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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16] 잉글랜드王을 찬탈자로 몰아 죽이고… 바이킹의 후예 '런던 대학살'

영국신사77 2020. 6. 3. 16:19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16] 잉글랜드王을 찬탈자로 몰아 죽이고… 바이킹의 후예 '런던 대학살'

조선일보 

  •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0.06.03 03:12

노르망디 공작, 잉글랜드를 정복하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국왕으로 등극하여 노르만 왕조를 개창한 소위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은 유럽사의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

노르만 정복, 유럽사의 중대한 변곡점


역사상 자주 있는 일이지만, 국왕께서 왕위 계승자를 낳지 못하면 복잡한 문제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11세기 초 잉글랜드의 고해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가 바로 그런 사례다. 전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바처럼 이 왕의 신앙심이 성인(聖人) 수준으로 깊은지는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부부 생활에서만큼은 수도사 수준으로 정결했던 게 분명하다. 중년에 들어선 국왕이 후계자를 낳을 가능성이 희박해진 상황에서 차기 왕권을 주장하는 후보는 세 명으로 압축되었다.

첫째는 노르웨이 왕 해럴드 하르드라다(Harold Hardrada). 그의 할아버지 크누트(Cnut)는 한때 덴마크, 노르웨이, 잉글랜드 왕위를 모두 차지하여 일명 '북해 제국'을 창건했는데, 손자인 하르드라다가 지난날의 왕위 계승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둘째는 웨섹스 백작 해럴드(Harold). 국왕의 처남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가졌고 많은 귀족의 지지를 받아서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셋째는 노르망디 공작 기욤(Guillaume, 기욤의 영어식 발음이 윌리엄이다). 에드워드 고해왕은 1051년에 자신의 종질(사촌 형제의 아들)인 기욤에게 그의 사후 국왕 지위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이 '약속'의 성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불명확하다. 단지 자신을 지원해 줄 정치적 동맹을 확고히 유지하기 위한 립서비스였을 가능성도 크지만, 어쨌든 기욤으로서는 이 약속을 믿고 대권의 꿈을 키운 것이 분명하다.

이미지 크게보기영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과 잉글랜드 해럴드 2세가 벌인 106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 전투 장면. 정복왕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 역사 주요 장면들을 상세히 묘사한 이 그림은 길이 약 70미터, 높이 50센티미터 크기에 수를 놓은 바이외 태피스트리 일부다. /게티이미지뱅크

차기 왕권의 행방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난다. 1064년 혹은 1065년, 국왕 에드워드가 해럴드를 노르망디 공 기욤에게 사절로 보낸 것이다. 해럴드는 기욤에게 여러 성물(聖物)을 걸고 기욤의 왕위 계승 권리를 존중한다는 서약을 했다. 국왕이 유력한 후보자들 사이에 미리 교통정리를 하여 기욤을 다음 국왕으로 확고하게 선택한 결정이었을까? 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서약까지 한 해럴드는 얼마 안 있어서 국왕이 사망하자 몇 시간도 채 안 지나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애초에 해럴드의 선서라는 게 없었던 일이며, 후일 기욤이 왕권을 빼앗은 후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역사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교황 지지 확보한 노르망디 군대

1066년 1월, 국왕 에드워드가 사망하고 해럴드가 왕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노르웨이의 하르드라다나 노르망디의 기욤이나 그냥 물러설 위인이 아니다. 그해 여름, 하르드라다가 먼저 출병하여 영국 북부 노섬브리아에 침입해서 요크를 점령했다. 해럴드는 그와 대적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9월 25일, 요크 근처 스탬퍼드 브리지(Stamford Bridge)에서 전투를 벌여 해럴드 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하르드라다는 전사했다.

그러는 동안 노르망디에서도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우선 바다를 건널 함대가 필요했다. 바이킹의 전통이 아직 살아있던 터라 단 몇 달 만에 에스네크(esneque, 바이킹 선박의 한 종류) 1000척을 건조했다. 그리고 프랑스 각 지역에서 원정에 참여할 기사들을 모았다. 중세의 전쟁에서는 종교적 정당성이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에 기욤은 교황청에 호소하여 교황 알렉산더 2세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제 노르망디 군은 '베드로의 깃발'을 들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으니, 일종의 십자군 모양새까지 갖춘 셈이다. 해럴드는 성인의 이름을 걸고 거짓 맹세를 하고 부당하게 왕권을 찬탈한 악당으로 묘사되었다. 마침 적당한 때에 하늘에서 해럴드를 응징하리라는 징조도 나타났다. 4월에 갑자기 나타난 혜성은 해럴드에게 악운이 끼었다는 의미로 해석했는데, 600년이 지난 18세기 초에 가서야 이것이 75~76년 간격으로 나타나는 핼리 혜성으로 밝혀졌다. 기욤의 군대는 9월 28일 잉글랜드 남부의 페번지(Pevensey)에 상륙했다. 사흘 전 북쪽 지방에서 하르드라다와 전투를 마친 해럴드의 군대는 서둘러 남쪽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니 병사들이 지쳐서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10월 14일 헤이스팅스(Hastings) 근처에서 일어났다. 온종일 지속된 전투는 해 질 녘에 가서 결판이 났는데, 기욤의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고 해럴드는 전사했다.

