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청 세조 순치제와 섭정 다이곤

영국신사77 2007. 1. 16. 09:17

  80. 청의 중국 지배(1)

 

     - 이한제한(以漢制漢)과 한간(漢奸), 섭정 다이곤(多爾袞)

 

    가. 자금성의 새 주인                                                   이길상

 

(1)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서 중원으로

 

베이징의 자금성  청태종이 급사하자, 후계 문제를 두고 다소간의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드러내지 않고 태종의 아홉번째 아들 복림(福臨)을 세워 연호를 순치(順治)로 개원했다. 이가 청나라 3대 황제인 세조 순치제(1643 ~ 61)다.

 

  이때 순치제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1638 ~ 1661), 따라서 최대 실력자인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도르곤 / 누르하치의 제14자)과 정친왕(鄭親王) 제이합랑(濟爾哈朗 / 지르하란 / 누르하치의 동생인 小酋=슈르가치의 제6자)이 보정왕(輔政王)이 되어 어린 황제를 보좌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이곤[도르곤은 곰이란 뜻이라고 함]은 사실상 섭정(攝政)으로 정치를 전단 하였고, 그에 의해서 한인(漢人)들을 앞세워 베이징에 들어가고, 중국을 지배하는데 성공하였다.

 

  중국이 변방의 이민족을 지배 내지는 복속시키는데 사용했던 전형적인 방법으로, 기미(羈 ?)정책이라는 것과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두 가지 수법이 있었다.

 

  기미(羈 ?)란 말의 재갈과 소의 코뚜레를 말하는데, 재갈 물린 말이나 코를 꾀인 소가 주인이 고삐를 당기는 대로 움직이듯이, 종주권(宗主權)이라는고삐만 그들이 쥐고 있으면,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멋대로 풀어두고 자치(自治)를 허용한다 해도 멀리 달아나지는 못한다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와 같은 농경사회에 대해서 주로 이런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유목사회에서는 이런 것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 서로간에 물고 뜯고, 할퀴고 험집 내도록 교묘히 조정하여 힘을 뺀 후, 정복하거나 복속시키는 것이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술법이다. 몽골이나 만주를 다스리기 위해서 주로 이런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런데 이런 낡은 중국의 전통이, 이때 와서는 역으로 이한제한(以漢制漢) 곧, 중국인으로서 중국인을 제압한다는 방침을 청나라는 세웠고, 이 수법이 적중하여 이들은 쉽게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을 지배 복속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만든 덫에 자기가 걸려던 셈이다. 역시 알 수 없는 것은 세상 일이다.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은, 청나라 조정에도 빠르게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다이곤은 모든 병력을 서쪽으로 옮겨, 산해관 동쪽 1백㎞ 지점에 위치한 영원(寧遠/닝위안)까지 나갔다. 이곳은 1626년 누르하치가 산해관을 넘으려고 나갔다가, 원숭환의 대포 세례를 받고 중상을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된 곳이다.

 

  이때 다이곤의 휘하에는 만주 8기와 몽골 8기, 그리고 중국인들로 구성된 한인 8기가 있었으며, 참모로는 포로가 되었다가 귀순한 명나라 장수 홍승주가 따르고 있었다.

 

  만주에서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베이징 동쪽 300 ㎞ 지점에 위치한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야 한다. 산해관은 중국 장성(長城)의 동쪽 끝에 해당하며, 글자 그대로 산과 바다가 잇 대어 있는 천험(天險)의 요새(要塞)다.

 

  일찍이 청 태종도 산해관 돌파를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 했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반년이 겨우 지난 1644년 4월, 다이곤의 청나라 군대는 산해관을 넘어, 5월 2일에는 중국인들이 길에 향을 사르고 영접하는가운데 당당히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의 뒤를 따라, 체두변발(剃頭?髮)이라는 기절초풍할 오랑캐의 머리 모습으로 변신한 오삼계 이하 명나라의 중국 장졸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연출이 가능했을까? 여기에는 이런 사연들이 전해지고있다.

 

  (2) 자금성의 새 주인

 

자금성의 전경  1644년 3월 18일, 이자성의 유적집단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오삼계(吳三桂)가 이끄는 명의 최정예부는 산해관에서 더 동쪽으로 나아가 청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삼계가 이곳을 지키고 있는 한, 청나라가 이를 쳐부수고 다시 산해관을 넘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자성의 침입을 받게 된 명나라 조정에서는, 너무도 급한 나머지 오삼계에게 베이징으로 돌아와 이자성을 막으라는 명령을 보냈다.

 

  이런 명령을 받은 오삼계는 베이징을 향해 군대를 돌렸으나, 막상 그가 산해관에 이르렀을 때, 명나라 최후의 황제 의종(毅宗) 숭정제는 이미 자결한 후였다.

 

  황제라는 구심점이 없는 마당에서 오삼계의 군대는 산해관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난처한 입장에 처한 그들에게, 이자성은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吳襄)을 인질로 붙잡아 두고, 다시 은(銀) 4만냥을 미끼로 오양(吳襄)을 시켜서 아들의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게 했고,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오삼계는 투항을 결심하고 산해관을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막상 베이징 근교에 다다르자 오삼계는 마음을 바꾸고 다시 산해관으로 되돌아 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적으로 싸웠던 청나라에, 원조를 청하는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황제는 유적 이자성에게 살해되었다. 나는 이원수를 갚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야 하는데, 귀국의 병력을 빌렸으면 한다..........."

 

  이런 제의를 받은 다이곤은 뛸 듯이 기뻤다. 면도 칼보다 예리하다는 그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인의(仁義)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을 멸하고, 중국의 백성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세우고 당장 군대를 이동하여, 4월 5일, 그렇게도 염원했던 산해관에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한편 베이징의 이자성은 오삼계의 군대가 산해관으로 되돌아 갔다는 소리를 듣고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오삼계를 잡기 위해 산해관으로 나갔다. 4월 22일, 드디어 이자성과 오삼계의 군대가 정면 충돌하여 전황이 급박할 때, 만주의 8기군이 이자성 진영으로 질풍처럼 달려 들었다.

