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강희제 [康熙帝] (1)

영국신사77 2007. 1. 15. 15:07

              강희제 [, 1654.5.4~1722.12.20]

 

 

  중국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1722). 중국 역대 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삼번의 난을 평정한 뒤 국가는 재정적, 내정적으로 안정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이름 현엽(/). 시호 인황제(). 묘호 성조(). 연호 강희. 순치제()의 셋째 아들로, 아들 35명, 딸 20명을 두었다. 순치제의 유명()으로 8세 때 즉위하고, 14세 때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다.

 

  청나라의 지배는 그의 재위기간에 완성되었으며, 다음의 옹정제(건륭제()로 계승되어 전성기를 이루었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의 유조()로 4명의 만주 기인()이 보정대신()이 되어 집정()의 임무를 맡았으나, 1669년부터 실질적인 친정이 되었다.

 

  당시 명()나라의 마지막 세력이었던 계왕()은 이미 멸망하고, 반청세력이었던 정성공()도 사망하여 중국의 지배가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평정()을 맡았던 윈난[]의 평서왕(西) 오삼계(), 광둥[]의 평남왕() 상가희(), 푸젠[]의 정남왕() 경계무()와 그 아들 정충()의 삼번왕()은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독립정권을 유지하며 청나라를 위협하였다.

 

  1673년 평남왕의 철번()을 계기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단호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1681년 평정에 성공하였으며, 대만의 정씨()도 내분으로 1683년에 멸망함으로써,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지배가 완성되었다.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이에 소비되던 방대한 비용이 필요없게 되어, 국가재정은 여유가 생겨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50년간의 면세 총액이 1억 냥()을 넘었으며, 1712년에는 인두세()를 정액화하고, 조운()을 정비하며, 황허강[]의 치수()에 힘쓰는 등 내정상으로도 안정된 시대를 이루었다.

 

  외정에 있어서는 러시아의 남하를 방위하기 위하여 아이훈성[]을 구축하고, 1689년 유리한 조건으로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었다. 1690년에는 외몽골[] 준가르부[]의 갈단[]을 토벌하고, 1691년에는 칼카부를 평정하였으며, 1696년에는 차오모드[]에서 갈단군[]을 괴멸시키고, 1697년에 갈단을 자살하게 만듦으로써, 외몽골을 판도 안에 집어넣었다. 그 후 갈단을 계승한 체왕아라푸탄[]이 티베트에 들어가 세력을 떨치게 되자, 1718년부터 티베트에 원정하여 그 지배권을 빼앗고, 중국의 영토를 크게 확대하였다.

 

  국내외 정치에서의 성공은 문화에도 반영되어 중국 최대의 유서()인 《고금도서집성》의 편찬과 《강희자전》의 출판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또한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도입하게 하였으며, 중국에서 처음으로 위도()를 적은 정밀한 지도 《황여전람도(輿)》를 작성시키는 등 문화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만년에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겪고, 황태자를 폐위시키기도 하였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1722년 12월 20일 병사하였다.

 

 

 

                중국 청나라의 제 4대 황제 <강희제>
                                                                                                     navjinho ( 2005-11-05 )

                          그레이트 리더 강희제

 

 

                                      왜 강희제 인가?

 

  얼마전 선저우(神舟) 5호의 발사 성공과 더불어 온 중국이 열광하고 환호했다. 선저우 5호의 성공은 중국의 눈부신 발전과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것을 가능케 했던 오늘날 중국의 지도부가 벤치마킹하기 위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 있다면 과연 누구일까? 진시황제? 한고조 유방? 한무제? 원태조 칭기즈칸? 명태조 주원장? 이 모두가 아니다. 그럼 누구일까? 다름아닌 '강희제'다. 요즘 중국 최고위급 관리들 사이에서는 '강희제 따라 배우기'가 한창이라고 한다. 특히 장쩌민과 후진타오 주석은 사람들에게 강희제를 읽으라고 독려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몇 해 전 중국 관영 CCTV에서는 강희제의 치세를 다룬 '강희제국'을 황금시간대에 방영해 이른바 '강희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강희제인가?


