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淸 太祖 누루하치

영국신사77 2007. 1. 16. 13:03
              淸 太祖 누루하치는 明나라 將帥였다.
delmonaco
2005-02-11      

  만주족을 통일하고 나아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淸 太祖, 누루하치는, 본래 明軍의 장수로서 그의 임무는 동족인 여진족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1583년 여진족長 아타이가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누루하치를 포함한 明軍이 아타이병력이 진치고 있는 城을 완전히 포위하고, 마지막 총공세를 앞둔 싯점에, 明의 총사령관 이성량에게 두 명의 여진족사람이 찾아왔다. 戰場의 총사령관을 직접 찾아올 정도의 여진족이었다면, 이 사람들 역시 明나라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특수층이었을 것이다.

  이 두명의 여진족사람은 다름아닌 아타이의 장인되는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의 늙은 노인은 이 장인의 아버지되는 사람이라 했다.

  반란군 족장 아타이가 바로 자신의 사위임을 밝히고, 자신이 직접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城안으로 들어가, 아타이를 설득해서 투항하도록 노력해볼테니, 공격을 중지해달라고 요구했다.

  明의 사령관 이성량은, 서로 피흘리지 않고 끝낼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다며, 그렇게 해 보라면서 단 하루의 시간을 주겠노라고 했다.

  약속했던 하루의 시간이 흘러가도 城안으로부터 아무런 기별이 없자 ,이성량은 총공격을 명령했고, 격렬한 전투가 있은 다음, 예상대로 城은 쉽게 함락되고 성안의 여진족은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전투가 끝난 후, 여진족의 시체더미속에서 明의 將帥 한명이, 여진족의 시체들을 끌어안고 목놓아 통곡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전날 아타이를 투항하도록 설득해보겠노라며 城안으로 들어갔던 바로 그 사람들의 시체였고, 통곡하는 明의 장수는 그 사람들의 아들이자 손자인 누루하치였던 것이다. 즉, 누루하치와 敵長 아타이는 처남 매부間이었던 것이다.

  치열한 전투중에, 城안에서 여진족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敵으로 간주하고 마구 죽이다보니, 일어난 사고였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이성량은, 누루하치를 불러 본의 아니게 일어난 실수였다며, 위로연을 베풀고 軍馬 30필과 상당량의 재물을 주며 누루하치의 마음을 달래려했지만, 효심이 깊었던 누루하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모두 죽인 명나라를 위해 더 이상 충성할 수 없다며, 이성량이 준 위로품을 받아 챙기고선, 明을 떠나 동족이 있는 만주로 향했다.

  여진족을 죽이는 게 主임무였던 누루하치가, 明軍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원한을 품는 건 완벽한 모순이자 자가당착이지만, 어쨌던 누루하치는 그렇게해서 明과  결별하고서, 절치부심의 복수심으로 힘을 기른 다음, 후일 明을 명말케하고 淸을 건국하게 된다.

  중국역사에서 누루하치의 明나라 장수경력을 들추어 그를 평가하는 중국인은 없고, 지금도 만주족에겐 누루하치는 영원한 神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2005.2.10.

 

 

 

 

데일리안 토론광장 - 데 안 토

 

 

 

               後金(대청제국) 시조 애신각라 누루하치 (1)

 
                                                      출처 카페 > 백두산트래킹 전문카페[태왕가.. / 담덕태자
                                                      원본
http://cafe.naver.com/taiwang/73
 
 

  조금은 지난 드라마이지만 武人時代에 보면 부용부인이 금강야차 이의민에게 鷄林의 黃龍으로써 新羅재건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신라의 후예들이 만주에 "金"씨의 나라를 세웠다며 그를 격려한다.

 

  금나라의 뿌리와 그뒤를 이은 후금(淸)나라 황족의 씨성인 愛新覺羅의 의미와 잊혀진 대제국의 후예로써의 자긍심을 부여하려 한다.

 

  참고로 임진왜란 발발시, 청태조 누르하치는 조선 선조에 보낸 친서에서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로 파병을 제의하며, 그가 동이족의 후예임을 명시하였으나, 사대주의에 눈이먼 조선의 조정과 선조는 이를 거부하고 명나라의 지원을 받는다.

