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데이트 : 2006.12.19 17:3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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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행 20:24) 중국의 두보는 유명한 그의 작품 곡강(曲江)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읊었다. 70세를 맞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일 게다. 내 나이 올해로 72세. 고희를 넘긴 나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은 시기가 됐다. 누구나 지나온 시절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가지 않은 길,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지난 내 인생을 되돌아볼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던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인도해주신 삶에 만족한다. 그분의 크신 은혜에 감격하며 살았던 시절이었다. 내 인생을 관통한 성경 구절은 사도행전 20장 24절 말씀이다. 주님의 복음 전파에 헌신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절절하다. 비록 부족했지만 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후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70세가 넘어서 교회에서도 이선으로 후퇴했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처럼 푸르디 푸르다. ‘청춘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하지 않았던가. 비록 육신은 노쇠해가고 있지만 내 내면은 날로 새롭다. 이 생명 다하기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려 한다. 나는 1975년부터 30년간 서울 광화문 인근의 내수동교회에서 믿음의 생활을 했다. 30년이란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동안 집사로,대학부 부장으로,시무장로로 사역했다. 40대 초반부터 나는 내수동교회 청년들과 함께 생활하며 신앙을 키워나갔다. 당시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내수동교회 청년들,정확히 말하면 내수동교회 대학부 회원 가운데서는 지금 큰 교회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는 분이 많다. 오정현(사랑의교회) 오정호(대전새로남교회) 송태근(강남교회) 화종부(제자들교회) 박선규(부산 부전교회) 목사 등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리더들이 그 당시 내수동교회 대학부 멤버들이었다. 대학부 시절부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던 오정현 목사는 지금 한국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금도 내수동교회 대학부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만큼 사랑했던 지체들이었다. 30년 세월이 흘러 나는 지난해 말 원로장로가 됐다. 내수동교회 최초의 원로장로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이 있었지만 내 마음은 무척 허전했다. ‘아직도 주님을 위해 펄펄 뛸 수 있는데 이제는 뒤로 물러나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렸다. 올해 1월 첫째주에 1부 예배를 드리고 서울 종암동의 집으로 돌아오니 오전 11시10분 정도가 되었다. 나는 30년을 한결같이 주일이면 새벽 5시에 나가 저녁 9시에 들어왔었다. 주일 오전에 예배를 마치고 집에 오니 참으로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안방에 조용히 누워 있는데 갑자기 벼락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놈아,내가 너를 지난 세월 동안 훈련시키고 키워놓았는데 늙었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뒷방에 누워 있으려 하느냐!” 그분의 음성이 나를 다시 깨워 일으켰다. 사실 나는 다른 분야에서는 한없이 부족하지만 교회를 섬기는 일은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교회와 목회자,성도들을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었다. 30년간 내수동교회에서 목회자와 같은 심정으로 생명을 걸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주님께서는 나이가 들었다고 그 같은 섬김을 끝마쳐서는 안된다고 일깨워주신 것이다. △약력 1935년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신우(인쇄 전문회사) 대표 △GP(글로벌 파트너스) 이사 △내수동교회 수석장로 △내수동교회 초대 원로장로 |
업데이트 : 2006.12.20 17:2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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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벼락같은 음성을 듣고 잠들 뻔했던 나의 영혼이 깨어났다. “그렇다,이렇게 사지가 멀쩡한데 주일에 누워만 있을 수 있는가. 청량리역에라도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 갈렙이 85세의 나이에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갈렙은 85세의 나이에도 적세가 가장 강한 지역인 “헤브론 산지를 내가 공격하겠다”고 영적 호기를 부렸다. 새삼 나는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인 청춘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위해 남은 여생을 멋지게 불태우리라고 결심했다. 청춘(靑春). 정말로 이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단어다. 나의 40대는 푸릇푸릇한 주님의 청년들과 함께 지냈던 청춘의 시기였다. 내수동교회 대학부 부장으로 10여년을 사역하면서 나는 청춘의 위대한 힘을 체험했다. 젊은 날이란 말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그 안에 진실된 사랑과 열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내가 내수동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박희천 목사님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1968년 5월,나는 인생의 큰 스승인 박 목사님을 만났다. 박 목사님은 당시 6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끝내고 서울 용두동 동원교회에 부교역자로 부임하셨다. 그때 동원교회에 출석했던 나는 이후 38년 동안 박 목사님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건방지게 말하면 박 목사님과 동역했다고 할 수 있다. 75년에 박 목사님이 내수동교회로 부임하셨을 때 나는 목사님에게 “함께 가겠습니다”라며 동행했다. 이후 30여년 동안 박 목사님과 내수동교회에서 믿음의 생활을 함께했다. 박 목사님은 정말로 순수한 신앙 열정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박 목사님은 일제 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고려파 거목인 고 한상동 목사님의 순수한 신앙 유산을 계승한 분이셨다. 그분은 그야말로 일사각오의 신앙을 삶에서 실천하셨다. 68년에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박 목사님의 설교에 매료됐다. “아,이렇게도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 계셨구나!” 내게 박 목사님의 말씀은 경이,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나를 매료시킨 것은 박 목사님의 삶이었다. 순수한 무욕의 삶을 박 목사님은 실천하셨다. 사실 박 목사님은 예장 합동측에서는 ‘살아 있는 성자’로 불리고 있다. 38년이란 긴 세월을 그분과 함께 지내온 나는 이 말이 전혀 과대포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분은 부교역자는 물론 어떤 사람들이라도 항상 존대하며 최선을 다해 섬기셨다. 박 목사님은 내년 1월13일에 팔순이 된다. 제자들이 이날 서울 힐튼호텔에서 팔순 축하 자리를 마련한다. 얼마 전 박 목사님이 내게 전화해 “이 장로님이 그날 기도해 주셔야지요”라고 부탁했다. 새삼 박 목사님과 긴 세월 동안 신앙생활을 함께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박 목사님과 더불어 내수동교회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지체들을 만났다. 바로 70년대와 80년대에 활동했던 내수동교회 대학부 회원들이었다. 나는 75년부터 86년까지 내수동교회 대학부 부장장로로 사역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들이었다. 내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대학부에서 헌신했던 뛰어난 주님의 청년들이 비추는 빛으로 인해 나도 환하게 빛났던 시절이었다. 당시 내수동교회 대학부에는 수백명의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 교회에 대학부라는 조직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내수동교회 대학부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모였다. 지방에서 서울에 공부하러 올라온 크리스천 대학생들은 꼭 한두 차례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찾았다. 그리고 정착했다. 당시 대학부 활성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학생이 지금 사랑의교회 담임인 오정현 목사였다. |
[역경의 열매] 이상하 (3) 주일마다 병원선교 환자쾌유 기도 |
정리=이태형 전문기자 thlee@kmib.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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