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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사본이란 무엇인가 ?

영국신사77 2006. 12. 23. 22:05

 

                                  ☞ 사해 사본

                                                                   쿰란(Qumram) 

잃어 버린 염소

 1947년 5월의 어느 봄날. 한 베드윈(Bedouin) 소년이 염소떼를 돌보다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염소를 찾고 있었다. 사해 서쪽 해안의 절벽 지대의 한 동굴 속에 돌멩이를 던졌다가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는, 친구를 불러 동굴 속으로 들어 가 보았다. 입구는 좁았지만 굴은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안은 길이 8.5 m, 너비 3 m, 높이가 3 m 나 되는 꽤 큰 굴이었다.

 그곳의 한쪽 구석에는 깨진 질그릇 조각들 사이로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높이가 60㎝ 가량되는 큰 항아리들이었다. 무하마드와 아메드는 조심조심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았다. 뭔가 시커먼 덩어리들이 드러났고, 꺼내보니 얇은 양가죽을 꿰매서 이은 두루마리였다. 너비 44㎝에 길이 1m ~ 8m 나 되는 그 두루마리들에는 뭔지 모를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보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골동품상에 가져가면 몇 푼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소년은 그것들을 꺼내 들고 동굴을 나왔다. 무하마드가 다섯 개, 아메드가 세 개.

 

신비한 두루마리

 두 소년은 베두윈 족장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다. 아메드는 골동상 한 군데에서 싼값으로 두루마리 세 개를 팔고 돌아갔다. 무하마드와 족장은 돈을 더 받을 욕심에 몇 군데를 더 기웃거렸다. 아주 귀한 것이라고 우기는 족장의 말에, 골동품 상인은 알아보고 나서 값을 매기겠다고 하였다. 족장과 무하마드는 그 상점에 두루마리 다섯 개를 맡기고 천막으로 돌아갔다. 골동상 주인은 그 길로 이스라엘의 성 마르코 수도원으로 사무엘 대사교를 찾아갔다. 한동안 두루마리를 살펴보던 대사교는 할 말을 잊은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의 눈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대사교는 두루마리에 씌어진 글은 히브리 글일 것이라는 말과 함께 5파운드에 사겠다고 했다. 사무엘은 이 두루마리가 어쩌면 구약성서 원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구약은 유태인들의 가장 성스러운 경전이다. 이것은 야훼 하나님이 당신께서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과 맺은 약속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야훼의 계시를 담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구약은, 그때까지도 그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었다. 사무엘의 가슴은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히브리 글자로 씌어진 이 두루마리가 구약의 원본이라면? 그는 서둘러 예루살렘에 있는 아메리카 동방 연구소의 트레버 박사를 찾아갔다.

 확대경으로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던 트레버는 어지러운지 잠시 일손을 놓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 하나님!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어떤 은총으로 내가 이 귀중한 것을 보게 되었을까?

 사무엘 대사교님, 이것은 틀림없는 구약성서입니다. 아직 증거가 없다 뿐이지 제 생각에는 구약 원본이 틀림 없습니다."  

 

  그때까지 서기 1008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Leningrad Codex)이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의 사본이었는데, 이 사해 사본은 그보다 무려 1100여년이나 앞선 서기 전 100년을 전후하여 기록된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트레버는 한참을 더 살핀 뒤 두루마리 가운데에서 구약성서의 이사야 서를 찾아냈다. 두 사람은 너무나 기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한참 지나서야 트레버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글씨체로 보아 이것은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의 것입니다. 어서 사진을 찍어 과학자들에게 보여서 원본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사해문서

 그들은 곧 사진 촬영에 들어갔다. 두루마리를 잘 다듬어 사진을 찍는데는 무려 아홉 달이나 걸렸다. 1948년 2월 그 사진은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한 고고학자들에게 보내졌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난 3월 15일, 사무엘 대사교는 미국 존 홉킨스 대학 고고학 교수 알브라이트 박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처럼 거룩한 경전을 구해서 보내주신 대사교님께 축복과 감사를 드립니다. 이 문서는 구약 원본이며 기원 전 1백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발견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발견이며, 인류 역사에 가장 뛰어난 발견입니다. 부디 나머지 두루마리도 찾아서 구약 39권을 모두 갖추게 되기를 빕니다."

