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한 와중에도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은 대만해협 주변에서 주거니 받거니 무력을 과시하고 있다. 미국은 이지스 구축함을, 중국은 항공모함을 동원했다.
미국 입장에서 대만해협은 대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중국 입장에서 이 해협은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곳이다. 또 대만해협은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 지역인 동아시아에 석유를 공급하는 생명선이기도 하다. 양쪽 모두에게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다.
대만해협과 관련된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다르다넬스(Dardanelles)해협이 떠올랐다. 지중해 북동쪽 에게해의 갈리폴리 반도와 소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좁고 긴 다르다넬스해협. 보스포루스해협과 함께 에게해와 흑해를 잇고,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루는 전략적 요충지다. 오늘날 터키 소유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세력이 통제하고 지배했다. 트로이, 아테네,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 로마, 비잔틴, 베네치아, 오스만튀르크…. 모두 당대를 풍미했던 제국들이다. 제국이 아니면 감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다르다넬스해협. 가히 제국의 왕관을 장식하는 빛나는 보석이라 칭할 만하다.
모든 제국이 탐냈던 해협
오늘날의 다르다넬스해협은 평범하고 평온하다. 아시아에 위치한 차나칼레가 해협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인데 인구 20만명의 관광도시다. 해안가에는 호텔과 식당이 즐비하고, 한가롭게 페리만이 양안(兩岸)을 오갈 뿐이다.
해협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면 페리를 타고 유럽 쪽의 겔리볼루 반도로 넘어가야 한다. 페리는 차나칼레 항구에서 수시로 출발한다. 해협을 건너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 남짓. 그 짧은 시간 동안 허무함과 감동이 묘하게 얽힌다.
얼마나 많은 정복자가 원대한 꿈을 안고 이 해협을 건넜던가? 페르시아의 대왕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거꾸로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이 해협을 건넜다. 한니발을 이겨 카르타고 제국을 무릎 꿇린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셀레우코스 제국을 응징하기 위해 이 해협을 건넜다.
그들이 너무나 어렵게 지난 해협을 나는 너무 쉽게 건너니 허무하고, 수천년의 시차를 두고 그들과 같은 길을 가니 벅차다. 그렇게 건넌 겔리볼루 반도는 우리에겐 갈리폴리(Gallipoli)로 익숙하다. 반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최악의 격전지 중 한 곳이었다. 수많은 군인이 다르다넬스해협을 지키거나 빼앗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에서 산화했다. 반도 곳곳에 유적지와 묘지가 널린 이유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갈리폴리 남단의 차나칼레 순교자 기념비다. 사각의 강인하고 웅장한 기념비가 다르다넬스해협의 입구를 응시하고 있다. 사방으로 뚫린 기념비 안으로 들어가 고개를 들면 거대한 터키 국기가 천장 가득하다.
잘 정리된 무덤들 사이로 유독 한 사람의 동상과 부조가 이곳저곳에 놓여 도드라진다. '터키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로 그 사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다. 그가 왜 이곳에 있을까? 충분한 자격을 갖췄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중 이 반도 전체를 무대로 진행됐던 갈리폴리 전투(1915년 2월~1916년 1월)를 승리로 이끈 사람이 바로 아타튀르크다.
제국들의 운명을 건 전쟁
터키의 전신(前身)인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다르다넬스해협을 장악하면서 강대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2대 군주 오르한(Orhan) 때였다(1354년). 해협 좌우의 아시아 아나톨리아와 유럽 발칸 반도를 중심으로 중동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그러나 19세기 내내 내리막길을 걸었다.
치명적인 붕괴의 순간은 1914년 여름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찾아왔다. 유럽의 대(大)제국 전원이 참가했지만 오스만튀르크 입장에서는 참전할 이유가 없는 전쟁이었다. 참전할 형편도 못 됐다. 제국 각지에서는 불온한 민족주의 바람이 불었고, 경제는 낙후됐기 때문이었다. 오스만튀르크 입장에서는 무장중립을 지키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승자 편에 붙어 국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당시 집권층은 독일과 손잡고 참전키로 했다. 러시아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어리석은 권력은 언제나 국가를 몰락으로, 백성을 수난으로 몰아넣는다. 오스만튀르크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5년 1월,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해 이스탄불을 점령할 계획이란 소식이 전해졌다. 작전의 입안자는 당시 영국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었다.