 

  만주 기병 출현에 혼비백산 된 이자성은 베이징으로 줄행랑쳤다가 오삼계의 아버지를 죽이고, 약탈한 보물들은 시안(西安)으로 실어보낸 후, 4월 29일 그의 7대조상까지 황제와 황후로 높이고는 자금성을 불지른 후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해서 5월 2일, 쉽게 베이징에 들어온 다이곤은, 약탈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비명에 죽은 황제(숭정제)의 장례를 정중히 치렀다. 그리고 방대한 군사비에 충당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각종 세금을 폐지하고, 지세(地稅)에 대해서도 우선 1/3을 탕감한다고 발표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이전에 있었던 일체의 잘잘못은 묻지 않는다고 발표하고, 명나라의 제도와 관료들 대부분을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과거를 열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지식인들의 동참을 유도하였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이자성이라는 유적이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인들이 이리 떼처럼 사나운 약탈자가 아니라, 예절과 도덕을 중시하는 빼어난 민족으로써, 어려움에 처한 중국의 인민들을 보살피고 도와주는 해방군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한 것이다.

 

  한편 다이곤은 명나라의 멸망을 기정 사실화하고, 청나라가 정당하게 그 뒤를 이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명사(明史)의 편찬을 서둘렀다. 전조(前朝)의 역사를 그 다음 왕조가 쓰게 됨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고 이어가는 것이 중국의 관례다. 따라서 명나라의 역사를 청나라가 쓴다는 것은, 청나라가 중국지배에 정통성을 확보하겠다는 주도면밀한 계획까지 다이곤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1636년, 조선에서는 병자호란이라는 홍역을 치렀고, 이듬해인 1637년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가 다이곤을 따라서 산해관을 넘어 북경까지 갔었는데, 소현세자는 이때의 사실들을 소상하게 적어서 본국에 보냈다.(소현세자가 보냈다는 글은 본문 말미에 실었음)

 

  국내 외가 어느 정도 안정된 1644년 9월, 다이곤은 선양(瀋陽)으로부터 어린 순치제를 베이징으로 모셔와 제법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다시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였고, 비에 흠뻑 젖은 명나라의 관료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새로운 자금성의 주인을 맞이하였다.

 

  이미 선양에서 즉위식을 올렸던 순치제가, 다시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즉위식을 올렸다는 것은, 청나라가 자금성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다.

 

  청나라는 몽골족이 세웠던 원나라와는 달리, 서방세계와의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중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그 수호자임을 자처하고, 명나라의 제도는 대부분 그대로 계승시켰으며, 관료들의 사회에서도 같은 수의 만주인들을 복수로 채용하여 만·한 병용 정책을 추진하였을 뿐이다.

 

  이를 두고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촌 떼기 만주족을 데릴사위로 맞아들여, 기울어져 가던 중국이라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수 천년간 이어온 중화라는 전래의 중국적인 자존심이 여기서 단절된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다음 기회를 끈질기게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몸에 베어 있었다.

 

  (3) 한간(漢奸)과 이한제한(以漢制漢)

 

청대의 청화백자 주전자, 고궁박물관 소장  중국에서는 왕조의 고체를 혁명이라고 하고,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을 빌리는 것이 통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유혈의 대가를 치루고서야 마무리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단순한 왕조교체의 범주를 넘어서, 이민족인 그것도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만주족이 큰 무리없이 이런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인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에서 적에게 빌붙어 나라를 그르치게 하는 매국노(賣國奴)를 한간(漢奸)이라 한다.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던 명나라가 망할 당시, 막상 숭정제를 따라 자결한 사람은 환관 한 사람뿐이었으나, 이자성이 자금성을 점거했을 때 궁녀200 여명을 비롯해서 40 여명의 관료들이 자결하여 고고한 지조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황후의 친정 아버지를 비롯해서 수 많은 관료들은 이자성 부하들의 흙 발에 체이고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얼굴에는 비굴한 웃음 기를 머금고 목숨만은 보전코자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만주족이 들어오자,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향을 사르고, 충성을 맹세하고, 만세를 불렀다.

 

  어떻게 보면 이들 모두가 한간(漢奸)들이다. 이런 형편없는 무리들을 만주족은 돈이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믿고 노예처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빠져든다는 것은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과 같아서, 세월이 지나고 서로가 흉허물 없이 지내게 되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진정한 애국의 길을 아는 사람은, 혁명 초기의 서슬 푸른 예봉(銳鋒)은 일단 피하고 본다는 음흉하고도 간사한 계산을 많은 중국인들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 사회가 안정되고 정의가 바로 서게 되면, 이들은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달래고 얼래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이런 것을 노회(老獪)라고 하는데, 그래서 청나라가 망했을 때 만주족은 소리없이 사라진 반면, 중국은 다시 중국으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한간으로 매도된 사람이 오삼계와 오삼계의 옛 상관이었던 홍승주, 그리고 명나라의 병부좌시랑으로 있다가 청조에서 다시 내각 수보를 지낸 김지준(金之俊) 등을 꼽을 수 있다.

 

  오삼계가 조국을 배반하고 청나라에 붙게 된 사실에 대해서, 진진원(陳圓圓)이라는 기생과의 사랑 때문이라고도 하고, 옛 상관이었던 홍승주의 권유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특히 기생과의 사랑 이야기는 후대에 윤색가필되어 흥미로운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애첩 진랑(陳娘)을 베이징에 두고 전선으로 떠났던 오삼계는 오매불망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항복을 권유하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귀순하기로 결심한 오삼계가, 베이징 근교에 이르렀을 때, 그렇게도 보곺았던 진랑이 이미 이자성의 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충격을 받고 산해관으로 되돌아 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크게는 나라의 운명이, 작게는 가족의 안위가 달려있었고, 여기에 각기 사정이 다른 많은 부하를 거느린 상황에서, 개인적인 사랑놀음 하나만으로 그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뭇 사나이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진진원이라는 기생이 오삼계의 애첩(愛妾)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홍승주라는 사람은 복건성(福建省/푸젠) 출신의 문관이다. 그러면서도 뛰어난 군략가로서, 이자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것이 인정 되어, 요동지방의 총수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당시의 요동 총수란, 전쟁에 이기면 시기를 받아 목숨을 잃고, 지면 문책을 받아 처형되는 죽음의 자리였다.

