골에서,

 

그 서북쪽 외몽골 일대에는 오이라트부족이 각각 유목에 종사하고 있었다.

 

15세기 이들 몽골족들은 명나라 영락제의 계속된 토벌로 세력이 약해졌다가, 외몽골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오이라트부족에서 에센(Esen/也先/야선/? ~ 1454)이란 자가 나타나 전 몽골족을 통합하고 강력한 힘으로 명나라의 국경을자주 침범하였다.

 

1449년 명의 정통제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자신이 포로로 잡힌 토목의변을 당한 후, 다시 오로도스 안쪽의 장성을 겹으로 쌓아야 하는 부산을 떨었으나,1454년 에센이 피살된 후 이들 몽골 사회는 2 ~ 30 년간 다시 분열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내몽골의 타타르 부족에서 다얀칸(DayanKhan / 達延汗 / 1487 ~ 1524)이 등장하여 장자커우(張家口)와 귀화성(歸化城) 방면을 중심으로 세력을 증대하고, 몽골의 대부분을 통일함으로써, 칭기즈칸계(系)가 권위를 회복하였다.

 

  그는 몽골족을 1만호 단위로 6개로 나누어 아들 손자들에게 분봉 시키고, 자신은 차하르(Chakhar / 察哈爾 / 찰합이)를 직할령으로 유목을 하는 한편, 명나라와의 마시(馬市)를 통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고 양국관계는 평화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몽골족의 분화가 시작되었고, 그가 죽은 후 이들 친족 간 다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할하(Khalkha) 강 유역에는 다얀 칸의 여러 아들 중 두 명에게 싱안링(興安嶺) 북부, 즉 할하강(江)의 동쪽과 서쪽의 목지(牧地)를 주고, 공동으로 할하 만호(萬戶)를 삼았는데, 그 후 전자를 내(內)할하, 후자를 외(外)할하라고 불렀다.

 

  내할하는 15세기 전반 남하하여 명나라의 동북변경을 침범하였으나, 청 태종에게 정복되고 이후 청에 복속하였다.

 

  다얀칸으로부터 인산(陰山)산맥 부근을 영지로 받았던 알탄은,그의 조부 다얀칸이 죽은 후 자주 명나라를 약탈하는 이른바 북로(北虜)의 무리가 되었고, 다시 외몽골을 원정할 때, 외할하는 알탄을 수행하여 이후 서쪽으로 나아가 이른바 할하 3부족을 형성하고 지금의 외몽골 전역을 차지하였다.

 

  이 때 알탄은 오이라트부족을 더 서쪽으로 내몰고 카라코럼과 청해를 차지하고 티베트까지 들어가 라마교를 받아 들였는데, 이때부터 늑대보다 더 사납던 몽골족이 양처럼 순해진 불가사의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아마도 윤회 전생에 겁을 먹고 후세에는 정말 늑대로 태어나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장자커우(張家口)의 북동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다얀칸 직계의 차하르(Chakhar/察哈爾/찰합이) 부족은, 그 후 알탄으로부터 압박을 받아 1547년 싱안링(興安嶺) 동쪽으로 이동한 후, 명나라의 랴오둥(遼東)을 빈번하게 침범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북동에서 일어난 청(淸)나라에 눌려 1627년경 다시 싱안링 서쪽으로 옮겨 하라친부(部) 등을 멸망시키고 다퉁(大同)·쉬안화(宣化) 인근에 터를 잡았으나, 1635년 청 태종(太宗)에게 멸망당하고 복속되었다.

 

  청태종은 이들 부족을 해체하고, 그들의 뛰어난 무력을 살려서 몽고 8기를 편성하는 한편, 그들을 한인과 분리시키고 만주족과의 통혼을 장려하였다. 이후 내몽고는 자주성을 잃고 청나라의 지배하에 놓였으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중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래서 내몽골은 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외몽골 일대에는 다얀칸 계통의 할하 3부족이 독립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서쪽에는 이들에게 밀려난 에센 계통의 여러 부족들이 흩어져 있다가, 초로스(綽羅斯) 부족의 추장 카라쿠라란 자가 오이라트 전 부족을 통일해서 군주가 되었는데, 정복된 이들 전 집단을 중가르부(Jungar)라 하였다.

