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협은 대천이 무릎을 꿇은 것도 모자라 저토록 고개를 숙이고 존칭을 쓰고 있다는 것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취아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저 여인을 들이지 않았다면 그의 주군이 저런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리어 응재는 이 일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득차 있었다. 모든 것은 지금 대천의 진심(眞心)에 달려 있다.
"욕을 하셔서 소저의 마음이 풀리신다면 얼마든지 그리 하셔도 좋소.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주시길 바라오. 내가 느끼고 있는 자괴감(自愧感)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그 간신배들에 대한 혐오감도 짙어진다오. 소저가 진정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하신다면, 4大 간신을 제거하는데 일조(一助)하셔야 할 것이오. 나 또한 그들의 피해자요."
취아는 대천의 진솔한 눈빛을 보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사 죄하고 있었다. 대천을 노려보던 그녀의 눈에서는 점점 독기가 사라졌다. 그 렇다고 완전히 경계를 늦추진 않았다.
"보아하니 나리께서도 권세를 얻고자 무던히도 애쓴 모양입니다. 여하튼 이 몸뚱이가 그런 대사(大事)에 끼여들어 장부(丈夫)들께서 목적하신 바를 이루는데 누(累)나 끼치지 않을까 의문이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한 번 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이쯤되면 반은 성공이었다. 대천은 요염하지만 영리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음성을 낮추고 조용히 대답했다.
"장 소저께서 정 내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으나, 일단 그 방법이란 게 여간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것이오이다. 4大 간신들 중, 두 명의 눈과 귀 를 어지럽히는 난임(難任)이라 하면 감이 오겠소?"
대천의 눈빛은 간절했다. 취아는 이 집에 들어오기전, 어차피 죽을 작정을 하였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간신배들에게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그녀의 친부(親父), 친모(親母)를 죽인 사람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취아는 더욱 단호한 어투로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나리께서는 돌아가신 내 부모를 위해 무엇을 하시겠소?"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당돌하였다. 하지만 대천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인지, 그녀의 무례한 발언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고 한 층 더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일이 잘 성사되기만 한다면, 이 부근의 모든 백성들과 이 임대천의 집에 장 장군 내외의 위패를 모시고 하루에 세 번 절하게 하며 일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는 행사를 갖도록 하겠소. 물론, 지금부터 우리 집 사당(祠堂)부터 당장 시행할 수 있소."
이 정도면 대성현(大聖賢)급의 예대(禮待)였다. 취아는 대천의 행동을 보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으나, 그를 더욱 시험하기 위하여 싸늘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다면 죽간(竹簡)에 나리께서 방금 하신 그 말을 새겨 이 집 본관(本館)에 걸고 다시 맹세하십시오. 그리하면 완전히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좋소이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내가 직접 새겨 넣겠소."
"비록 내가 나리의 제의를 받아들이긴 하였지만, 이 수락이 나리를 완전히 용서한다는 의미는 아니니, 살펴서 잘 생각하신 후,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이 쯤되면 주객(主客) 전도요, 장단(長短)의 뒤집힘이었다. 유 협은 대천의 계획에 동의하기는 하였으나 이렇게까지 몸을 숙일 줄은 몰랐다. 응재는 대천의 인내심에 놀라기도 하고, 취아의 당당함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주막에서 뭇사내들에게 웃음을 흘리며 머리가 텅빈 여인네처럼 행동했던 그 취아가 아닌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이란 겉보고는 모르는 법이다. 대천은 손수 감옥 문을 열어주며 응재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성찬 후 댁에 이 소저분을 하루 이틀 모셨다가, 함께 제나라로 떠나심이 어떠시겠는가. 자네도 곧 그리로 가실 것이니."
"그, 그리 하겠습니다."
응재는 멋적게 머리를 긁었다. 갑자기 취아의 처지가 상승되었으니, 어찌 대해야 할찌 아리송해 진 것이다.
"그간 많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공자(公子)님. 하지만 앞으로도 더 신세를 져야 할 것 같군요."
응재는 어안이 벙벙하여 자신도 모르게 포권하며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쩝.. 이렇게 상황이 바뀌게 되다니, 역시 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로군요. 아, 장인어른. 저도 이만 가보아야 겠습니다. 부모님께서 여간 걱정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대천은 문득 아직까지 돌아오고 있지 않은 딸이 떠오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응재에게 다시 한번 깊이 사죄하였다.
