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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설교(30) 모르드개

영국신사77 2020. 5. 11. 19:35

성경인물설교(30) 모르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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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7.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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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설교(30)  르드개(에2:5-3:11)

 

● 하나님의 감동으로 바사왕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되었을 때, 일제의 만행을 피해 만주나 연해주 등지로 피해있던 동포들이나 일본에 강제로 끌려갔던 사람이, 해방 후에도 조국으로 쉽게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거나, 그 후손들이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비록 고향이 아닌 이방 나라이기는 했지만, 이미 그곳에 수십년동안 자리를 잡고 살아왔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그렇게 쉽게 떠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연유로 해서, 수많은 유대인들은 고향 유대땅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잡혀온 낯선 나라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방인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종교 전통을 고수했기 때문에, 어디서든 남의 눈에 잘 띄었고, 주변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뛰어난 재주와 상술, 끈질긴 생활력 등을 바탕으로, 포로로 잡혀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물을 모으고 높은 관직에 오르는 등 주변 사람의 부러움을 샀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주변 모든 사람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혹독한 박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게 되었다.

 

적개심에 가득찬 주변 환경에 둘러싸여, 소수의 유대민족 운명은 늘 풍전등화와 같았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윗대부터 뿌리 내려 살고 있는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들에게 구원의 희망은 보이질 않았다. 언제 타민족으로부터 테러를 당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늘 저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의 전역사가 그러했다.

 

이같은 암담한 상황을 앞에 두고 유대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조상들이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은 정말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가? 우리는 살아날 수 있을까?

 

● 초기 유대교 지도자들은 ‘에스더서’를 구약성경에 포함시킬 것인지 뺄 것인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부림절이라는 것이 모세의 율법에 없는 절기이고, ‘에스더서’ 어디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실 다른 구약성경 어디에도 ‘에스더서’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없다. 그리고 신약성경 어디에도 ‘에스더서’를 인용하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에스더서’에 나오는 역사내용도 다른 성경이나 역사연대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도 ‘에스더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고, 주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에스더서’의 존재가치는, 에스더라는 이름의 뜻이 ‘별’이듯 더욱 빛나고 있다.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이 온 세상이 자기 것인양 호언장담하며 교만히 행할 때, 저들 뒤에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에스더서’는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 세계에 흩어져 수천년동안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싸우며 오늘에 이른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도 믿음을 붙들고 살아가기 위해 어려움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에스더서’는 얼마나 큰 용기를 주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도, 암담한 상황을 앞에 두고, “진정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여호와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의 사정으로 보고 계신가? 우리는 살아날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하는 수많은 믿음의 백성들에게 ‘에스더’서는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백성들을 도우시고 구원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 ‘에스더’서의 주인공은 물론 바사국의 왕후 에스더이다. 하나님께서 에스더와 함께 하셔서 유대민족을 결정적으로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도록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다. 하지만, ‘에스더’서를 찬찬히 읽어보면, ‘에스더’서의 또다른 주인공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모르드개’이다.

 

모르드개는 베냐민 사람 기스의 증손, 시므이의 손자, 야일의 아들이다. 즉 모르드개는 사울 임금 집안 출신이었다. 그런데 왜 베냐민 지파 사람을 유다인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스라엘이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나뉠 때, 남유다는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 두 지파로 나라를 이루었고, 나머지 열지파는 에브라임지파를 중심으로 북왕국을 이루었다. 베냐민지파가 왜 유다지파와 연합하게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나, 1대 사울왕이 베냐민 지파였고, 다윗왕이 사울왕의 후손을 잘 보살폈으며, 베냐민지파가 거주하는 땅이 유다지파 땅과 바로 붙어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다지파에 붙은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후로 베냐민지파는 유다지파와 함께 유다인을 형성하게 된다. 사도 바울도 베냐민 지파였다.

 

2장6절에 보면 모르드개가 BC597년경 느부갓네살왕이 유다왕 여고냐를 비롯 유다백성을 포로로 끌고갈 때 사로잡혀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바사왕 아하수에로가 1장의 대연회를 베푼 연대가 BC483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시차가 무려 114년이나 생긴다. 따라서 에스더서에 등장할 당시 적어도 모르드개는 130세 이상의 노인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성서학자들은 6절에 ‘모르드개’라는 이름이 없이 단지 ‘그’라는 지시 대명사만 기록되어 있으므로, 정작 바벨론으로 유배됐던 자는 모르드개의 증조부 ‘기스’였으며, 따라서 모르드개는 포로 4세로서 바사제국의 수상에 등극한 자로 볼 수 있다.

 

모르드개라는 이름의 뜻은 불분명하다. 그는 에스더의 사촌오빠였으며, 바사제국의 수산궁 상당한 고위직에 있었다. (2:21)대궐문에 앉았다는 것은, 단순한 문지기가 아니라 중요한 책임자로 집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랬기 때문에, 내시들의 반란을 사전에 탐지할 수 있었고, 에스더의 형편을 살피러 후궁 뜰 앞으로 왕래할 수 있었다. 그는 후일 바사제국의 총리대신이 된다.

 

● 그러면, ‘에스더서’의 또다른 주인공 모르드개가 어떤 인물이었을까? 에스더서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몇가지 살펴보자.