 

 그 무렵, 이름 난 성서 학자인 히브리 대학 고고학과장 수케닉 박사도 옛 두루마리 세 개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메드 소년이 판 두루마리였다. 그 또한 이 두루마리가 구약 원본임을 알고 있었다. 나머지 두루마리들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것이 구약 원본임을 증명하는 일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나머지 두루마리 다섯 개를 사무엘 대사교가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무엘과 수케닉이 만난 날, 두루마리 여덟 개가 합쳐진 날, 그 날은 인류가 잃었던 보물을 되찾은 날이 되었다. 그들은 두 달 동안 두루마리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나서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기자들은 숨을 죽인 채, 수케닉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떨리는 목소리를 받아 적었다. "여러분, 이 두루마리에는 구약의 이사야서 원본이 들어 있습니다. 그밖에도 에세네 교파에서 썼던 '공동체 계율','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 싸움','감사 찬미가 모음'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크나큰 기쁨과 행운을 얻는 일이 다시는 올 수 없을 것입니다."

 

쿰란공동체

 1949년 중동전쟁이 끝나자 사해 지방은 요르단의 땅이 되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던 프랑스 신부 드 브오 (R. De Vaux)가 사해 일대 탐험에 나섰다. 브오 신부는 무하마드와 아메드, 그리고 그곳 베두윈들을 데리고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던 벼랑으로 갔다. 브오 신부는 그곳에 에세네 교파가 살았던 자취가 반드시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 엄청난 보물이 단 한 군데의 동굴에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귀중한 것일수록 만일을 대비하여 여기 저기 흩어 놓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브오 신부의 짐작은 틀림없었다. 탐험대는 동굴을 열 개나 더 찾아 내었고, 그 안에서는 두루마리가 수백 개나 쏟아져 나왔다.

 

 탐험이 계속 될수록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바위 아래 깊은 땅속에는 옛 도시 흔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두 겹으로 된 성벽 안에는 저수지와 급수시설,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곳이 요세프스를 비롯한 고대의 역사가들이 언급하고 있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엣세네(Essene) 집단의 수도원임이 밝혀진 것이다. 수도원은 원래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으며, 이 보다 높은 지점의 계곡에 댐을 건설하여 겨울철의 우기에 흘러내려 오는 빗물이 수로를 따라 수도원의 물 탱크에 자동적으로 저장되었다. 한 주간 중 평일에는 근처의 수많은 동굴 속에서 기거하던 엣세네 수도자들이 안식일에는 이곳으로 내려와 물로 씻는 정결 예식과 성서 연구를 하였고 공동의 식사를 위한 대형 식당과 주방, 성서를 베끼는 필사실 등이 이곳에 갖추어져 있었다.

 

  또 키르바트 쿰란 (Khirbat Qumran)이라고 불리는 수도원 건물도 있었다. 수도원 방 안에는 나무로 만든 큰 책상과 걸상이 먼지에 덮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잉크병과 붓까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동안 발견된 문서들은 모두 그 방에서 쓰여졌음이 분명했다. 뒷날 실험하여 보니, 잉크병의 잉크와 두루마리 글씨의 잉크는 같다고 밝혀졌다.

 

 브오 신부의 탐험으로 밝혀진 사해 동굴의 옛 유적에 얽힌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이 사해 바닷가를 거닐기 백 년 전에, 이미 이곳 동굴들에서는 에세네 (Essenes)파로 불리는 한 무리가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와 마찬가지로 유태교의 한 갈래였다. 이 무리는 '정의의 스승'(Teacher of Righteousness) 이라 불리는 사람이 이끌었으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율법과 제사 등 형식과 권위에 치우친데 비해, 신비주의와 금욕 생활을 내세웠다.

 

에세네파

 에세네파 신자들은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따위를 모두 함께 했다. 결혼은 거의 하지 않았고, 오로지 세상의 종말에  대비하여 하나님과 한 몸이 되기를 기도했다. 그들은 세상이 마지막에 이르면, 그들 '빛의 아들들'이 '어두움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다. 200년 동안 에세네파 교인들은 금욕, 기도, 하나님의 말씀 읽기를 계속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세상의 종말은 끝내 오지 않았다. 서기 68년이 되자, 그들은 '어두움의 아들들' 이 아닌 로마군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무참히 짓밟고, 끝까지 항거하는 마사다 요새를 무너뜨린 뒤 유태인들을 수천년 방랑의 길로 내몰았다. 사해동굴의 문서들은 이때 로마 10군단을 피해 동굴 속에 감추어진 듯하다.