"사돈께 조만간 이 대천이 직접 찾아가 뵙겠다고 전해주시게. 딸을 잘못 키운 내 죄가 크네."
그는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가 백의 작위를 가졌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성찬 후의 임(任)나라라는 땅에 와서 더부살이하는 처지이니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대천이 환공에게 혈검(血劍)을 바치고 나서 그 댓가로 얻은 것은 백이라는 작위와 약간의 재물에 불과했다.
환공에게 절대적 충성을 다했던 성 후는 그에게,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임나라에 와서 살 것을 권유하였고, 임나라의 상당부분을 떼어주며 자치권(自治權)도 보장해 주었다. 다행히 대천은 현명한 통치를 해 나갔고, 성 후도 만족하며 더욱 그를 신임하였다. 그래서 초린을 며느리감으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혈검비무가 끝나고 안정이 되거든 그 때 천천히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 때면, 초린낭자도 마음의 준비가 되겠지요."
응재 또한 포권하며 물러났다. 대천은 직접 대문까지 마중나가며 성 찬후에게 잘 말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취아도 대천이 내어 준 가마에 올랐다. 시간은 이미 자시(子時;밤 11시~1시)가 넘어 있었다.
용하는 초린을 지키느라 잠도 충분히 자지 못했다. 무슨 기척이라도 있으면 곧장 칼에 손을 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통은 들쥐거나 딱정벌레였지만 그 소리 마저도 범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초린은 용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한 표정으로 잠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녀는 이틀동안 집을 나온 것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진 그는 초린의 침상에 기대어 선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용하는 경쾌하게 울어대는 종달새 소리에 조용히 눈을 떴다. 머리는 여전히 무거웠다. 초린은 용하보다 더 일찍 눈을 떴지만 침상에서 내려올 생각을 아니하고 있었다. 용하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이고 그녀에게 물었다.
"아씨. 오늘은 들어 가셔야 하옵니다. 주인어른께서 무척 상혼(喪魂;몹시 놀라 얼이 빠짐)하셨을 것이옵니다."
그 말에 초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용하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우리 딴 데로 가자. 지금 들어가면 너나 나나 무사하지 못할 거야."
용하는 초린의 철없는 생각에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에는 어떤 다급함도, 두려움도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초월한 듯 싶었다. 그는 초린의 팔을 부드럽게 거두며 다시 달래었다.
"아씨. 아씨께서는 주인 어른의 따님이시옵니다. 무사하지 못하시다니요, 어찌 아버지께서 따님을 해치겠사옵니까? 겁내지 마시고 저만 따라 오십시오."
"그럼 용하는? 난 그렇다 치고, 용하는 어떻게 할 건데?"
용하가 보기에 초린은 아직 어린아이 같았다. 그녀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용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 걱정 마십시오, 아씨."
초린은 용하의 태도에 무엇이 이상하다 싶었는지 한동안 곰곰히 생각하다가 크게 외쳤다.
"싫어! 나 안가. 용하도 가지 마, 응? 이번엔 정말 안될 것 같단 말야. 가지 말자."
초린이 떼를 쓰면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용하는 초린의 손목을 꼭 잡고 밖으로 뛰쳐 나가려는 것을 막았지만 이미 그녀의 발버둥이 시작되고 있었다.
"싫어, 안가! 싫단 말야!"
용하가 초린의 어깨를 세게 부여잡자, 그녀는 그의 팔뚝을 물어 뜯으며 앙탈을 부렸다.
"아씨, 죄송하옵니다."
'퍽!!'
"으음..."
'털썩!'
초린은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어쩔 수 없었던 용하가 초린의 뒷머리를 쳐 잠시 기절시킨 것이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초린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소인도 아씨를 뫼시게 되어 행복했었습니다. 평생 모시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잠시 옛 추엇을 회상하는 듯, 용하의 눈동자가 꿈꾸는 듯이 흔들렸다. 헐벗은 어렸을 적 역병으로 죽은 부모님 앞에서 몇날 몇일을 울고 있는데, 마침 그 곳을 지나던 대천과 유 협의 눈에 띠어 격투기술을 배우며 여태껏 이곳에서 살아온 것이었다.