 

초로스 왕가의 3대가 되는 갈단(Galdan / 1649 ~ 1697)이란 자는 알타이 산맥 서쪽에 근거로 다라이 라마의 지지를 얻어 라마교·중가르 세계국가의 건설의 꿈을 안고, 1677년 오이라트 전체의 수장이었던 장인을 죽인 후 칸(汗)을 자칭하고, 1682년에는 타림분지의 회부(回部)도 복속시켰다. 이어 1688년 알타이산맥을 넘어 외몽골에 침입하여 할하부족과 정면 충돌했다.

 

힘에 밀린 할하 3부족은 청에 의지하고 전 부족이 내몽고로 피난했다. 강희제는 만리장성 밖에서 친히 할하족의 왕공들을 인견하고, 1690년 지펭(赤峰) 부근에서 갈단 군을 물리치고 외몽고를 청에 복속시켰다.

 

강희 35년(1696년), 갈단이 다시 침입하자, 강희제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고비사막을 넘어 차오모도(昭草多)에서 갈단을 격파하였는데, 황제가 직접 고비사막을 넘은 것은 명의 영락제에 이어 강희제가 두 번째이다.

 

  한편 라마왕국 건설과 몽고통일에 꿈이 깨진 갈단은 이듬해 알타이 산중에서 독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그 후 갈단의 아들 손자 대에 다시 티베트를 침공하고 끈질기게 라마왕국을 실현코자하였으나, 결국 청의 옹정, 건륭제에게 토벌되고 이후 중가르부와 티베트는 중국의영토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갈단이 패사(敗死)한 뒤 할하 부족은 다시 외몽고로 돌아가, 이후 1부(部)가 증설되어 4부로 되었으며, 청나라는 이를 번부로 삼아 이번원(理藩院)에서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1년 신해 혁명 후 청조가 무너지고. 1924년 소비에트의 지원으로 독립하여,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국가가 되었다가, 소련의 해체 후 서방에 문호를 개방, 몽골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주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있다.

 

  여기서 우리들이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만리장성이 본래의 기능을 잃고 하나의 역사적인 유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청의 세력 범위는 만리장성을 훨씬 더 넘어섰기 때문이다.

 

 

        나. 네르친스크 조약(Treaty of Nerchinsk / 尼布楚條約)

 

외몽골의 초원지대만주의 중·남부 지역은 청조의 발상지인 동시에, 8기의 영지(領地)라 하여, 중국본토와 분리해서 특별한 군정구역으로 두고 매우 신성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外) 싱안링(興安嶺) 산맥이 높낮이로 기복(起伏)을 이루고 흑룡강과 송화강이 도도히 흐르는 북만주 일대는 만(滿)·몽(蒙)계의 여러종족이 유목이나 수렵에 종사하는 원시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그들을 같은 종족이라 해서, 수시로 징발하여 전투시에 소모된 만주8기의 보충병으로 충당하였을 뿐, 이곳은 그들의 자치에 맡기고 있었다.

 

이런 신비에 가까운 태고 그대로의 땅에, 금발(金髮)과 벽안(碧眼)의 백인종들이 나타나 일확천금을 노리면서 소박한 원주민 사회를 무법천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17세기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세력을 계속확장 하다가, 1598년 류리크왕조가 단절되고, 1613년 로마노프왕조가 갓 성립되었으나, 내란으로 영일이 없었다.

 

모스크바 러시아가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주변을 통합하자, 이에 반발해서 변경지대에 모여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고,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약탈과 용병으로 때로는 반란으로 위력을 발휘했던 기마전투에 능숙했던 무리들을 카자크(코자크)라 부른다.

 

카자크로서 두각을 나타냈던 라진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몸이 갈기갈기 찢겨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지만, 이보다 백년 앞서 예르마크(YermakTimofeyevich / ? ~ 1584)라는 카자크의 또 다른 수령은 처음에 볼가강·돈강 상류지역에서 약탈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가, 이반 4세의 토벌을 받고 카마강 상류로 도망가서 페르미의 스트로가노프가(家)의 보호를 받았다.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스트로가노프가(Stroganov family)는 시베리아 경영의 전진기지로서 정부의 지지를 받았고, 영지 내에 요새를 구축하고 사병을 거느릴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 스트로가노프가에서 예리마크에게 시베리아 정복을 맡겼다.