 

  홍승주 역시 오삼계 등 부하 장졸을 이끌고 산해관 동쪽에서 청 태종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고, 청 태종은 그를 지나칠 정도로 우대하여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관한 일화도 수 없이 전해 오고 있지만, 그 진위를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는 반청세력의 토벌에 앞장서고, 청조를 위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김지준은 명나라에 출사했다가, 다시 이자성에게 벼슬하고, 그러다가 청이 베이징에 들어 왔을 때, 다이곤에게 10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이 받아들여지면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기용되고 내각의 수보가 된 사람이다.

 

  이가 제시했다는 열 가지 조건이란 그야 말로 당시로서는 별 소용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런 것들이었다.
⑴ 남자는 청나라 조정에 따르지만 여자는 따르지 않는다.
⑵ 산 사람은 따르되 죽은 사람은 따르지 않는다.
⑶ 남편은 따르되 아내는 따르지 않는다.
⑷ 관료는 따르되 아전은 따르지 않는다.
⑸ 노인은 따르되 젊은이는 따르지 않는다.
⑹ 유학자는 따르되 승려나 도사는 따르지 않는다.
⑺ 기생은 따르되 광대나 배우는 따르지 않는다.
⑻ 벼슬길은 따르되 혼인은 그전대로 한다.
⑼ 나라 이름은 따르되 벼슬 이름은 그전대로 한다.
⑽ 부역이나 납세는 따르되 말이나 글은 그전대로 둔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여질수 있다 그래서 다이곤은 이를 기꺼이 승낙하고 그를 내각 수보로 임명했다. 내각의 수보가 된 김지준은 다시 왕공은 수도를 벗어날 수 없고, 기인(旗人)은 상업에 종사할수 없으며, 환관들이 궁성 밖으로 나오면 참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만들었다. 이런것이 당시로서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면 여기에는 엄청난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열 가지를 다시 요약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청나라 조정에 따르는 것은 남자에 한하며, 그것도 가장이나 지식계층 및 고급관리 등 책임있는 사람들은 한간이 되어 기꺼이 따르겠지만, 반면 여자들과 젊은 이들, 아전과 승려 및 도사들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광대나 배우, 죽은 사람은 따르지 않겠다는 것은 중국인들의 오락과 풍속과 장례 및 묘지에 관한 중국적인 문화전통에 대해서는어떤 간섭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이 열 가지 조건이 받아짐에 따라, 청나라 조정에서는 남자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듯이 여자들에게도 전족을 금지시켰으나 이는 소용이 없었다. 여자들은 따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례나 묘지를 옛 습관대로 지키게 되고, 이로써 중국인들은 조상에 대한 불효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전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관(官)과 이(吏)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중국사회지만, 말단 행정을 담당했던 아전이란 대대로 세습하면서 그 고장의 터줏대감으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으로, 황제는 이들을 파면하거나 새로 임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의 명령은그가 임명한 관(官)에서 그치고, 실제 지방 행정의 담당자인 이들 아전들에게는 먹혀들 수가 없었다.

 

  또한 젊은 사람들은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 났으며, 오랑캐가 싫은 이름있는 지사나 학자 및 문인들은 승려나 도사가 되어 현실을 도피할수 있는 길이 열였고, 연극, 예술, 문자, 노래 등도 간섭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자유와 전통, 그리고 향락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여유와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모든 것이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7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옹정·건륭연간에 이르러,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와 별도로 김지준이 내각수보가 되어 만들었다는 "왕공은 도성을 벗어날 수 없고,....기인들은 상업에 종사할 수 없다"는.등의 당시로서는 별 의미 없었던 이런 것들이, 천하의 악법이 되어 만주인들에게 족쇄를 채우게 되자,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조법(祖法/조상이 만든 법)은 한자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이 또한 그들의 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앞으로 좀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에, 그때 맞추어 하기로 하고 한간들의 이야기를 좀더 따라가 보자.

 

  청의 중국지배에 저항하는 세력은 세 가지 였다. 첫째가 이자성의 잔당들이 였고, 둘째가 이자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장헌충의 무리들로서 이들은 사천성을 중심으로 아직도 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남의 곳곳에는 명의 황족을 모시고 18년간 줄기차게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이들 전부를 남명(南明)이라한다.

 

  도르곤은 이자성을 토벌하기 위해 즉각 정벌군을 편성했다. 청군의 추격을 피해 섬서(陝西/산씨)로 줄 행낭을 쳤던 이자성의 60만 대군은 더이상 달아날 곳이 없게 되자, 산속을 헤매던 끝에 이자성은 농군에게 붙들려 살해되고 그 부하들은 대부분 항복하였다. 이로써 순치 2년(1645) 이자성의 반란은 매듭을 지었다.

 

  안휘(安徽/안후이), 호북(湖北/후베이), 사천(四川/쓰촨)을 휩쓸던 장헌충은 1644년 이자성이 베이징으로 들어가 대순황제가 되었을 때, 사천의 성도(成都/청두)에서 대서국(大西國)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를 잠칭하고 있다가 청의 토벌군이 밀어 닥치자 피에 주린 흡혈귀 마냥 살육과 약탈을 거침 없이 자행하는 광란(狂亂)을 펼쳤다.

 

  그는 이곳 사람들이 아무리 깊은 산중에 숨어 들어가도 그 부하들을 시켜 찾아내게 하여 죽인 후 그 증거로 손을 잘라오게 하였는데, 많이 잘라 온 사람에게는 높은 벼슬을 주고, 아예 사람의 씨를 말리기로 작정하였다. 적군인 오랑캐에게 단 한 사람도 남겨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가 하면 술을 좋아했던 그는 친구들이 찾아오면 융숭히 대접하고, 돌아갈 때는 많은 선물을 주어 보내고 나서는, 그의 부하들을 시켜 돌아가는 길목을 지켰다가 목을 잘라오게 하여, 그 잘린 목을 옆에 두고 술친구로 삼았다.

 

  이런 참혹한 양상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이 보다1세기 후 편찬된 촉벽(蜀碧)이란 책의 내용에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흥미 본위의 많은 픽션이 가미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전부를 사실이라고 할 수도 없겠고, 그렇다고 전혀 허무맹랑한 낭설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기에, 정신 도착 치고는 너무나 무서운 인간 종말의 광기(狂氣)였다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표현이 없다.