그 때 초린은 다섯 살, 그는 일곱 살이었다. 꼬마 선녀처럼 예뻤던 초린은 그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장난을 걸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고집이 세어 용하를 곤란하게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는 한번도 그녀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감싸주는 것이 하늘이 내려준 사명(使命)인 듯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벌(罰)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였다.
"또 한번 아씨의 몸에 손을 대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니 다신 이런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그는 그녀를 안고 말이 묶여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일단 그녀를 말에 태우고 밧줄로 고정 시킨뒤, 그는 말을 몰아 길을 나섰다. 그는 가는 내내 거리의 모든 풍경을 담아 두려는 듯 새삼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웠다. 나무 하나, 꽃잎 하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아름다워 보였다. 그는 그렇게 넋을 잃은 듯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
|
|
Subject |
혈검지도 3부- 아씨를 위해서라면 下 (81) |
|
|
드디어 용하는 혈풍회의 대문 앞에 당도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 노곤한 몸을 바로 세우며 하품을 하고 있던 문지기들은 용하를 보자 깜짝 놀라 달려나왔다.
"아니, 자네 미쳤는가? 지금이 어느때라고 들어와?"
"일단 아씨만 맡겨두고 몸을 피하세나. 이렇게 들어 가다간 목숨 을 부지하기 힘들걸세."
제각기 용하를 위한답시고 한 마디씩 해댔지만 그는 고개를 저 으며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초린을 안아 들었다.
"말씀들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내 걱정들은 마시고 문을 열어 주십 시오."
"이보시게. 약관의 나이에 생을 마감할 것인가? 뒷일은 우리에게 맡 기고 어서 도망가라고 하지 않아!"
용하는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들이 무척 고마웠지만 전혀 그럴 생각 은 없었다. 만일 그가 여기서 내뺀다면 아씨를 빼내어 욕보이고 도망 갔다는 소문을 듣게 될 것이고, 초린 또한 곤란한 지경에 처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용하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 고, 어쩔 수 없이 대문을 열었다.
"무조건 빌게나. 행운이 있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용하는 그들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성큼성큼 안으로 들었다. 지나가 는 하인들도 용하의 품에 축 늘어져 있는 여인이 초린이라는 것을 알 고 지네들끼리 뭐라고 쑥덕였다. 그는 거침없이 대천의 방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하인에게 일렀다.
"어르신을 불러 주십시오."
그 하인 또한 초린의 얼굴을 보고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유 협을 불렀다.
"어르신... 잠시 밖으로 나오심이..."
유 협과 함께 이런 저런 일을 의논중이었던 대천은 그 소리를 듣고 말했다.
"자네를 부르는군. 나가 보시게."
유 협은 워낙 대화에 열중하고 있던 지라 하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 를 듣지 못했다. 어쨌든 그는 대천이 나가보라기에, 별 생각없이 방문 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의 눈 앞에는 초린을 안은 용하가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나도 머리가 좀 아프군. 나가서 바람이나.."
뒷목을 두드리며 밖으로 나온 대천은 말을 잇지 못했다. 금지옥엽 기 른 딸이 일개 종 따위의 품에 안겨 있다니. 대천의 눈에 핏발이 섰다. 유 협은 정신을 차리고 여종들을 불러 초린을 모시라고 말했다. 용하 는 대천을 보자마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주인 어른을 뵙습니다."
대천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유 협은 다급히 용하에게 재촉하여 물었 다.
"대체 어찌 된 것이더냐, 응? 아씨는 왜 저지경이 된 것이냐? 어서 말 을 해 보거라."
"말할 필요도 없다."
갑자기 대천이 유 협의 말을 잘랐다. 용하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다 는 듯이 눈을 꽉 감았다.
"쓸모없는 것은 즉시 처단함이 옳다. 내 검을 가져와라."
"주공! 모든 것은 소신의 죄이옵니다. 용하는 아씨의 명을 어길 수 없 었을 것이옵니다. 살펴 주시옵소서."
유 협이 간절히 아뢰었지만 대천은 하인이 가져온 검을 받아들고 용 하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혼인의 일방적인 파기로 인해, 나는 엄청난 망신을 당했다. 네 소임 을 다하지 못한 죄가 크다는 것을 알겠느냐?"
"백번을 죽어도 마땅하옵니다. 주인 어른의 어떤 처분도 달게 받겠습 니다."
'채앵!'