 

 '쿰란 공동체'에서 찾아낸 두루마리들에는 '에스더서 (Esther)를 뺀 구약성서가 모두 들어 있다. (에스더서에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말이 한 마디도 없다). 또 에세네파가 지켜야 할 '공동체 계율' 같은 기록들도 많이 있다. 이곳에서 나온 구약성서는 오늘날의 구약과 거의 다름이 없다. 단 '쿰란 공동체'를 처음 만든 '정의의 스승'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다. 어떤 이는 그가 예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가 인류 전체의 구원을 바랐던 데 비해, 에세네파는 자기들만의 구원을 빌었으므로, 정의의 스승을 예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은 '정의의 스승'은 세례 요한일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꽤 설득력 있는 말이지만 뚜렷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 광야에서 선교하던 세례 요한이나 근처의 요단 강에서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했던 예수도, 이 공동체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쿰란 주변 11개의 동굴에서는 발견된 사해 사본들 가운데, 두루마리(scroll)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불과 10개 뿐이며, 나머지는 수천 개의 조각들로 발굴되었다.

 이들 중 약 1/4은 구약 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 주석, 신학서, 쿰란 공동체의 규율집 등으로써, 대부분 양피 가죽이나 파피루스 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 놓은 것들이다. '사해 두루마리'는 그 뒤로 수케닉 박사의 아들이자 1963년에 마사다 요새를 찾아낸 야딘(Yadin)이, 사무엘 대사교의 두루마리를 25만 달러에 사들여, 모두를 이스라엘 정부에 기증했다.

 

 

 출처:★ 스타투어(Star Tour)

 

 

         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출처 블로그 > 참좋은군사
원본 http://blog.naver.com/jjkkhh2232/50011443919

 

 

  사해사본이란 1947년과 1956년 사이에 사해바다 주변에서 발견되어진 사본을 말한다. 이 "사본들"은 일부 완전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분적인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광범위한 의미로 보면, 사해사본들은 주전 3세기 부터 주후 8세기 무렵까지의 문서들로서 사해바다 주변 지역의 7 장소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을 통칭한다. 사해바다 주변 지역들이란 것은 쿰란, 마사다, 와디 무라바아트, 나할 헤베르, 나할 쩨엘림, 나할 미쉬마르, 그리고 키르벳 미르드 지역들을 일컫는다. 이러한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에는 카이로에서 발견되어진 "그니자"까지도 포함되어지기도 한다.

 

  한편, 협소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은 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쿰란 사본들을 가리킨다. 1952년 3월 10일 부터 29일까지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사해바다의 북서쪽 해변가 일대, 즉 하자르 엘 아쯔바흐에서부터 라쉬 훼쉬카에 이르는 8 km 지역에 흩어져 있는 273개의 동굴들에 대한 답사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39개의 동굴들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자취를 확인하였고, 25개의 동굴들에서 쿰란 제 1동굴과 쿰란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같은 형태의 토기들과 유물들을 출토하였다. 그중에 단지 11개의 동굴에서만 "기록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들을 가리켜 협소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이라고 일컫는다.


 

                    어떻게 사해사본의 기록연대를 알았을까 ?

 

  사본과 함께 발견되어진 토기와 동전들을 통한 연대 결정과 더불어, 서체를 비교 연구하는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이 사해사본의 기록연대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어졌다. W. F. Albright, N. Avigad, S. A. Birnbaum, F. M. Cross, R. S. Hanson 과 J. T. Milik 등이 이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의 전문가들이다.

 

  이들에 의해서 사해사본의 서체들이 4가지 부류로 분류되었다.

 

           ① 고어체; 250 B.C. 부터 150 B.C. 까지,

           ② 하스모니안 서체; 150 ~ 30 B.C. 까지,

           ③ 헤롯시대 서체; 30 B.C. 부터 A.D. 70 까지,

           ④ 헤롯시대 이후 또는 장식서체; A.D. 70~135 까지 등의 구분이다.