 

곰처럼 한겨울의 눈 속에서도 노숙을 할 수 있는 카자크 기병대를 이끈 예리마크는 1581년 우랄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향하여 이르티시강 유역의 시비르한국을 공략, 왕 쿠춤의 군대와 이르티슈 강변에서 싸워 크게 이겼고, 이듬해 수도 시비르(이스케르)를 점령하여 정복지역을 이반 4세에 바치고 원조를 구하였다. 시베리아라는 어원은 이 시비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584년 8월 갑자기 나타난 쿠춤군의 기습을 받아 이르티슈강으로 쫓기다가 예르마크는 익사하여 스트로가노프가의 동진은 잠시 주춤 했으나, 당시의 북만주에는 금과 은 그리고 모피가 무진장이라는 소문은 상업자본가로 성장한 이 집안에서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도중에 원주민들과 싸움을 계속하고 얼음과 추위와 원시림으로 뒤덮인 시베리아 땅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여, 1638년에는 오츠크해에 도달했다.

 

여기서 러시아의 군인들과 상인들은 방향을 남으로 돌려 수렵족인 퉁구스 계의 원주민들을 압박하면서 흑룡강을 남하하여 네르친스크,아르바진에 전진기지를 구축했다. 러시아가 아류산 열도와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로 진출한 것은 이 보다 훨씬 후의 일이다.

 

북만주에 진출한 러시아인 들은 질 나쁜 보드카(vodka)로 원주민을 취하게 만들고 뺏고 빼앗기는 약탈이 공공연히 자행되자, 이들 원주민들은 반항하면서 남쪽으로 밀려났다.

 

  강희제는 정식으로 러시아 정부에 항의하고 곧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 러시아는 사절을 베이징에 보내어 선물을 진상하고 통상 이외에는 딴 뜻이 없음을 천명하자, 서양식 외교를 몰랐던 강희제는 이를 조공으로 받아들이고 신하의 예를 갖춘 것으로 생각하고 일단 양해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계속 주둔하면서 침략의 손길을 송화강까지 뻗치자, 일확천금을 노리고 몰려드는 러시아인들 의 숫자도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이렇게 러시아의 침략이 한창이던 약 30년간, 조선에서도 청의 요청에 따라 두 차례 이들의 토벌 길에 올랐는데,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칼럼77호 17세기의 러시아 참조)

 

  3번의 난과 대만 정복이 이미 끝났고, 갈단의 침략을 저지한 청나라에서는 드디어 적극책으로, 돌아서 강희 28년(1689) 대군을 파견하여 아르바진을 공격하는 한편, 외교교섭도 병행하여 네르친스크에서 양측대표가 담판에 들어갔다.

 

  이래서 국경선 이외 싱안령 즉, 야블로노이와 스타노보이두 산맥과 아루군 강으로 확정되고, 러시아, 만주, 중국, 라틴 4개어로 조약문이 작성되었다.

 

  이것을 네르친스크 조약이라고 하는데, 당시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섭정 소피아가 정권을 잡고 있다가 총병대의 반란으로 실각하고 표트르 1세가 제위에 복귀하였으나, 그는 아직 17세의 나이로서 그 모후가 정치를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복잡한 국내 외 사정은 몹시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에, 담판은 청나라의 요구가 대부분 수용되었고, 청나라로서도 중국 역사상 유례없은 국경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베이징에 머물고 있었던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베르비스트 등은 강희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러시아에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다. 성천자(聖天子)의 꿈

 

40 대의 강희제네르친스크조약이 체결된 1689년은 강희제의 나이가 설흔에 접어 들었을 때다. 같은 시기, 앞서 이야기와 같이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17세의 소년황제였고,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마흔 한 살의 장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동·서양이라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대왕 혹은 대제 소리를 들었던 이들간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모두 열 살 이전의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잘 지켰을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살림으로 늘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어떤 루트였던 간 서로가 통하고 있었다.