에스더서에 그려진 모르드개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을 깊이 정성껏 돌보고 아낌없이 에너지를 쏟아 도와 주는 인정 많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모르드개의 첫 번째 등장은 에2:7에 나온다. 거기서 우리는 포로와 잡혀와 있다 이국땅에서 고아가 된 에스더를 거두는 모르드개를 볼 수 있다.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같이 양육하더라.”(2:7)

 

에스더를 위한 모르드개의 수고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왕궁에 들어간 후에도 그는 늘 에스더가 잘 지내는지 깊은 관심으로 기켜 보았다. “모르드개가 날마다 후궁 뜰 앞으로 왕래하며 에스더의 안부와 어떻게 될 것을 알고자 하더라.”(2:11)

 

관심이 덜한 사람이었다면 간단히 손 씻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거둬준 것만으로도 본분을 다하지 않았던가. 이제 출가했으니 깨끗이 잊어버리고 본인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랬을지 모르지만 모르드개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하수에로왕의 왕비를 간택하기 위해 뽑혀 들어간 처녀들은, 1년을 준비한 후 왕과 하룻밤을 지내게 되고, 후궁들이 머무는 궁으로 가서 머물면서, 왕이 부르기 전에는 다시는 왕에게 나아갈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임금과 접촉하면 다시는 가족에게 돌아갈 수도 없었다. 왕비 후보라는, 화려하게 보이는 처지였으나, 한편으로는 궁궐에 일생 감금되어 살아야 하는, 처참한 인생이었다. 모르드개는 처음부터 에스더의 덕을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모르드개의 두 번째 등장은 2장 후반부에 나온다. 이번에 모르드개가 챙긴 사람은 왕이었다. 그는 왕의 두 신하가 왕을 해하려 음모를 꾸미는 소리를 들었다. 모르드개는 들은 내용을 에스더를 통해 고하여 왕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구했다. 모르드개는 2장 안에서만 벌써 고아를 거두고 왕을 보호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사람에 영합하는 자가 아니었다. 3장에 보면 모르드개는 하만 앞에 절하기를 거부함으로 하만의 분노를 사게 된다. 하만은 당시 왕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실력자였다. 흔히 말하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권세를 누리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왕의 모든 신복들이 하만에게 꿇어 절했다. 그것은 또한 왕의 명이기도 했다. 모르드개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런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모르드개가 왕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하만에게 꿇지 않고 절하지도 아니했는가?

 

3:1에 보면, 하만을 아각사람으로 소개한다. 즉 하만은 전에 이스라엘백성에게 대대로 원수 노릇을 했던 민족들 가운데 하나인 아말렉 사람들의 임금 아각의 후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각은 모르드개 집안에 속하는 사울왕의 적대자였다. 사울왕이 아각을 살려준 것이 계기가 되어 사울은 하나님에게 버림받는다. 모르드개는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만에게만은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모르드개는 고아를 거두고 왕을 챙겼을 뿐 아니라 나아가 유대인이라는 한 민족 전체를 살렸다. 하만이 모르드개에 대한 복수로 유대인을 전멸시키려는 윤허를 받아내자 모르드개는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으며 재를 무릅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했다.”

 

그런 굴욕과 고생을 감수함으로 모르드개는 이스라엘의 긴박한 위험을 에스더에게 전달할 수 있었고, 에스더는 마침내 내시를 보내 사정을 알아 보게 한다. 유일한 탈출구 앞에서 에스더가 주춤거리자 모르드개는 단호히 맞선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참된 사랑의 실천자들은 평소에는 양과 같다가도 소명을 감수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사자(獅子)라도 될 수 있다. 모르드개는 긍휼이 많은 자였으나 나약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단호한 대처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그는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이들에게까지 강하게 나갈 수 있었다.

 

진정한 부드러움은 강한 것과 함께 있을 때 발견된다. 늘, 매사에 부르러운 것은 진짜 부드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진짜 강한 것은 부드러움과 함께 있을 때 진정으로 강한 것이다.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 많으시고 부드러운 분이신가?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얼마나 강하신 분인가? 모세가 얼마나 온유한 사람이었나. 그러나 모세는 또한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나?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엄위하신 분이신가? 그러나 또한 얼마나 감미롭고 부드러운 분이신가? 자연의 여러 현상을 볼 때, 창조주 하나님의 그 섬세하시고 부드러움에 감탄하게 된다. 모르드개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있는 사람이었다.

 

● 한 가지 주목할 대목이 있다. 일찍이 모르드개가 고아 에스더를 돌보지 않았다면 후에 달리 왕 앞에 나아갈 길이 없었을 것이므로 온 이스라엘은 망했을 것이다. 아하수에로왕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더라면, 내시들의 음모를 차단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일로 인해 왕으로부터 아무런 보상이 없었지만, 모르드개의 헌신은 변치 않았다.

 

평소에 베풀었던 사랑과 긍휼 행위나 충성된 헌신이 이후에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긍휼의 행위를 베풀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당장 눈앞에서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선행을 베푸는 것을 중지해서는 안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다. 보이는 않는 선행과 사랑의 실천은 언젠가 놀라운 감동과 능력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모르드개의 강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좇아 자구책을 찾게 된다. 이번에도 긍휼의 역할을 주로 맡은 자는 모르드개였다. 그는 면밀한 조서를 작성해 인근 모든 고을의 동족들에게 보냈고 그리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위험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승리를 얻은 후에도 모르드개의 긍휼은 계속된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와 개입을 기념하는 연례 축일을 제정했다. 얼마든지 자신의 충성을 기려 기념비를 세울만도 했건만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축일 중 서로 예물을 주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것을 명했다. 이렇듯 모르드개는 자기를 챙긴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 냈다. 기회만 나면 모르드개는 남을 도왔다. 처음에는 고아, 다음은 왕, 다음은 온 민족, 다음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이처럼 최선을 다해 이웃을 돕고, 자신의 일에 충성되고,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의 결국이 어떻게 될까? 에스더서의 마지막 절에 나오는 총평은 그에게 꼭 어울린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존대하여 그 허다한 형제에게 굄을 받고 그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누가 이보다 뛰어난 총평을 바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