대천의 긴 칼날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용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칼이 그의 목에 닿으려는 순간,
"주공! 주공. 소신이 이렇게 비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시옵소서."
'어르신...'
용하는 유 협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다. 그에게는 특별히 엄격하기만 했던 '어르신'이었는데 지금 자신을 위해 이토록 빌고 있다. 유 협이 하인 한명을 위해 이렇게 빈 적은 없었다. 대천은 발 밑에 엎드려 계 속 간청하는 유 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씨를 신(神)처럼 모시며 살아온 아이옵니다. 선처를 부탁드리옵니다."
대천은 칼을 마당에 집어 던졌다. 곧 하인이 달려들어 그 칼을 조심스 럽게 거두었다.
"자네가 그토록 청하는데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목 을 베는 대신 난장(亂杖; 신체의 부위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마구 치 는 곤장) 80대를 치고 내쫓도록 하라."
당장 목을 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난장 80대면 죽거 나 불구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유 협은 속으로 용하가 죽지만 않 기를 바랄 뿐이었다. 곧 큰 몽둥이를 든 두 명의 병사가 다가왔다. 용 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대천의 뒤통수에다 대고 절을 하였다.
"그간 소인을 거두어 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대천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모두들 뒤돌아 서 있 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시행하라!"
그의 표정과는 달리 단호한 명령이 튀어나왔다. 명이 떨어지기가 무 섭게 그 병사들은 사정없이 용하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유 협은 그 광 경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고, 이 소식을 알고 달려온 만식이도 눈물을 흘렸다.
대천의 방안 까지도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뼈가 튀는 소리와, 골이 깨어지는 소리가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넌 이미 내 딸을 사모하고 있구나. 서로를 위해선 어쩔 수 없겠구나.'
천민이 귀족과 사랑에 빠지면 둘 다 능지처참 감이었다. 대천으로서는 집안의 기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혹(酷)한 벌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유 협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용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 만 매질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신음을 낼 기력조차 없는 그였다. 만식 과 용하와 친했던 다른 하인들도 눈물을 쏟으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부러진 다리 위에 또 거센 매질이 가해졌다. 용하는 외마디 비명 을 지르며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찬물이 끼얹어지고 그가 퉁퉁 부어 오른 눈을 간신히 뜨면 또 매가 떨어졌다. 이 광경에는 유 협도 눈물 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옥같은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대천이 명령한 댓수가 다 채워졌다. 곧이어 병사들은 만신창이가 된 용하를 질질 끌고 나갔다. 만식은 울 부짖으며 그 뒤를 쫓았다.
"으흑.. 용하야!"
안으로 대문이 잠궈지고, 용하는 길에 버려졌다. 문지기들에게 사정 사정을 하여 밖으로 나온 만식은 피에 흠뻑 젖은 용하를 억지로 일 으켰다.
"용하야.. 설마 죽은거야? 야! 죽으면 안돼.. 우린 영원히 친구하기로 했잖아.. 으흐흐흑..."
그는 용하의 안고 눈물을 쏟다가 이대로 두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는 지, 일단 그를 들쳐 업었다.
"어디로 가야되지?..으흑.. 어디로 가야 이 자식이 살 수 있지?"
막상 그를 업긴 했지만 갈 데가 없었다. 다급히 길거리를 헤메며 여 기저기를 기웃거리던 그는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운아네로 가자."
그는 장터로 발을 돌렸다. 운아와 그녀의 아버지라면 용하를 따뜻하 게 맞아줄 것이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흐흐흐.. 네 놈은 아비도 없다지?'
'하하.. 네 어머니는 말도 못하잖아! 그렇지 않아?'
'쬐끄만게 눈빛만 살아가지고는.. 벙어리 자식이 오죽 할까?'
'네 아비의 원수를 갚고 싶지 않으냐? 어서 칼을 잡아라! 쓰러질 때 까지 휘두르란 말이다!'
'다 죽일 거야! 혈검을 찾아서 모조리 죽여 버릴 거야! 모두 다! 최고 가 되어서 다 무릎꿇게 해 주겠어! 모두!'
"허억!"
|
|
Subject |
혈검지도 3부- 습격당하는 대호태자 (82) |
|
|
깨어보니 꿈이었다. 표웅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자리에서 일어 났다. 유 협에게 특훈을 받고 있는 요즘, 그는 꿈을 자주 꾸었 다. 유 협은 그에게 찌르고 베는 기술보다 온 몸의 기(氣)를 다 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표웅은 예전보다 많이 피로를 느끼는 듯 하였다. 그가 옷을 갖추어 입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제 일어 났느냐."
