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5년부터 30년간 서울 광화문 인근의 내수동교회에서 믿음의 생활을 했다. 30년이란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동안 집사로,대학부 부장으로,시무장로로 사역했다. 40대 초반부터 나는 내수동교회 청년들과 함께 생활하며 신앙을 키워나갔다. 당시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내수동교회 청년들,정확히 말하면 내수동교회 대학부 회원 가운데서는 지금 큰 교회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는 분이 많다. 오정현(사랑의교회) 오정호(대전새로남교회) 송태근(강남교회) 화종부(제자들교회) 박선규(부산 부전교회) 목사 등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리더들이 그 당시 내수동교회 대학부 멤버들이었다.
대학부 시절부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던 오정현 목사는 지금 한국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금도 내수동교회 대학부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만큼 사랑했던 지체들이었다.
내년에 팔순이 되시는 박희천 원로 목사님과 더불어 내수동교회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지체들을 만났다. 바로 70년대와 80년대에 활동했던 내수동교회 대학부 회원들이었다. 나는 75년부터 86년까지 내수동교회 대학부 부장장로로 사역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들이었다. 내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대학부에서 헌신했던 뛰어난 주님의 청년들이 비추는 빛으로 인해 나도 환하게 빛났던 시절이었다. 당시 내수동교회 대학부에는 수백명의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 교회에 대학부라는 조직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내수동교회 대학부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모였다. 지방에서 서울에 공부하러 올라온 크리스천 대학생들은 꼭 한두 차례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찾았다. 그리고 정착했다. 당시 대학부 활성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학생이 지금 사랑의교회 담임인 오정현 목사였다.
오정현 목사는 당시에도 비전과 열정을 지닌 대학생이었다. 오 목사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 10여명의 내수동교회 학생들과 함께 대학부를 만들었다. 동생 오정호(대전 새로남교회 목사),오정일(사랑의교회 목회 자료 실장) 등 3형제가 대학부의 주축이었다. 나는 10여명의 대학부원들과 함께 주일마다 용산의 철도병원(현 중대부속병원) 병실을 찾아 찬양하며 환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한 주도 빠짐없이 병원 선교를 했다.
당시 대학부가 있던 서울시내 교회에서는 내수동교회 철도병원 찬양팀에 대해서 대부분 알고 있었다. 우리는 1975년부터 10여년 동안 이 사역을 펼쳤다. 우리 모두는 병원에서 환자들의 손을 잡고 울면서 기도했었다. 진실된 사랑이 넘쳤던 시기였다. 그것이 우리 내수동교회 대학부원들의 영성계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환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위로와 은혜를 받은 것이다.
대학부원들은 많을 때는 250명까지 됐다. 우리는 매년 한 차례씩 ‘생고기의 날’을 열었다. 일종의 총동원 전도주일인 생명과 교제,기쁨의 날을 줄여서 생고기의 날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날에는 교회내 대학생들이 각 학교의 믿지 않는 친구들을 데려와 부흥 집회를 열었다. 이런 모임들을 오정현 목사가 주도했다. 당시에 오 목사는 신학대학을 가지 않고 일반대학에서 공부했기에 당회에서 특별히 ‘대학부 간사’라는 타이틀을 줬다. 오 목사가 대학부 간사로서 형제,자매들의 영적 관리를 한 것이다. 그 때 대학부 설교는 송인규 목사가 담당했다. 현재 합동신학교 교수로 사역하고 있는 송 목사는 영감있는 메시지로 대학부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내수동교회 대학부원들은 아름다운 공동체의 삶을 살았다. 대학생 시절의 오 목사가 자취하고 있던 동부이촌동 시민아파트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그득했다. 우리는 그 자취방을 ‘라브리’라 이름했다. 라브리는 프란시스 셰퍼 박사가 스위스에 만든 영성공동체의 이름이다. 대학부 회원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는 진정한 영성공동체를 꿈꾸며 함께 울고,웃고,삶을 나눴다.
오 목사는 간사로서 탁월한 영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대학생에 불과했던 오 목사는 당시부터 각 교회를 다니며 대학부 부흥에 대해서 특강을 하기도 했다. 나는 부장 장로로서 매일 새벽,아침이슬 같은 청년들이 주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기를 기도했다.
내수동교회 대학부가 부흥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박희천 목사와 당회가 전적으로 대학부 활동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당회는 대학부가 요청한 것은 어떤 내용이라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만큼 대학부가 교회의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화종부(제자들교회) 박성규(부산 부전교회) 이성주(미국 거주) 목사를 비롯해 현재 내수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지웅 목사에 이르기까지 헌신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아름다운 소문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지방의 크리스천 학생들 사이에서는 “서울에 가면 내수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돌았었다.
지난 30년동안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통해서 수천명의 신앙 일꾼들이 양성됐다. 목회 영역뿐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인재들이 배출됐다. 10여년간 대학부 부장집사로 사역하면서 나는 솔직히 이들 무명의 청년 크리스천이 한국교회와 사회의 중심 리더로 활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이들이 선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사역하기만을 기도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젊은 시절에 뿌린 이들의 땀과 눈물,기도를 기억하고 계셨다. 그리고 무명의 일꾼들을 사용하셨다. 이제 중년이 된 이들은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의 변혁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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