프랑스·영국군과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교착상태를 이루자 처칠은 이스탄불을 정복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코자 했다. 처칠은 연합군이 이스탄불을 차지해 오스만튀르크 제국을 무력화할 수 있다면 여러 전략적 이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우선 남쪽으로부터 러시아를 공격하는 오스만튀르크를 제거하고, 흑해를 통해 러시아군에 군수품을 지원할 수 있게 된다. 연합군은 흑해로 흐르는 다뉴브강과 발칸반도를 통해 독일의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배후를 공격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러시아는 배후 걱정 없이 전군을 독일 전선에 투입할 수 있고, 독일은 홀로 양쪽 전선에서 힘겨운 전쟁을 벌여야 한다. 독일은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전략적 안목이 탁월한 처칠 정도 되는 인물만이 그려낼 수 있는 대전략이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무스타파 케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단 하나의 실수를 제외한다면.
처칠과 아타튀르크의 전쟁
케말은 오늘날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났다. 근대 교육을 받았고,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능력과 열정, 애국심을 두루 갖춘 탁월한 군인이었다.
집권층은 강직한 성격의 케말을 껄끄러워했다. 다르다넬스해협이 공격당해 이스탄불이 함락될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오고 나서야 케말을 전선으로 파견했다.
국제적 안목이 뛰어났던 케말은 처음부터 독일과 손잡고 전쟁에 뛰어드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군인답게, 애국자답게, 나라의 부름에 응했다. 그런 그에게 배정된 건 오합지졸로 급조된 볼품없는 미니 사단 하나였다. 무능한 권력의 치졸함이었다.
케말은 보란 듯이 단기간에 오합지졸을 군인으로 탈바꿈시켰다. 4월 25일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작전이 전개되자 케말은 미니 사단을 이끌고 최전선에서 맞서 싸웠다.
케말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나는 너희에게 공격하라 명하지 않겠다. 죽어라. 우리가 죽어야 다른 병사들이 뒤를 이을 것이다."
이런 명령이 100년 이상 제대로 된 승리 한 번 해본 적 없는 비루한 군대에 가당키나 할까? 그러나 통했다. 비록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케말이 보여준 의지와 용기, 인품과 능력은 햇병아리 군인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강렬했던 것이다.
케말의 부대는 죽기로 싸워 가장 중요한 고지를 지켜냈다. 연합군의 상륙작전은 실패했다. 케말의 승리는 향후 계속된 전쟁의 흐름을 바꿨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집권층은 원치 않았지만, 독일군 수뇌부는 케말을 '전적으로 믿는다'며 무려 여섯 개 사단과 함께 가장 중요한 전선의 방어를 맡겼다. 그는 맡은 바 의무를 다했고, 연합군은 결국 철수했다. 양측 통틀어 무려 50만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처칠의 원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케말이 이겼고, 국민 영웅이 됐다.
전쟁은 1918년 말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패배한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함께 해체됐다. 케말은 무너진 나라를 일으켜 터키 공화국을 세웠고, 전면적인 개혁을 통해 터키가 중동의 강국으로 비상(飛上)할 기틀을 마련했다.
그 모든 위대한 행보가 다르다넬스해협에서 시작됐다. 만약 케말이 지켜내지 못했다면 해협과 터키의 운명은 어찌 됐을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비극 앞에서 약소국이 그토록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할 수는 없다. 오늘날 해협에 나부끼는 건 터키의 깃발이 아니었을 것이다.
100년 전 남의 일이 아니다. 미·중 분쟁의 시대에 전략적 요충지인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오싹한 일이다. 우리는 격화되는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태극기를 지켜낼 수 있을까?
[갈리폴리 전투 영화에 호주 아버지가 왜 등장할까]
갈리폴리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도 여러 편이 있다. 최근에 인상 깊었던 건 '워터 디바이너(The Water Diviner, 2014년)'다. 유명 배우 러셀 크로가 감독에 주연까지 맡았다.
갈리폴리 전투로 세 아들을 모두 잃은 아버지가 아들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고향인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나 터키로 향하는 이야기다. 멜 깁슨이 주연한 갈리폴리(Gallipoli, 1981년)도 같은 전쟁을 다루고 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제작국이 오스트레일리아란 것과 두 배우가 오스트레일리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갈리폴리에 투입된 연합군의 핵심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였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각각 2만8000여 명과 74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갈리폴리 반도에는 이들의 무덤과 추모비도 있다.
※ 4월15일 자 〈테살로니카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49회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