 

  사천에 청의 토벌군이 도착한 것은 순치 3년(1646)말, 장헌충은 토벌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그 부하들은 운남(雲南/윈난) 방면으로 달아나 사천지방이 청의 지배하에 들어 갔으나 ,운남으로 도망친 그 잔당들은 그 후에도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베이징에서 숭정제가 자결했다는 소식이 명의 배도(陪都/준수도) 난징에 전해지자, 신종의 손자가 되는 복왕(이자성에게 피살되었던 복왕의 아들)이 사가법(史可法) 등에게 옹립되어 연호를 홍광(弘光)으로 정하고 명을 계승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지배계급간에 분란이 일어나고, 수하 장졸 역시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순치 2년(1645) 5월 15일, 난징은 함락되고 복왕은 도망치다가 난군의 손에 잡혀 죽고, 이곳의 문무백관들은 머리를 갂고 변발을 하였다.이때 토벌군의 총수는 한간(漢奸) 홍승주였다. 최소한 강남지역이 남아 지키고자 했던 명나라 구신(舊臣)들의 소박한 꿈도, 결국은 또 다른 명나라의 옛 거물에게 짓밟히고말았다.

 

  그 후로도 명의 부흥운동은 한 동안 계속되어, 명나라의 후손이었던 당왕(唐王)은 복주(福州/푸저우)에서, 계왕(桂王)은 광동(廣東/광둥)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부흥을 도모했지만, 모두가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 중에서 정성공(鄭成功:1624∼62)·장황언(張煌言:1620∼64)등은 해상세력을 동원하여 청군(淸軍)과 해전을 벌였으며, 자주 본토의 내륙 깊숙이 쳐들어 가기도 하였지만, 역시 이곳 지리에 밝고 해전에도 익숙했던 홍승주가, 난징에 진을 치고 마치 그물 코를 잡아당기듯 속속들이 이들을 차례대로 토벌했다.

 

  1662년 홍승주에게 밀린 계왕(桂王)은 운남(雲南/윈난)성의 곤명(昆明/쿤밍)까지 밀려났다가, 그곳에서 이자성에게 붙들려 살해되자, 18년간 계속되었던 부흥운동도 막을 내렸고 청의 중국지배는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이제 청으로서는 사냥이 끝났으니, 사냥개를 잡아 삶을 일만 남았다.

 

 

 

국역조선왕조실록(인조 22년, 1645년 5월 23일)
《 인조 045 22/05/23(경술) / 세자가 금군 홍계립을 보내어 자신의 주변 상황을 수서로 치계하다 》

 

  세자가 금군(禁軍) 홍계립(洪繼立)을 보내어 수서(手書)로 치계 하였다.


  “구왕(九王/다이곤) 이하 여러 진영은 유적을 대파시킨 후에 이미 승승장구의기세를 얻은 데다, 또 오삼계가 미리 전로(前路)의 주현(州縣)에 문서를 돌려서 모두구왕을 맞아 항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왕의 군대가 무령현(撫寧縣)에 도착하자그 성중의 백성들이 5리쯤 되는 길을 미리 마중 나와 기다렸다가 구왕을 영접하여 성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청하니, 구왕이 그 백성들을 어루만져 효유하고, 또 고시문(告示文)한 장을 주어 각기 자기 생업에 편히 종사하도록 타일렀습니다. 이때 구왕은 성 안에들어가지 않고 현의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묵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일찍 출발하여 영평(永平)의 큰 길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현의 서쪽 아랫길을 향하여 갔으니, 이는 대개 유적이 왔다간 후로 연도에 풀 한 포기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아랫길이 조금 멀기는 하지만 풀이 있어 말을 먹이기에 편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날 저녁에는 창려현(昌黎縣)에 도착하여 묵었습니다.


 

  27일에는 영평부(永平府) 난하(?河)의 하류인 난주(?州)의 남쪽에서 묵었고, 28일에는 개평위(開平衛)의 성 서쪽으로 10리쯤되는 곳에 도착하였고, 29일에는 옥전현(玉田縣) 앞에 도착하였으며, 30일에는 계주(?州)의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지역에 도착하여 묵었습니다. 5월 1일에는 통주강(通州江)의 얕은 여울을 건너, 저녁에 통주의 서쪽으로 20리쯤 되는 지역에 이르러 묵었습니다.하루 평균 행군이 1백 20∼30리 정도가 됩니다.


 

  지난번 계주에 있을 적에 유적 1백여인이 와서 항복하며 말하기를 ‘산해관에서 패배한 후에, 그들은 청나라 군대가 쫓아올 줄 알고 황급히 재화(財貨)와 부녀자들을 수탈한 다음, 29일 저녁에 화약을 터뜨려 궁전을 불태우고 성문으로 도망쳐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구왕이 여러 진영의 정예한 군졸들을 뽑아 팔왕(八王)과 십왕(十王) 및 오삼계 등에게 주어 그들을 급히 추격하도록 하고 구왕도 이틀 길을 하루로 당겨서 급히 전진하였기 때문에, 일행의 짐 보따리가 미처 통주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신(臣)은 그런대로 잘 먹고 지냈습니다마는, 시강원 이하는 모두 이틀 동안이나 밥을 굶었습니다.


 

  2일에는 일찍 출발하여 황성(皇城)을 둘러 나갈 적에 구왕이 황제에게서 지난번에 받은 황색 의장(儀仗)을 전도(前導)로 삼고, 가마를 타고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갔습니다. 그리하여 조양문(朝陽門)으로부터 들어가 대궐문 근처에 이르니, 금의위(錦衣衛)의 관원이 황제의 황옥교(黃屋轎)와 의장(儀仗)으로 구왕을 맞이하였습니다. 구왕은 황옥교를 타고 의장을 앞길에 배열하고서,장안문(長安門)으로부터 들어가, 무영전(武英殿)에 당도하여서는 황옥교에서 내려걸상에 올라 앉아, 금과(金瓜)와 옥절(玉節)을 궁전 앞에 나열시켰습니다.


