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6일부터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적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사기가 크게 저하됐다. 국군과 유엔군은 1주일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군은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23일부터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전쟁의 주도권을 국군과 유엔군이 쥐기 시작했다.
맥아더 원수는 27일 워싱턴에 “나의 판단에 따라 38선을 넘어도 좋다는 권한을 부여해주기 바란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는 것은 소련 또는 중공의 주력군이 북한에 진입해 있지 않거나 북한 안에서 군사적으로 소련군 및 중공군의 위협에 직면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을 경우에 한한다”는 조건부 승인 훈령을 내렸다.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지체없이 북진을 해야 한다”고 했으나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의 38선 돌파 권한이 없다”며 난색을 보였다. 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유엔이 결정할 때까지 장군은 휘하 부대를 데리고 기다릴 수 있지만, 국군이 밀고 올라가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아니요. 내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우리 국군은 북진할 것이요.”
이 대통령은 30일 부산 경무대로 육군 수뇌부를 호출했다. “그런데 정(일권) 총장, 정 총장은 38선에 도달한 우리 국군에게 어찌해서 북진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소. 38선 때문인가 아니면 딴 이유 때문인가.”
정 총장은 “38선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정 총장은 맥아더로부터 미국 정부가 명령할 때까지 단 1명도 38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장군들을 이렇게 꾸중했다. “38선이 어찌 됐다는 것인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말인가.” 정 총장은 이 대통령이 그때처럼 노여워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정 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유엔군과의 지휘권 문제가 있습니다만, 각하의 명령을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잠시 후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작전권을 맥아더 장군에게 위임한 이유를 다시 설명했다.
“나는 맥아더 장군에게 우리 국군의 지휘권을 맡기기는 했으나 내가 자진해서 한 것입니다. 따라서 되찾아올 때도 내 뜻대로 할 것이요. 지휘권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따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즉 대한민국 국군인 여러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령만 충실히 지켜주면 되는 것이요.”
대통령은 품 안에서 명령서를 꺼내서 정 총장에게 건넸다. “이것이 나의 결심이요, 나의 명령입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38선을 넘어 즉시 북진하라. 1950년 9월 30일 대통령 이승만.”
이 대통령으로부터 북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정 총장은 참모총장 고문 하우스만과 이 문제를 숙의했다. 하우스만은 긴급추적권이라는 방법을 찾아냈다. 긴급추적권은 전쟁 중 적을 추적해 전투를 벌이지 못하게 돼 있는 지역이라도 긴급상황이 발생해 불가피한 경우 일정 기간, 일정 지역을 추적해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이 권한을 이용해 정 총장은 김백일 장군에게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김 장군은 백골부대인 3사단 23연대장 김종순 대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귀 연대에 북진 명령을 내린다. 38선을 돌파하라. 38선은 이 순간부터 없어진다.”
한국군 3사단 23연대는 이렇게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부대가 됐다. 23연대가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한 것은 1950년 10월 1일 오전 11시 25분이었다. 미국은 논란 끝에 38선 돌파를 결정했다.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3일 ‘유엔군은 10월 3일 0시를 기해 38선 이북의 북한에 작전을 연장한다’는 일반명령 제2호를 발표했다.
워커 8군 사령관이 도쿄로부터 정식 북진 명령을 받은 것은 7일이었고, 실제로 미군이 38선을 넘은 것은 9일이었다. 국군이 38선을 넘은 지 9일 만에 미군 주력부대가 38선을 넘은 것이다.
38선을 돌파한 국군과 미군은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평양을 향해 빠르게 진군했다. 국군 제1사단은 중서부의 험한 산길을 하루 평균 25㎞의 속도로 강행군하면서 북진했다. 경의선 국도를 따라 진군하던 미 제1기갑사단은 하루 평균 18㎞의 속도로 북상하고 있었다.
속도 경쟁에서 한발 앞선 국군 제1사단은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도착했다. 10월 19일, 국군과 유엔군 5개 사단은 포위망을 형성해 평양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제1사단 15연대는 대동강 상류에서 도하작전에 성공하고 곧바로 모란봉을 공격했다. 오후에는 마침내 평양 시내 깊숙이 진입해 주요 건물에 태극기를 게양하며 평양 입성의 개가를 울렸다.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날은 대한민국 국군에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38선 돌파에 앞장섰던 육군 제3사단의 북진을 기념해 56년 9월 14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국군의 날’을 대통령령 제1173호로 제정·공포했다. 이때부터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키게 된 것이다.
김재동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