                  ‘믿기지 않는 리더쉽’의 주인공 강희제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다. 권력은 10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60년 넘게 권력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그 권력을 그 다음 대(代)에도 탄탄대로 위에 올라서게 만든 믿기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강희제다.

 

 중국 청나라의 제 4대 황제인 강희제는 1661년부터 1722년까지 무려 61년간 중국을 다스렸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제(秦始皇帝)로부터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부의(溥儀)에 이르기까지 220명에 달하는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황제자리에 앉아 있었던 사람이 바로 그다.

 

  기간만 오래도록 황제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다.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증손자인 강희제의 치세동안 만주족이 세운 청왕조는, 중국 전체에 대해 그 통치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15만 명 남짓한 소수민족을 가지고, 그 1,000배가 넘는 1억 5000만 명의 중국 한족을 이끌어 간 그 믿기지 않는 리더십의 주인공이 바로 강희제다.

 

 청왕조의 태조 누르하치가 만주 일대를 평정한 후, 2대 태종 홍타이시 때를 거쳐 3대 세조 순치제에 이르기 까지 만주족 전사들은, 명왕조와 전쟁을 계속했다. 결국 명왕조를 군사적으로 복속은 시켰지만, 한족들의 자존심은 만주족 출신의 청왕조에 봉사할 수 없다는 입장이 완강했다. 그 완강한 민족적 저항의 벽을 뚫고, 거대민족 한족의 에너지를 새로운 국가 건설에 동원해 내는 믿기지 않는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이 바로 강희제다. 아울러 그는 아들 옹정제, 손자 건륭제에 이르는 3대 130여 년 간의 찬란했던 전성기를 구가하게 만든 장본인이자 시발점이었다.

 

 강희제는 타이완과 티벳을 복속시켜 오늘의 중국 지도를 그린 인물이다. 또 그는 자기 모국어가 아닌 중국어를 자라면서 몸소 익히고 오늘날 '강희자전'으로 더 잘 알려진 방대한 중국어 사전을 편찬해 냄으로써, 오늘의 중국어가 설 기반을 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힘으로 영토를 넓힌 무력 군주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고풍을 진작시킨 탁월한 문화 군주였다.

 

bb한마디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믿기지 않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리더였던 것이다. 만주족 전사들이 명왕조를 무너뜨리고 베이징에 입성해 중국 전체를 평정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분명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 기적을 지속시켜 청왕조를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 놓고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3대 130여 년 동안 지속된 청왕조의 찬란한 전성기를 연 것은 기적 그 이상의 일이었다.

 

 강희제는 과연 어떻게 15만명 남짓한 변방의 소수민족이었던 만주족을 이끌고, 당시에 이미 인구 1억 5000만 명이 넘는 거대민족 한족을 268년간이나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일까? 게다가 61년이란 긴 세월동안, 황제로서의 리더십을 지속해서 발휘할 수 있었던 그 믿기지 않는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또 그 유례가 없는 문무겸전의 믿기지 않는 리더십의 비밀은 어디에 있던 것일가? 이런 물음을 던지며 '강희제 리더십'의 실체와 만나 보도록 하자. 

 


                                 롱런한 CEO 강희제

 

 천자(天子)로 불린 중국의 황제는 특별한 존재였다. 오직 황제만이 얼굴을 남쪽으로 향해 남면(南面)할 수 있었고, 모든 신하들은 북쪽으로 얼굴을 향해 그를 우러러 보아야 했다. 또 황제만이 붉은 먹물로 글씨를 썼으며, 모든 신하는 검은 먹물만 써야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황제'라는 글자는 어떤 문서에서나 줄을 바꾸어 새로 시작해야 했고, 다른 줄의 첫머리보다 반드시 올려서 써야만 했다. 더구나 아무리 높은 대신이라 할지라도, 천자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황성의 첫 번째 문인 대청문을 지나 모두 7개의 문을 거쳐 약 2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가야 했다.

