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은 건물공사장으로 투입 되었는데
지붕공사를 위한 석고보드를 나르는 일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무거운 판넬을 6장씩 나르는 일을 하는데
처음이라 여기저기 긁히고 일도 힘들었지만
아저씨들이 하는 모든 용어들이 다 일본어인 것과
욕이 섞이지 않은 것이 없어서 놀랐다고 합니다.
각오는 하고 갔지만
모든 말들에 욕설이 섞인 것이
“야, 망치 갖고 와” 하면 될 것을 “야, xx 망치 갖고 와,
야 x새꺄 이거 들어, x새꺄 빨리 못 와”이런 식이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상상도 못할,
더 전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욕설을 들어서
우리 말의 다양성에 감탄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엔 불쾌한 마음도 들었지만
자기에게는 낭만일 수도 있는 아르바이트 막노동이
생계의 수단인 연세 드신 분들에게
욕설은 일종의 스트레스의 돌파구가 되겠구나 생각하니
이해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입으로는 욕설을 퍼붓지만
가족을 위하여 거친 일을 하는 아저씨들을 보면서
서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고도 하였습니다.
보통 두 끼 식사에 간식도 주는데
짜장면이나 밥을 시켜 주지만
간혹 고기도 준다는 말에 내심 기대를 가졌던 아들은
그 날 따라 함바집 사정에 의하여
라면만 세 번을 주어서 아저씨들의 험악한 분위기도 불안하고
자신도 몹시 실망을 하였다고 합니다.
마침 그 날은 아들의 24번 째 생일이고
뜨거운 선교지에서 열흘간 노동을 하고 온 터라
불고기라도 해주려고 했는데
새벽부터 나가면서
“엄마, 걱정마세요
요즘은 현장에서 음식도 잘 주고 고기는 실컷 먹는데요”
하면서 나갔었기에
생일이라도 지나서 보낼 걸 하는 후회에 마음 한 편이 아렸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그런데 엄마, 나중에 일 끝날 무렵에는
아저씨들이 ”야, 이 예수 믿는 놈 무서운 놈이야
그만큼 욕을 먹었으면 더러워서라도 그냥 갈만한데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노래까지 하면서 끝까지 버티고..
대단한 놈이야 x새꺄
너 다음에도 우리랑 일하자” 라고 하였다며
무척 즐거워 하였습니다.
그 날 아들은 70000원을 받아서 7000원의 수수료를 내고
63000원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기도에
자기 돈 7000원을 보태서
건강한 몸을 주셔서 노동 할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하며
첫열매 감사헌금으로 70000원을 드렸습니다
오늘 새벽도 아들은 이삿짐이 있을지도 모르니
새벽기도 끝나는 대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일하러 나갔습니다.
“엄마, 욕설이 난무하는 현장에 갑니다. 기도해 주세요”
라고 말하면서도 눈을 찡긋 하며 웃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