유 협이었다. 표웅은 말없이 포권하였다. 유 협은 표웅에게 백 옥으로 된 작은 병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부터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하기 위한 본격적인 수련에 돌입한다. 일단 이것을 마셔라."
표웅은 군소리 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가 한 번에 마시려 는데, 유 협이 저지하며 말했다.
"이것은 만년된 황기(黃耆)를 짠 즙이다. 또한 이 즙은 신선이 아닌 이상 마시기 힘든 것이지. 단숨에 마시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기(陽氣)가 화(火)를 불러 일으켜 내장을 상하게 할 수 도 있으니, 아주 조금씩 마시거라."
그는 유 협의 말을 따라 그것을 천천히 들이켰다. 골까지 아플 정도로 쓰디 쓴 액(液)이 표웅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곧 그 의 몸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곁에 있는 유 협에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열기였다.
"자, 이제 가부좌를 틀고 온 마음을 깨끗이 비워라. 또한 그 지 경에 이를 때까지 일체 금식(禁食)하며, 어떤 잡념도 허용해서는 안되느니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자, 그럼 시작해 보자꾸나."
일단 표웅이 앉고, 그 뒤에 유 협이 앉았다. 표웅이 태허(太虛; 氣 가 완전히 사라진 공허, 그 자체)의 상태가 되면 유 협은 자신의 모든 기를 그에게 쏟아내어 그가 온몸의 경락(經絡)을 유통시키 는 것을 도울 것이다.
비무까지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혼자힘으로 온 몸 의 경혈(經穴)을 뚫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유 협의 도움 이 필요한 것이다.
온몸의 모든 기공(氣功)을 표웅에게 몰아주면, 유 협은 크게 노쇠 하여 현재의 기력을 거의 잃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것은 대천도 말린 일이었지만 유 협은 표웅이 비무에서 우승만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한편 제나라에 도착한 대호는 성안과 함께 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잠만 이곳에서 잘 뿐, 대부분은 근처 거리에 나가 술을 마시 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4大 간신들이 혹시나 대호가 환공과 접촉 할까 싶어 여기저기 사람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궁에 있는 것은 거 의 감옥과도 같았다. 대호는 성안에게 술병을 던져 주며 말했다.
"이렇게 사람 사는 냄새를 맡아야 상쾌하지. 궁에 있는 사람들에게선 모두 썩은 냄새가 나거든."
성안도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들이켰다.
"하지만 형님의 안색이 말씀보다 그리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말에 대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성안과 이곳으로 오기 전, 연화루 에 들린 이후로 대호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온통 먼지 쌓인 탁자들 과, 거미줄 쳐진 문들은 그의 마음을 사정없이 짓눌렀었다.
"아닐세. 뭐, 일만 잘 된다면야 여인 한명 찾는 것 쯤은 식은 죽 먹기 겠지."
그들은 복잡한 거리를 걸으며 이것 저것을 구경하였다. 하지만 이렇 게 무방비 상태로 있는 그들을 향한 음흉한 눈동자들이 있었다. 그들 은 몇 십척을 떨어져서 대호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심하게 관찰하였 다.
"응재 아우도 올 때가 되었는데."
"곧 오겠지요. 혼인은 잘 치뤘는지 모르겠습니다."
"흠.. 그러게 말이다. 궁금한 것이 매우 많군."
등에는 큰 화살통을 메고 반쯤은 얼굴이 가려진 이 사내들은, 대호가 고개를 숙이고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까 지 지켜보고 있었다.
"얘야, 왜 우는 것이냐?"
"흑...어..어떤 아저씨들이 우리 누나를 강제로 끌고 갔어요."
"음? 그 아저씨들이 누구냐?"
"어머니 말로는 옹 무(邕 懋)란 사람의 졸개들이래요. 흑.. 이 마을에 예쁜 누나들은 그 아저씨가 다 잡아 갔어요."
대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토록 그들은 자신이 마치 군주인 양, 방자 한 짓거리들을 서슴지 않았다. 대호는 그 아이에게 금화 한 냥을 쥐어 주며 말했다.
