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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17] 이잡듯 샅샅이 뒤져라… 英 노르만왕조, 전국민 재산 색출 대작전 / 영국사의 새로운 전환

영국신사77 2020. 6. 17. 17:17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17] 이잡듯 샅샅이 뒤져라… 英 노르만왕조, 전국민 재산 색출 대작전

조선일보

  •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0.06.17 03:12

영국사의 새로운 전환

 

 

1066년 노르만 정복은 영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다.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프랑스 기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국왕 해럴드를 살해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이 나라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영국민들이 겪은 일들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가혹한 정복과 약탈의 연속이었다.

노르만인으로 영국 지배계급 교체

강력한 무력으로 주민들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하더라도 정복왕 윌리엄의 입지는 아직 불안정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이웃 나라에서 쳐들어온 무도한 인간들에게 지배받게 되었다는 데 대해 분개하는 감정이 컸고, 수년간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했다. 윌리엄을 따라 영국으로 들어온 프랑스계 기사들 수는 만명이 채 안 되었는데, 이 소수 인원으로 200만명 가까운 영국인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윌리엄은 약 20년 동안 무자비한 방식으로 지배 체제를 구축해 갔다. 우선 구 귀족들을 몰락시켰다. 이미 정복 전쟁 와중에 많은 귀족이 사망하여 살아남은 귀족들이 얼마 안 되었지만, 그나마 남은 귀족들도 토지와 직위를 빼앗겨 무력화되었다. 윌리엄은 우선 해럴드 왕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을 '반역자'로 몰아 땅을 몰수했다. 반란을 일으킨 지역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주변 지역을 불태워버린 다음 이런 식으로 소유주가 없어진 땅을 자신이 차지하던지 혹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분배했다. 이처럼 원래의 지주층에게서 토지를 빼앗는 과정이 지속된 결과 약 150년 후에는 토지 소유주 가운데 윌프리드, 애설스탠 같은 기존 주민 이름은 거의 사라지고 윌리엄, 로버트, 리처드 같은 프랑스식 이름이 80%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다. 노르만인들이 영국의 지배 계급이 된 것이다.

 

이미지 크게보기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1세의 관리들이 1086년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최후의 심판일 장부)'에 기록하기 위해 농장 소작인을 조사하고 있는 장면(피터 잭슨 作). 둠즈데이 북은 모든 국민에게 빠짐없이 세금을 걷기 위해 토지·재산 현황을 조사한 자료인데, 너무나 철저히 조사를 해서 마치 최후의 심판 때 판결처럼 어떤 속임수나 변경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Look and Learn

 

새 지배 왕조에 충성을 약속한 영국인들은 이론상으로는 프랑스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았지만 실제로 모든 요직은 노르만인들이 독점했다. 정복 후 수년 동안 반란이 극심했을 때에는 궁정이나 교회 요직에 영국인들을 임명하거나 직위를 유지하도록 하는 회유책을 썼다. 하지만 위험한 시기가 지났다고 판단하자 윌리엄은 곧바로 이들을 해임하고 노르만인들로 교체했다. 예컨대 정복 이전부터 캔터베리 주교였던 스티건드(Stigand)의 경우 1070년 직위를 박탈당하고 투옥되었고, 그 자리에는 캉(Caen)에서 랑프랑(Lanfranc)을 불러와 임명했다.

세금·벌금으로 소득 올린 새 왕조

지배 체제를 확고히 지키기 위해서 대민 감시용 성을 쌓았다. 일반 농민들을 동원하여 구릉이나 평지에 인공 축토를 쌓고 그 위에 성을 축조했다. 유럽의 성은 모두 돌로 짓는 것으로 착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중세 성은 대개 목제였다.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돌로 개축하는 곳이 많았다. 윌리엄은 이렇게 축조한 성들에 왕실 수비대를 주둔시킨 반면, 다른 영주들에게는 성의 소유를 금지했다.

새 왕조는 각종 봉건적인 세금을 부과하여 소득을 올렸다. 신하들의 소유지 변경과 상속 때 납부하는 부과금, 영주 딸의 결혼이나 아들의 십자군 참가 시 내야 하는 헌납금 같은 것이 그런 예들이다. 도시 자유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이나 각종 벌금도 다양했다. 예컨대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일시에 결혼할 수 있는 허가를 얻기 위해 15파운드" "아내가 국왕의 포로 상태인 남편과 동침하기 위해 200파운드"를 납부해야 하는 식이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기록 문서인 둠즈데이 북. 11세기 영국의 사회상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런던국립문서보관소 소장.