 

  물론 누르하치 입장에서야 자신의 주적 明나라의 국력쇠잔으로 이득을 보았으나, 그건 오로지 조선과 명나라의 뜻일 뿐, 만약 조선이 누르하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아마 후금의 건국은 있을 수 없었을것이다.

 

  이제 청나라 황족의 性인 愛新刻羅의 비밀과 뜻을 알아보며, 다시금 지난날의 역사에 대한 사색을 부여코자 한다. 

 

 

後金(大淸帝國) 시조 애신각라 누루하치
[愛新覺羅-大淸帝國]
 


 

  북부 한국, 만주대륙 이곳은 태초부터 한민족의 영원한 보금자리였으며, 한웅천황 이래로 단군쥬신, 가우리, 대가우리, 대김제국을 거치며 민족 사이에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민족의 본 고향땅이다.


  그러나 원나라가 쇠퇴하며 발생된 행정 공백의 틈을 뚫고 한족(漢族)의 신흥 세력인 명나라와, 옛 땅을 되찾으려 하는 왕씨 가우리[高麗]의 다툼에서 민족 숙원의 절대명령을 거부하고, 제 한 몸의 영예에만 집착했던 이성계의 반역으로, 그만 민족의 귀중한 성역을 명나라에 빼앗겨 버리고만 통한이 서린 우리 땅이다.


  비록 명나라가 만주를 빼앗았다고 하나, 그들의 행정력이 미치는 곳은 겨우 요녕성 정도에 불과했고, 그 동쪽의 광활한 대지에는 여전히 옛 여진족(女族)이 각 부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본서가 일찍이 밝힌 것처럼, 여진족은 쥬신[朝鮮]족으로 우리와 같은 족의 일파이다. 만족 대사전(滿族大辭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듯이, 여진(女)은 만족의 선세(滿族的先世)이며, 만주어 발음으로 쥬신[朱先, 朱里, 諸申, 혹은 珠申]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와 같은 민족[朝鮮=珠申] 쥬신족임은 명백한 진실이다.

 

  개천(開天) 5457년: 서기 1559년, 만주의 대영웅 누루하치[努哈赤]가 멍거테무얼[猛哥帖木]의 5세손, 탑극세(塔克世)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인데, 애신(愛新)은 신라[新羅]를 사랑하고, 각라(覺羅)는 신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옛 조국 신라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옛 신라의 망명 집안인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신단민사는 애신각라는 금태조(金太祖)와 같이 계림(鷄林) 김(金)씨의 후손이라고 했다. 신라가 망한 후 경주 김씨 경순왕의 망명 왕자들이 금강산과 흑룡강성 그리고 백두산 속으로 흩어졌다가, 훗날 제각기 힘을 모아 다시 흥기했던 것이다.

 

  개천(開天) 5481년: 서기 1583년, 누루하치는 민족의 자존심과 독립을 위하여, 만주에 들어와 있는 한족(漢族: 明國)들을 추방하기 위하여 군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강력한 힘을 가진 한족을 몰아내려면, 우선 만주를 통일한 후 모든 힘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이리하여 시작된 민족 통일전쟁은 수년간 계속되었고, 마침내 건주 여진(여진이 여러 부족중 가장 강력했던 부족)을 손에 넣은 후, 서기 1587년에는 쑤쯔허[蘇子河] 상류에 최초의 성을 구축하여, 강력한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서기 1607년에는 후이파를, 13년에는 우라[烏拉]를 병합하여 명실공히 통일 여진국을 만든 후, 서기 1616년에 칸(汗)의 지위에 올랐다. 새 나라의 이름은 대금제국(大金帝國)의 영광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후금(後金)으로 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정하였다.


  누루하치는 역사의 초기부터 써 오던 한자(漢字)가, 우리 쥬신족의 소리말에 적당치 않으므로 새로운 글자 "여진 문자"를 발명하였으며,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제정하여 나라의 기본으로 하고, 도성을 허투아라[赫圖阿拉]로 옮겼다.