잉글랜드를 차지한 정복왕 윌리엄

1620년쯤에 무명의 예술가가 그린 정복자 윌리엄의 초상화. 런던 국립 초상화 갤러리 소장. /위키피디아

기욤의 군대는 잔존 세력이 결집해 있는 런던으로 진격해 가서 잔혹하게 공격했다. 수비군은 궤멸했고, 잉글랜드의 주민들은 기욤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많은 귀족이 전투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귀족이 많지 않았다. 곧 프랑스 기사들이 정복군처럼 잉글랜드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해 크리스마스 날에 기욤은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잉글랜드 왕으로 추대되었고 노르만 왕조(Norman dynasty)가 개창되었다.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동시에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이 되었으며, '정복왕(William the Conqueror)'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 자신은 이 표현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선왕에게서 계승권을 약속받았고 그에 따라 정당하게 왕위에 올랐지, 무력으로 정복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잉글랜드 주민들로서는 외국인이 군대를 끌고 와서 무자비한 살상을 벌인 후에 왕권을 차지한 데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없었다. 그 시대의 사정을 소상히 기록한 잉글랜드의 수도사이며 연대기 작가인 오드릭 비탈리스(Orderic Vitalis)는 꽤나 신랄한 글을 남겼다. 크리스마스 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윌리엄이 왕위에 오르던 날 런던이 불길에 휩싸였는데 이는 윌리엄이 악마가 보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1087년 그가 프랑스 도시 캉(Caen)에서 장례를 치르는 날 다시 그 도시가 불길에 싸였으니 불지옥에서 온 자가 불지옥으로 돌아가는 징표라는 식으로 서술했다.

노르망디 공작이 동시에 잉글랜드 국왕이 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는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프랑스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기욤과 그 후계자들은 한편으로 자신에게 충성해야 하는 신하이지만 다른 한편 자신과 동렬의 왕이다. 영국은 오랫동안 유럽 대륙의 역사에 결부되었다. 영국이 대륙 내의 영토를 정리하고 문자 그대로 섬나라가 되는 것은 백년전쟁 이후의 일이다.

[노르망디 '바이외 태피스트리']

무려 70미터…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을 찬양하기 위해 한땀한땀 수놓은 그림

프랑스 바이외 태피스트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는 11세기의 복장과 무기, 풍습 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프랑스 문화부

노르망디의 바이외(Bayeux) 박물관에 소장된 태피스트리는 노르만 정복 사건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시각 자료다. 길이 약 70미터, 높이 50센티미터의 크기에 그림을 수놓은 이 작품은 엄밀히 말하면 태피스트리(벽 가리개)가 아니라 자수 작품이다. 오랫동안 기욤의 부인 마틸드가 만든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지만, 아마도 노르만 정복 직후 잉글랜드에서 만들어졌다가 1077년 완공된 바이외 성당에 헌정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 이 성당에서는 평소에는 태피스트리를 말아서 상자 속에 보관하다가 축일에 가지고 나와 벽에 걸어 전시했다.

'세계 최대의 만화 작품'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해럴드가 사절로 노르망디를 찾아오는 장면부터 헤이스팅스 전투까지 노르만 정복의 주요 장면들을 북유럽 예술 형식에 담아 묘사하고 있다. 모두 626명의 인물과 배, 말, 무기 등이 정확하게 그려진 태피스트리는 매우 귀중한 중세 예술 작품일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사료로 평가받는다. 제작자의 의도로는 해럴드가 바이외 성당의 성물을 걸고 기욤에게 선서하는 장면이 핵심 부분일 것이다. 해럴드는 신과 성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후 이를 배신하고 왕권을 찬탈했으니 기욤이 왕권을 되찾은 게 정당하다는 메시지다. 노르망디에서 출항하는 장면에서는 이 시기에도 계속 바이킹 선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악인 해럴드가 사망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그 의미는 하느님이 결국 정의의 편에 서서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는 신학적·정치적 이데올로기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03/202006030007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