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예배당 시공사 돌연 공사 중단… 하나님 약속을 붙잡았다
소강석 목사 꽃씨 목회 <25>
입력 : 2020-07-07 00:07
새에덴교회 성도들이 2005년 1월 경기도 성남 구미동 성전에서 마지막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있다.
2003년 8월 경기도 용인 죽전 새 예배당 터파기 공사가 시작됐다. 교인들은 매일 터파기 공사장에 나와 공사와 안전을 위해 기도했다. 터파기 공사는 3개월 만에 완료됐다. 예배당만 건축하면 됐다. 문제는 건축비였다. 건축비를 마련해야 했는데, 토지 대금을 모두 현찰로 지급한 지도 얼마 안 된 상황이라 재정이 바닥이었다.
이럴 때 은행 대출이 필요한 것이다. 은행 대출을 받으려면 시공사에서 지급 보증을 해줘야 했다. 그런데 계약 시 지급 보증을 해 주기로 했던 시공사 측에서 돌연 못 해주겠다고 태도를 바꿨다.
그러자 은행에서는 건축완공 지급각서만 써줘도 된다고 했는데 그것도 못 해주겠다고 했다. 물론 이해는 된다. 만약 우리가 잘못해 부도가 나면 건설회사가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너무나 섭섭함을 느꼈다.
건설회사에서 공사를 중단시켰다. 성도들에게 호소했다.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역경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해도 절망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기공예배를 드릴 때 비가 그치게 하시고 우리에게 쌍무지개를 보여주셨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그 쌍무지개를 기억합시다. 재정적인 어려움도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시고 공사는 반드시 재개될 것이며 우리 가슴 속에 빛나는 찬란한 약속과 꿈은 이뤄질 것입니다. 이럴수록 우리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읍시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 교회 ‘천사의소리 합창단’이 유럽 공연을 간다고 할 때 집사람에게 인솔해 잘 다녀오라고 했다. 나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예정됐던 유럽 코스테 집회를 떠났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뭘 못하겠는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시리라.”
그때는 휴대전화 로밍이 됐던 것도 아니고 답답했지만, 모든 걸 주님께 맡기며 믿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한 주간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니 공항에 마중 나온 장로님들의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은행에서 서로 대출해 주겠다”고 했다. 왜 그런가 연유를 들어봤다. 나도 모르는 중에 몇몇 은행 직원들이 우리교회 주일예배를 몇 번이나 은밀히 참석했다고 했다.
과연 이 교회에 대출해줘도 괜찮은지, 교회 분위기가 어떤지 보려고 몰래 탐방하고 간 것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까 교회 분위기가 생동감이 있더라는 것이다. 담임목사가 설교하고 신자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니까 교회 건축만 잘해 놓으면 수만 명이 금방 모이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새에덴교회는 담임목사의 꿈과 패기, 신자들의 열정과 헌신, 즉 교회의 생명력이 신용이고 담보였다.
경기도 용인 새 성전인 ‘프라미스 콤플렉스’ 공사 때 철골을 세운 모습.
그러니 새에덴교회는 부동산 담보나 시공사의 건축 완공 지급 각서가 필요 없다고 했다. 교회의 생명력, 생동감, 역동적 분위기가 가장 강력한 신용이요 담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은행이 서로 다투어 대출해 주겠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당연히 교회는 이자가 제일 싸고 지급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로 했다. 우리 성도들의 생명력이 담보돼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넘긴 것이다. 우리는 건설회사를 바꾸려 했는데 이 정보를 알아챈 건설회사 대표가 정식으로 당회에 사과해 공사가 재개됐다.
그러자 이번에는 교회 앞에 먼저 입주한 아파트 주민들이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매일 민원을 제기하고 집회를 하기 시작했다. 예배당을 먼저 지었으면 문제가 없었는데, 국영기업체에서는 아파트 건설부터 진행하도록 시설지원을 한 후 상가나 종교시설은 이후에 짓도록 조치를 했다. 그러니 먼저 입주한 아파트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하고 반대 집회를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 대해 극한적인 용어를 사용한 대형 현수막을 교회 앞 아파트 벽에 달아놨다. 외부의 여러 단체를 끌어들여 시청과 교회 건축현장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했다. 그때 가장 안타까웠던 건 반대하는 사람 중에 집사, 장로도 많았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부적으로는 성도들을 더욱 하나로 결속시켰다. 외적으로는 집회 현장에 가서 악수도 하고 음료수도 사다 줬다. 그러면서 민원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주민 대표들과 접촉하며 수십 차례 협상을 진행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행히 2년여의 세월이 흐르고 여러 기관의 도움으로 입주민들과 화해하고 협상을 마무리했다.
