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양상을 뒤바꾼 대역전 드라마였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시점은 영등포 부근 한강 방어선을 처음 시찰한 1950년 6월 29일이다. 맥아더 회고록에 보면 “영등포 언덕에서 하늘의 계시가 울렸다. 인천상륙작전을 포함한 인민군 섬멸 반격작전이다”라고 썼다.
한강 변에서 호를 파고 경계하던 병사와 대화를 하면서 조국 수호 결의에 가득 차 있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통해 반드시 한국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날 밤 도쿄의 숙소로 돌아온 맥아더는 퀘벡전기(戰記)를 밤새도록 읽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군이 캐나다 퀘벡에서 싸울 때,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세인트 로렌스강을 거슬러 올라간 영국군이 프랑스군의 배후에 상륙해 승리한 작전을 기록한 책이다. 맥아더는 밤새도록 책을 읽은 후 성경을 꺼내 읽고 기도를 했다. 그리고 “이것 말고 한국을 건질 작전은 없다”고 확신한 후에 자리에 누웠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9m나 되기 때문에 밀물 때 2시간 안에 상륙하지 않으면 3.2㎞나 되는 갯벌을 엄폐물도 없이 전진해야만 한다. 갯벌에서는 전차나 차량은 당연히 이동할 수 없고, 도보도 사실상 어렵다. 상륙할 장소는 해변의 모래사장이 아니라 방파제와 축대였다. 상륙함을 정박시킨 후에 사다리로 올라가야만 한다.
상륙작전으로서는 그야말로 재앙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갖고 있었다. 그래서 참모들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률이 5000분의 1밖에 안 된다고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반대했다.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 셔먼 해군참모총장, 미 합참에서 모두 반대했다. 맥아더는 “소심하기 짝이 없군”이라며 “인천에 상륙해야만 적군의 숨통을 제대로 끊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결국, 9월 4일 최종계획이 확정되고 8일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9일 합참이 최종승인했다. 맥아더는 디데이를 9월 15일로 정했다. 상륙작전을 위해 새로운 상륙부대인 제10군단을 일본에서 창설했다. 군단장은 맥아더 사령부의 참모장이던 알몬드 소장이었다. 예하 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해 한국해병대(4개 대대)와 제17연대로 정해졌다. 병력은 총 7만5000명에 달했다.
디데이가 가까워지자 병력 7만5000명을 태운 미 7함대의 함정 261척이 인천 앞바다로 향했다. 미해병1사단 제5연대 제3대대 병력이 탑승한 17척의 상륙정과 전차 9대를 적재한 전차 상륙함이 녹색 해안으로 명명된 월미도 해변을 향해 일제히 전진했다. 오전 6시 30분, 상륙정들은 무사히 해안선에 도착해 병력을 상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해안가의 북한군 대부분은 9월 13~14일에 있었던 사전포격과 폭격으로 제거된 상태였다.
월미도 곳곳에 만들어진 동굴에 숨어있던 적의 저항이 있었지만, 오전 8시쯤 월미도는 완전히 장악됐다. 전투결과 적 108명을 사살, 136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외 동굴 참호 안에서 사살된 적이 150여명이었다. 반면 아군의 피해는 17명 부상이 전부였다.
가장 긴박한 순간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썰물로 인해 함대는 후방으로 물러났다. 오후 밀물 시기에 후속 주력부대가 상륙하기 전까지 월미도에 상륙한 선발대는 적 지역에 고립됐다. 적의 반격을 차단하기 위해 함재기들이 출동해 월미도로 향하는 도로를 맹폭격하며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오후 5시 33분 밀물 때가 되자 해병 제5연대가 월미도 건너편 만석동 적색 해안으로 상륙하였다. 동시에 해병 제1연대가 인천항 남측의 낙섬 인근 해안에 설정된 청색 해안에 상륙했다. 이들 두 연대는 9월 16일 새벽까지 인천 도심을 누비며 시가지를 완전히 장악했다.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에는 21명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로페즈 중위다. 그는 상륙작전 당시 미 해병대 1사단 제5해병연대 장병들이 만석동 적색 해안에 상륙할 때 선봉에 서서 방파제를 넘으며 부대를 진두지휘했다. 로페즈는 선두에서 수류탄을 던져 적의 진지 한 곳을 파괴했다. 그리고 적의 다른 진지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려는 순간 적의 기관총탄이 그의 가슴과 오른쪽 어깨를 관통했다.
치명상을 입은 로페즈가 손에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선발대 전체가 위험에 처하자 로페즈는 “수류탄이다!”라고 외치고 온몸으로 감싸 안아 장렬히 전사했다. 그는 그렇게 여러 전우의 목숨을 구하고 24살의 나이로 산화했다.
6·25전쟁의 전세를 뒤집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결코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다. 월미도 앞바다에서 적의 포격에 의해 전사한 스웬슨 중위로부터 시작해 로페즈 중위에 이르기까지 21명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월미도 공원과 만석동 적색 해안 지역에 이들의 추모비가 건립되는 그날을 꿈꾸며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님을 일깨워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김재동 목사