 

  서기 1618년, 마침내 대명 선전포고를 하고 푸순[撫順]을 곧 취하더니, 곧이어 청하(淸河)지방의 한족들을 멀리 서쪽으로 내쫓고, 이 지역을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

  개천(開天) 5523년: 서기 1625년, 후금은 서울을 심양으로 옮기고, 요하 이동 70여성을 모조리 탈환하였다. 누루하치가 죽자 그의 여덟번째 왕자인 황태극[皇太極]이 즉위하여(1,636년),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에서 청(淸)으로 고치고, 여진인을 만주인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후금, 청으로 이어지는 만주의 동포들은 남쪽에 있는 동족의 나라인 조선[李氏 朝鮮]에게 연합군을 형성하여 민족의 원수인 한족[漢族之國=明]을 토벌하자고 간절히 요청하였으나, 얼빠진 이씨조선 왕족들은 동족인 청을 거부하고 명나라에 빌붙어 만주 동포들을 실망시켰다.


  오히려 이를 강압적으로 바로잡으려는 군사 행동(丙子胡亂)을 굴욕적인 국치였다고 원한의 감정만 쌓게 되니, 이씨 왕족들의 사대주의 사상은 가히 신라가 당을 상대로 행했던 추태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종횡으로 누비며 생업을 꾸리던 만주인들은, 기마민족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특유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른바 그 유명한 8기제도(八旗制度)가 그것이다.


  이 제도는 평상시에는 밭 갈고 사냥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일단 전시 동원령이 내리면 그들이 속한 깃발을 들고 자신들이 타던 말에 올라 그대로 전선으로 내닫는 체제여서, 국가 위기에 대처하는 기동력이 대단히 신속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8기에는 제각기 고유한 색깔이 있었다. 정황(正黃), 정홍(正紅), 정람(正藍), 정백(正白), 양황(黃), 양홍(紅), 양람(藍), 양백(白)이었다. 8기제도는 군사, 경제가 일체된 사회 체제로서, 누루하치는 8기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군정 대사는 8기 수령들이 공동으로 상의하여 결정하고, 최고 통치자의 계승권도 8기에서 선거를 통해 뽑았다.

 

  이처럼 청조(淸朝)는 항상 준전시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전국민이 모두 동원되는 국가 총동원 체제였으므로, 인구 비례상 10대 1이 넘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하고, 무려 276년 동안 중국인들을 다스리며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조가 중국을 제압하고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위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세습왕제를 받들고 있었으면서도, 장자가 아니라 왕자들 중 가장 훌륭한 왕자를 뽑아 황제로 추대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씨조선은 왕을 조종하려는 실세들의 첨예한 대립과 투쟁으로 나라는 서서히 힘을 잃어갔던 것이다. 청의 이 제도는 정여립이 생각했던 왕의 선출 방식이었는데, 그는 못난 이연 왕을 만나 역적으로 몰려 죽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만주족이 중국 한족을 다스리면서 주인행세를 했음은, 서양인들 눈에도 정확히 비췄던 듯싶다. 그것은 서양인들이 중국인을 다스리는 관리를 "만다린"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만다린-MANDARIN"의 한자는 "滿大人(만대인)"으로, 곧 만주 대인이라는 뜻인데, 중국 발음으로 大가 "다", 人이 "렌"이기 때문에 만주 대인이라는 말이 만다린으로 변하였음을 똑똑히 밝혀 둔다.

만주인들의 중국인 차별 정책도 대단했었는데, 한 예로 중국인들도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머리를 변발하고 길게 따내려야 했으며, 만주 땅은 내지(內地)라 하여 중국인들은 출입을 제한 당했고, 특히 성지(聖地) 백두산 100리 이내로 접근하면 죽음으로 죄를 갚아야 했을 정도였다.

백산흑수록(白山黑水錄)에는, 청조(淸朝) 시조는 장백산 북쪽 돈화현(敦化縣) 액마색(額摩索) 남쪽 100리 지점인 야액다력성(野額多力城)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본 저자가 만주의 곳곳을 헤매며 애신각라의 발자취를 추적하던 중, 몇몇의 괘씸한 중국의 학자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조선족의 학자라는 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애신각라를 만주나 한국인이 아닌 중국 송(宋)나라 인으로 조작하여 탄생시키려는 공작을 한참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우선