 

  그런가 하면, 예로부터 천자는 일일만기(一日萬機), 곧 하루에 1만 건의 사무를 처리한다고 이야기되었다. 다소 과장된 것 같지만, 실제로 황제의 하루는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해서 선대의 가르침을 담은 조직과 보훈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침 7시부터는 대신들과 만나서 정치를 논의하고 연이은 접견을 오후까지 계속했다. 늦은 오후에는 학자들을 불러 경서와 역사강의를 듣고, 저녁 7~8시부터는 지방관들이 보내온 주접(奏摺; 관료들이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는 일종의 비밀통신)을 꺼내 읽어, 이것에 대한 답장 즉 유지를 썼다. 결국 제대로 하려면 엄청난 격무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중국 황제의 자리였다.

 

  청왕조를 연 태조 누르하치와, 그 다음 대인 태종 홍타이시까지는 만주에서 살았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들판을 쏘다니며 사냥을 일삼았고 조정의 격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3대 세조 순치제가 명왕조를 멸망시킨 뒤, 베이징에 입성한 후 그는 스물셋 한창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순치제의 아들로 청왕조의 4대 황제가 된 이가 바로 성조 강희제이다. 여덟살 나이에 황제에 오른 강희제는 5년간의 섭정체제를 거친 후 재임 6년차부터는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61년동안 청왕조를 이끌었다. 사상 유례없이 롱런한 황제였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사실 중국의 황제들은 대부분 장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강희제가 말년에 자신의 상유(上諭), 곧 미리 써 놓은 유서에서도 언급했듯이, 중국황제들 중에 흰수염이 날 때까지 살아있던 경우가 많지 않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만큼 중국 황제들은 장수하지 못하고 대부분 단명에 그쳤다. 진시황제(BC256~BC210)가 불로초를 찾으라고 그토록 독려했다지만, 그 역시 환갑을 넘기지 못했다.

 

  대부분의 중국 황제들이 장수하지 못하고 단명한 까닭은 두 가지 상반된 이유로 해석된다. 하나는 격무 탓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나친 방사(房事) 탓이다. 국정에 충실하려던 황제의 경우에는 격무에 시달리다 죽기 일쑤였고, 환관과 대신들한테 실질적인 국정을 찬탈 당한 황제의 경우에는 그저 궁안에서 볼모나 마찬가지의 신세에서 방사(房事)나 즐기다 조로(早老)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강희제는 이 두가지 함정을 모두 피해갔다. 그는 환관과 대신들에 둘러 싸인 명목상의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격무에 시달렸지만, 문약(文弱)에 빠지지 않고 광야를 누비던 만주족의 핏줄답게, 틈나는 대로 사냥을 즐기며 그것을 견뎌낼 만한 체력을 유지했다.

 

  말년에 가서 다소 몸이 쇠하긴 했지만, 그래도 강희제는 강건한 인물이었다. 칭하이(淸海)에서 돈도브의 군대를 격파하고 티벳으로 진격해 그것을 복속시켰던 것이 강희 59년 즉 그의 나이 67세 때였으니 말이다.   

 

                               문무 겸전의 리더 강희제

  