"얘야. 곧 네 누나를 찾을 수 있게 될것이다. 그 때까지 부모님을 잘 모셔야지? 자 울지 말고."
그 아이는 대호가 달래자 금새 울음을 그쳤다. 대호는 착잡한 심정으 로 그 아이를 집으로 돌려 보내고 발길을 돌렸다. 그 때였다.
'쉬이이이이익'
'푸우욱!'
"으으으으으윽.....!"
무시무시한 화살 하나가 대호의 오른쪽 가슴에 박혔다.
"꺄아아아~~!"
대호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모두들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잠시 딴 것을 구경하고 있었던 성안은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한달음에 달려 왔다.
"형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아니 이럴 수가?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형님! 정신 좀 차려 보십쇼!"
성안은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큰 나무를 타 넘고 도망가는 복면의 사내가 있었다.
"하압!"
성안도 그를 뒤쫓아 그 나무위로 올랐다. 등에 화살통을 메고 있는 그 복면의 사내는 온 힘을 다하여 나무들을 뛰어 넘었지만 성안의 속도에는 역부족이었다.
'휘리리리릭'
성안은 비뢰법을 써서 눈 깜짝할 사이로 그 사내의 앞에 착지했다. 복면을 한 사내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역력하였다. 성안은 칼을 빼어 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챙! 챙!'
그도 곧 칼을 빼어들고 성안의 칼을 막았지만 무서운 속도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성안은 금새 그의 헛점을 찾아내었고, 곧바로 그의 팔을 베어냈다.
"으윽...!"
성안은 쓰러진 그에게 다가가, 칼로 복면을 벗겨 냈다.
"누가 보냈느냐?"
하지만 그 사내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성안은 그의 허벅지에 칼을 꽂으며 다시 물었다.
"누가 보냈는지 말만 한다면 네 목숨은 살려 주겠다."
"으으윽..."
'푸욱'
"아아아아악!"
성안이 칼에 더욱 힘을 주자, 마침내 그는 싹싹 비는 시늉을 하였다.
"마..말하겠소. 포역아가 보내서 왔소.."
'휘익!'
"으으으으윽.."
약속대로 성안은 그의 몸에서 칼을 빼냈다. 성안은 도망가려는 그를 붙잡고는, 그가 메고 있던 화살통을 베어 떨어뜨린 후, 그것을 주워 자신의 허리춤에 매었다. 성안은 자세한 것을 더욱 묻고 싶었으나, 대 호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곧 그는 그 사내를 풀어주고는 다시 무서운 속도로 달려 대호가 있는 곳으로 왔다.
대호의 가슴에 박힌 화살은 무척 컸다. 쇠뇌(활보다 멀리 쏠 수 있는 장거리 공격용 무기. 보통 활보다 활촉이 거대하여 살상력이 강함)의 일종인 듯 싶었다. 대호의 입술은 이미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성안은 그를 부축하여 곧장 궁으로 향했다. 곧 어의들이 달려들어 의 식을 잃은 대호를 깨워보려 애썼지만 그는 결국 깨어나지 않았다. 대 호의 어머니인 소여향도 달려와 아들의 얼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 다.
"태자.. 이 어찌된 일이란 말이오.. 이보오, 어의대감. 왜 깨어나지 않는 것이오?"
"송구하오나.. 화살촉에 치명적인 독이 발라져 있어서.. 상처부위만 소 독한다고 될 일이 아니옵니다. 곧 온 몸에 독이 퍼져.. 며칠 안으로.."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해독을 시키시오, 어서!"
"아뢰옵기 황공하옵니다만.. 이것을 해독시킬 의원은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 독은 해독약이 없는 불가살(不可殺; 현 재의 불가사리)의 독이옵니다."
성안은 충격으로 휘청이는 소여향을 부축하였다. 마치 자신이 대호를 그렇게 만든 것처럼 죄책감이 밀려오는 성안이었다. 자신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면 사전에 막을 수도 있었을런지 몰랐다.
"그렇다면.. 얼마나 .. 버틸 수 있겠소?"
"저희들이 최선을 다 한다 해도.. 사나흘을 버티기 힘들 것이옵니다.
"이럴 수가... 어찌하여 우리 대호에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이냐.."