  "애신각라의 이름을 후금이나 만주의 8대 성씨들 중에서 발견할 수 없으므로 원래 만주인이 아니다. 따라서 분명히 중국의 송나라가 망한 후 김제국(金帝國)시절 만주지방으로 망명했던 교로(交魯)가문일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교로(交魯)의 북중국 발음이"Jiao-lu"여서 애신각라의 각라(覺羅)의 중국식 발음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애신각라의 애신은 이름이고 각라는 성이라는 것이다. 언제부터 중국에서 성을 이름 다음에 썼는가? 하는 질문에는 대답을 못하고, 어째서 중국학자가 한자의 뜻을 버리고 발음을 따르는가 하는 질문도 묵살한 채, 하여튼 애신각라는 만주인이 아니고 송나라 사람임으로 중국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그의 논문은 수정 없이 그대로 발표하여 당당하게 역사를 뒤집었다.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 우리의 역사는 지금도 무섭게 꼬이고 뒤틀리며 왜곡 되어가고  있다.

 

 

 

 

 

                                누루하치

 

                                                                            binosarang (2006-04-13)


 

북부 한국, 만주대륙 이곳은 태초부터 한민족의 영원한 보금자리였으며,

한웅천황 이래로 민족 사이에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우리 민족의 본 고향땅이였습니다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세운 왕의 이름이 누루하치입니다

그런데  성(性)이  신라를 사랑하고생각한다는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합니다  삼국시대때의 신라일까 궁금했는데

이유인즉,    신라왕족이 자신의 나라가 망한뒤 만주로 망영하여 그곳에 터를 잡고

뿌리를 내려 여진족(만주족)들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네요

후에 그 후손들이 후금의 전신격인 금나라를 세우게 되고

그 금나라의 황족 후손이 누루하치 라고합니다

 

여담 입니다만,

원래 누루하치는 명군의  장수는데 여진족수장  아타이가  반란을

일으켜 명군의 총사령관 이성량과 함께 반란을 토벌하기위해 왕 명을 받게됩니다

 그런데 반란군 아타이는 누루하치와 처남 매부 사이였다고합니다

하여 누루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사위가 되는 아타이를 설득할테니

공격을 하지말것을 이성량에게 권유하고 성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루의 약속시간을 가지고..

 

그러나 약속했던 하루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게되자

이성량은 공격을 명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성안에 있던 누루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명군의 의해 본의 아니게 죽음을 당하게 되어

누루하치는 크게 노하고 슬퍼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이성량은 미안한 마음에 성대한 위로연과 아주 많은 위로품을 주어

그를 달래려 하였지만 남달리 효심이 깊었던 누루하치는

그길로 명을 떠나 자신의 땅 동족이 있는만주로 향하게됩니다

그리고 이름도 개명하게 되느데,

 그의 원래 이름은 동대랑(童大郞) 이였느데, 자신이 원래 금나라 황족임을 알고

성을 애신각라 이름을 누루하치 로 개명을하게 됩니다 .

 

(또다른  말은 원래부터 애신각라가  성이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루하치는 민족의 자존심과 독립을 위하여 만주에 들어와 있는 한족(漢族)들을 추방하기 위하여 군을 일으킵니다

이리하여 시작된 민족 통일전쟁은 수년간 계속되었고,

마침내 1616 년 만주를 통일하고,  예전 자신들의 조상들이 세운

금나라를 잇는다는 의미로, 후금이란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원래 금나라 왕족의 성은 완안(完顔) 씨입니다. 과거엔 한 나라가 망하게되면

  반란을 염려하여 그나라의 황족을 몇대까지 멸하곤하느데, 죽음을 피하기 위햐여 

  보통 성을 개명을 하는게 보통입니다   누루하치도 완안이라는 성을 쓰지않고

  애신각라 로 개명한것은, 완안씨의 선조가  신라에 뿌리를 두는 김씨이기에

   그리했을 것 같네요)

 

  임진왜란 때는 누루하치가  조상이 하나인 조선을 침략한 왜구를 보고

조선을 돕겠다고 수차례 자청하였고 ,

한 조상의 형제라 여겨줄것을 여러차레간청 하였지만

명나라의 눈치와  잘난 선비들의 사대주의 때문에 잘난 이씨왕조는

호의를 뿌리치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습니다

 