 

  신은 이때 구왕의 참모관과 함께 동서로 나누어 앉아 있었습니다. 환관을 불러 유적의 형세와 황성이 함락된 이유를 물으니, 환관이 대답하기를 ‘유적이 2월 20일경부터 황성을 포위하여 대포(大砲)와 화전(火箭)으로 성중을 공략해 들어왔다. 그런데 성을 지키던 군졸들은 여러 달 동안 군량을 공급 받지못하여 모두 싸울 마음이 없어져서 밖으로 흩어져 나가 있다가, 미처 성을 들어오지도 못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4∼5첩(堞)씩을 지키다가 도저히 버틸 수 없어 모두 성을버리고 달아났다. 그러자 적이 마침내 성을 타고 넘어오니, 황제와 황후는 스스로 목매어 죽고, 태자와 황자(皇子)인 세 왕은 그들에게 붙잡혔다. 그후 황성의 백성들이 황제와 황후를 황성에서 1백 리쯤 떨어진 북쪽 진산(鎭山)에 장사 지냈다.’ 하였습니다.


 

  적이 이미 성에 들어와서는 국호를 대순(大順)이라하고, 원년의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하고서 황제라 자칭 한 지 42일 동안에 인심을수습하기 위해 침탈하는 행위를 금지했었는데, 산해관에서 패배하여 돌아온 이후로 성중의 재물과 보화를 모조리 수탈하여 가지고 가면서 화약으로 궁전과 여러 성문을 불태웠으나, 다만 인명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구왕이 황성에 들어가자, 황성의 백성들이 향을 피우고 두 손을 마주 잡고서 경의를 표하였으며, 심지어는 ‘만세’를 부르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중의 크고 작은 관원(官員) 및 환관 7천∼8천 명이 또한 모두 명함을 내밀고 와서 배알하였습니다. 궁전이 모두 불탔는데, 오직 무영전만이 우뚝 하게 홀로 남아 있었고, 내금천(內禁川)·외금천(外禁川)의 옥석교(玉石橋)도 파손된 데 없이 완연하게 그대로 있었습니다. 불타버린 집에서 나온 제비들은 높게 혹은 낮게 하늘을 까맣게 가리어 날으니, ‘봄 제비가  숲에 둥우리를 튼다[春燕巢林]’는말이 참으로 헛 말이 아닙니다.


 

  구왕이 무영전 앞 행랑 채에 신의 처소를 정해 주었는데, 공간이 비좁고 사람은 많으므로, 구왕에게 말하여 무영전 동쪽 방을 얻고 나니, 전보다는 조금 넓고 또 침상·탁자·병기·의장 등도 있습니다.


 

  구왕이 황성에 들어온 후로는 장수 용골대(龍骨大)등을 시켜 성문을 관장하게 하여, 청나라 사람과 우리 나라 사람을 출입하지 못하도록 엄금하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과 신을 따르던 일행의 인마(人馬)들이 모두 성 밖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청나라 사람이 심양으로 돌아가는 인편을 만나, 대단히 바쁘고 황급한 가운데 대충 적어서 치계를 드리니, 황송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원전】 35 집 185 면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출처: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  |  글쓴이 : 이길상 원글

 

 

 

 

 

     81. 청의 중국 지배(2)

 

                 - 호복변발과 팔기(八旗) 및 녹영(綠營)

 

                              나. 회유(懷柔)와 강경(强硬)

                                          

                              (1) 호복(胡服)과 변발(? 髮)

 

  천안문 광장과 중국 군경다이곤이 이끄는 청나라군대가 베이징에 입성 후 다른 것은 죄다 명의 유습을 존중하고 그대로 두었으나 복장과 머리털 모양만은 그네들의 방식을 따르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소위 호복변발을 강요하고 이를 명령한 것이다.

 

이런 명령에 대해서 중국인들은 만주족의 복장인 호복(胡服)은 비교적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앞과 옆 머리는 빡빡 깎고 뒷머리만 남겨 길게 땋아 늘어뜨리며, 수염도 콧수염만 좌 우 열 개씩만 남기고, 나머지는 깎아 버리는 소위 체두변발(剃頭 髮)에 대해서는 심한 반발과 물의(物議)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의관(衣冠)이 곧 신분을 표시하던 동양적인 전근대사회에서 각 민족은 머리털 또한 매우 중시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무인이 중심이었던 흉노(체두-剃頭)와 선비(삭두-削頭), 그리고 몽골(개체-開剃)이나 여진(체두-剃頭), 일본(권발-卷髮)에서는 그 형태는 조금씩 다르나 남자들은 모두 머리를 깎았다.

 

  반면 문신 중심의 중국(長髮과 束髮)과 조선(結髮)에서는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내 몸과 터럭과 살갗은(身體髮膚)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受之父母), 감히 이를 손상하지 않고 잘 보존하는 것이(不敢毁傷) 효도의 시작(孝之始也)으로 보았고, 특히 머리털과 수염을 깎는다는 것은 금기(禁忌) 중의 금기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중국인들이 몽골 족이 세운 원의 지배하에서는 개체(開剃) 변발이라 하여, 앞 머리에서부터 뒤 꼭지까지는 빡빡 깎고 좌우 옆 머리만을 남겨 이를 두 가닥으로 길게 땋아 늘여 뜰이는 치욕을 당했다가, 명의 성립과 동시에 머리털도 중국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만주족이 들어와 돼지꼬리 같은 이런 머리모양을 강요하자 거세게 반발한 것이다.

 

  그래서 다이곤도 이런 명령을 내렸다가 반발이 거세자 20 여일 만에 일단 취소하고, 사태를 관망하다가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다시 변발을 강요하였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끈질기게 변발을 강요했는가?