 

  다만 강희제는 중국인들이 혐오(嫌惡)하는 동이(東夷)계 이적(夷狄) 출신의 오랑캐로 태어났다.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세운 창업의 군주도 아니고, 새로운 정치모델을 창안한 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나 표트르 대제 처럼, 어린 시절 혹독한 시련이나 큰 고생을 당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랑캐 출신의 이 황제가, 언감생심 공자의 수제자가 되기 위해서 중국 역대 황제 중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 내기 힘들었던 철저한 금욕생활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꿈을 키웠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주자가 가르친 성리학에 따르면 오랑캐는 오랑캐일 뿐 결코 성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성천자가 되기 위한 그의 희생적인 노력은, 황제가 아닌 일반인들도 하기 힘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에 관한 일화와 역사의 평가는 수 없이 많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강희제가 여덟 살에 황제가 되고 열 여섯 살 때 친정을 시작했으며, 예순 아홉 살로 타계할 때까지, 61년간 제위에 있었던 것은 중국 역사상 그가 처음이다. 그렇다면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꾀나 난해한 과정을 거쳐, 자기 희생이라고 할 수 있는 수신(修身) 단계를 그는 어떤 모습으로 임했는가?

 

  서양 선교사들이 전하는 그의 모습은 "황제의 키는 조금 크며, 약간 살이 찐 얼굴에는 마마자국이 있고, 이마는 넓고 코와 눈은 중국인들처럼 작으며, 그 동작은 부드럽고 정중하였다"라고 전하는 것을 보면, 전형적인 퉁구스계 남성이다.

 

  노년기 황제 자신이 스스로 말하기를 어려서부터 사냥을 시작하여 호랑이 135마리, 곰 20마리, 표범 25마리, 늑대 96마리, 그 밖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의 짐승을 잡아 사냥 솜씨를 자랑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뛰어난 자 만이 칸이될 수 있었던 그들 수렵사회에서, 황제로서의 자질이 손색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장정이 꿈쩍 달 싹도 못하는 강궁(强弓)을, 손수 매기고 능히 당기는 활의 명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호랑이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명의 수녀제(秀女制)를 계승·도입하여 많은 후비(后妃)를 두었고, 그 후비들로부터 35명의 황자(아고)와 20명의 황녀를 출산하였다고 하는데, 도합 55명의 자녀를 두었다면, 오늘의 가치관이나 당시 서양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망령 아니면 타락이다.

 

  그렇지만 순치제가 만든 조법은 황제의 통정이 남녀간 정사가 아니라 많은 자손을 얻는데 있었고, 이런 아버지의 유훈을 그 아들인 강희제는 철저히 지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도 18명의 왕자와 4명의왕녀를, 9대 임금 성종은 15명의 왕자와 11명의 왕녀를 각각 두었지만, 이들 군주가 호색한이 아니라 명군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명의 수녀제란 황실의 피를 신선하게 하고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 사족의 여아가 12세가 되면 궁중에서 생활하게 하였다가, 그 중에서 자질이 뛰어난 자를 가려 후비로 삼았던 제도다. 강희제는 이 제도를 받아들여, 만주기인들의 딸 가운데 12살이 되면 궁중에 수녀로 보내게 하여 이들을 가려서 후비로 삼도록 제도화 하였던 것이다.

 

  그는 왕성한 체력을 가졌으면서도 술과 담배를 입에대지 않았고, 반면 피를 토하면서까지 4서 5경은 물론,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서 서양의 학문까지도 폭넓게 익혔다.

 

  그런가 하면 집안 살림을 아끼기 위해 궁중에서 사용하는 화장품과 향응비를 전부 없애고, 명나라 때 10만명이나 되었다는 환관과 궁녀의 숫자를 4백명으로 줄였고, 황제의 옷 치장도 매우 검소했다.

 

  그런 한편으로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황하의 치수를 위해 하도총독(河道總督)을 두고, 강희 16년(1677) 개수공사에 착수해서 7년만에 완성시켰다.