  후에도, 누루하치는 남쪽에 있는 동족의 나라인 조선에게 연합군을 형성하여

민족의 원수인 명을(한족)을 토벌하자고 간절히 요청하였으나, 잘난 이씨왕조는

동족인 후금을 거부하고, 게속해서 친명배금 정책으로 인하여

누루하치의 실망감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를 강압적으로 바로 잡으려는 군사 행동을 굴욕적인 국치였다고

원한의 감정만 쌓게 되니, 이씨 왕족들의 사대주의 사상은

가히 신라가 당을 상대로 행했던 추태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겁니다

 

왜란이 끝난후에 인조반정이후  조선은 계속해서 친명배금 정책으로 인하여

정묘호란 , 병자호란 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호란의 경우 후금의 입장에선 형제의나라로 생각하지만

조선은 계속해서 명나라에 대한 무조건 충성 때문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난이였습니다

어쨋든 그리하여 또다시 명나라의 속국처럼

조선은 가게 되구요.. 뿌린대로 거둔 거죠 ㅡㅡ;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당시후금도 명과 대립상황이라

어려운 상황임을 뻔히 알면서도 군을 보내어 도와주려했던 누루하치..

 

 그는개인적인 생각으론,

 당시 조선을 한형제로, 같은 동족으로 여기고, 나름대로 어버이나라로

생각지 않았나 싶네요 오랑케라 부르며 업신여겼던 그 후금은,

중국의 마지막왕조 청나라를 세우게되구요

 참 쓴웃음 나오게 되는 대목입니다 ..

 

 

당시 외교정책을 슬기롭게 했다면

형제의 나라로 생각한

그들에게 우리도 똑같이 대해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개인적으론

많이 남네요

 

생각해볼건  후금입장에선 조선이 정복 못할만큼 강한 나라는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누루하치는 우리나라를 정복대상으로는 생각지 않았던 이유는,

누루하치 자신이 신라가 자신의 뿌리를 두는 자신의 모국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된 과거의 역사이므로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누루하치가  그래도 우리랑 같은 곳에서 뿌리를 뒀던 우리 조상의

후예인건 확실한것 같습니다

저넓은 중국을 통일한 왕조가 신라의 후손 우리나라의 후손이

했으니...ㅎㅎ

 

원래 만주가 우리나라 의 기원이 되는 곳이고

말하지 않아도 과거 우리나라 땅인거 모르는 사람 없을 것이고

그러면 그 민족도 우리 민족이 아닐까합니다

요즘 사회이슈로 혼혈문제가 많이 제기되느데

과연 우리나라 민족이 색깔만 같지 전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진짜 한민족일까요??

 

구시대적인 발상을 이젠 버리고 서로 힘을 하나로모아

우리의 옛영토를 되찾아야합니다

 

누루하치 그사람은  아니  그분은  우리와 뿌리를 같이한 민족이 맞을겁니다

 

참,,

중국또라이 학자들이 요즘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하고있느데

고구려라는 한왕조를 자기들 역사라고 떠들고 난린데

 

누루하치는  한 개인인데 왜곡하지 않겠습니까

원래는 중국사람이라고.........

자신들은 타민족에 지배를 받은적도, 침략받은 적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 그들인데, 뭔짓을 못하겟습니까...

 

ps

   제가 잘못알고있는 지식일수도 있으니 

   또다른 사실이나 잘못된분있으면 댓글 환영합니다

   저도 역사를 좋아하는 한사람으로서.......

 

 

 

                 청나라 황제 누루하치 헤투알라

 

                                                                                                           gusigi55

 

                                                                                                           kahn84 (2003-08-28 )

 

  한자로 음차하여 혁도아랍(赫圖阿拉)이라고도 표기합니다. 후일 지금의 선양

(셴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청조의 수도였다고 합니다.

* 다음 내용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온 내용입니다.


  싱징라오청 興京老城(흥경노성) (지금의 명칭인 듯.)

  만주어로는 '가로의 뫼'라는 뜻인 헤투알라라고 한다. 청조(淸朝)의 발상지로서 1603년 청태조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이곳에 성을 축조하고 1619년 자이피얀으로 천도할 때까지 16년간의 근거지로 건국의 기초를 다진 도성이다.

  1633년 헤투알람을 고쳐 싱징이라고 하였으며, 1877년 이후는 라오청을 붙여서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지방의 한촌(寒村)으로 토성 터와 궁전 터의 일부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