 

  여진 사회에서 머리를 기르는 것은 상중(喪中)임을 표시할 뿐, 머리를 깎는 것 자체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만주시절부터 투항(投降)이나 귀화(歸化)해 온 외국인들에도 어김없이 변발을 강요하였고, 심지어 적(敵)·아(我)를 머리털로 구별하였다.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를 막기 위해 털가죽으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감싸고, 여름이면 이를 벗어 던져 더위를 피하는 원초적인 생활습관에서, 목욕은 고사하고 세수조차 재대로 하지 않는 이들에게, 머리털은 귀찮은 존재일 뿐, 다른 아무런 가치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19세기 Formosa(타이완) 사람들 / 사진자료  기후와 풍토가 만주와는 다른 중국에서 굳이 이를 강요한 것은, 복장과 머리털을 포함한 전래의 외형을 그들 스스로 지키고, 이를 중국인들에게 강요함으로서 중국에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원대한 포석도 동시에 깔고 있었던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힘에 못 이겨 별 수 없이 머리를 깎았다. 그런데 이것이 남쪽으로 올수록 반발은 심해졌는데, 순치 2년(1645) 6월, 강소성(江蘇/장수)에 변발 명령이 내렸을 때, 이곳 사람들은 하루만에 모두 머리를 깎았다.

 

  그러나 양자강 남쪽 절강성(折江/저장)에 같은 명령이 전달되자, 지식인을 중심으로 일반시민, 농민들이 가세하여 들고 일어나, 어느 변란(變亂)때 보다도 강경하게 반항하였다.

 

  이들은 머리를 깎기 위해 내려온 만주 인들을 몰아내고, 일 년 간은 머리털을 지켰다. 그러나 조직력이 없었던 그들로서는 일단 머리털을 지키는데 안도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않고 있다가, 결국 저항력은 무너지고 차례대로 머리는 깎였다. 이래서 3년 후에는 전 중국인들이 체두변발과 호복 차림으로 거리를 메웠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앞서 김지준이 제시한 열 가지 조건 중에, 도사나 승려 등은 청의 관습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이 적용되고, 이들은 호복과 변발에서 제외되자, 자존심 강한 학자나 지사들 중에는 출가하여 이를 피하고 지조(志操)를 지켰다.

 

  그런데 풍속이나 유행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기존의 제도에서 이질적인 문화가 유입되면 몸에 박힌 가시를 뽑아 내야 하듯, 처음에는 완강하게 이를 거부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이질문화에 몰입되고 만다. 이것을 원래대로 복원하려면 이때는 다시 복원 자체를 거부한다.

 

  1851년 청조에 반기를 들고 태평천국을 세웠던 홍수전(洪秀全)은, 변발을 버리고 장발로 돌아가 이상국가를 세우고자 했으나 실패하였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지고 변발을 금지시키자, 이번에는 그에 대한 반발이 다시 일어났었다.

 

머리털을 두고 시끄러운 것은 예나 이제나 우리들에게도 다를 것이 없었다.

 

개화기 우리나라에도 을미사변 후 성립된 제 4차 김홍집내각에서는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채택하여,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1월1일로 정하고, 연호를 세워 건양(建陽) 원년이라 했다.

 

동시에 임금 고종이 솔선하여 머리를 깎은 후, 당시 제 4차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의 고시로 이른바 단발령을 발표하였고, 국왕을 비롯한 관리들의 복장도 바꾸었다. 그리고는 관리들이 가위를 들고 길거리에 나서서 상투머리를 보는 데로 잘랐다.

 

그러나 민비시해로 반일 감정이 격화되어 있었고, 음력의 폐지와 단발령 또한 일본의 간계라 하여 유생들을 중심으로 정부의 이런 정책에 심하게 반발하다가 결국 의병으로까지 확대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서 대다수의 친위대가 지방으로 내려갔고, 임금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불안한 심기를 감주지 못했다.

 

이런 틈새를 비집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이범진 이완용 등 친러파는 임금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게 하였는데(俄館播遷), 이 과정에서 김홍집과 어윤중은 피살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다시 이들의 세상이 되었다.

 

대한제국이 문을 닫고 일제 강점기에 들어섰을 때, 대다수 사람들이 상투를 잘랐고, 자격 면허를 얻어 머리를 전문적으로 손질해 주는 이발사(理髮師)가 등장하고, 이발관도 수 없이 생겨났으며, 바리캉이라는 프랑스제 머리 깎기 기구도 들어와 서양식 머리문화가 움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41년 12월, 일본내각총리 및 육군대신을 겸했던 동조영기(東條英機 / 도조히데키)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머리를 깎고 설치자 일본조야가 머리를 깎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그 여파가 조선에까지 닥쳐 남자들은 노유(老幼)를 막론하고 모두 머리를 빡빡 깎았다.

 

  광복 후 어른들은 상투머리 아닌 서양식 머리모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계속 삭발을 강요하였고, 헌법에 신체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학생들의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가위를 들고 서슴없이 잘랐다.

 

  이를 두고 학부모나 그 말 많은 언론조차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아예 입을 봉했다. 그래서 이들이 교문을 떠나면 대부분 우선 머리부터 길게 길렀다.

 

  1970년대, 젊은이들의 머리모양이 유행 따라 장발이 주류를 이루자, 이것이 남에게 혐오감을 준다 하여 거리에서 경찰이 이들을 단속하고, 단발(短髮)을 지시했다가, 이에 응하지 않으면 경범죄로 처벌하였다.

 

 1980년대 중·고등학생들에게도 드디어 두발과 교복자율화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자율과 자유는 다르다는 억지 논리가 등장하고, 논란 끝에 교모(校帽)는 사라졌지만, 교복(校服)은 부활되었고, 두발만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는 했으나 학교마다 단속 기준을 정하고 그 간섭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까지 이어지고있다.

 

 물론 여기에는 힘없는 학교가 이런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간섭을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청소년보호라는 명분 아래 사회가 합의하고 이를 학교에 압력을 가하기 때문인데, 지금도 염색된 노랑머리 청소년을 바라보는 많은 성인들의 시각으로는 그 자체가 불량일 뿐 개성있는 모습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작금의 실정이고 보면, 이런 가치관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간섭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2) 팔기(八旗)와 녹영(綠營)

 

  청나라가 명의 잔존 세력을 토벌하는데는, 홍승주와 오삼계를 비롯한 중국인 장졸들을 앞장세우고, 그 뒤를 만주의 팔기 병들이 따르면서 감시와 독전(督戰)을 병행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청나라 군사의 핵심 정예(精銳)는 기병(騎兵)들이었고, 이들이 사막이나 초원지대에서는 십분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중국의 본토에 들어서면 사정이 확연히 달라진다.