아파트 민원대책 대표를 비롯해 주요한 분들이 나의 끊임없는 설득에 못 이겨 우리 교회에 등록해 다닐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는 역전되고 반전됐다. 재정의 위기도, 민원의 위기도 변장된 하나님의 은혜로 임한 것이다.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온 성도들이 생명나무 신앙으로 한마음을 이루고 교회 안에 생명과 은혜가 충만하면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 위기는 오히려 더 놀라운 축복을 위한 비상의 과정일 뿐이다. 찬란한 약속의 종합단지, 프라미스 콤플렉스(Promise Complex)의 항해는 파도를 넘어 먼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노아의 아들 함처럼 선악과를 선택한 사람들
성경에 보면 선악과를 선택해 저주와 불행의 노예가 돼버린 사람들이 있다. 노아의 아들 함이 그렇다. 노아는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당대의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해도 묵묵히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고 인류의 족보와 씨를 계승해 인류 역사를 보존해 준 사람이다.
그런데 노아도 실수를 했다. 노아가 배에서 나오던 해부터 포도 농사를 시작해 몇 년 후에 포도 열매를 풍족하게 거두었다.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많이 담가 놓았다가 진탕 마셨다. 물론 이것은 노아의 실수였다. 술주정하다가 몸에 열이 나는지 옷을 홀딱 벗고 곯아떨어져 버렸다.
이 모습을 함이 봤다. 그는 온 형제와 자식, 조카들에게 아버지의 실수와 허물을 까발리고 다녔다. 그러자 다른 가족까지 몰려와 그 모습을 보게 됐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수치인가.
그런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을 쳐서 옷을 벗어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 드리고 다시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이키며 조심스럽게 나왔다.(창 9:22~23)
함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거짓말한 것이 아니다. 사실을 본 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노아는 자기가 술에 취했을 때 벌어진 모든 일을 알게 됐다. 노아는 함의 자녀들이 셈과 야벳의 영원한 종이 되도록 저주해 버렸다.
반면 노아는 셈과 야벳에게 대대로 복을 받도록 축복을 했다.(창 9:24~25) 결과적으로 노아의 축복대로 셈과 야벳은 후손 대대로 복을 받았지만 함의 후손은 자손 대대로 셈과 야벳의 종노릇을 하는 저주를 받았다.
함은 자기 깐에 보이는 진실을 진실로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함에게 참 불행한 일이었다. 당시 노아는 가정의 제사장적 위치요 영적 지도자였다. 노아의 장막과 가족공동체는 교회와 같은 곳이었다. 함이 한 일은 오늘날 영적인 지도자의 허물을 까발리는 것과 똑같았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본 것을 본 대로 말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겠다고 말이다. 물론 교회는 개혁돼야 한다. 목회자는 철저한 윤리성과 도덕성, 투명성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도 사람인데 부지중에 허물과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오늘날 함처럼 선악과를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본 것을 교회 안과 밖으로 다니며 까발리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노아의 허물을 덮어주었다. 자기 자녀나 조카들이 볼까 봐 하체를 옷으로 덮었고 자신들도 볼까 봐서 고개를 돌리고 다가가 덮었다. 이런 의미에서 차라리 함은 노아의 허물을 보지 말았으면 좋았을 뻔했다. 옛말에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함이 차라리 그 모습을 보지 않고 몰랐더라면, 약이 되고 복이 됐을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 생활을 하면서 신앙이 어린 단계에선 몰라야 할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교회 특성과 생리상 교회 깊숙이 들어가면 초신자의 신앙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교회 밥을 오래 먹고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 교회 운영에 참여하고 목회자와 가까운 거리에서 섬겨야 한다. 이런 사람은 신앙의 연조가 깊고 성숙하기 때문에 교회의 빛과 그림자를 포용하고 수용할 수 있다. 어지간하면 선악과 시각이 아니라 생명나무 시각으로 포용하고 수용한다.
교회의 깊숙한 속사정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선악적인 시각과 마인드로만 보면 얼마든지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이라도 생명나무 시각과 마인드로 보면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분쟁하는 교회에 가서 양쪽 의견을 들어보면 모두 일리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일리와 일리가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일리를 넘어서는 것이 있다. 주님의 생명이 먼저이고 진리가 먼저여야 한다. 일리가 아닌 진리, 생명이 먼저다.
소강석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46120&code=23111211&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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