소여향은 대호태자를 붙들고 절규하였다. 성안은 대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대호의 얼굴은 점차 로 흑빛이 되어 갔다. | |
| |
Name |
|
|
成支仁 | |
|
Subject |
혈검지도 3부- 천하를 훔치려는 자들의 모략 (83) |
|
|
응재는 취아와 함께 제나라로 들었다. 응재는 여전히 그녀를 대하기가 껄끄러운 듯, 오는 내내 별 말이 없었다. 그는 제일 먼저 궁으로 들어가 환공에게 인사를 하기로 하였다.
응재의 뒤로 분홍빛 비단 치마를 휘날리며 사뿐하게 걷는 여인이 있었다. 머리는 느슨하게 묶여 바람결에 일렁이고, 젖가슴을 살짝 덮은 웃옷이 아슬아슬하였다. 응재가 안으로 들려고 하자, 병사들이 창을 들이밀었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응재 또한 일국의 태자요 이 나라의 귀한 손님일 진대, 이렇게 따져묻는 그들이 예(禮)를 지킨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에게 포권하며 미소지었다.
"아, 내가 누구인지는 알 것이고, 잠시 제후(齊候)를 알현하러 왔소."
하지만 그들은 그를 쉽게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 크게 떠들며 걸어오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그가 옹 무였다. 그는 응재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아니, 임(任)국의 공자(公子)님 아니시옵니까."
"아, 옹 공(邕 公). 오랜만이외다."
"헌데 여긴 어인 일이시옵니까?"
옹 무는 가느다란 눈으로 응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마치 이 곳의 주인인 양, 계집들을 거느리고 목을 뒤로 제친 꼴이란 살이 쪄 거대해진 목을 스스로 돌리지도 못하는 살찐 쥐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제후(齊候)의 병환이 깊으시다 하길래, 잠시 나마 회춘(回春)을 하시라고 가기(家妓) 한명을 바치려고 왔소."
응재는 짐짓 크게 웃으며 옹 무에게 포권하였다. 옹 무는 옆눈으로 여인을 슬쩍 쳐다보더니,
"하하. 그러시옵니까. 헌데, 주군께서는 낮잠이 드셨사오니 일단 이 아이는 제게 맡기시옵소서. 주군께서 깨시면 곧 아뢰겠사옵니다."
"그럼 그리 하십시오. 자, 어서 인사를 드려라."
여인은 흰 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부끄러운 듯 응재의 뒤로 숨어들었다. 옹 무는 이 여인의 자태에 황홀해 진 듯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허허. 이 무슨 짓이냐. 어서 인사올리지 못할까."
응재가 명하자, 숨었던 여인은 빼꼼히 옹 무를 쳐다보며 살며시 무릎을 굽혔다 폈다.
"이 아이가 워낙 숫기가 없소."
"여인이 너무 부끄러움이 없으면 쓰겠사옵니까. 허허허..참으로 아름다운 아이옵니다. 주군께서 매우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그럼 공만 믿고 난 이만 가 보겠소."
"살펴 가시옵소서."
응재의 모습이 사라지자 옹 무는 주위 계집들을 모두 물리치고 갓 들어온 여인만을 데리고 어디론가 바삐 걷기 시작했다. 어떤 방이 한칸 나오자 그는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부끄러워 하는 그 여인에게 말했다.
"여기가 네 처소이니라."
"알겠사옵니다.."
그녀가 방으로 드려는 순간, 옹 무의 살찐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그의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옹 무는 벌써 잘록한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서서히 밀치고 있었다.
"부끄러운 척 하지 마라. 네 눈에는 색기가 가득하구나. 누군가를 호릴 생각을 단단히 하고 온 모양인데, 이쯤이야 봉사해 주지 못하겠느냐."
"하오나.. 소녀는 이곳에서 가장 높으신 분을 뫼시라는 명을 받고 왔사옵니다.. 이러시오면 소녀는 무사하지 못하옵니다.."
"가장 높으신 분?"
그는 살찐 몸을 여인에게 부비며 거친 숨소리를 내었다.
"내가 가장 높다. 누가 감히 이 옹 무에게 도전하겠느냐. 환공도 내 말이라면 거역치 못한다. 헌데 네 말로는 내가 싫지는 않다는 뜻 같구나."
예쁜 여인만 보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이 살찐 몸뚱아리는 어느덧 이 여인의 가녀린 몸 위를 짓누르고 있었다. 여인은 옹 무를 그윽하게 쳐다보며 빨간 입술을 달싹였다.