 

윌리엄의 치세에 모든 국민에게 빠짐없이 세금을 걷기 위해 전국의 토지 및 재산 현황을 대단히 꼼꼼하게 조사한 자료가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이다. 윌리엄은 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귀족들을 위원으로 임명하여 전국을 순찰하며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조사 보고서 이름('최후의 심판일의 장부')은 너무나 철저히 조사를 수행해서 마치 최후의 심판 때의 판결처럼 어떤 속임수나 변경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내용을 보면 과연 전국 각지의 상황을 지극히 엄밀하게 조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리주 림프스필드의 영주 직영 농지는 쟁기 5개, 소 5마리, 농노 15명, 날품팔이 농부 6명, 공유 쟁기 14개, 연 2실링 수입의 물방앗간 1개소, 양어장 하나, 교회당 하나, 목장 4에이커, 돼지 150마리의 숲(당시 숲 크기는 돼지 몇 자리를 칠 수 있느냐로 쟀다), 연 2실링 수입의 채석장 2개소, 매의 집 2개, 노예 10명이 있다. 영지 수입은 에드워드 국왕 당시에는 연 20파운드, 그 후에는 15파운드, 현재는 24파운드이다."

의회제도 기틀이 된 강력한 왕권

심지어 숲 한가운데 사는 사람도 조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소 8마리, 자기 소유 쟁기 한 개 그리고 노예 2명의 도움으로 그가 개간한 농지 약 100에이커를 경작하고 있다. 그는 현재까지 조세를 바치지 않았다."

 

런던 타워는 1070년대에 정복자 윌리엄 1세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다음 왕들이 성벽을 둘러쌓고 건물들을 추가한 이곳은 요새, 궁전, 감옥 등 900년 이상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됐다. /위키피디아

 

이 숲속의 고독한 농부도 다음 해부터는 성실한 납세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자료를 통해 추산한 결과 1086년 당시 영국 인구는 150만~200만명이며, 그중 노예가 10%일 것으로 추산한다. 이런 정도로 자세한 조사 사업은 19세기 말에 가서야 다시 가능해진다.

이처럼 강력한 왕권이 자리 잡게 된 결과 영국 국민은 자유를 빼앗기고 완전한 억압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까? 그 당시에는 그렇게 느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다른 결과를 낳았다. 강력한 왕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자 이것이 오히려 민중의 자유를 신장하고 의회 제도가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다. 사실 아무리 윌리엄과 신흥 지배층의 무력이 강하다 해도 소수의 충성스러운 신하만으로 전국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명의 기사로 어떻게 그 많은 국민을 적으로 돌려 강압적으로 통치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지방의 전통적 자유를 인정해 주고 유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협조를 이끌어내는 게 낫다. 결국 초기의 잔혹한 정복과 지배 체제 구축 과정이 지난 후 자신감을 찾은 국왕은 관대한 통치를 펼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왕은 귀족 중에서 관리를 선임했는데, 귀족들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민중과 손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귀족과 민중층이 결합하여 의회 제도를 통해 한편으로 국왕의 국정 운영에 협조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 국왕이 자의적 통치를 하려 할 때 견제하기도 했다.


[영어가 완성되다]


프랑스어의 한 갈래인 앵글로노르만(Anglo-Norman)어를 사용하는 노르만인들이 영국의 새로운 귀족층이 되자 언어상의 변화가 불가피했다.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고대 영어, 즉 앵글로색슨어는 이 시기에 상류 계급 언어인 프랑스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중세 영어로 변화해 갔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프랑스어 단어들이 영어로 들어왔다.

특히 지배층과 관련된 단어 중에 프랑스어 계통 단어들이 많다. 궁정(cour→court), 왕관(couronne→crown), 회의(conseil→council) 등이 그런 사례다. 육군(armé[e→army), 탑(tour→tower), 성(château→castle), 군기(軍旗, étandard→standard) 같은 군사 용어들, 수도원장(prieur→prior), 예배당(chapelle→chapel), 미사(messe→mass) 같은 종교 용어들도 마찬가지다. 사법(justice), 감옥(prison) 같은 재판 관련 용어들은 아예 철자까지 같은 형태로 영어에 들어왔다.

계급 간 차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는 동물과 관련된 용어들이다. 예컨대 소는 농민들이 기르는 동물일 때에는 cow이지만 고기를 요리해서 식탁 위로 가져갈 때에는 beef가 된다. 목축이나 농사일을 하는 농민들은 여전히 앵글로색슨어 cow를 사용하지만 요리로 접하는 지배 계층은 프랑스어 boeuf를 사용하다가 이것이 beef로 바뀐 것이다. 돼지(pig, porc→pork), 양(sheep, mouton→mutton), 송아지(calf, veau→veal)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어의 preux라는 단어는 원래 용맹한 기사를 뜻하지만 영어에서는 오만하다는 뜻의 단어 proud의 어원이 되었다는 것도 그런 미묘한 차이가 반영된 흥미로운 사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16/20200616050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