  강희제는 대단한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그는 사물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그는 유달리 천문학, 지도제작, 광학, 의학, 대수학 등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그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좋아했다. 서방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들과도 자주 어울리곤 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공학적, 의학적, 예술적, 천문학적 기량을 높이 평가하고 이들을 적극 활용했다. 사실 강희제는 청소년기가 되어서야 한자를 배웠지만, 열심히 한학을 배운 덕에 왠만한 학자 못지않은 상당한 한학 실력을 갖추었고 글씨도 달필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소림사 현판도 강희제의 글씨라고 한다. 더구나 강희제는 주자학과 수학, 자연과학 등에 정통한 호학인(好學人)으로 4만 9000여 자가 담긴 중국 최고 최대의 사전인 <강희자전(康熙字典)>을 비롯해, 당시(唐詩)를 모은 <전당시(全唐詩)>, <주자전서>와 <성리대전> 등을 편찬한 탁월한 '문화군주'였다. 게다가 강희제는 학구열까지 대단한 사람이었다. 책을 보다가 피를 토할 정도로 면학에 힘썼는가 하면, 한인 출신의 유학자에게서 주자학을, 예수회 출신의 서양인 신부로부터 자연과학을 전수받는 등, 배움에 있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바로 강희제의 이런 호학과 향학열 그리고 호기심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가, 청왕조의 문화적 전성기를 이뤄낸 바탕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강희제는, 결코 문약(文弱)에 기운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대단한 무력을 과시한 황제이기도 했다. 강희 20년인 1681년에 '삼번(三藩)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명왕조의 잔존세력을 일소하였고, 2년 후인 1683년에는 타이완을 점령해 병합했다. 또 그 2년 후인 1685년 강희 24년에는 러시아 군대를 패퇴시키고 알바진 요새를 공략했으며, 그 후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켰다. 그런가 하면 1696년과 1697년에는 준가르 전사들의 지도자 갈단을 정벌하러 나서 결국 그를 자결케 했고, 사망하기 두 해 전인 1722년, 강희 59년에는 티베트를 공략해 복속시켰다. 현재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는 중국의 지도는, 이 시기에 대체적인 윤곽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강희제의 치세를 세계사적으로 비교해서 보면 이렇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즉위한 것은 강희 21년 즉, 1682년이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사망한 것은 강희 54년 즉, 1715년이었다. 결국 강희제의 시대는 유럽의 절대주의 왕정과 맞물리는 시기였다. 하지만 당시 청왕조는 러시아는 물론 유럽 최강이었던 프랑스보다도 국부(國富)면에서 앞섰다. 한마디로 강희제는, 그의 치세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강대한 나라의 CEO로, 61년을 지낸 셈이었다. 바로 문무겸전의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말이다.  


                                 대통합의 리더 강희제

  

  청왕조를 세운 만주족과 그 지배를 받게 된 한족 간에는 먹거리가 사뭇 달랐다. 더구나 청왕조 초기에는 이른바 만주족의 만식(滿式) 먹거리와 한족의 한식(漢式) 먹거리 간의 차이 만큼이나 만주족과 한족간의 민족적 갈등과 불화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만주족은 15만여 명에 불과했고, 한족은 그 100배가 넘는 1억5000여만 명이었다. 청왕조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족의 참여가 절실했다. 그런 이유로 강희제는 만주족과 한족 간의 갈등과 불화를 씻고 민족간 화해와 통합을 이루기 위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고민 끝에 던져진 강희제의 카드는 언뜻 보기에 의외의 것이었다. 다름 아니라, 상호 이질적인 만주족 먹거리인 만식과 한족의 먹거리인 한식을 한데 모아 놓으라는 것이었다. 강희제는 만주족과 한족간의 민족적 화해와 화합을 이루기 위해, 전국적으로 만주족과 한족의 고유한 먹거리들을 모아 올리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요리 비법, 색상, 맛과 향, 건강식의 네 가지 기준을 적용해 108가지의 음식을 최종 선발해 차려 놓았다. 그리고 이 음식들이 차려진 자리에, 만주족 출신과 한족 출신 관료들을 함께 불러모아 대연회를 연 것이다. 이것이 이름하여 '만한전석(滿漢全席)'이다.

 

  강희제가 만한전석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한마디로 음식의 나눔을 통한 민족간의 화해와 통합이었다. 먹거리의 통합을 통해 만주족과 한족간의 화합을 꾀한 그 발상이 참으로 탁월하지 않은가. 아무리 서로 으르렁거리고 질시하다가도, 먹는 자리에 와서는 서로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강희제는 바로 그것을 노렸을 것이다. 결국 강희제의 이런 감각있는 화해와 통합의 노력 덕택에, 15만 명 남짓했던 만주족이 당시 1억 5000만 명이 넘는 한족을 268년간이나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 단지 지배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만주족의 에너지와 한족의 에너지를 뒤섞어 내어 대중화(大中華)의 시너지를 이뤄낸 것이 아니었을까?  