"소녀 또한 포부가 크신 분을 존경하옵니다.. 하오나.. 벌을 받을까 두렵사옵니다."
"벌은 무슨. 낮에는 환공의 땀만 닦아주다가, 밤에는 그저.. 이렇게.. 흐음.."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여인의 가슴에 고개를 푹 처박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으음.. 혜아이옵니다..."
"넌 순진한 것 같으면서도 요염하기 그지 없구나.."
그의 기름진 얼굴이 여인의 가슴을 지나 새하얀 배위을 훑었다. 그리고 더 깊은 곳을 향하는 순간,
"안에 옹 공 계시는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듣자하니 수조였다. 옹 무는 가볍게 방바닥을 두들기며 입맛을 다셨다.
"하필 이럴 때 꼭.. 얘야. 혜아야. 숨소리도 내지 말고 있거라."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옹 무는 재빨리 땀을 닦고 밖으로 나가 반갑게 수조를 맞았다. 수조는 무엇을 숨기려는 것 처럼 방문을 꼭 닫고 자신의 소매를 끄는 옹 무가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자네 안에서 뭘 하고 있었나? 병사들에게 물어보니 그냥 이 쪽으로만 왔다고 하더군."
옹 무는 수조의 팔을 끌며 연신 숨을 내뱉었다.
"잠시 산책을 하는 중에 더워서 안으로 들어가 쉬는데, 선잠이 들었었네. 헌데 무슨 일이신가?"
"지금 포 공(역아)과 양 공(개방)도 와 계시네. 급히 의논할 일이 있다 하네."
그들은 역아와 개방이 기다리고 있다는 정자(亭子)에 당도했다. 사방이 탁 트인 곳이었지만 그들만을 지키는 사병(私兵) 오십 명을 제외하고선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환공의 궁은 더없이 좋은 피난처요, 은신처였다. 환공을 빌미로 수상쩍다 싶은 사람들은 모두 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수조와 옹 무가 앉자마자 역아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지금 대호태자가 곧 죽을 것이오."
"아니, 그게 정말이오?"
"해독제가 없는 독이 그 놈의 몸에 서서히 퍼지고 있소이다. 이것이 다, 우리 딸아이의 계획이었다오. 허허허."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다가 꼴이 아주 좋게 됐군. 후후후"
그들은 고소하다는 듯이 크게 웃어대며 차를 마셨다.
"그럼 일이 더 쉽게 되겠구려."
"물론이외다. 호 태자가 없는 관군(官軍)들이야 갈팡질팡 하다가 다 무너질 것이오. 개중에는 항복하는 병사들도 있을 것이고. 하긴 호 태자가 멀쩡하게 관군을 지휘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군사들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오."
"맞는 말씀이시오. 병거(兵車)를 귀신처럼 다루는 병사들이 있는데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겠소."
수조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개방의 앞에 죽간(竹簡)과 흑석(黑石)이 놓여 있었다.
"양 공. 무엇을 쓸 참이었소?"
"이제.. 마무리만 잘 지으면 되오. 이 죽간에 공들께서 아무 글씨나 써 보시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개방이 건네주는 흑석으로 한 글자씩 새겨봤다. 개방은 그들의 글씨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품에서 다른 죽간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환공의 친필이오. 내가 보기에는.. 국 공의 필체가 환공과 가장 비슷하구려. 물론 더 연습을 해야겠지만."
수조는 궁금한 듯이 개방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이시오?"
"환공의 유언을 조작하기에는 국 공이 가장 알맞을 것 같다는 소리오. 자, 이것을 드릴테니 매일 연습하시오."
그들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조는 환공의 친필이 새겨진 죽간을 품에 넣고 찻잔을 들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혈검비무로 쏠릴 때, 우리는 천하를 쥐게 될 것이오."
개방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역아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뭐 전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따님께서 이번 비무에서 우승하지 못한다면 천하를 쥐기는 커녕, 도리어 혈검의 주인이 된 자에게 당할 수도 있소. 듣자하니 임나라에도 엄청난 무공을 가진 자가 있다는데.. 뭐.. 표.. 표 뭐더라. 하여튼 있다 하오."
그러자, 개방이 은근한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이 양개방이 그리 허술한 줄 아시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