  이러한 구분 속에서 고딕체와 필기체 등으로 세분화하기도 한다.

 

  고문서체 비교 연구 방식에 의해서 얻어지는 연대 결정은 + 50년의 오차 범위 한도내에서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문서체에 대한 비교 연구와 함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이용하여 연대를 결정 짓는다. 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C14)를 이용하여 산화되고 남아있는 방사능 물질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얻어지는 연대는, + 200 년 또는 + 80 년 정도의 오차를 보여, 고문서체 연구와 함께 연대 결정의 중요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진다.

 

  1951년 시카고 대학의 과학자 W. F. Libby 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둘러쌌던 천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1917, + 200년 또는 A.D. 33, + 200년. 즉, A.D. 233 년과 168 B.C. 무렵이라는 결정을 얻었다(O.R. Sellers, BASOR 123[1951] 24-26 참조).

 

  또한 1956년 런던의 한 연구소(Laboratory of the Royal Institution)에서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종려나무 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940 + 80 년, 즉, A.D. 16 + 80 년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마지막으로 사본 자체 내에 연대 산출의 근거를 제공하는 단서들에 근거한다. 예를들면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된 나훔 주석서(4QpNah)에 [ Dmy ]trws 는 Demetrius III Eucerus 라는 주전 2세기 경의 셀류커드 통치자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며, 알렉산드라 여왕의 히브리식 이름 "샬롬찌온",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후계자 "히르카누스", 그리고 첫 번째 시리아의 로마 총독 Aemilius Scaurus(ca 63 B.C.)에 의하여 일어난 "'Emilyos 학살 사건"등과 같은 내부 기록들은 연대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한다.

 

 

               제 1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7개의 두루마리 사본이 발견되어진 곳이다. 7가지 두루마리 사본들은 ① 이사야 두루마리A(1QIsaa) ② 이사야 두루마리 B(1QIsab) ③ 공동체 규칙서 (1QS) ④ 전쟁사 (1QM) ⑤ 감사 찬양시편 (1QH) ⑥ 하바국 주석서 (1QpHab) ⑦ 창세기 외경 (1QapGen) 등이며, 이것들 외에도 72개의 조각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고 그 가운데 15개가 성서 내용들이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은 미가, 스바냐, 시편의 주석서들과 2개의 공동체 규칙서의 부록들이다(1QSa; 공동체의 메시야 규율 1QSb; 축복문 모음집).

 

               제 2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2번 동굴에서는 18개의 구약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는데, 레위기 11:22-29 의 내용을 담고있는 2Q5 같은 문서는 고대 페니키아 문자들과 비슷한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2Q18 은 제 2경전 가운데 하나인 시라서(Sir 6:14-15, 20-31)의 내용을 보존하고 있으며, 이것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으로는 매우 초기에 해당하는 시라서 사본으로 알려진다. 왜냐하면, 10세기, 12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카이로 그니자에서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기록된 시라서는 헬라어와 라틴어 사본 만이 알려져 왔었었다.

 

  2번 동굴에서는 또 다른 히브리어로 기록된 제 2 경전 사본 조각들도 제공한다. 그 밖에도 15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텍스트들도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2개의 '쥬빌리(Jubeilees)' 사본들(3Q19, 3Q20)과 아람어로 기록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서술문(3Q24)' 등이 있다.


 

               제 3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3번 동굴에서는 14개 조각의 텍스트들을 발견하였는데, 3개가 성서(에스겔 16:31-33, 시편 2:6-7,애가 1:10-12, 3:53-62) 내용들이고, 11개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고, 그 중에 하나는 이사야 1:1에 대한 주석(3Q4)이다.

 

  또한 유명한 "청동 플라크"(3Q15)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는데, 12개의 칼럼에 보물들(돈, 금, 은, 기타 보석들)이 감춰진 장소들이 열거되어 있다.