         서번트 리더쉽(servant leadership)의 선구자 강희제

 

  강희제가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名君)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독특한 통치 철학에 힘입은 바가 컸다. 강희제의 통치 철학은, 한 마디로 '국궁진력(鞠躬盡力)'으로 요약된다. '국궁'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구부린다는 뜻이고, '진력'은 온 힘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국궁진력'이란, 존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구부려 온 힘을 다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 해석해 봐도, 이 말은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황제가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당시 동아시아 왕조 국가에서는 그 어디서도 있을 수 없는 발상이었다. 당연히 신하들이 "국궁진력이란 말은 신하가 쓰는 말이므로 황제가 쓰기에는 적당치 않다."며 진언에 진언을 거듭해 올렸지만, 강희제는 뜻을 굽히지 않고 '국궁진력'의 말을 고집했다.

 

  그리고 오히려 한술 더 떠, "짐은 하늘의 종이기 때문에 어떤 일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군주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쉴 수가 없는 것이다." 면서, 자신의 황제로서의 소임이, 묵묵히 하늘과 백성을 향해 '국궁진력'을 실천하는 것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모든 것과 구별되고, 모든 것 위에 있으며, 모든 것을 다 가진 황제가 '몸을 구부린다'는 의미의 '국궁'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던 시절에, 강희제는 스스로를 하늘과 백성의 종이라고 여기며, 죽는 날까지 '국궁진력'의 자세를 견지하고 이를 실천했던 것이다.

 

  이처럼 진심으로 '국궁진력'을 다했던 그였기에, 강희제는 오늘날에도 장쩌민과 후진타오 주석 등 중국 지도부가 "신중국 건설을 위해 강희제를 배우자."고 합창할 만큼, 감동어린 리더십의 전형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국궁진력' 이야말로,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곧 '섬김의 리더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뒷마무리마저 깔끔했던 그레이트 리더 강희제

 

  강희제는 죽기 5년 전인 1717년, '고별상유(上諭)' 즉 사실상의 유언을 남겼다. 근 60여 년의 치세를 돌아보며 남긴 고별상유 치고는 너무나도 짧은 글이었지만, 강희제는 그 짧은 상유를 남기기 위해 10년동안 고민했노라고 고백하고, 그것도 모자라 "간을 드러내고 쓸개를 끄집어 내며 오장을 보여주는 것처럼 진심을 털어 놓았노라."고 말하고 있다. 거기서 강희제는 "자신의 마음을, 천하를 보살피는 데 다 쏟아 부었노라."고 고백한다.

 

  과연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리더가 몇이나 될까? 특히 '고별상유' 중에서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을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대 백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는 구절은 오늘의 리더들이 진정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경구가 아닐까 싶다.

 

  진정한 리더는, 언젠가 고별상유 곧 자기만의 유서를 미리 남겨야 할지 모른다. 그 때 구구한 변명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가는 일에 대한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남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진짜 리더다. 굿 리더(Good leader)를 넘어선 그레이트 리더(Great leader)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희제는 뒷마무리가 깔끔하고 끝이 좋은 그레이트 리더였던 셈이다.


  60년 넘게 천하를 이끌었지만,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을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대 백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그레이트 리더, 강희제.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신중국 건설을 위해서는 강희제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지식iN & 블로그

 

 

 

 

                                    강희제





  근면함, 관용, 총명, 사려, 실용주의..