 

산과 바다, 강과 호수가 많은 중국 지형에서는 우선 산악전(山岳戰)과 수상전(水上戰), 그리고 장기전(長期戰)을 기본으로 치러야 하고, 이런 전투에서 기병의 위력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날씨가 무덥고 늪과 호수가 많은 남쪽 지방일수록 청나라 군사들은 맥을 못썼다. 청나라는 이런 고민을 풀기 위해 중국 전래의 전투방법을 채택하고, 명나라의 군사 중 희망자를 따로 모아 이들의 깃발을 녹색(綠色)으로 하여 한인팔기(漢人八旗)와 구분하고, 깃발의 색깔에 따라 녹영(綠營)이라 불렀다.

 

팔기(八旗)란 글자 그대로 여덟 개의 깃발을 말한다. 황·백·홍·남색의 4색 깃발과, 각 색의 깃발에 태를 둘러 다시 네 개를 더 만들어 모두 여덟 개로 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 글에서 이야기 한데로 이것은 원래 여러 부락이 공동으로 산을 에워싸고 몰이 사냥을 할 때 만든 진형(陣形)을, 누르하치가 병농일치(兵農一致)의 행정·군사제도로 변형 발전시킨 것이다.

 

  그들의 몰이 사냥 방법이란 대략 이런 것이다. 짐승이 달아날 수 있는 길목에는 황색기를 든 추장이하 부락민이 자리하여 미리 지키고, 그 황색기를 중심으로 남색기를 든 부락민이 좌우로 갈려 타원형으로 진형을 이루고 산을 에워싼다. 여기에 홍색기와 백색기를 든 부락민들은 포위망 한가운데서 시작하여 각각 양쪽으로 포위망을 좁혀 짐승들을 황색기 있은 곳으로 몰아내어 잡는 방법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백색기와 홍색기는 가운데서부터 몰이 역할을, 남색기는 옆으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포위 역할을, 황색기는 한 곳으로 몰려온 짐승들을 포획(捕獲)하는 역할을 각각 나누어 맡았는데, 이런 집단 사냥 기술을 군대의 편제와 전투에 응용했다는 것이다.

 

  1616년, 누르하치는 만주족에게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실시하고, 모든 씨족을 팔기(八旗)에 소속시키고, 기(旗)를 구사(gusa/固山)라 불렀다. 구사의 우두머리를 구사에젠(Ejen/額眞)이라 하여 그 일족을 배치했는데 에젠이란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훗일 도통이라고도 불렀다.

 

  각 구사(gusa/固山/旗)에는 5 갑라(甲喇/잘란/무리라는뜻)를 두었고, 각 갑라는 5우록(牛 ?/니루/화살이라는 뜻)으로 나뉘고 각 우록에는 300명의 장정이 속하게 하였다.  따라서 하나의 gusa(旗)에서 전투에 동원될 수 있는 장정은 7500 명에 달하였고, 이들 장정들을 기인(旗人)이라 하였다. 이들을 전부합하면 6만 명이 된다.

 

  처음에는 만주인들 만으로 팔기를 만들었다가 1635년 몽골인 들로 구성된 몽골팔기가 1642년에는 한인(漢人)들로 구성된 한인팔기가 만들어져, 만주8기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도록 하였는데, 이로써 8기의 총 병력은 18만명이 되었다.

 

 

  다이곤이 산해관을 넘어 중국에 들어 왔을 때, 팔기병의 총 병력은 10만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베이징에 들어와서 일반인들을 성안에서 몰아내고 궁궐 수비와 수도 치안을 맡으면서 천하를 장악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그 후 수도에 주둔하면서 중앙을 수비했던 부대를 금려(禁旅) 팔기라 하였고, 지방의 요소에 배치된 부대를 주방(駐防) 팔기라 하였다. 팔기에 소속된 기인(旗人)들은 기지를 포함하여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고, 그들의 지위가 자손에게 세습되어 특이한 무사 신분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저 김지준이란 자가 기인(旗人)은 상업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법을 제정했을 때, 설마 자기들이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아야 된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웃어 넘기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 사회는 안정되고 역할은 축소되어 이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었을 때, 그 후손들은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보복인가를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조법(祖法/조상이 만든 법은 고칠수가 없다)이라는 족쇄가 이들은 단단히 묶고 있었기 때문이다.

 

녹영(綠營)은 명나라의 군대로 있었던 사람들이 청이 중국을 지배하자 지원하여 다시 청나라 군대로 이름만 바꾼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부대의 편제나 편성도 명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청은 60만에 이르는 이들 녹영을 전국 요소에 배치하고 팔기로 하여금 이를 감시하게 하였다. 반청세력과 잔적(殘賊)을 소탕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을 때,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녹영을 앞세우고 그 뒤를 팔기가 따르게 하였다.

 

그 후로도 강남지방 일대에는 해적을 비롯한 반청세력들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계속 나타나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유력한 한인(漢人) 출신의 군벌들을 왕으로 세워 이곳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런 군벌로서 왕이 되었던 사람이 오삼계와 상가희(尙可喜), 그리고 경중명(耿仲明) 등이 었다. 이들을 흔히 3번(三藩)이라 불렀다.

 

  이들 3번이 강희제(康熙帝/1661 ~ 1722) 때 난을 일으켜 청나라에 대항했다가 모두 토벌되었는데 이를 3번의 난(1673 ~ 81)이라고 한다.

 

(3) 젊은 황제 순치제의 순애보(殉愛譜)

 

청대의 자기  불과 여섯 살 나이에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황제로 즉위한 순치제는 철저하게 유학교육을 받고 자랐다.

 

자금성에 들어와서도 그 주위에는 이름 있는 학자들은 불러 모으고 이들과 담론을 즐기면서 더욱 유가적인 교양을 쌓았다.

 

황제라고는 하지만 실권은 그의 삼촌이자 섭정(攝政)인 다이곤이 가지고 있었기에, 그가 황제로서 치세한 기간은 다이곤이 사망한 1653년부터 61년까지 햇수로 불과 8년 남짓하다.

 

그런데 그가 다이곤에게 실권을 맡기고 한 창 유가적인 교양을 쌓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겼다.