 

  감춰진 보물들의 수량은 가히 경이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들면, 4600 달란트의 은과 금 등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아무 누구도 텍스트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모르고있다.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4번 동굴은 가장 중요한 동굴이랄 수 있다. 완전한 사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15,000 조각들"의 사본이 발견되어진 곳이다. 나훔의 주석서(4QpNah)가 5개의 칼럼으로 기록된 가장 긴 사본이고, 나머지는 모두 끼워맞추어야하는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1952년 부터 1960년 까지 끼워 맞추기 퍼즐을 통하여 584개의 텍스트 종류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에 127개가 성서 내용들이고, 나머지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가운데는 테필린, 메주자, 그리고 탈굼(4Q128-157)들인데, DJD 6 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주석들과 구약성서와 관련된 시리즈들(4Q158-186)은 DJD 5 에서 다루었다. 또한 여러종류의 제 1에녹서가 1976년 J.T. Milik 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그 외에도 10개 내지 11개의 공동체 규칙서와 1896년 카이로 그니자를 통해서만 알려졌던 다마스커스 사본이 8개 정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헬라어로만 알려져왔던 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의 일부도 발견되었고, Jubilees 의 히브리어 원본의 일부도 알려졌다. 또한, 토빗서의 사본(4개는 아람어, 1개는 히브리어- 헬라어와 라틴어를 통해서만 알려진 제 2경전)과 1번 동굴에서 발견된 감사 찬양시편 조각, 그리고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사본들이 발견되어진 곳이 4번 동굴이다.

 

  "하나님의 아들(4Q246)", "축복문 모음집(4Q525)", "율법의 실천을 위한 모음집"으로 알려진 4QMMT 등, 이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구약성서에 대한 본문비평 연구의 중요한 자료들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 사상의 배경을 연구하는데에도 중요한 자료들로 알려졌다.

 

 

        제 5번, 6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5번 동굴에서는 정경화 이전의 성서 텍스트들 8개(신명기 7:15-24, 8:5-9:2 열왕기 상 1:1, 16-17, 27-37 이사야 40:16, 18-19 아모스 1:3-5 시편 119:113-20, 138-42 애가 4:5-8, 11-15, 16, 18-19, 20-22, 5:1-3, 4-12, 13, 16-17 애가 4:17-20 과 개봉하기가 아주 어려운 테필린 한 개)와 17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 발견되었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중에는 1QS 2:4-7, 12-14와 병행구에 해당하는 "공동체 규칙서(5Q11)", 그리고 카이로 그니자 다마스커스 사본 9:7-10과 병행구인 "다마스커스 사본(DD)의 사본(5Q12)", "아람어로 기록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서술문(5Q15)" 등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6번 동굴에서는 비교적 덜 중요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7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2개는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6Q1 창세기 6:13-21 과 6Q2 레위기 8:12-13 등의 기록이다).

 

  나머지는 열왕기 상 3:12-14, 12:28-31, 22:28-31, 열왕기 하 5:26, 6:32, 7:8-10, 7:20-8:5, 9:1-2, 19-21, 시편 78:36-37 ,아가 1:1-6, 6-7, 다니엘 8:20-21, 10:8-16, 11:33-36, 38 등의 내용들이다. 그 밖에도 24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도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중요성이 덜한 이야기체 문학들, 예언적, 사법적, 제의적 내용들과 찬양시들이다.



 

            제 7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놀랍게도 19개의 문서 조각들이 전부 헬라어로 기록된 것들이 발견되어진 동굴이다. 이 중에서 2개가 확인되었는데, 7Q1은 출애굽기 28:4-7 그리고 7Q2는 예레미야의 편지 43-44(=바룩서 6:43-44)로 밝혀졌고, 다른 것들은 너무 조각이 작고 적힌 내용의 분량이 충분치 않아서 해독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제 8번, 9번, 10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8번 동굴에서는 4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테필린에서, 또 어떤 것은 메주자에서 나왔다. 또한 창세기 17:12-19, 18:20-25 그리고 시편 17:5-9, 14, 18:6-9, 10-13 등의 문구들과 한 개의 비성서적 찬양 텍스트가 발견되었다.

 

  9번 동굴에서는 6 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파피루스 조각 한 개만이 발견되었고, 10번 동굴에서는 2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오스트라카 한 개가 발견되었다.