  마치 강희제가 직접 쓴 회고록을 읽는 듯 한 느낌이 들었던 스펜스의 <강희제>를 읽으면서, 재위기간 61년으로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길었음에도 훗날 명군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건 강희제의 이러한 성품에 힘입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등극 초기에는 명군 소리를 듣다가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정무에 태만해지고 매사에 전횡하는 독재자가 되었던 황제가 얼마나 많았던가를 생각하면 -현대의 독재자들도 다를 게 없었지만-여덟 살에 등극한 이래로 재위기간 내내 정무에 힘쓰며, 결국 청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번영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던 데는, 이런 타고난 성품이 아니고서는 힘들었으리라는 생각에서이고, 어쩌면 그 한결같음에 내심 질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언제나 제왕은 마땅히 일의 크고 중요한 부분에만 관심을 가지고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을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대, 백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 작은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마침내는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되므로, 짐은 매사를 꼼꼼하게 살펴 왔다."라는 강희제의 말은 어떤 마음으로 정무에 임해 왔는지 보여주는 듯하고..


  또 하나 학문에 열심이긴 했지만, 천재나 대학자와는 거리가 있었던 강희제를 읽고 생각해보는 부분은.. 설령 만 권의 책을 읽는다고 해서 만사(萬事)에 통달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꼭 그런 사람이 일을 성취한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딱히 새삼스러울 건 없는 애기겠지만..(물론 독서가 세상에 쓰이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만은 아니고, 사람에 따라 독서의 이유가 다 다른 것이지만...)

  탁상 위의 이론보단, 일에 임해서 치밀하게 생각하고, 세부적인 부분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것에서 일의 성취가 갈리는 것이며,  독서는 평상시 사고력을 단련(?)하고..때론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정보들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식별, 취합하는 능력을 기르는데 얼마쯤 도움을 줄 뿐인 듯싶다.


  어쨌든 과장광고의 감이 없지 않았던(나름대로 재밌긴 했지만)  이월하의 대하소설 <강희대제> 12권보단, 이 한 권의 책이 더 유익하고 재미도 있었는데, 스펜스의 <옹정제>와 청대(淸代)에 대한 개괄서인 임계순의 <청사(淸史)>도 가능한 이번 달 안으로 읽어볼 생각이다.

 

 

 

 

                          중국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
                                                                                                    cmj3324 ( 2004-06-27)

  강희제는 중국 청나라 4대 황제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긴 61년 동안 치세하면서 태평성세를 이룩하였다. 이 책을 지은 작가는 조너신 스펜스는 강희제에 위대한 업적속의 황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 면모에서 살펴본 책이다. 이를 통해서 강희제에 대한 진면목을 진술하고 사실감 있게 나타내어 주고 있다.

 

  또한 강희제가 스스로 말하는 자서전 형식으로 서술하여, 인간적 면목을 더울 극명하게 나타낸다.


 
“사냥과 원정”에서 감명을 받은 부분은, 삼번의 난에 대한 태도였다. 강희제는 자신의 판단으로 많은 희생을 낳은 것을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는 부분에서 진한 감명을 받았다. 누구나 잘못과 실수를 하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더욱이 그는 황제이므로 더욱 더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사고”의 장에서 느낀 것이다. 강희제는 끝없는 탐구에 즐거움을 느꼈다. 천문학, 지도제작, 의학, 수학 등에 관심이 있었으며 ,서적 편찬으로 큰 업적을 남기었다. 또한 선교사들을 수용하고 호의를 베풀었다... 


  “장수”의 장에서 그는 죽음의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소탈하게 말하였다. 다른 역대의 많은 사람들, 특히 황제들은 영원불멸을 하기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에 대조해보면, 강희제는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겸허함을 갖춘 황제라고 볼 수 있다.