 

몽골 출신의 순치제의 어머니, 즉 태종 홍타이지의 황후는 이때 황태후가 되어 있었는데, 이 황태후가 그의 시동생이자 태종의 동생이며 순치제의 숙부(叔父)인 섭정(攝政) 다이곤과 재혼을 하게 된 것이다.

 

  형이 죽으면 그 형수를 동생이 아내로 맞이하는 이른바 형사처수(兄死妻嫂)가 만(滿)·몽(蒙)사회에서는 전래된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삼국지위지 동이전 부여조에도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으니 이는 흉노와 같은 풍속"(兄死妻嫂 匈奴同俗)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그들의 풍속이며, 이때까지 그 풍속은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사회의 풍속이고, 이런 일을 생전 처음 보게 된 중국 관료들은 밝은 대낮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속으로는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그들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입가에 흘리면서 연신 축하한다고 다이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이들 중국인들이 더욱 놀랬던 것은, 비록 다이곤이 섭정으로서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는 있었지만, 서열 상 황태후보다는 분명히 몇 단계 아래인 신하의 신분이다. 황태후가 어떻게 신하에 해당하는 사람과 내리 혼인(降婚)을 할 수 있는 가라는 점은 호기심 이상으로 이들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나름대로 철이 들었고, 유가적인 교육으로 이미 중국적인 사고가 몸에 벤 순치제로서는 이를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여진족은 몽골 족이 모든 면에서 그들보다는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몽골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청나라 왕실에서는 몽골 여자를 황후로 삼는 것이 관례화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서 순치제는 몽골출신의 어머니가 싫었고, 숙부에게 혐오감(嫌惡感)을 갖는 동시에, 몽골 족까지 밉게 보았다. 순치제의 상심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무분별한 정사(情邪)를 막고 군주독재 권을 확립하기 위해 궁중 법도를 새로이 마련하여 조법으로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다.

 

  중국의 관습상 일부일처는 필부들에게나 해당되는 부끄러운 것이고, 남자가 많은 처첩을 거느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진나라 시황제가 아방궁을 짓고 3천 궁녀를 거느리면서, 궁녀들 방 앞에는 양의 먹이를 두게하고, 양을 몰고 다니다가 먹이를 먹는 방에 들어가 동침하고 그 정표를 남겼다고 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황제가 수 많은 비빈을 거느리고 그 몸에서 수 많은 자녀가 태어난 것은 역대 제왕들의 공통적인 사실이다.

 

  이것이 청대에 이르러, 황제의 침실을 관장하는 경사방태감(敬事房太監)이란 환관이 저녁 수라가 끝날 무렵이면 크다란 은쟁반에 황제가 총애하는 비빈의 이름이 적힌 녹두패(錄頭牌)를 올리면 황제가 이를 보고 생각이 없으면 그냥 물리고, 그중 하나를 뒤집어 놓으면, 그 날밤의 행운(?)은 그 녹두패의 주인공이 차지하게 되는데, 엄격하게 시간이 정해지고,.. 일이 끝난 즉시 자기 처소로 돌아가야 한다.

 

이때 경사방태감은 황제에게 수태(受胎) 여부를 물어보고 유념하라고 하면, 대장에 성명과 연월일시를 상세히 기록하여 훗일 증거를 남기고 그렇지 않을 때는 출산을 하지 못하게 조치했다. 평소 황제가 후궁의 처소를 찾아도 황후의 승인이 없으면 그 후궁은 황제에게 절대로 문을 열어 주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 아들이 태어나면 적서(嫡庶)의 차별없이 태어난 순서에 따라 제1 아고(황자) 제2 아고 하는 식으로 번호를 매겨 아고방이라는 곳에 같이 수용시키고 아무 차별없이 교육을 받게 한 후 그 중 가장 뛰어난 아고에게 다음 제위를 계승케 했다.

 

  이런 것이 순치제가 만든 조법이다. 로맨틱한 장면이라고는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고, 씨받이 내지는 씨내리가 남녀간 사랑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무미 건조한 법을 만들어 후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막상 자신은 한 여인을 사랑하다가 24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고 한다.

 

  1653년 다이곤이 죽자, 죽은 그를 벌(罰) 주고, 몽골출신의 황후를 폐위시킨다고 선언하여, 신하들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래게 만들었다. 주위에서 아무리 간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관습상 몽골 여자를 다시 황후로 세웠지만, 새 황후 역시 버릇 없다는 핑계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렇게 상심 속에 시름없이 지나던 이 젊은 황제 앞에, 생명을 다 바쳐 사랑할 만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동귀비(董貴妃)라고 불렀던, 기록상으로는 만주출신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항간에 떠다니는 소문으로는 양주(陽州/양저우)에서 이름을 떨치던 어느 부호의 애첩 동소완(董小宛)이라는 미모의 여인이, 양주가 변란으로 시끄러울 때, 포로가 되어 베이징으로 왔다가, 어떤 연줄을 따라 궁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젊은 황제를 사로잡았고 한다.

 

  이 젊은 황제는 동귀비가 옆에 없으면 수저도 들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고 아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동귀비가 순치 17년(1660) 8월 병을 얻어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

 

  비탄에 잠긴 황제가 이번에는 죽은 동귀비를 황후로 봉한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주위에서 부당함을 간곡하게 아뢰자, 인생무상을 느끼고 자금성의 황제자리를 팽개치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죽치고 앉아서, 아무리 신하들이 권해도 나오지를 않자, 할 수 없이 황제가 사망하였다고  발표하고 어린 그의 아들을 다음 황제로 세워 이를 수습하였다.

 

  이런 것은 다만 민간에서 쉬쉬하는 가운데 소문으로만 전해졌을 뿐, 공식 기록에는 순치 18년(1661) 정월 초 이튿날, 황제가 마마를 앓는다고 알려지고, 곧 이어 24세의 젊은 황제의 죽음이 발표되었다.

 

  곧 유조(遺詔)가 발표되고 순치제의 두 아들 가운데 둘째인 여덟 살의 현엽(玄燁)이 청의 4대 황제로서 뒤를 이었는데, 이가 희대의 명군 성조 강희제(聖祖 康熙帝 / 1661 ~ 1722)다.


 

출처 : 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  |  글쓴이 : 이길상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