 

  소작인을 지주의 착취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토지와 함께 매매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흉년이 들었을 때 토지세를 감면할 경우 소작료도 감면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강희 20년(1681) 이후 사회경제가 신속히 회복되었으며, 인구가 증가하고 많은 도시와 농촌이 안정되었고 번영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정치 구호를 내 걸어도 실리가 없으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 특히 계산이 빠르고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중국인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들이 국가에 대한 의무는 세금뿐이다.

 

강희제는 군사비 지출이 가장 많았던 3번의 난 중에도 매년 3 ~ 4백만냥의 감세 조치를 취해 ,강희 50년(1711)의 발표에 의하면 50년간의 감세 총액이 1억만냥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두세(人頭稅)를 강희 50년을 기준으로 장정수 2450만 명을 정수로 하고, 그 후의 증가분에 대해서는 매기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황제의 즉위 50년을 기념하는 대단한 선물이었다.

 

  인구 증가에 비례해서 토지면적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구증가에 맞추어 인두세를 증대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금징수를 위한 장정의 수를 고정시키고, 이보다 증가한 인구를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으로 등록시켜 이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중국인들에게 만주인들은 오랑캐가 아니라 구세주가 아니면 미륵보살인 셈이다. 민심이 따르는 것은 말할 것도없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서양의 학문을 서학(西學)이라고 불렀다.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천문, 역법, 수학, 통계, 지리 등 폭 넓게 배우고 익혔으나, 이들이 설교하는 크리스트교에 관해서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그대들은 아직 천국에 가 있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천국 일만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일은 믿지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무엇이든 쓰일 때가 따로 있는 것이며, 상제(上帝)가 우리들 손에 쥐어 주신 것을  잘 활용해야 한다. 그대들의 걱정은 오직 죽은 사람에게나 고마운 일이니, 그 걱정은 죽은 다음에나 하는 것이 낫겠다. 짐은 저승 일에는 흥미가 없다.....

 

  이런 황제 앞에서 선교사들은 손을 벌릴 틈이 없었다. 중국의 축첩(蓄妾)제도와 현세적 사고의 벽을 깨뜨리기에는 그 벽이 너무나 두터웠다. 그래서 카톨릭의 신부들은 중국에서 전도는 오직 빈민들에게서만 효과를 거둘 수있다고 말하였다는데, 일부일처란 이들 빈민들에게만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사회에서는 하위 층에 불과한 승려계급이, 서양에서는 높은 사회적 신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중국인들로서는 이상한 일로 보였다.

 

  어쨋거나 강희제가 서양 신부들의 손을 빌려 10년만에 청나라의 실측지도를 만들었는데,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라고 이름 붙인 그 원도는 오늘날 전하는 것이 없고, 당밀이라는 프랑스 왕실 기사가 만들었다는 동판에 의해 소위 "당밀의 지나(支那)지도"가 프랑스에 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중국인들은 지구는 네모로 되어 고정되어 있고, 해와 달을 비롯한 천체가 이 방형(方形)의 지구를 돌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구체천동설이 아니라 방형천동설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희제가 처음에는거리를 일일이 재고 그것을 그대로 네모로 된 종이에 옮겼다. 이렇게 되고 보니 위아래가 맞지를 않았다. 그래서 서양선교사들에게 명령해서 천체를 기준으로 삼각측량을 하고 경 위도를 그려서 중국의 실측 지도를 만든 것이 황여전람도 였다.

 

강희 16년(1677) 자금성의 건청궁 서쪽에 학문소를 열고 이름을 남서방(南書房)이라 하였다. 황제는 틈틈이 이 남서방에 들려, 출사한 사람들을 상대로 역사, 학문,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이야기하고, 이야기에 흥취가 돋구면 밤이 가는 줄도 몰랐다. 이 남서방에 모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강희자전(康熙字典)을 비롯한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교적인 성군의 길에서 황제로서는 문무를 겸전한 모범생이 아니라 우등생이었지만, 그도 제가(齊家)에서는 실패한 군주에 속한다.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고금동서 천민에서부터 황제에 이르기까지 안타깝게도 다를 바가 없었다. 강희제는 만주 전래의 전통을 깨고, 중국식의 황태자를 미리 세웠다가 단단히 실패하고 말았다.

 


출처 : 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  |  글쓴이 : 이길상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