 

  “황자들” 장에서는, 강희황제의 인간적 면모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장이다. 인렁[중국발음]을 아껴 황태자로 삼고 직접 길렀다. 하지만 우리 조선사의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처럼 사랑이 지나쳤는지 오히려 비뚤어지고 말았다. 종국에는 폐태자를 명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강희제가 고뇌하는 모습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상유”의 장에서는, 강희제가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자신의 내면의 생각을 외부로 표현하려는 노력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어렸을 때 황태후의 영향을 받고 살아왔으며 역대 황제들에 대한 변명, 백성을 살핀 치세, 죽음을 초탈한 삶에 대해 말하면서, 끝에 “짐은 이제 말을 맺노라.” 하는 순간 ,나는 내 마음속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정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황제로서의 위엄과 인간으로서 겸허함을 보여주며 대 업적을 이룩한 가히 황제중의 황제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1. 삼번의 난 격파

 

  청의 중국 지배권을 재확립하면 ....청나라는 ..중국에 입관하는데 있어서, 독자적인 무력만으로는 사실상 역부족이었고, 이에 많은 중국 신사층의 도움을 얻게 됩니다. 이때 청이 중국에 입관하는데 매우 현저한 공을 세운 3인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오삼계, 상가희, 경계무 이 3인들입니다.

  청나라 정부는 중국 입관 이후 이 3인을 왕으로 봉하였는데 이들은 바로 청의 강희제 통치시절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강희제는 이들이 일으킨 난을 효율적으로 진압함으로서 ..만주족의 건재함과 우위를 선포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청나라의 중국지배력은 매우 확고하여 졌습니다.

  (그런데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운도 상당히 작용하였습니다. 오삼계와 삼번 연합군은 처음에는 승승장구합니다만 ..어느 순간 오삼계가 청조정의 눈치를 살피느라 ..진군속도를 늦춥니다. 그 덕택에 강희제는 군대를 재정비할 수 있었고, 이후 강희황제가 정비된 군대를 동원하여 ..삼번 반란군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이죠. 사실상 이때 청조정이 거의 망할 뻔 했다고 합니다. 강희제가 도망을 준비할 정도였다는 군요,)

 



                                          2. 재정의 재확립

  중국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기가 되는 지정은 제도의 기초를 마련한 황제가 바로 강희황제입니다. 중국에서 지정은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의 부역부담, 세금부담은 크게 줄어들었고, 일반백성들이 여유로워진 시간과 자금을 상업에 투자함으로서, 강희황제시절 중국의 상업과 농업은 크게 발전을 이룩하게 됩니다. 지정은제도로 인해서 다소간 재정수입의 감소가 있었지만 ... 이 제도로 인해서 상업이 크게 발전하게 됨에 따라, 청나라의 재정은 오히려 매우 강화되게 됩니다.

  (강희황제 시절 청의 호조에 비축되어있던 은의 총량이 거의 1억냥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3. 유교적 통치질서의 확립

  강희황제는 유교적 통치이념에 매우 충실한 인물로서 ..유교이념에 따라서 국가를 잘 통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이에 따라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한 성유 16조를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학습하도록 하였으며, 그 자신도.. 한 국가의 최고통치자, 모든 백성의 어버이로서 매우 인자한 통치를 펼치고자 노력했습니다.

  (청나라 역대황제중 강희제의 통치시절을 최고로 치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황제 자신의 능력이 매우 출중했고 근면했으며 ..또한 가장 선정을 펼치고자 노력한 황제가 바로 강희제입니다.)



                           4. 국경선의 확립

  강희제는 그의 통치기간동안 여러차례의 대외원정을 벌렸고, 대개 승리를 거둠으로서 ..현대중국 영토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1689년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서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음으로 ..연해주쪽의 국경을 확립함과 동시에, 러시아의 남하도 저지했고 1690~ 1697년에는 외몽골을 토벌하여 그 통치자를 처단하고 ..외몽골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또 1718년에는 티베트에도 원정하여 티베트도 중국의 통치영역으로 편입시켰습니다.



                   5. 여러가지의 집필사업, 문화의 융성

  강희제는 또한 문화적으로도 관심이 많은 황제였습니다. 가장 먼저 그는 대규모의 집필사업을 벌여 <고금도서집성>, < 강희자전>과 같은 책들을 출간하였고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매우 적극성을 보임으로서 이때 중국에 많은 수의 서양문물들이 유입되게 되었습니다.

                 내용출처 : "강희제" [책]참고 중국사3권, [책] 참고 네이버 지식[참고]arch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