 

 

           제 11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11번 동굴은 1번, 4번 동굴들처럼 중요하다. 고대 히브리어 문자로 기록된 레위기(11QpaleoLev)와 시편 두루마리(11QPsa), 욥의 탈굼역(11QtgJob), 거의 완전한 성전 두루마리(11QTemplea), 그리고 여러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쿰란과 수도원


사해 구약사본은 현존하는 구약사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에스더서만을 제외하고는 구약의 모든 책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

   사해사본을 발견한 장소이다. 사해의 북서쪽에 있는 쿰란은, 사해사본을 기록한 엣센파 사람들의 주거지역이 있었다. 이 지역의 발견은 1951-1956년의 최근일이며 폐허속의 주건물은 폭 27m 길이 44m정도로서, 석고가 거칠게 발라져 있는 큰돌로 만들어졌다.

 

  북쪽에는 수비탑이 있으며, 부엌과 붙어있는 식당에서는 1,000여 점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주 건물 주변에는 옹기장이집, 방앗간, 염색집, 7개의 저수탱크 등이 발견되었으며, 의자, 책상, 말라버린 잉크가 담겨진 잉크 스텐드가 있는 기록실이 발견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쿰란 주변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들 가운데 두루마리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불과 10개이며, 나머지는 수없이 많은 조각들로 발굴되었고, 이들 중 약 1/4이 구약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주석, 신학서, 쿰란공동체의 규율집들로서, 대부분 양피가죽이나 파리루그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놓은 것이다.

 

  사해구약사본은 현존하는 구약사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에스더서만을 제외하고는 구약의 모든 책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

 

 

 

                      엣세네파의 주거지역 처음으로 발견

 

 

  이즈하르 히르쉬필트를 단장 으로 하는 히브리 대학교 고고학 발굴단은 엔게디 지역에서 엣세네파 사람들이 살았던 유적이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히르쉬필트 단장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엣세네파 사람들이 쿰란 지역에 거주했었다는 이론과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역사 기록의 증거들과 현장 발굴유적들을 근거로하여, 엣세네파 사람들과 쿰란 지역의 관계성을 부정한다.

 

  1세기경의 로마 역사가 플리니우스가 기록한 역사서에 의하면, 엣세네파 사람들은 "아주 가난"하게 생활 하였었고, "그들이 살았던 주거지역 아래에는 엔게디가 놓여 있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발굴단은 발굴현장에서 작은 돌들을 사용하여 만들었던 단조로운 형태의 가옥 구조들을 발굴하였는데, 청빈하고 수도적 생활의 일면을 나타내는 구조물들이고, 현재까지 약 20~25개 정도의 집들을 발굴하였다. 주거지의 크기는 2*3m 정도로 규칙적이며, 일부는 규모가 커다란 건물들도 발굴되었는데, 이것들은 공공건물로써 사용되었을 것으로 알려졌다.히르쉬필트 단장은 이러한 형태의 가옥구조는 엣세네파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일치 한다고 설명한다.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1세기경, 즉 엣세네파 사람들이 활동하뎐 시대의 유물들로 알려졌다. 히르쉬필트의분석에 의하면, 유물들의 단순한 형태난 사용되었던 시기 등을 근거로 하여 발굴 주거지역이 엣세네파 사람들의 주거지역임을 뒷받침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쿰란 지역이 엣세네파의 거주지역이었다는 이론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히르쉬필트는 이에 반박하면서 사실상 이번 발굴 지역이 최초의 엣세네파 거주 지역이 발견 되어진 곳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번에 발굴 되어진 유적지는 사해로부터 200 m 높이에 있는데, 제2성전 시대의 유대인 마을이 발견되어진 텔 고렌(TellGoren)으로부터 아루고트(Arugot) 골짜기를 따라 동쪽 비탈을 따라 약 500 m올라가는 산등성이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히르쉬필트는 엣세네파 사람들이 50여년전 사해사본이 발견되어진 쿰란 지역에 거주했었다고 하는 이론에 대하여 반대 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쿰란 유적지에 있는 건물들은 유다지방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 '창고'들과 비슷하며, 엣세네파 사람들이 반드시 쿰란 지역에 살았었다고는 볼 수 없다고 설명한다.

 

  또한, 쿰란에 살았던 사람들과 사해사본의 관계성에도 의문을 제기하고 노르만 골브(NormanGolb)와 의견을 같이하여, 사해 사본들은 예루살렘에서 옮겨진 것이며, 로마에 대항했던 1차반란(A.D.66-70년) 기간 동안, 사본 보존을 위하여 쿰란 지역의 동굴들로 옮겨진 후에 숨겨진 것들이라는 이론을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